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한 동화
온다 리쿠 지음, 권남희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7년 8월
평점 :
품절



온다 리쿠.

난 한 번 '꽂히는' 작가를 만나게 되면 차근차근 작품을 읽어나가기 보다는 단숨에 현재까지 나온 작품을 몰아 읽는 편이다. 옛날에 전집류(셜록홈즈 시리즈, 뤼팽 시리즈)를 자주 사줬던 엄마의 영향일 수도 있고, 그저 편식을 하는 내 성격일 수도 있겠지만, 보통은 마지막 작품까지 읽고 그제서야 만족의 한숨을 쉬곤 한다.

 

하지만 온다 리쿠는 그럴 수가 없었다. 저번에 '유지니아'를 읽은 이후, 문득 아, 이 작가 작품은 몰아읽을 수 없겠구나, 하는 느낌이 들었다. 사람의 마음 속 불안감을 조용히 흔드는 글을 단숨에 몇 권이고 읽어버린다면 당분간은 일상 생활 속에서 그 흔들림을 담은 채 살아야 할 테니까. 가뜩이나 방학 끝무렵 + 개강이라 여러가지 일이 복잡한데 가슴 속 술렁거림을 감당할 여력이, 내게는 없었다.

 

<불안한 동화>는 그나마 흔들림이 적지만 책에서 손을 뗄 수 없는 건 다른 책과 마찬가지다. 순식간에 사람을 끌고들어가는 흡착력, 집중력이 책에서 느껴진다. 노리코의 그림처럼.

 

호러 미스터리 라고 표지에 적혀있지만 실상은 무섭다기 보다 얼이 빠져 읽어 내려서인지 '흥미로웠다'. 환생, 기억을 읽는 사람, 죽음에 얽힌 미스터리가 잘 섞여 들어간 마블링 볼을 들여다보는 느낌이랄까. 개인적으로 환생, 이라는 개념을 좋아하는 편이라 신이 나서 읽었지만 보통 내가 즐겨읽던 판타지에서의 '환생'이 주는 발랄함보다는 제목답게 '불안'한 기운이 맴돈다.

 

사람이 전생의 기억을 이어받는 게 가능할까. 나도 이런 걸 좋아하는 편이라 예전부터 여러가지 정보를 찾아다니긴 했지만 솔직히 내가 겪은 일이 아니라 의심스러운 구석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책에서도 나왔지만 달라이 라마는 '모두' 전생의 달라이 라마로의 기억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어렸을 때의 내게는 그게 그저 우와-그런가, 하고 놀랄거리였지만 조금 머리가 컸다고 이제는 그게 과연 좋은 일일까, 하는 생각이 든다.

 

노리꼬는 '다음 생에는 잘 할거야'라고 마지막에 되뇌인다. 그래, 만약 사람이 정말 '환생' 하는 거라면 그 이유는 전생보다 더 나은 삶을 살 기회가 내려오는 거 아닐까. 그렇다면 전생을 기억할 이유는 없는 거 아닐까. 딱히 어느 인생보다 낫다, 고 잘라말할 수는 없는 내 인생이지만 전생이랍시고 '누군가', 지금의 내가 아닌 누군가의 기억이 끼어든다면 조금 짜증스러울 것 같다. 아무것도 없지만 주제파악만은 확실히 하는 나로서는 전생이든 뭐든 결국은 남의 기억이 아닌가 싶다.

 

불안한 동화, 동화를 현실로 끌어내리니 새로운 동화가 시작되었다. 평생을 어머니의 그림자에 휘말려왔던 뵤,가 어린시절 동화를 풀어헤쳐 얻은 건, 마음 편히 발을 디딜 수 있는 '현실'이었다. 잔인한 진실이었을지라도 뵤에겐 새출발의 계기가 되었을거라 생각해 괜히 흐뭇해 진다.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읽으면 왜 온다 리쿠의 책들이 사람을 울렁울렁 술렁술렁하게 만드는지(의성어만 잔뜩 늘어놓을 수 밖에 없는 내 심정도) 이해하게 될 책이다.

 

솔직히 말하면 <유지니아>를 읽고나니 그 강렬함에 비해 이 <불안한 동화>는 재미있고 흥미롭고 흡인력 있지만 온다 리쿠 특유의 '술렁술렁'함이 2% 부족한 느낌이다. 이거, 몇 권 읽지도 않고서 온다 리쿠에 너무 깊이 빠져든 건 아닐까...

