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0만 가지 죽는 방법 밀리언셀러 클럽 13
로렌스 블록 지음, 김미옥 옮김 / 황금가지 / 200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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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율은 하나도 변하지 않았어. 늘 그대로라니까. 바뀐 게 있다면 우발 살인이 늘었다는 거지, 살인자와 희생자가 서로 모르는 사이에 일어나는 살인 사건 말이야. 우발 살인율이 얼마나 높은가를 보면 어느 지역에 사는 게 얼마나 위험한지를 알 수 있지. -178쪽

<워터십 다운의 열한 마리 토끼>라는 책을 읽어보신 적 있나요? 그 책에 토끼 마을이 나오거든요. 인간들에 의해 길들여진 토끼들의 마을이죠. 인간들이 토끼를 위해 음식을 마련해 주기 때문에 식량은 충분해요. 식량을 주는 사람들이 이따금 덫을 놓아 토끼 고기를 먹으려고 드는 것만 빼면 토끼 천국이라고 할 수 있죠. 살아남은 토끼들은 절대로 덫에 대해 이야기하거나 덫에 걸려 죽은 친구들에 대해 말하는 법이 없어요. 그들은 덫이라는 것이 존재하지도 않는 듯이 죽은 동료들이 아예 살았던 적도 없었다는 듯이 태연히 행동하기로 무언의 약속을 한 셈이죠.
뉴요커들이 마치 그 토끼들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우리가 여기 사는 건 문화든 일자리든 간에 이 도시가 주는 뭔가가 필요해서죠. 그리고 이 도시가 우리 친구나 이웃들을 죽일 때 우리는 저마다 다른 방식으로 보죠. 그런 기사를 읽으면 하루나 이틀쯤은 그 사건에 대해 이야기하지만 곧 잊어버리는 거예요. 잊어버리지 않으면 그 일에 대해 뭔가를 해야 하는데 그럴 수가 없기 때문이죠. 그러지 않으면 이 도시를 떠나야 하는데 떠나고 싶지 않기 때문이죠. 우린 마치 그 토끼들 같아요. 그렇죠?
-249쪽

최고의 보드카는 말이지, 메스 같은 거야. 숙련된 외과의사의 손에 들린 예리한 메스 말이야. 뒤끝이 깨끗하다니까. -270쪽

죽음에 이르는 800만가지 방법이 있다… 호텔 방 창문에서 뛰어내리기만 해도 간단히 죽을 수 있다. 하지만 한 번도 그런 종류의 일을 시도해 본 적은 없다. 그런 일을 저지를 사람으로 보인 적도 없다. 겁이 너무 많거나 불굴의 의지를 가졌거나 둘 중 하나겠지. 그것도 아니라면 나의 지독한 절망이 생각만큼 절실하진 않았던 모양이다. 여하튼 계속해서 살아가게 만드는 뭔가가 있다. -356쪽

지난 2년 동안 내가 지레 늙어 버렸는지, 이 도시가 점점 더 추잡해지고 있는지 모르지만, 요즘 사람들은 아주 성급하게 방아쇠를 당기는 것 같거든. 전에는 그래도 이유가 있어서 죽였는데 말이야. 지금은 죽이지 말아야 할 이유가 없으면 죽인다고. 죽이지 않는 것보다 죽이는 게 빠르지. 무의식적으로 행동한다니까. 너한테 하는 말이지만, 난 그게 무서워. -364쪽

순간순간 알코올의 끈질긴 유혹에 시달리고, 스치듯 가까이 선 죽음을 의식하면서 혼자 쓸쓸히 이어가는 삶.-49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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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적이지 않은 독자
앨런 베넷 지음, 조동섭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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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왕은 어떤 책을 읽으면 그 책이 길잡이가 되어 다른 책으로 이끈다는 것도 깨닫게 되었다. 고개를 돌리는 곳마다 문들이 계속 열렸고, 바라는 만큼 책을 읽기에는 하루가 너무 짧았다.-28쪽

책 읽기가 매력적인 이유는 책이 초연하기 때문이라고 여왕은 생각했다. 문학에는 당당함이 있었다. 책은 독자를 가리지 않으며, 누가 읽든 안 읽든 상관하지 않는다. 여왕 자신을 비롯해서 모든 독자는 평등했다. 여왕은 생각했다. 문학은 연방이고, 문자는 공화국이라고.-39쪽

우선, 여왕이 책을 읽으면서 불안감과 낭패감을 느낀 것은 사실이다. 끝없이 펼쳐진 책들이 여왕을 노려보고 있었고, 여왕은 독서를 어떻게 계속해나가야 할지 전혀 알 수 없었다. 여왕의 독서에는 체계가 전혀 없었다. 한 권을 읽으면 그 책에 따라 다음 책으로 이어졌고, 두세 권을 동시에 읽을 때도 많았다. 메모를 시작하면서 다음 단계로 넘어갔고, 그 뒤로는 늘 손에 연필을 들고 책을 읽었다. 읽은 내용을 요약하는 것이 아니라 가슴에 와 닿은 구절을 그대로 베끼는 것이었다. 책을 읽으며 메모를 한 지 일 년쯤 지난 뒤에야 가끔 떠오르는 자신의 생각을 시험 삼아 용기 내어 적게 되었다. 여왕은 이렇게 썼다. ‘나는 문학이 광대한 나라라고 생각한다. 그 먼 국경으로 여행하고 있지만 국경에는 절대 다다를 수 없다. 게다가 나는 출발도 늦었다. 결코 따라잡지 못하리라.’ -58쪽

