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백년 전 악녀일기가 발견되다 내인생의책 푸른봄 문학 (돌멩이 문고) 6
돌프 페르로엔 지음, 이옥용 옮김 / 내인생의책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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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몇 년 전 미국에서 어학연수를 했었다. 반쯤은 생각보다 재미없는 대학생활을 벗어나고 싶어서 선택한 어학연수는 공부보다는 새로운 무언가가 그저 재밌는 나날이었다.  그래도 처음 어학원에 들어섰을 때는 엄청 긴장해 있었다. 규칙적인 생활을 빠져나갈 궁리만 하면서도 규칙에 얽매이는 나로서는 어학보다는 '학원'이라는 곳이, 심지어는 한국말도 통하지 않을 미국에 있는 기관이 어쩐지 현실같이 느껴지지 않았다. (뭐 그 뒤로 거의 1년간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게 놀기도 놀았지만... )

 

어찌어찌 들어간 반에서 제일 첫 날 가르쳐 준 것은, 간단한 인사법과 자기소개법, 그리고 해서는 안 될 질문이나 말 같은 미국에 적응하기 위한 기초 중의 기초에 해당하는 것들이었다. 인사법(Hello, how are you? I'm fine thank you.)이나 자기소개법은 그렇다 쳐도 나는 해서는 안 될 질문이 도통 이해가 가질 않았다. 아니 왜 나이를 물어보면 안 되는거래? 보통 만나서 나이로 언니/동생을 정하는 나라에서 자라난 나에게 그 항목은 은근히 스트레스였다. 하지만 내가 뭘 어쩌겠어. 나는 이미 한국에서 16시간 떨어진 미국땅에 혼자였고 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따르라고 하지 않던가. (하지만 그 뒤로도 나는 습관적으로 나이를 물었다...)

 

그 첫 날, 작고 단단한 체격의 금발 선생님은 흑인들에게 'negro'란 단어를 써서는 안 된다고 강조하며 말했다. 작은 단일민족의 나라에서 자라난 수도권 방콕소녀였던 나에게 인종차별이란 주제는 멀고도 먼 이야기였었다. 그런데 그 첫 날, 나는 아, 여기가 진짜 미국이구나-하는 단순한 감상과 함께 인종차별이 정말로 있는거구나, 하고 조금은 얼빠진 생각을 떠올렸다. 솔직히 얘기하자면 그 때도, 지금도 가끔씩은 그렇게 오히려 강조를 해대는 것조차 차별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정말 다를 거 없다면 말도 거칠게 없어야 하지 않을까. 하지만 뭐, 뚱뚱한 사람에겐 돼지라고 부르면 안 되고 나같이 키가 작은 사람에게 난쟁이 똥자루라고 부르면 기분 나쁜 법이니까. 그렇게 생각하면 또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하긴 이해하고 말고가 아니라, 당장 백인들에겐 우리 나라 사람도 황인종으로 colored people에 속하니 당장 우리 이야기일런지도 모르겠지만.

 

<2백년 전 악녀일기가 발견되다>라니 내가 좋아하는 '책 제목의 기준'에서 한참 벗어난 길이다. 거기다 악녀일기, 라는 묘하게 칙릿소설 같은 제목 덕에 사실 읽어볼 생각도 하지 않고 있었다. (그래도 기본적으로 악녀는 좋아한다. 팜프파탈이라든지) 하지만 세상일은 아무도 모르는 법. 어느 날 오후,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택배 하나가 도착했다. 시킨 건 없지만 택배 받는 걸(특히 책 택배) 좋아해서 좋아라 받아들고 두근두근대며 뜯어보았다. 그랬더니 두둥. 으음, 이것 참 내 취향을 고려하지 않은 책 선택인걸. 하면서도 괜히 신이 났다. 과연 선물의 의외성은 정말 놀랍군.

 

솔직히, 아주 솔직히 말하자면, 책을 펴들고 정말 놀랐다. 생각했던 칙릿 소설도 아닐 뿐더러 글자 크기도 크고 소설이라기 보다는 동화...보다도 동시같았달까. 차근차근 <저자의 말>부터 읽어가니 어어... 인종차별 이야기란다. 인종차별이라고는 머리로만 아는 지식에 미국 도로에서 차타고 지나가며 '너네 나라로 돌아가'라고 소리치던 금발머리 놈밖에 모르는데... 조금 걱정하며 책장을 넘기니 정말, 읽기는 쉬웠다. 글자도 크고 주인공 '마리아'의 일기 형식이라 -분명 마리아는 여느 아이들처럼 일기 쓰기를 그리 좋아하지 않은 모양이다- 줄이 그렇게 많은 편도 아니었다. 인종차별 이야기라길래 뭔가 다툼이라도 있을거라 생각했는데 이야기의 처음부터 끝까지 나온 다툼은 노예와 바람핀 아빠와 엄마 사이에만 존재했다.

 

마리아는 부유한 집의 딸로 14살이 되어 자신의 개인 노예를 가지게 된다. 마리아는 엄마 친구댁 아들 루카스를 좋아하고, 가슴이 좀 더 나오길 바라는(!) 평범한 소녀다. 마리아가 선물로 받은 노예 꼬꼬는 말도 잘 듣고 일도 잘하지만 좀 따분하다. 어느 날 루카스네 아줌마가 노예를 사지 않겠냐고 한다. 꼬꼬도 일을 잘 하지만, 아줌마네 노예 울라는 화장품도 마사지도 수준급이라고 한다. 마리아는 노예시장에 나가 꼬꼬를 팔고 돌아온다. 마리아의 인생은 즐겁고 행복하다-.

 

작가의 의도대로, 읽고나니 좀 오싹했다. 저 시대에는 '노예' 라는 게 당연했다. 생각해 보면 옛날 내가 읽었던 책의 '인종과 상관없이' 상냥한 어린아이는 그 시대 개념으로는 좀 이상한 거 아닐까. 아마 마리아는 평생을 저렇게 노예를 아무렇지도 않게 부리며 살다 죽겠지. 향내나는 방 안에서 예쁜 옷을 입고 하하호호 수다를 떨면서도 누가 그 옷을 준비하고 차를 준비하는지에 대해서는 궁금하지도 않을테고.

 

조금 분개하며 책을 덮었지만, 뭐랄까. 옛날 공산주의에 대해 배울 때도 생각한 거지만, 인간이 누구나 평등해지는 시대는 오지 않는다. 이 시대조차 인종차별이 그리 심하지 않다뿐이지 아직 존재하며,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재산으로 사실상 계급이 나뉜다. (영국에는 귀족제도가 남아있지만 그거야 그쪽 나라 사정이고) 쪼끔 더 부정적으로 말하자면, 결국 사람이 평등한 때는 죽고난 다음밖에 없는 게 아닐까... 그것마저 아니라고 하면 너무 슬플 것 같아서 애써 생각하지 않고 있지만.

 

2백년 전의 악녀일기 덕분에 오늘도 이런저런 생각만 잔뜩 했다. 작가 아저씨는 내 이 반응을 보고 좋아하시겠지만서도, 나의 이 풀길 없는 답답함은 어쩌란 말이냐... 책 속으로 뛰어들어가 하하호호 신난 마리아 머리를 꽁 때려주고 싶은 심정이다, 정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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