 

-속물스러운 사람들은 어째서 모두 닮았을까. 같은 얼굴을 하고 같은 목소리를 낸다. 우리는 너희와 달라. 인생에 막대한 투자를 하고 있어. 그래서 우리는 인생을 즐기지. 어때? 즐겁겠지?  그렇게 말하는 그들의 손짓발짓을 보고 있노라면, 무심결에 코웃음을 칠 것 같다. 자존심 덩어리 같은 시선과 들으라는 걸 전제로 늘어놓는 자랑이 숨 막힐 듯 덥다. (16)

 

-내가 존재하기 훨씬 전부터 이 세계가 존재했다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신기하다. 적어도 나는 그 사실을 증명할 수가 없지 않은가. 모두들 내가 태어난 시점에 미리 말을 맞추었을지도 모르는 일 아닌가. 이 세계가 나만의 100미터 단거리 달리기가 아니라 영원히 끝나지 않는 릴레이 경주라는 것을 이해하기란 너무 어렵다. (18)

 

-꿈이 현실로 침입해온 지금, 내게는 달아날 곳이 없다. (108)

 

-아무래도 최근 젊은 여자들은 양극화 현상을 보인다는 느낌이 든다. 무조건 자신을 타인과 차별화하고 '뭔가'를 추구하는 타입과 판에 박힌 '여자의 인생'을 걷는 타입으로. (119)

 

-최근에 비로소 깨달았지만, 내게는 '행복해지고 싶다'는 욕망이 남들보다 부족한 것 같다. 유학과 결혼, 이 두 가지는 결국 같은 것이다. 둘 다 사회든 남성이든 누군가에게 자신의 가치를 인정받고 싶어 하고, 그것으로 행복한 삶을 추구한다. 그러니 근본적으로는 뿌리가 같은 욕망이다.
물론 나 역시 당연히 행복한 게 좋다. 그러나 나름대로 균형을 유지하며 하루하루 생활하는 것만으로 스릴이 넘치고, 그것만으로도 벅차다. 나 자신을 추스르는 것만으로도 정신이 없는데, 여기에 다른 것이 더해지면 내가 펑 하고 터져버릴 것 같은 생각이 든다. 내 삶도 제대로 챙기지 못하는 터에, 다른 것까지 신경 쓸 겨를은 없다. 나는 이게 자연스러운 사고방식이라고 생각하는데, 다른 사람들은 그렇지 않은 것 같다. (120)

 

-아마 같은 버스에 타서도 소녀들의 시야에는 노인들이 전혀 들어오지 않을 것이다. 병도, 늙음도, 죽음도 소녀들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세계일 테니까. (172)

 

-이렇게 오랜 세월 살아오며 엄청나게 많은 시간을 일에 할애하고, 여러 사람을 사귀어도 손안에 남는 건 겨우 한 줌뿐. 남는 것은 아무것도 없을지도 몰라요. 그것이 만약 증오였다고 해도 이렇게 형태를 갖추고 손에 남는다면 좋은 일이죠. (1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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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코샤넬 - Coco before Chanel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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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영종료


글쎄요...코코샤넬의 삶을 다 표현하기에는 좀 영화가 짧았다는 느낌이 들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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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을 연구하는 여인
아리아나 프랭클린 지음, 김양희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07년 6월
평점 :
절판



나는 꽤 오랫동안 내가 이 책을 읽었다고 착각하고 있었다. 실은 아니었다는 걸 깨달은 건, 매우 뒤늦게도 이 책의 후속작인 '죽음의 미로'를 중간정도 읽었을 때였다. 아무래도 새로 시작하는 이야기라기엔 옛날을 회상하는 부분이 많아서 뭐지? 하고 물음표만 늘리고 있다가 문득, 아.......하고 이 책이 떠올랐다. 쯧쯧쯧,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겠지만 책은 순서대로 보는 걸 좋아하는 나로서는 축복받은(!) 토요일 오후에 침대에서 뒹굴거릴 때 깨닫기엔 너무 슬픈 일이었다.

 

어쨌거나 저쨌거나 난 '죽음의 미로'를 다 읽고 당장 도서관에 달려가 이 책을 빌려왔다. 다행히도 이 책이 처음 나왔을 때만큼 인기가 있는 편이 아닌지 서늘한 도서관 한 구석에 얌전히 꽂혀있었다. 이제라도 알아차려서 다행이지.