어둠 속에서 여왕은, 문득, 자신이 죽으면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만 존재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누구에게도 종속되어본 적이 없는 여왕도 죽고 나면 다른 모든 사람과 다를 바 없어질 터였다. 책 읽기는 그것을 바꿀 수 없다. 그러나 글쓰기는 그것을 바꿀 수 있을지도 모른다.
독서 때문에 인생이 풍요로워졌느냐는 질문을 받는다면, 여왕은 분명, 그렇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똑같이 확실하게, 그와 동시에 독서 때문에 인생의 모든 목적이 말라붙었다고 덧붙였을 것이다. 한때 여왕은 자기 의무를 마음에 깊이 새기고 최선을 다해 의무를 수행할 각오를 품은, 확고하고 성실한 사람이었다. 책 읽기는 실천적 행위가 아니었다. 그것이 늘 문제였다. 여왕은 늙었지만, 여전히 실천가였다. -117쪽

책은 행동을 촉발하지는 않습니다. 책은 대개 자신이 이미 하기로 마음먹은 바를, 어쩌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 하기로 마음먹은 바를 확인시키기만 하죠. 우리는 자신의 신념을 뒷받침하려고 책을 찾습니다. 말하자면 책은 책으로 끝나는 겁니다.-13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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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한 여행자
앤 타일러 지음, 공경희 옮김 / 예담 / 2007년 7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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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업다이크의 평가에 백번 동감, 참 좋은 작가의 참 좋은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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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한 여행자
앤 타일러 지음, 공경희 옮김 / 예담 / 2007년 7월
품절


"정신을 차려보니 녀석이 나를 보며 이빨을 드러내고 서 있더군요. 그러자 도기두에서 배운 내용이 생각났어요. ‘어느 한쪽만 대장이 될 수 있다’는 말이었죠. 그래서 개한테 말했어요. ‘어림없지’라고요. 처음 떠오른 말이 그거였거든요. 엄마는 내 잘못을 봐주지 않을 때 그렇게 말하곤 했어요. ‘어림없지’라고 말하면서 부러진 오른팔 대신 왼팔을 뻗었지요. 손바닥을 내밀고 눈을 똑바로 보면서-개들은 눈을 빤히 보면 못 견디거든요-천천히 일어났어요. 개가 당장 궁둥이를 대고 앉지 않았다면 큰일 날 뻔했죠." -167쪽

메이컨은 그녀가 가장 좋은 부분을 주고 싶어한다고 느꼈다. 또 그녀는 그렇게 했다. 하지만 그녀의 ‘가장 좋은 부분’은 셜리 템플처럼 머리를 한 모습이 아니었다. 가장 좋은 부분은 뮤리엘의 톡 쏘는 맛이었다. 턱을 비스듬히 들고 단호한 눈빛으로 카메라를 쳐다보는 톡 쏘는 맛, 싸움꾼 같은 통렬함이 가장 좋은 부분이었다. -346쪽

뮤리엘은 펼쳐놓은 책과 같았다. 그에게 무슨 말이든 했다. 말을 너무 많이 해서 그가 불편할 정도였다. 그녀는 완벽과는 거리가 먼 자신의 본래 모습을 감추려 하지 않았다. 성격이 거칠고 말버릇도 나빴다. 또 자기혐오에 빠지면 몇 시간이고 아무도 어쩔 수가 없었다. 알렉산더에 대한 태도도 미쳤다 싶을 정도로 일관성이 없었다. 한순간 과보호하다가 금방 냉담하게 손을 놓아버렸다. 분명히 영특했지만 메이컨은 그녀만큼 미신을 신봉하는 사람은 본 적이 없었다. 지칠 정도로 자세하게 꿈 얘기를 하지 않고 지나는 날이 하루도 없었다. 꿈에 나온 일이 앞으로 일어난다고 믿었다…전생에 패션 디자이너였고, 적어도 한 번의 죽음은 기억난다고 장담했다. 그녀는 특정 종교와 상관없이 신앙심이 깊었고, 신이 그녀를 보살펴준다고 믿었다. 작은 것이라도 얻으려면 힘들게 싸워야 하는 형편인데 그렇게 믿다니 메이컨은 앞뒤가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354쪽

하지만 둘이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을 때 아이가 슬그머니 메이컨의 손을 잡았다. 차가운 손가락이 정말로 분명하고, 정말로 특별하게 느껴졌다. 아이의 특징이 그대로 드러났다. 알렉산더의 손을 꼭 잡으니 슬픔 같은 감정이 마음에 스르르 젖어 들었다. 예전에 느꼈던 위험이 다시 그의 삶 속으로 파고 들었다. 핵전쟁과 지구의 미래에 대해 다시 걱정해야 하게 생겼다. 이던이 태어난 후 ‘지금부터 다시는 완전히 행복해지지 못할 거야’라는 은밀하고 죄책감이 드는 생각을 자주 했다. 물론 그 전에도 완전히 행복하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388쪽

