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기계치다. 따라서 기계를 무척이나 싫어한다. 허나 그러면서도 세탁기, 냉장고, 컴퓨터, 식기세척기, 에어컨, 핸드폰, 무선전화기, 로봇청소기, 오디오 등등 수많은 기계에 둘러싸여 살고 있다. 다달이 월세를 내는 셋방에서 전세로의 탈출을 그토록 꿈꿨던 것은 제발이지 저것들을 모조리 분해했다가 다시 조립하면서 사용설명서를 보지 않기 위해서였다. 이사에 드는 비용보다 더 화가 치밀어 오르는 것은 사용설명서를 이해하지 못하는 내 자신에 대한 알 수 없는 자괴감이었다. 그리고 이번만큼은 철저한 준비 끝에 절대 헤매지 않으려 저 기계들이 멀쩡하게 움직이거나 돌아가는데 필요한 한 다발의 선들을 용도별로 따로 담고 표시까지 해 두었지만 결국은 이사 전에는 딱 맞아 떨어졌던 선들이 한 움큼이나 남아서 ‘대체 어떤걸 연결 안한 거야’ 하면서 머리를 쥐어뜯어야 했다. 그리고 두말하면 잔소리겠지만 이런 때에 사용 설명서는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몇 번이나 사용 설명서를 들고 씨름을 한 끝에 나는 중요한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다. 사용 설명서는 기계를 만든 이들이 자신들이 만든 기계가 얼마나 복잡하고도 위대한 것인지 (더불어 그걸 만든 자신은 얼마나 더 위대한지)를 무지몽매한 인간들에게 알려주기 위한 안내서라는 것을 말이다. 갖은 복잡한 말과 이해하기 어려운 용어로 쓰인 그 안내서를 보고 있노라면 아마 누구라도 알게 될 것이다. 그 안내서로는 절대 그 기계의 작동을 도모할만한 어떤 정보도 알아낼 수 없다는 것을 말이다. 그래서 이사를 한다면 저 기계들을 다시 조립하려고 애 쓰는 게 아니라 이참에 싹 바꾸어서 소비의 미덕을 실천하는 동시에 기계 설치는 구입처의 엔지니어들이 와서 사용설명서 따위는 절대 펴보지 않고 척척 연결하는 기인열전이나 관람하는 게 백번 옳은 일이다.
언젠가 이 고민을 당시 공대를 전공한 남자친구에게 물었더니 그는 이렇게 말했다.
‘공돌이들이 문장력이 좀 부족하지’
문장력? 문장력이라고? 누가 사용설명서에서 괴테나 헤르만헤세를 만나기를 기대했나? 그도 아니면 하루키의 시니컬함과 빌 브라이슨의 위트를 기대했단 말인가. 나는 그저 사용 설명서 그 본연의 의미대로 기계를 사용함에 있어 도움을 받고자 했을 뿐이다. 사용 설명서를 만든 엔지니어들이야 자신들이 하는 말이 무엇인지 다 알 것이다. 아무리 복잡한 용어도 설마 그걸 만드는 일 보다 더 복잡하겠는가. 그래서 그들은 생각할 것이다. 이 기계를 만들라는 것도 아니고 단지 전원을 꽂고 약간의 조립 끝에 사용을 하라는 건데 뭘 못 알아듣는다고. 근데 그게 우리 같은 일반인 (어쩌면 일반인에서 좀 모자라는 나 같은 인간) 에게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사실 사용설명서 같은 건 되도록 보지 않으려고 한다. 다행스럽게도 요즘은 나처럼 사용 설명서 기피증 환자를 위해 사용 설명서를 요약해놓은 초 간단 사용 설명서(?)가 존재한다. 드디어 그들도 고급 사용자 (즉 사용 설명서를 모두 이해함은 물론이고 거기에 간단한 응용까지 가능한 천재들) 와 저급 사용자 (사용 설명서를 처음부터 끝까지 읽고 하란대로 다 했는데도 기계는 전혀 내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 를 구분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주기적으로 사용 설명서를 들고 씨름을 해야 하는 경우에 종종 놓이곤 한다. 그건 바로 핸드폰 때문이다. 다들 알다시피 우리나라는 초우량 IT강국이 아닌가. 유치원 별님반인 내 조카도, 틀니를 해야 하고 돋보기 없이는 아무것도 못 보는 우리 할머니조차 핸드폰을 갖고 있으니 (그리고 그런 일은 결코 드문 현상이 아닌) 핸드폰 보급률은 더 말 할 것도 없다. 이제 집 전화는 없어도 살 수 있지만 핸드폰이 없이는 살 수 없는 시대가 온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 핸드폰이 점점 진화한다는 것이다. 