 

시리즈의 두번째 권부터 읽은지라 부작용 아닌 부작용이 있었다. 앞에서도 썼지만, '죽음의 미로'에는 종종 '시몬'이나 '보호견'이 회상 속에서 등장한다. 처음에야 아무렇지도 않게 넘겼지만(난 까탈스럽기보다는 둔감한 독자기 때문에) 그렇게 자주 등장하는 '시몬'이 누구인지, 앨리의 아빠와는 도대체 어떤 사이였는지, 역시 종종 등장하는 '보호견'이 어떤 존재였는지 책을 펴기 전부터 궁금해 하고 있었다. 순서가 뒤바껴도 한참 바뀌었지만 말이다.

 

그래서 기대에 기대를 하고 읽은 '죽음을 연구하는 여인'.

 

아, 시몬! 난 첫 등장부터 이 작은 유대인이 좋아졌다. (내 상상 속에서) 순박해 보이지만 작은 눈을 영리하게 빛내는 이 애처가 아저씨가 유대인인건 나와는 아무 상관도 없었기에. 아델리아의 어리숙함(아델리아는 세상 물정을 너무 모르는 구석이 있다)에 난처해 하는 그가, 단서를 잡으러 나가서 양털 제조에 대해 배워 천진하게 알려주는 그가 너무 좋았다. 그래서 너무 슬퍼졌다. 의도치 않게 그의 미래를 알고 있어서. 누군가의 미래를 미리 안다는 건 이런 느낌이구나.

 

아델리아는 내가 좋아할만한 여자였다. 굳이 말하자면, 여자라고 무시당하는 게 짜증스러울, 능력있고 자각있는 여자. 안전한 '의사들의 도시'에서 살아온 아델리아는 난생 처음 건너온 잉글랜드에서는 '의사'라는 자신을 당당히 내보일 처지가 아니다. 그것 하나만으로 '마녀'로 몰릴 가능성이 있으니까. 그럼에도 그녀는 어디까지나 자신을 포기하지 못한다. 죽은자들을 위한 의사. 그들을 대신해 말을 해주는 의사.

 

-나는 그 아이들을 위해 기도하려고 여기 온 게 아니에요. 나는 아이들을 대신해서 말하려고 온 겁니다. (124)

 

난 그 투철한 직업정신과 대비되는 순진함, 그럼에도 반짝이는 영민함에 대번에 아델리아가 좋아졌다. 아마 현대에 태어났어도 그렇게 도도하고 순진했을 것 같다.

 

줄거리를 대충 말하자면, 잉글랜드의 어느 마을에서 아이들이 연쇄적으로 살해당하는 사건이 일어난다. 사람들은 그게 유대인의 짓이라 생각해 유대인을 핍박하고, 그때문에 부유한 유대인들에게 세금을 못 받게되어 슬픈 헨리왕은 저 멀리 시칠리아에서 사건을 조사해줄 '죽은 자를 다루는 의사'를 초청하게 된다. 불행히도 여자의사가 마녀로 몰리던 시절, 뛰어난 재능으로 이름을 날리던 아델리아는 난데없이 잉글랜드로 가게 되고 살인범에게 목숨을 위협받는 동시에 사건을 하나하나 파헤쳐 가는데...

 
난 역사는 잘 모른다. 우리 나라 역사도 헷갈려하는 마당에(자랑은 아니지만) 남의 나라 역사가 머리 속에서 제대로 정리되어 있을리 만무하다. 덕분에 옛날 사회 시간에 배웠던 기억을 되살리느라 끙끙대며 책을 읽었다....고 말하고 싶지만 가볍게 넘어갔다. 어차피 외국의 '중세'는 비슷비슷한데다 역사적 지식을 그렇게 요구하는 책이 아니었으니까. 물론 자세히 알고 있다면 '역사적' 재미가 있었을 것 같기도 하지만...
 

고등학교 시절, 역사시간이 재미있었던 유일한 순간은 역사 속 야사와 비사를 속삭여주던 순간이었다. 불행히도 내 머리는 역사와 년도는 거부했지만, 그런 이야기들은 머리맡에서 읽어주는 동화마냥 머리속에 박혀 있다. 해가 지날수록, 어린 시절엔 거들떠 보지도 않았던(단순히 내가 싫어서) 역사에 흥미가 가는 것도 생각해보면 재미있다. 이제 슬슬 나도 뒤를 돌아보게 된 것인가...