메이컨은 그녀에게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싸움꾼을 본 적이 있을까?... 뮤리엘은 놀라지도 않은 눈치였다. 그녀는 여기서는 이웃 사람을 만나고, 저기서는 집 없는 개를 보고, 그 너머에서는 강도를 만나리라 예상하고 길을 활보했던 것 같았다. 모든 것이 똑같이 삶의 일부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메이컨은 그녀에게 경외심을 느꼈고, 쪼그라든 기분이 들었다. 뮤리엘은 콧노래를 흥얼대면서 걸음을 옮겼다. 특별히 나쁜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는 듯 노래를 흥얼댔다.-423쪽

그는 흥미가 느껴졌다. 그런 커플이 왜 생기는지 이제야 알았다. 전에 그가 예상했던 것처럼 그들이 어처구니없이 무얼 몰라서가 아니었다. 그들은 남들이 짐작하지 못할 이유 때문에 하나로 엮였음을 이제 알았다. -53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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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삶이 내게 왔다
정성일 외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09년 12월
절판


글을 쓰고 산다는 것은 일종의 '곶감 빼먹는 삶'인 것 같다. 말하자면 자신이 글쓰는 삶을 살지 않은 시절의 경험들을 곶감 빼먹듯 글에다 빼먹는 삶 말이다. 이전의 삶을 소모한다는 느낌 없이 뭔가 창조적인 일을 하고 있다는 만족감을 가질 수 있는 '글쓰기 하는 삶'을 살 수는 없을까. 그래서 생각해낸 게 스스로 정한 안식년제다. 내가 정한 안식년은 글을 쓰느라 소모될 대로 된 경험과 사유의 창고들을 채워넣기 위해 '삶의 현장'으로 가서 글 쓴 기간만큼 일하는 것이다. 물론 생활방편으로서의 일이다. 스코트 니어링 부부나, 리 호이나키 같은 사람들은 그래서 내게는 인생의 좋은 지침을 주는 스승들이다.-15쪽

영화의 구체적인 순간 앞에서 어떤 결단을 내려야 할 때 시청각적 체험을 기꺼이 삶 속의 세계에 복종시키고서야 비로소 내가 알고 있던 영화의 개념들과 삶의 기호들을 함께 껴안는다는 느낌을 가질 수 있었다. 아니 그보다 영화를 한다는 문제가 세상을 살아가는 문제와 완전하게 동일한 질문으로 다가왔다. 이제 나에게 영화에서 그 장면을 찍는가, 마는가라는 문제는 그 세상이 거기 있는가, 없는가의 질문이 되었다. -36쪽

번역자는 번역하는 책을 국내에서 맨 먼저, 그리고 가장 정밀하게 읽는 사람이다. 번역자는 때로 저자보다도 더 그 책을 내밀하게 읽는다. 저자가 무심코 쓴 대목까지도 번역자는 일일이 신경을 써가며 우리말로 옮겨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책의 내용에 관해서는 저자의 권위가 우선하겠지만 책의 '함량'에 관해서는 번역자의 판단이 한몫한다.-104쪽

무릇 책이라면 둘 중 하나는 되어야 한다. 좋은 책이라는 평을 듣거나 아니면 잘 팔리거나. 거꾸로 말하면 양서도, 베스트셀러도 되지 못하는 책은 출간 의미가 없다는 이야기다.-104쪽

지식을 생산하고 검토하는 작업이 아카데미즘이라면 생산된 지식을 대중에게 보급하는 작업은 저널리즘이다...연구자는 지식을 생산할 뿐 보급하는 역할을 하지 않는다. 하지만 연구자가 생산한 지식이 궁극적으로 소비되는 곳은 바로 대중의 영역이며, 소비되는 과정은 대개 트리클다운과 같은 '흘러넘침'의 형태를 취한다...출판사는 예나 지금이나 '대중적 글쓰기가 가능한 연구자' 혹은 '전문적 내용을 다룰 능력을 가진 대중적 필자'를 원한다. 둘 다 책이라는 매체를 통한 소통을 중심으로 한다는 면에서 같다. 발원지는 달라도 목적지가 같은 만큼 양자는 서로 만나야 하고 또 만날 수밖에 없다. 그런 점에서 아카데미즘과 저널리즘은 소통하고 교호하며, 서로에게 자극을 줄 수 있다. -107쪽

예전과 달리 지금은 정보가 중요해서 출판물을 인쇄하지는 않는다...바꿔 말하면 프레스(인쇄술)를 이용한다는 것은 곧 상업적 목적을 가지는 대량생산이라는 이야기다. 현대의 출판은 모두 상업 출판이다. -108쪽

"선생님께서 단어 하나 고칠 때마다 전 세계의 독자 백만 명이 늘어난다고 생각하십시오." 스티븐 호킹, <시간의 역사> -10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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