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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벨의 개
캐롤린 파크허스트 지음, 공경희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06년 8월
평점 :
절판
난 차에 굉장히 약해서 몸이 약해지면 어김없이 멀미를 한다. 차 안에서 글자를 봐도 그렇다. 책도 아니고 단순히 핸드폰으로 문자를 봐도 머리가 핑-도는 짜증스러운 순간이 찾아온다.
그런 내가 일요일 오후 차 안에서 책 한권을 잡고 있었다. 내가 징징거릴 걸 민감하게 알아챈 엄마는 차 안에서 웬 책이야, 라고 말했고 난 책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대꾸했다.
"엄마, 이 사람 아내가 막 자살하려는 참이란 말이야."
실은 이미 알고 있었다. 렉시는 이미 책의 첫장부터 죽은 채 등장했으니까. 하지만 어둠 속 작은 구원에 매달리듯 난 렉시의 마지막이 무언가 특별하고 우리에게 알려주고픈 뭔가를 던져줄거라 믿었다. 자살을 선택이라고 믿는 여자. 그리고 그녀의 헌신적인 남편. 두 사람이 날 잡고 놔주지 않는 것 같았다.
어느 날, 교수인 폴은 집에 전화를 했다가 낯선 남자의 목소리를 듣는다. 사랑스런 아내 렉시가 사과나무에서 떨어진 채 발견되었다는 형사의 목소리였다. 그 후, 아내를 너무 사랑하던 폴은 렉시가 죽던 당시 함께 있던 개, 로렐라이에게 말을 가르쳐 렉시가 죽던 그 날의 미스터리를 풀어보려 하는데...
개가 말을 한다면...이라는 상상은 개를 키우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은 해봤을 테마다. 우리집은 그렇게 개를 미친듯이 아끼고 사랑하는 집은 아니었지만 왜인지 줄곧 일이년의 공백을 사이에 두고 강아지를 데려오곤 했다. 요크셔테리어에 마르티스... 지금의 강아지는 시츄로 굉장한 먹보지만 애교가 많다. 강아지들을 키우다보면 절실하게, 이 녀석이 말을 할 줄 알면 좋을텐데-라는 생각이 드는 순간이 있다. 정확히는 말을 알아들을 줄 알면 좋을텐데, 지만. 화장실을 못 가릴 때나, 밖에 나가야 하는데 바지 가랑이를 물고 놓지 않을 때, 아파서 낑낑 대는데 나는 영 어디가 아픈지 잘 모르겠을 때. 애처롭기도 하고 안쓰럽기도 하고 한 편으로는 난감하기도 하고. 그럴 때는 한숨을 푸욱 내쉬며 머리를 쓰다듬고 말하는 거다. '네가 말만 할 줄 알아도...'
물론 그건 이루어지지 않을 꿈이다. 사실 실제로 개가 말을 하게 되면 오히려 오싹하지 않을까 싶다. 싫다, 싫어. 유창하게 말을 강아지라니. 하루 이틀이야 재밌겠지만 나중에는 감시당하는 느낌이나 안 들면 다행이겠지...
폴은 아내를 잃은 슬픔에, 실은 그녀가 자살하지 않았을까 하는 의혹에 로렐라이에게 말을 가르치는 일에 매달린다. 폴과 렉시는, 이성적인 남편과 감성적인 아내였다. 서로가 서로를 보완해 주는 존재였던 것이다. 그런 아내의 죽음은 남편의 이성을 여지없이 흐트러트린다. 순수한 애정. 그 애정이 독이 된다.
이야기의 큰 줄거리는 폴이 로렐라이에게 '말을 가르치는' 일상을 그리지만 실제로는 폴이 바라본 렉시를 '보여주고' 있다. 예쁜 렉시, 엉뚱한 렉시, 예술가답게 복잡한 렉시... '폴이 바라본' 렉시는 그랬다.