 

중세시대에는 종교가 삶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권력에도 큰 비중을 차지했고) 책에서는 종교적인 배경이 종종 등장한다. 수도원장, 수녀들... 은수자라는 듣도보도 못한 존재(은둔해서 수행하는 사람)... 딱히 종교를 가지진 않았지만 그 당시 종교와 권력이 상충하던 시기는 개인적으로 흥미가 있는 편이다. 기독교 관련 강의시간에도 재미있게 들었던 부분이기도 하고. 하지만 종교를 떠나서 이 책 덕분에... 책 끄트머리에서야 겨우 호쾌하게 등장하는( 맨 앞에서도 나오지만 거기선 너무 제멋대로이기만 하니까) 헨리왕에게 관심이 높아졌다. '이 사람'이 '그' 헨리왕이라 이거지.

 

-매복 기습이라고 아델리아는 생각했다. 성공적이든 아니든, 교활함을 예술의 영역으로 끌어올리는 행위를 지금 구경하고 있다는 걸 그녀는 깨달았다. (511)


헨리왕 말고 이 책에서 가장 매력있는 등장인물은 단순히 내 관점에서, 주인공 아델리아가 아닌 유대인인 시몬이다. 그 시절은 기독교가 성행하고 있었고 힘이 있는 종교였기 때문에(현대도 그렇지만...) 유대인들은 상당히 핍박받고 있었다. 종교적인 이유에서 탄생한 부당한 대접은 비합리적이지만, 어디 인간의 생이 합리적으로만 흘러가던가. 그것은 그 시대 유대인들이 '어쩔 수 없이' 감당해야 했던 시대의 빚이었다. 어느 인종이 다른 인종보다 미개하다, 라는 인종주의도 싫지만 단순히 어느 민족이 예전-까마득한 예전-에 했던 일 때문에 겪는 민족차별은 더 싫다. 현재를 살아라, 라고 자신있게 말하는 건 아니지만 과거가 현재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건 오로지 '가르침' 뿐이라고 믿기 때문에. 현재가 과거를 짊어질 필요는 없지 않을까. (더불어 내가 좋아하는 시몬이 그런 취급을 받는다는데에 단순히 열이 받았다. )

 
재미있는 책이었다. 아델리아의 다음 행보가 상당히 기대된다. 실은 이미 두번째 권은 읽었지만서도.
 

-내일이란 건 없다, 그는 그걸 모른단 말인가? 내일이란 것들은 무서운 것들로 가득 차 있다. 오늘, 지금이 그 무엇보다 중요했다. 예의 따위를 신경 쓸 시간이 없다. (4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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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벨의 개
캐롤린 파크허스트 지음, 공경희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0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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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난 차에 굉장히 약해서 몸이 약해지면 어김없이 멀미를 한다. 차 안에서 글자를 봐도 그렇다. 책도 아니고 단순히 핸드폰으로 문자를 봐도 머리가 핑-도는 짜증스러운 순간이 찾아온다.

 

그런 내가 일요일 오후 차 안에서 책 한권을 잡고 있었다. 내가 징징거릴 걸 민감하게 알아챈 엄마는 차 안에서 웬 책이야, 라고 말했고 난 책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대꾸했다.

 

"엄마, 이 사람 아내가 막 자살하려는 참이란 말이야."

 

실은 이미 알고 있었다. 렉시는 이미 책의 첫장부터 죽은 채 등장했으니까. 하지만 어둠 속 작은 구원에 매달리듯 난 렉시의 마지막이 무언가 특별하고 우리에게 알려주고픈 뭔가를 던져줄거라 믿었다. 자살을 선택이라고 믿는 여자. 그리고 그녀의 헌신적인 남편. 두 사람이 날 잡고 놔주지 않는 것 같았다.

 

어느 날, 교수인 폴은 집에 전화를 했다가 낯선 남자의 목소리를 듣는다. 사랑스런 아내 렉시가 사과나무에서 떨어진 채 발견되었다는 형사의 목소리였다. 그 후, 아내를 너무 사랑하던 폴은 렉시가 죽던 당시 함께 있던 개, 로렐라이에게 말을 가르쳐 렉시가 죽던 그 날의 미스터리를 풀어보려 하는데...