나는 사용 설명서에 관한 이해력 저하로 되도록 기계는 한번 사면 다시 그 어려운 사용 설명서를 펼 일이 없도록 폐기처분하기 직전까지 사용하곤 하는데 핸드폰만큼은 그게 어려웠다. 이 기계는 정기적으로 업그레이드를 해 줘야만 한다. 내가 최근에 핸드폰을 바꾼 이유는 남들이 자꾸만 내게 80바이트가 넘는 문자나 이미지 전송 따위를 해대기 때문이었다. 내 핸드폰은 워낙 구형인지라 80바이트 이상의 문자가 도착하면 ‘멀티메일이 도착하였습니다’라고 알려 줄 뿐. 그 멀티 메일의 내용은 결코 알려주지 않았다. 그러니 이미지 전송 따위는 당연히 안 될 밖에. 그래서 별 수 없이 핸드폰을 바꾸게 되었다. 그런데 맙소사 사용 설명서가 무려 173 페이지나 된다. 얼마 전 책을 내려고 원고를 보냈더니 출판사에서 350페이지나 된다며 300페이지 정도로 줄이기를 원했던 기억이 엊그제 같은데 173페이지라니. 대체 이 작은 핸드폰 하나를 사용하기 위해 내가 숙지해야 할, 혹은 읽어도 모를 용어들이 얼마나 산재해있을 것인지를 생각하자 머리가 아팠다. 그러나 나는 심호흡을 하고 찬찬히 첫 페이지부터 펼쳐서 읽기 시작했다. (주요 부분을 정리하기 위한 노트와 더 중요한 부분을 표기하기 위한 형광펜을 준비했음은 물론이다.) 일단 내 핸드폰의 사용설명서는 간단하고도 형식적인 환영 인사 (우리 핸드폰의 질 높은 서비스를 만나게 되었으니 영광인줄 알아 이것들아 정도라고 보면 되겠다.) 그리고 나서 바로 협박을 시작했다. 자기네 회사에서 공급된 휴대폰의 ESN을 제거, 변경 혹은 다른 번호의 복제 입력은 불법 행위로서 관련법규 형법 제 347조에 의거 10년 이하의 징역이나 2,000만 원 이하의 벌금을 받게 되는 처벌대상이 됨을 유의함과 동시에 이러한 불법적인 시도로 인해 휴대폰의 소프트웨어가 손상되어 더 이상 쓰게 되지 못할 경우 그건 전적으로 소비자 니 책임 이라는 얘기였다. 오... 그러니까 이 휴대폰을 잘못 사용했다가는 최고 10년 동안 감방에 갇히거나 내 통장 잔액보다 훨씬 더 많은 2천만 원의 벌금을 낼 수도 있단 말이지? 허나 다행인 것은 나는 ESN이 뭔지도 모르니 그걸 제거하거나 변경 혹은 복제 입력 따위는 절대 할 일이 없을 것이라는 점이었다. 이로서 내가 이 핸드폰으로 인해 가족들에게 2천만 땡겨 달라거나 사식을 부탁할 염려는 덜었다.
그 다음 장에도 협박은 계속되었다. 핸드폰을 남에게 함부로 빌려주지 말라던가 혹은 자기네 회사 이외에서 만든 제품을 사용했을 경우 고장이 나건 폭발을 하건 휴대폰이 트랜스포머처럼 살인 기계로 변신을 하건 그건 전적으로 내 책임이라는 말과 함께 빨간색으로 ‘사용자 안내문 - 제작자 및 설치자는 당해 무선설비가 전파혼신 가능성이 있으므로 인명안전과 관련된 서비스는 할 수 없습니다’ 라고 적혀 있는데 이건 아직까지도 무슨 소린지 전혀 모르겠다. 물에 빠진 사람을 건져서 심폐 소생술을 할 때 주먹 대신 핸드폰으로 심장을 치지 말라는 소린지 아니면 누군가가 내 핸드폰으로 무인도에 갇혔다며 살려달라고 말할 때 전파혼신의 가능성이 있으므로 이건 헛소리로 간주하고 무시하란 얘기인지 도무지 접수가 안 된다. 그리고 이 사용설명서를 읽다가 알게 된 중요한 사실은 건설현장, 군사지역, 주유소, 가스누출 위험지역, 화학 약품 보관소 배의 갑판 등에서는 모두 휴대폰을 사용하지 말란다. 나는 오직 비행기 안이나 병원에서나 사용하지 말아야 하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닌 모양이다. (그나저나 이놈의 나라는 연말만 되면 온 도로가 다 공사중인데 그때는 거의 핸드폰은 무용지물이 되겠군) 이런 협박들을 거치고 나면 비로소 구성품 확인하기. 즉 내가 산 휴대폰을 누군가 미리 뜯어서 베터리등을 슬쩍하지 않았는지 확인하는 페이지가 나온다. 그 다음은 휴대폰에 딸린 명칭들이다. 보니 총 16개이다. 전화번호도 3개 이상 못 외우는 인간에게 16개의 휴대폰 각 부분의 명칭들이라니. 근데 이건 약과다. 아직 시작도 안했다. 그 후에 이어지는 내부 버튼 설명은 무려 12개이고 측면 버튼 설명은 3개이다. 거기다 터치 버튼 사용법이 5개이다. 대체 언제 끝이 나나 싶어 목차를 보니 168개이다. 173페이지에 168개의 목차라. 아마 이걸 돈 주고 팔았다면 초판 1쇄도 다 못 팔았을 게 뻔하다.
