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한 동화
온다 리쿠 지음, 권남희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7년 8월
평점 :
품절



온다 리쿠.

난 한 번 '꽂히는' 작가를 만나게 되면 차근차근 작품을 읽어나가기 보다는 단숨에 현재까지 나온 작품을 몰아 읽는 편이다. 옛날에 전집류(셜록홈즈 시리즈, 뤼팽 시리즈)를 자주 사줬던 엄마의 영향일 수도 있고, 그저 편식을 하는 내 성격일 수도 있겠지만, 보통은 마지막 작품까지 읽고 그제서야 만족의 한숨을 쉬곤 한다.

 

하지만 온다 리쿠는 그럴 수가 없었다. 저번에 '유지니아'를 읽은 이후, 문득 아, 이 작가 작품은 몰아읽을 수 없겠구나, 하는 느낌이 들었다. 사람의 마음 속 불안감을 조용히 흔드는 글을 단숨에 몇 권이고 읽어버린다면 당분간은 일상 생활 속에서 그 흔들림을 담은 채 살아야 할 테니까. 가뜩이나 방학 끝무렵 + 개강이라 여러가지 일이 복잡한데 가슴 속 술렁거림을 감당할 여력이, 내게는 없었다.

 

<불안한 동화>는 그나마 흔들림이 적지만 책에서 손을 뗄 수 없는 건 다른 책과 마찬가지다. 순식간에 사람을 끌고들어가는 흡착력, 집중력이 책에서 느껴진다. 노리코의 그림처럼.

 

호러 미스터리 라고 표지에 적혀있지만 실상은 무섭다기 보다 얼이 빠져 읽어 내려서인지 '흥미로웠다'. 환생, 기억을 읽는 사람, 죽음에 얽힌 미스터리가 잘 섞여 들어간 마블링 볼을 들여다보는 느낌이랄까. 개인적으로 환생, 이라는 개념을 좋아하는 편이라 신이 나서 읽었지만 보통 내가 즐겨읽던 판타지에서의 '환생'이 주는 발랄함보다는 제목답게 '불안'한 기운이 맴돈다.

 

사람이 전생의 기억을 이어받는 게 가능할까. 나도 이런 걸 좋아하는 편이라 예전부터 여러가지 정보를 찾아다니긴 했지만 솔직히 내가 겪은 일이 아니라 의심스러운 구석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책에서도 나왔지만 달라이 라마는 '모두' 전생의 달라이 라마로의 기억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어렸을 때의 내게는 그게 그저 우와-그런가, 하고 놀랄거리였지만 조금 머리가 컸다고 이제는 그게 과연 좋은 일일까, 하는 생각이 든다.

 

노리꼬는 '다음 생에는 잘 할거야'라고 마지막에 되뇌인다. 그래, 만약 사람이 정말 '환생' 하는 거라면 그 이유는 전생보다 더 나은 삶을 살 기회가 내려오는 거 아닐까. 그렇다면 전생을 기억할 이유는 없는 거 아닐까. 딱히 어느 인생보다 낫다, 고 잘라말할 수는 없는 내 인생이지만 전생이랍시고 '누군가', 지금의 내가 아닌 누군가의 기억이 끼어든다면 조금 짜증스러울 것 같다. 아무것도 없지만 주제파악만은 확실히 하는 나로서는 전생이든 뭐든 결국은 남의 기억이 아닌가 싶다.

 

불안한 동화, 동화를 현실로 끌어내리니 새로운 동화가 시작되었다. 평생을 어머니의 그림자에 휘말려왔던 뵤,가 어린시절 동화를 풀어헤쳐 얻은 건, 마음 편히 발을 디딜 수 있는 '현실'이었다. 잔인한 진실이었을지라도 뵤에겐 새출발의 계기가 되었을거라 생각해 괜히 흐뭇해 진다.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읽으면 왜 온다 리쿠의 책들이 사람을 울렁울렁 술렁술렁하게 만드는지(의성어만 잔뜩 늘어놓을 수 밖에 없는 내 심정도) 이해하게 될 책이다.

 

솔직히 말하면 <유지니아>를 읽고나니 그 강렬함에 비해 이 <불안한 동화>는 재미있고 흥미롭고 흡인력 있지만 온다 리쿠 특유의 '술렁술렁'함이 2% 부족한 느낌이다. 이거, 몇 권 읽지도 않고서 온다 리쿠에 너무 깊이 빠져든 건 아닐까...

 

-속물스러운 사람들은 어째서 모두 닮았을까. 같은 얼굴을 하고 같은 목소리를 낸다. 우리는 너희와 달라. 인생에 막대한 투자를 하고 있어. 그래서 우리는 인생을 즐기지. 어때? 즐겁겠지?  그렇게 말하는 그들의 손짓발짓을 보고 있노라면, 무심결에 코웃음을 칠 것 같다. 자존심 덩어리 같은 시선과 들으라는 걸 전제로 늘어놓는 자랑이 숨 막힐 듯 덥다. (16)

 

-내가 존재하기 훨씬 전부터 이 세계가 존재했다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신기하다. 적어도 나는 그 사실을 증명할 수가 없지 않은가. 모두들 내가 태어난 시점에 미리 말을 맞추었을지도 모르는 일 아닌가. 이 세계가 나만의 100미터 단거리 달리기가 아니라 영원히 끝나지 않는 릴레이 경주라는 것을 이해하기란 너무 어렵다. (18)

 

-꿈이 현실로 침입해온 지금, 내게는 달아날 곳이 없다. (108)

 

-아무래도 최근 젊은 여자들은 양극화 현상을 보인다는 느낌이 든다. 무조건 자신을 타인과 차별화하고 '뭔가'를 추구하는 타입과 판에 박힌 '여자의 인생'을 걷는 타입으로. (119)

 

-최근에 비로소 깨달았지만, 내게는 '행복해지고 싶다'는 욕망이 남들보다 부족한 것 같다. 유학과 결혼, 이 두 가지는 결국 같은 것이다. 둘 다 사회든 남성이든 누군가에게 자신의 가치를 인정받고 싶어 하고, 그것으로 행복한 삶을 추구한다. 그러니 근본적으로는 뿌리가 같은 욕망이다.
물론 나 역시 당연히 행복한 게 좋다. 그러나 나름대로 균형을 유지하며 하루하루 생활하는 것만으로 스릴이 넘치고, 그것만으로도 벅차다. 나 자신을 추스르는 것만으로도 정신이 없는데, 여기에 다른 것이 더해지면 내가 펑 하고 터져버릴 것 같은 생각이 든다. 내 삶도 제대로 챙기지 못하는 터에, 다른 것까지 신경 쓸 겨를은 없다. 나는 이게 자연스러운 사고방식이라고 생각하는데, 다른 사람들은 그렇지 않은 것 같다. (120)

 

-아마 같은 버스에 타서도 소녀들의 시야에는 노인들이 전혀 들어오지 않을 것이다. 병도, 늙음도, 죽음도 소녀들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세계일 테니까. (172)

 

-이렇게 오랜 세월 살아오며 엄청나게 많은 시간을 일에 할애하고, 여러 사람을 사귀어도 손안에 남는 건 겨우 한 줌뿐. 남는 것은 아무것도 없을지도 몰라요. 그것이 만약 증오였다고 해도 이렇게 형태를 갖추고 손에 남는다면 좋은 일이죠. (1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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