 

개가 말을 한다면...이라는 상상은 개를 키우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은 해봤을 테마다. 우리집은 그렇게 개를 미친듯이 아끼고 사랑하는 집은 아니었지만 왜인지 줄곧 일이년의 공백을 사이에 두고 강아지를 데려오곤 했다. 요크셔테리어에 마르티스... 지금의 강아지는 시츄로 굉장한 먹보지만 애교가 많다. 강아지들을 키우다보면 절실하게, 이 녀석이 말을 할 줄 알면 좋을텐데-라는 생각이 드는 순간이 있다. 정확히는 말을 알아들을 줄 알면 좋을텐데, 지만. 화장실을 못 가릴 때나, 밖에 나가야 하는데 바지 가랑이를 물고 놓지 않을 때, 아파서 낑낑 대는데 나는 영 어디가 아픈지 잘 모르겠을 때. 애처롭기도 하고 안쓰럽기도 하고 한 편으로는 난감하기도 하고. 그럴 때는 한숨을 푸욱 내쉬며 머리를 쓰다듬고 말하는 거다. '네가 말만 할 줄 알아도...'

 

물론 그건 이루어지지 않을 꿈이다. 사실 실제로 개가 말을 하게 되면 오히려 오싹하지 않을까 싶다. 싫다, 싫어. 유창하게 말을 강아지라니. 하루 이틀이야 재밌겠지만 나중에는 감시당하는 느낌이나 안 들면 다행이겠지...

 

폴은 아내를 잃은 슬픔에, 실은 그녀가 자살하지 않았을까 하는 의혹에 로렐라이에게 말을 가르치는 일에 매달린다. 폴과 렉시는, 이성적인 남편과 감성적인 아내였다. 서로가 서로를 보완해 주는 존재였던 것이다. 그런 아내의 죽음은 남편의 이성을 여지없이 흐트러트린다. 순수한 애정. 그 애정이 독이 된다.

 

이야기의 큰 줄거리는 폴이 로렐라이에게 '말을 가르치는' 일상을 그리지만 실제로는 폴이 바라본 렉시를 '보여주고' 있다. 예쁜 렉시, 엉뚱한 렉시, 예술가답게 복잡한 렉시... '폴이 바라본' 렉시는 그랬다.

 

과연, 남을 어디까지 이해할 수 있을까. 우린 자주 '우리가 남이니?'라고 말하지만 '남'이란 개념은 결국 '자기가 아닌 존재'를 말하는 거고, 그렇게 치면 부모님조차 남인 셈이다. 결국 어느 정도까지 이해는 해도 100% 이해하기란 어려운 그런 존재. 친밀도에 따라 이해도도 다르겠지만 다른 어떤 존재를 100% 이해한다는 것 또한 무서운 일이 아닐까.

 

폴은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렉시를 이해하려고 노력한다. 하지만, 그는 그 마지막에서 깨닫는다. 진실, 그것만이 위안이라고. 내가 편하자고 상상한 모습이 아니라, 환하게 웃든 찌푸리며 화를 내든 그 사람의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는 것.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게 아니라 그 사람을 받아들이려고 노력하는 것이 진정으로 그 사람을 이해하는 방법이라는 걸.

 

바벨의 개, 바벨탑에서 막 도망쳐 나온 폴과 로렐라이의 슬픈 '렉시' 그리기. 어리석고 사랑스럽고. 축축한 코를 부비며 주인을 올려다보는 강아지를 닮은 소설이었다.

 

-당신이 듣지 않으면 나는 말할 수 없어요 (14)

 

-내가 도달한 결론은, 모든 개들은 목격자라는 것이다. 개들은 우리의 가장 사적인 순간에 언제나 함께 한다. 우리가 혼자라고 생각할 때도 개들은 같이 있다. 개들이 우리에게 무슨 말을 해줄 수 있는지 생각해 보자. 개들은 심지어 대통령의 무릎에도 앉는다. 사랑과 폭력 행위, 입씨름과 싸움을 지켜본다. 아이들의 은밀한 장난도 본다. 그들이 본 것을 죄다 우리에게 말해줄 수 있다면, 그들과 함께 했던 삶의 빈틈이 메워질 텐데. 뭔가 시도해 보는 수밖에 선택의 여지가 없을 것 같다. (19)

 