문득 이 핸드폰보다 조금 더 간단한 기계들의 사용 설명서가 몇 페이지인지 궁금해졌다. 그래서 이 사용 설명서들만 잔뜩 들어있는 상자를 꺼내서 핸드폰보다 더 사용이 간단한 기계들의 분류 작업에 들어갔다. 놀랍게도 그냥 켜면 뉴스나 드라마를 보여주는 줄 알았던 TV가 무려 40페이지 (사용자를 더욱 헤깔리게 하기 위해 이건 페이지 순서가 1,2 이런 식이 아닌 1-2 1-3 으로 표기되어 있다.) 토스터기는 무려 83페이지 (빵 하나 굽는데 저 정도의 사용 설명서를 독파해야 하다니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밥솥은 24페이지다. (내 밥솥은 아마도 갈비 굽기 모드나 잡채 만들기 등도 되는 모양이다. 아니고선 끽해야 밥 하나 가지고 24페이지씩이나 설명할 리가 없다.)
그 중 하나를 골라 펼쳐 보았다. 내가 가진 에어컨의 사용 설명서 25 페이지에서는 열대야 숙면운전 작동순서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열대야 버튼을 눌러 열대야숙면운전을 선택하세요. 입면모드-숙면모드-기상모드 순서로 3단계 냉방운전이 자동으로 진행됩니다. 3단계 냉방운전의 순서는 열대야숙면운전 선택 시 3단계 온도와 바람의 변화에서 보다 자세하게 확인 하실 수 있습니다. 무슨 말인지 알겠는가? 난 에어컨을 단 이후로 열대야 숙면운전 모드 따위는 한 번도 사용 해 본적이 없다.
이건 어디까지나 내 생각인데 말이다. 나 같은 인간들 몇 명과 공학박사, 문학박사, 엔지니어 및 인류학자 몇 명이 모여 사용설명서 사용법 같은걸 만들면 어떨까? 사용설명서를 위한 백과사전이라던가 사용설명서 사용법 100일 완성 같은 책을 내면 좀 팔릴 것 같은데...아니면 안철수 연구소 같은 곳과 손을 잡고 사용설명서 사용법 자동 해석 프로그램 같은걸 개발해도 괜찮지 않을까? 이 세상에 나같은 어리버리한 인간들이 넘쳐흐른다고 가정하면 아마 남은 평생 나는 돈방석에 앉아서 사용 설명서 전용 메이드 같은걸 두고 살 수도 있겠지.
지금 내가 바라는 것이 하나 있다면 세상에 더 이상 복잡한 기계 같은 건 나오지도 말고 필요하지도 말았으면 한다는 것이다. 현재 내가 떠안고 있는 사용설명서의 해석 및 적용에만도 남은 평생을 다 써야 할 지경인데 여기다 더 새로운 것이 추가된다면 난 아마 평생 사용설명서를 해석하느라 정작 그 기계는 사용조차도 못 해보고 내 인생을 종쳐야 할 것만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든다.
자 그러면 나는 이만 173 페이지에 목차만 168개에 달하는 내 핸드폰 사용 설명서나 읽어야겠다. 어찌 되었건 이걸로 멀티메일이라는 것도 보내거나 받아보고 무려 카메라도 달려 있으니 못난 얼굴이나마 한번 찍어봐야 쓰지 않겠는가? (근데 아뿔싸. 내가 기존에 쓰던 핸드폰과 다른 메이커의 핸드폰이라 멀티메일은 고사하고 한글 찍는 법도 모르겠다. 당분간 80바이트 이상의 문자를 보낼 일은 절대 없을 것 같다.)
* 이 글은 새로 연재를 시작한 글입니다. 아마 타이틀은 불만제곱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평소 불만이 많은 인간인지라 1년정도 소재 걱정은 안해도 되겠군 했었는데 벌써부터 다음주에 뭘 마감해야 할지 고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