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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분노하지 않는가 - 2048, 공존을 위한 21세기 인권운동
존 커크 보이드 지음, 최선영 옮김 / 중앙books(중앙북스) / 2011년 12월
평점 :
절판
세계 10위권의 경제 대국임을 자랑하곤 하지만, 우리나라는 여전히 인권 후진국이다. 당장 서울시 학생인권조례를 둘러싼 논쟁들을 보자. 임신 또는 출산, 성적 지향 등을 이유로 “차별받지 않을 권리를 가진다.”는 문구를 청소년 임신과 동성애를 적극 장려한다고 해석하여 극렬히 반대하거나, 체벌을 비롯한 “모든 물리적 및 언어적 폭력으로부터 자유로울 권리를 가진다.”는 구절을 보곤 체벌을 금지하면 교육이 엉망이 될 것이라 주장하고, 학생의 인권을 적극 보호해야할 의무가 있는 교육부가 이를 재의하라고 요구하는 등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어려운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모든 사람은 자유롭고, 존엄하며, 평등하다.”는 세계인권선언 제1조는 마치 별세계의 얘기처럼 들린다.
이처럼 인권인식 혹은 인권감수성이 허약한 우리 현실에서 인권과 관련된 책이 출판되었다는 것, 나아가 “왜 분노하지 않는가”라는 강렬한 제목을 달고 나왔다는 것은 우선 반가운 일이다. 우리가 쉽게 인식하지 못해 그냥 지나치고 있는 부당한 현실에 주의를 기울이도록 안내해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사실 인권인식 혹은 인권감수성을 갖기 위해선 상당한 의식적 노력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인권이란 항상 소수자의 인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다수자의 입장에선 일상적 상황에서 소수자가 느끼는 부당함을 인식하기 어렵다. 얼마 전 인터넷과 SNS를 뜨겁게 달궜던 ‘코피 사건’도 일상적으로 나누는 남성들의 성적 농담이 여성에게 어떤 불쾌감을 주는지 인식하지 못했기에 벌어진 일이다. (혹시나 해서 덧붙이는데, 여기서 소수자란 단순히 수적으로 적음이 아니라 사회적 소수자, 즉 사회적 약자를 의미한다.) 그렇기 때문에 인권에 대한 인식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으며, 부당한 현실을 끊임없이 지적하고 고쳐나가려 노력해야 한다. 그러나 아쉽게도 책은 제목과 달리 부당한 현실에 대한 분노를 촉구하는 내용을 담고 있지는 않다.
이 책은 ‘2048 프로젝트’를 성사시키기 위한 일종의 선전책자(팸플릿)다. ‘2048 프로젝트’란 세계인권선언이 선포된 지 100년째 되는 해인2048년까지 세계인권조약을 체결하여 “세계 모든 지역에 적용 가능한 세계권리장전”을 수립하려는 운동이다. 이 운동이 왜 필요한가? 저자는 세계인권선언 이후 각종 국제 규약이 비준되고 많은 국가들이 규약에 서명했지만, “규약들은 예외 사항이 가득했고, 거의 모든 국가의 법정에서 아무런 강제력을 갖지 못했”기에, 그 결과 “인권 침해에 대항할 수 있는 법적 혹은 경제적 영향력이 부족하다.”(38)고 지적한다. 그러므로 현실적 구속력을 갖추기 위해선 ‘선언’의 수준에 머물 것이 아니라 강제력을 가진 ‘조약’의 수준으로 한 단계 뛰어올라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언론의 자유, 종교의 자유, 결핍으로부터의 자유, 환경에 대한 자유, 공포로부터의 자유’라는 다섯 가지 핵심 의제를 설정하고, 전세계가 동의할 수 있는 구체적 조항을 작성하기 위해 ‘함께 모여, 함께 생각하고, 함께 작성하여, 함께 결정하자’고 주장한다.
좋은 얘기다. 그러나 매우 공허하다. 왜 그런가? 앞서 지적했듯이 인권의식의 향상은 소수자가 처한 부당한 현실을 인식하는 데서 출발한다. 나에게는 아무렇지도 않았던 것이 다른 이들에게는 심각한 문제일 수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영화 관람과 같은 일상적 오락 활동을 생각해보자. 당신이 만일 휠체어를 타는 장애인이라면 어떨까. 울퉁불퉁하고 턱진 보도와 불편한 교통수단, 그리고 장애인을 별로 고려하지 않고 만들어진 건물 등 영화 한 편을 보기 위해 감수해야 하는 불편이 상당하다. 혹은 당신이 청각장애인이라면 어떨까. 한국 영화에 자막을 제공하는 극장이 거의 없기에 우리 영화는 보고 싶어도 볼 수가 없다.