-느긋하고 평온하고 행복해 보였다. 입술에 가벼운 미소가 걸려 있었다. 기운이 났다. 내 앞에 새로운 하루가 펼쳐져 있었다. 가능성이 넘치는 하루가. 얼른 렉시와 시간을 보내고 싶어 안달이 났다.(59)

 

-다른 사람의 심장이나 간, 신장을 이식받은 사람은, 음식이나 좋아하는 색이 바뀌는 경우가 있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마치 장기에 옛 기억이 담겨 있어서, 새 주인의 몸속에서 과거가 들어갈 자리를 찾는 것 같다나. 바로 내가 내 몸 안에 렉시를 그런 식으로 담고 있었다. 그녀가 내 안에 자리 잡은 후, 나는 그녀의 스타일로 보고 듣고 맛보게 되었다. (63)

 

내 최고의 기사를 빼앗아가는구나. 내가 오늘 알게 된 것을 어제도 알았다면, 네 잿빛 눈을 빼고 흙으로 된 눈을 박았을 것을. 네가 내 것이 아니라는 것을 어제도 알았다면, 살로 된 네 심장을 빼고 돌로 된 심장을 박았을 것을. (82)

 

-"가서 렉시를 데려와."
나는 개가 아는 모든 명령어를 외쳤다. 하지만 소용이 없다. 나는 로렐라이를 막지 못한다. 그 마법 주문을 내뱉은 후로는 막을 재간이 없다. 로렐라이는 집을 빙빙 돌면서, 잃어버린 것을 찾아 헤맨다. (89)

 

-자살은 한순간일 뿐이라고 렉시는 내게 말했다. 그녀는 내게 자살을 꼭 그렇게 표현했다. 한순간의 일이라고.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다거나, 태양이 빛나고 있으며, 보고 싶어 안달하던 영화가 이번 주에 개봉한다는 사실 따위는 안중에 없게 되는. 잘되는 일이 아무것도 없으리란 생각이 퍼뜩 떠오른다. 영영 그럴 것 같다. 그래서 자신에게 묻는다. 이게 다란 말이야? 이런 일이 닥칠 줄 알았지만 오늘이 그날일 줄은 몰랐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한다. ...그러면 그 순간은 끝난다. 그 영화를 보지 못한다면 얼마나 슬플까 하는 생각이 든다. 또 키우는 개를 보면서 내가 없어지면 누가 개를 보살필까 하는 생각도 든다. 그러면 평범한 생활로 돌아간다. 하지만 그것은 마음에 계속 남는다. 그 생각을 일부러 하지 않더라도, 그날의 선택권이 내게 있다는 걸 알고 위로를 받는다. 사탕을 뺨 안쪽에 밀어넣듯이, 그 생각을 마음 구석에 밀어놓는다. 그 뒤에 묻어둔 기억은 혀를 굴릴 때의 달콤한 쾌감과 똑같다. (105)

 

-내가 어렸을 때, 과장법을 많이 쓰던 어머니는 이런 말을 즐겨 했다. 세상이 끝날 때, 마지막으로 내가 떠오를 거라고. 땅이 갈라지고 발밑으로 흙이 내려앉을 때 어머니는 하늘로 날려보내듯 내 이름을 외칠 거라고 했다. 매일 나이 드는 걸 알고 놀라는 지금에야 어머니의 말이 과장만이 아니었음을 깨닫는다. 우리 모두는 이런 이름을 하나씩 품고 산다는 생각이 든다. 그 이름의 가치는 그런 마지막 순간에 입에서 흘러나오기 전까지는 모른다. 그게 언제나 예상하는 이름일 것 같지는 않다. 내 어머니조차도 그랬을 것이다. (141)

 

-작은 역할을 하더라도 내가 나오는 대목을 읽는 게 좋았다. 다른 사람의 꿈에 내가 등장하는게 만족스러웠다. 그건 어떤 면으로든 내가 존재한다는 증거니까 내 마음의 벽 밖에서도 내가 존재감 있고 가치 있다는 증거니까. (303)

 

-누구나 심장이 두 개란 말이 맞지 않을까? 주먹처럼 뒤에 웅크리고 있는 비밀 심장. 우리가 매일 사용하는 단순한 심장 밑에서 비비꼬여 쪼그라든 채 살아가는 심장. ...두 번째 심장을 어두운 색으로 만드는 것은 꿈의 내용이 아니라, 잠이 오지 않아서 깨어 있을 때 머리를 스치는 생각들이다. 우리가 타인에게 절대 이야기하지 않는 것도 그런 생각들이고. (306)