과연, 남을 어디까지 이해할 수 있을까. 우린 자주 '우리가 남이니?'라고 말하지만 '남'이란 개념은 결국 '자기가 아닌 존재'를 말하는 거고, 그렇게 치면 부모님조차 남인 셈이다. 결국 어느 정도까지 이해는 해도 100% 이해하기란 어려운 그런 존재. 친밀도에 따라 이해도도 다르겠지만 다른 어떤 존재를 100% 이해한다는 것 또한 무서운 일이 아닐까.
폴은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렉시를 이해하려고 노력한다. 하지만, 그는 그 마지막에서 깨닫는다. 진실, 그것만이 위안이라고. 내가 편하자고 상상한 모습이 아니라, 환하게 웃든 찌푸리며 화를 내든 그 사람의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는 것.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게 아니라 그 사람을 받아들이려고 노력하는 것이 진정으로 그 사람을 이해하는 방법이라는 걸.
바벨의 개, 바벨탑에서 막 도망쳐 나온 폴과 로렐라이의 슬픈 '렉시' 그리기. 어리석고 사랑스럽고. 축축한 코를 부비며 주인을 올려다보는 강아지를 닮은 소설이었다.
-당신이 듣지 않으면 나는 말할 수 없어요 (14)
-내가 도달한 결론은, 모든 개들은 목격자라는 것이다. 개들은 우리의 가장 사적인 순간에 언제나 함께 한다. 우리가 혼자라고 생각할 때도 개들은 같이 있다. 개들이 우리에게 무슨 말을 해줄 수 있는지 생각해 보자. 개들은 심지어 대통령의 무릎에도 앉는다. 사랑과 폭력 행위, 입씨름과 싸움을 지켜본다. 아이들의 은밀한 장난도 본다. 그들이 본 것을 죄다 우리에게 말해줄 수 있다면, 그들과 함께 했던 삶의 빈틈이 메워질 텐데. 뭔가 시도해 보는 수밖에 선택의 여지가 없을 것 같다. (19)
-느긋하고 평온하고 행복해 보였다. 입술에 가벼운 미소가 걸려 있었다. 기운이 났다. 내 앞에 새로운 하루가 펼쳐져 있었다. 가능성이 넘치는 하루가. 얼른 렉시와 시간을 보내고 싶어 안달이 났다.(59)
-다른 사람의 심장이나 간, 신장을 이식받은 사람은, 음식이나 좋아하는 색이 바뀌는 경우가 있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마치 장기에 옛 기억이 담겨 있어서, 새 주인의 몸속에서 과거가 들어갈 자리를 찾는 것 같다나. 바로 내가 내 몸 안에 렉시를 그런 식으로 담고 있었다. 그녀가 내 안에 자리 잡은 후, 나는 그녀의 스타일로 보고 듣고 맛보게 되었다. (63)
내 최고의 기사를 빼앗아가는구나. 내가 오늘 알게 된 것을 어제도 알았다면, 네 잿빛 눈을 빼고 흙으로 된 눈을 박았을 것을. 네가 내 것이 아니라는 것을 어제도 알았다면, 살로 된 네 심장을 빼고 돌로 된 심장을 박았을 것을. (82)
-"가서 렉시를 데려와."