이렇게 소수자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것, 소수자들이 느끼는 부당함을 인식하는 것, 그래서 그 부당한 처사에 분노하는 것, 이것이 바로 인권 의식의 각성을 위한 첫걸음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 책은 이러한 문제들을 마치 당연한 상식인양 자세히 지적하지 않고 지나간다. 물론 저자의 나라(미국)에서는 이러한 인식이 상식일 수 있다. 하지만 저자의 목표처럼 전세계의 모든 이들이 ‘함께 모여, 함께 생각하고, 함께 작성하여, 함께 결정’하고자 한다면 우리나라를 비롯한 여러 인권 취약 국가들의 인권 의식 향상을 위한 노력이 선행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 인권이란 무엇이고 왜 보장되어야 하는지, 인권에 대한 무지가 왜 위험한지, 쉽게 인식하지 못하는 인권 침해의 사례는 무엇인지 등등을 보다 자세하게 설명해 줄 필요가 있다. 그래야만 책 제목처럼 부당한 현실을 자각하고 ‘분노’하게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저자의 현실 인식도 매우 단순하다. 저자는 현재의 기술 발전, 즉 전세계가 실시간으로 연결되는 소셜 네트워크의 발달이 2048년 세계인권조약의 체결을 이끌 탄탄한 밑거름이라고 강조한다. 저자의 이행 방법인 ‘함께 모여, 함께 생각하고, 함께 작성하여, 함께 결정하자’를 실현할 물적 토대가 갖춰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단 소셜 네트워크란 전세계적 현상이 아니다. 세계 인구의 20%가 절대빈곤 상황에 처해 있는 현실에서 소셜 네트워크를 통한 전세계의 자유로운 의사소통이란 환상에 불과하다. 모두가 함께 모여 결핍으로부터의 자유를 토론하자고 하지만 정작 결핍의 처지에 놓인 이들은 정작 토론에 참여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다섯 가지 의제의 동시 실현보다는 더 시급하고 절박한 것을 중심으로 우선순위의 설정을 고려할 필요도 있다.
우선순위의 설정이 중요한 이유는 무엇보다도 세계권리조약의 체결 자체가 현실을 극적으로 변화시키기 어렵기 때문이다. 핵확산금지조약이나 여러 세계무역협정의 사례에서 알 수 있듯이, 조항의 구체적 내용이 강대국이나 거대 자본의 입김에서 자유롭기 어렵고 또 갈등이 발생할 경우에도 그들의 발언권이 더 큰 힘을 가지는 경우가 많다. 다시 말해 이미 경제적, 정치적 불균형이 존재하는 상황에서 이 불균형의 영향을 받지 않은 공평한 조약의 수립과 이행은 어려운 일이 될 가능성이 크다. 특히 인권과 같이 소수자 중심의 사고가 필요한 영역에서는 더더욱 힘든 일이 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세계권리조약이란 현실 변화를 추동하는 원동력이라기보다는 현실 변화의 산물로 보아야 한다.
인권이란 인간으로서 마땅히 보장받아야 할 권리이자 그러한 권리를 갖지 못한 소수자에게 적극적으로 보장되어야 할 권리이다. 그리고 인간의 역사는 그러한 권리가 거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격렬한 투쟁을 통해서 얻어진 것임을 보여준다. 세계인권선언의 모태라고 할 수 있는 프랑스 인권선언이나 미국의 권리장전은 모두 지배질서에 대항한 혁명의 산물이었다. 결국 현실 변혁에 대한 적극적 의지 없이 보편적 인권의 획득은 신기루일 뿐이다. 예를 들어 저자는 자신의 계획이 사회주의가 아니라 공공 서비스가 강화된 자본주의일 뿐이라고 강변하지만, ‘자본주의’와 ‘공공성’이 얼마나 어울리기 힘든 단어인지 최근의 신자유주의는 잘 보여주고 있으며,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근본적 수정 없이 공공 서비스가 강화될 리 없다는 것은 이제 잘 알려진 상식이다.
이처럼 현실적 불평등에 대한 분명한 변혁 의지나 계획 없이 단지 100주년이라는 상징적 시기에 맞춰 이상적 상황이 도래할 수 있다고 선전하는 것은 그저 그렇고 그런 얘기(just-so story), 공허한 구호에 불과하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전세계가 인권의 가치를 공유하자는 저자의 목표가 불필요하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는 우리가 반드시 이루어내야 할 목표이다. 단지 그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인간의 보편적 인권을 위해 함께 모여 토론하자’와 같은 추상적 구호가 아니라 현재 우리가 처해 있는 상황에 대한 치밀한 분석과 이를 토대로 구체적 이행 계획이 필요하며, 그것이 현존하는 질서를 파괴해야 가능한 것이라면 이를 위한 적극적 실천 의지 또한 병행되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은 것이다.
저자는 책 앞부분에서 헌법을 가방에 넣어 다니는 변호사와 학생의 사례를 들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교실에서 법정에 이르기까지 모든 곳의 사람들이 세계권리장전에 대해 배우고 꺼내 사용할 수 있다면, 그것은 문화의 기본 구조가 되고 존중받을 것이다.”(31) 나는 이 구절을 보고 한 가지 상상을 한다. 학교나 선생님의 부당한 대우나 차별을 당했을 때 가방에서 학생인권조례를 꺼내 잘못된 점을 조목조목 지적하는 학생의 모습을. 그러나 이는 대학서열화나 입시지옥과 같은 학벌 차별 현실에 대한 고민 없이 학생인권조례만으로는 만들어질 수 있는 풍경이 아니다. 학생인권조례가 학생 문화의 기본의 구조가 되기 위해선 학벌 차별 철폐와 같은 보다 근본적인 구조의 변화가 필요하다.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현실에 적극 개입할 필요가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