 

-그대는 나의 가장 멋진 기사님. (314)

 

-거기 삶의 큰 거짓과 죽음의 큰 거짓이 있었다는 걸 이제는 똑똑히 알 수 있을 것 같다. 보통 사람들에게 자살은 결코 선택하지 않을 순간이다. 하지만 결국 그걸 선택하리란 걸 아는 사람들, 자기에게 선택권이 있음을 아는 사람들은 다르다. (336)

 

-그런데 당신은 인생의 하루가 그런 식으로 사라져가는 게 두려워져. (338)

 

-그래서 나는 자꾸만 돌아보게 된다. 아무리 여러 번 보더라도 그녀의 얼굴을 볼 수가 없다. (341)

-우리 사이에 있던 어두운 순간이 있었다는 사실도, 너무 환해서 똑바로 바라볼 수 없던 순간이 있었다는 사실도 기억한다. 그 여인을 있는 그대로 기억하려 노력한다. 슬픔에 위안이 되게 내 마음대로 짜 맞춘 여인의 모습이 아니라......시간이 흘러, 용서라는 약이 갈라지고 찢긴 내 가슴을 씻어줄수록 나는 알게 된다. 그녀를 본모습 그대로 기억하는 것이 내가 우리 둘에게 줄 수 있는 선물임을. (3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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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백년 전 악녀일기가 발견되다 내인생의책 푸른봄 문학 (돌멩이 문고) 6
돌프 페르로엔 지음, 이옥용 옮김 / 내인생의책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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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몇 년 전 미국에서 어학연수를 했었다. 반쯤은 생각보다 재미없는 대학생활을 벗어나고 싶어서 선택한 어학연수는 공부보다는 새로운 무언가가 그저 재밌는 나날이었다.  그래도 처음 어학원에 들어섰을 때는 엄청 긴장해 있었다. 규칙적인 생활을 빠져나갈 궁리만 하면서도 규칙에 얽매이는 나로서는 어학보다는 '학원'이라는 곳이, 심지어는 한국말도 통하지 않을 미국에 있는 기관이 어쩐지 현실같이 느껴지지 않았다. (뭐 그 뒤로 거의 1년간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게 놀기도 놀았지만... )

 

어찌어찌 들어간 반에서 제일 첫 날 가르쳐 준 것은, 간단한 인사법과 자기소개법, 그리고 해서는 안 될 질문이나 말 같은 미국에 적응하기 위한 기초 중의 기초에 해당하는 것들이었다. 인사법(Hello, how are you? I'm fine thank you.)이나 자기소개법은 그렇다 쳐도 나는 해서는 안 될 질문이 도통 이해가 가질 않았다. 아니 왜 나이를 물어보면 안 되는거래? 보통 만나서 나이로 언니/동생을 정하는 나라에서 자라난 나에게 그 항목은 은근히 스트레스였다. 하지만 내가 뭘 어쩌겠어. 나는 이미 한국에서 16시간 떨어진 미국땅에 혼자였고 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따르라고 하지 않던가. (하지만 그 뒤로도 나는 습관적으로 나이를 물었다...)

 

그 첫 날, 작고 단단한 체격의 금발 선생님은 흑인들에게 'negro'란 단어를 써서는 안 된다고 강조하며 말했다. 작은 단일민족의 나라에서 자라난 수도권 방콕소녀였던 나에게 인종차별이란 주제는 멀고도 먼 이야기였었다. 그런데 그 첫 날, 나는 아, 여기가 진짜 미국이구나-하는 단순한 감상과 함께 인종차별이 정말로 있는거구나, 하고 조금은 얼빠진 생각을 떠올렸다. 솔직히 얘기하자면 그 때도, 지금도 가끔씩은 그렇게 오히려 강조를 해대는 것조차 차별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정말 다를 거 없다면 말도 거칠게 없어야 하지 않을까. 하지만 뭐, 뚱뚱한 사람에겐 돼지라고 부르면 안 되고 나같이 키가 작은 사람에게 난쟁이 똥자루라고 부르면 기분 나쁜 법이니까. 그렇게 생각하면 또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하긴 이해하고 말고가 아니라, 당장 백인들에겐 우리 나라 사람도 황인종으로 colored people에 속하니 당장 우리 이야기일런지도 모르겠지만.