나는 개가 아는 모든 명령어를 외쳤다. 하지만 소용이 없다. 나는 로렐라이를 막지 못한다. 그 마법 주문을 내뱉은 후로는 막을 재간이 없다. 로렐라이는 집을 빙빙 돌면서, 잃어버린 것을 찾아 헤맨다. (89)
-자살은 한순간일 뿐이라고 렉시는 내게 말했다. 그녀는 내게 자살을 꼭 그렇게 표현했다. 한순간의 일이라고.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다거나, 태양이 빛나고 있으며, 보고 싶어 안달하던 영화가 이번 주에 개봉한다는 사실 따위는 안중에 없게 되는. 잘되는 일이 아무것도 없으리란 생각이 퍼뜩 떠오른다. 영영 그럴 것 같다. 그래서 자신에게 묻는다. 이게 다란 말이야? 이런 일이 닥칠 줄 알았지만 오늘이 그날일 줄은 몰랐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한다. ...그러면 그 순간은 끝난다. 그 영화를 보지 못한다면 얼마나 슬플까 하는 생각이 든다. 또 키우는 개를 보면서 내가 없어지면 누가 개를 보살필까 하는 생각도 든다. 그러면 평범한 생활로 돌아간다. 하지만 그것은 마음에 계속 남는다. 그 생각을 일부러 하지 않더라도, 그날의 선택권이 내게 있다는 걸 알고 위로를 받는다. 사탕을 뺨 안쪽에 밀어넣듯이, 그 생각을 마음 구석에 밀어놓는다. 그 뒤에 묻어둔 기억은 혀를 굴릴 때의 달콤한 쾌감과 똑같다. (105)
-내가 어렸을 때, 과장법을 많이 쓰던 어머니는 이런 말을 즐겨 했다. 세상이 끝날 때, 마지막으로 내가 떠오를 거라고. 땅이 갈라지고 발밑으로 흙이 내려앉을 때 어머니는 하늘로 날려보내듯 내 이름을 외칠 거라고 했다. 매일 나이 드는 걸 알고 놀라는 지금에야 어머니의 말이 과장만이 아니었음을 깨닫는다. 우리 모두는 이런 이름을 하나씩 품고 산다는 생각이 든다. 그 이름의 가치는 그런 마지막 순간에 입에서 흘러나오기 전까지는 모른다. 그게 언제나 예상하는 이름일 것 같지는 않다. 내 어머니조차도 그랬을 것이다. (141)
-작은 역할을 하더라도 내가 나오는 대목을 읽는 게 좋았다. 다른 사람의 꿈에 내가 등장하는게 만족스러웠다. 그건 어떤 면으로든 내가 존재한다는 증거니까 내 마음의 벽 밖에서도 내가 존재감 있고 가치 있다는 증거니까. (303)
-누구나 심장이 두 개란 말이 맞지 않을까? 주먹처럼 뒤에 웅크리고 있는 비밀 심장. 우리가 매일 사용하는 단순한 심장 밑에서 비비꼬여 쪼그라든 채 살아가는 심장. ...두 번째 심장을 어두운 색으로 만드는 것은 꿈의 내용이 아니라, 잠이 오지 않아서 깨어 있을 때 머리를 스치는 생각들이다. 우리가 타인에게 절대 이야기하지 않는 것도 그런 생각들이고. (306)
-그대는 나의 가장 멋진 기사님. (314)
-거기 삶의 큰 거짓과 죽음의 큰 거짓이 있었다는 걸 이제는 똑똑히 알 수 있을 것 같다. 보통 사람들에게 자살은 결코 선택하지 않을 순간이다. 하지만 결국 그걸 선택하리란 걸 아는 사람들, 자기에게 선택권이 있음을 아는 사람들은 다르다. (336)
-그런데 당신은 인생의 하루가 그런 식으로 사라져가는 게 두려워져. (338)
-그래서 나는 자꾸만 돌아보게 된다. 아무리 여러 번 보더라도 그녀의 얼굴을 볼 수가 없다. (341)
-우리 사이에 있던 어두운 순간이 있었다는 사실도, 너무 환해서 똑바로 바라볼 수 없던 순간이 있었다는 사실도 기억한다. 그 여인을 있는 그대로 기억하려 노력한다. 슬픔에 위안이 되게 내 마음대로 짜 맞춘 여인의 모습이 아니라......시간이 흘러, 용서라는 약이 갈라지고 찢긴 내 가슴을 씻어줄수록 나는 알게 된다. 그녀를 본모습 그대로 기억하는 것이 내가 우리 둘에게 줄 수 있는 선물임을. (34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