 

<2백년 전 악녀일기가 발견되다>라니 내가 좋아하는 '책 제목의 기준'에서 한참 벗어난 길이다. 거기다 악녀일기, 라는 묘하게 칙릿소설 같은 제목 덕에 사실 읽어볼 생각도 하지 않고 있었다. (그래도 기본적으로 악녀는 좋아한다. 팜프파탈이라든지) 하지만 세상일은 아무도 모르는 법. 어느 날 오후,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택배 하나가 도착했다. 시킨 건 없지만 택배 받는 걸(특히 책 택배) 좋아해서 좋아라 받아들고 두근두근대며 뜯어보았다. 그랬더니 두둥. 으음, 이것 참 내 취향을 고려하지 않은 책 선택인걸. 하면서도 괜히 신이 났다. 과연 선물의 의외성은 정말 놀랍군.

 

솔직히, 아주 솔직히 말하자면, 책을 펴들고 정말 놀랐다. 생각했던 칙릿 소설도 아닐 뿐더러 글자 크기도 크고 소설이라기 보다는 동화...보다도 동시같았달까. 차근차근 <저자의 말>부터 읽어가니 어어... 인종차별 이야기란다. 인종차별이라고는 머리로만 아는 지식에 미국 도로에서 차타고 지나가며 '너네 나라로 돌아가'라고 소리치던 금발머리 놈밖에 모르는데... 조금 걱정하며 책장을 넘기니 정말, 읽기는 쉬웠다. 글자도 크고 주인공 '마리아'의 일기 형식이라 -분명 마리아는 여느 아이들처럼 일기 쓰기를 그리 좋아하지 않은 모양이다- 줄이 그렇게 많은 편도 아니었다. 인종차별 이야기라길래 뭔가 다툼이라도 있을거라 생각했는데 이야기의 처음부터 끝까지 나온 다툼은 노예와 바람핀 아빠와 엄마 사이에만 존재했다.

 

마리아는 부유한 집의 딸로 14살이 되어 자신의 개인 노예를 가지게 된다. 마리아는 엄마 친구댁 아들 루카스를 좋아하고, 가슴이 좀 더 나오길 바라는(!) 평범한 소녀다. 마리아가 선물로 받은 노예 꼬꼬는 말도 잘 듣고 일도 잘하지만 좀 따분하다. 어느 날 루카스네 아줌마가 노예를 사지 않겠냐고 한다. 꼬꼬도 일을 잘 하지만, 아줌마네 노예 울라는 화장품도 마사지도 수준급이라고 한다. 마리아는 노예시장에 나가 꼬꼬를 팔고 돌아온다. 마리아의 인생은 즐겁고 행복하다-.

 

작가의 의도대로, 읽고나니 좀 오싹했다. 저 시대에는 '노예' 라는 게 당연했다. 생각해 보면 옛날 내가 읽었던 책의 '인종과 상관없이' 상냥한 어린아이는 그 시대 개념으로는 좀 이상한 거 아닐까. 아마 마리아는 평생을 저렇게 노예를 아무렇지도 않게 부리며 살다 죽겠지. 향내나는 방 안에서 예쁜 옷을 입고 하하호호 수다를 떨면서도 누가 그 옷을 준비하고 차를 준비하는지에 대해서는 궁금하지도 않을테고.

 

조금 분개하며 책을 덮었지만, 뭐랄까. 옛날 공산주의에 대해 배울 때도 생각한 거지만, 인간이 누구나 평등해지는 시대는 오지 않는다. 이 시대조차 인종차별이 그리 심하지 않다뿐이지 아직 존재하며,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재산으로 사실상 계급이 나뉜다. (영국에는 귀족제도가 남아있지만 그거야 그쪽 나라 사정이고) 쪼끔 더 부정적으로 말하자면, 결국 사람이 평등한 때는 죽고난 다음밖에 없는 게 아닐까... 그것마저 아니라고 하면 너무 슬플 것 같아서 애써 생각하지 않고 있지만.

 

2백년 전의 악녀일기 덕분에 오늘도 이런저런 생각만 잔뜩 했다. 작가 아저씨는 내 이 반응을 보고 좋아하시겠지만서도, 나의 이 풀길 없는 답답함은 어쩌란 말이냐... 책 속으로 뛰어들어가 하하호호 신난 마리아 머리를 꽁 때려주고 싶은 심정이다, 정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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