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두 푸딩 살인사건 한나 스웬슨 시리즈 12
조앤 플루크 지음, 박영인 옮김 / 해문출판사 / 2010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시리즈는 리뷰하기가 어려워서 되도록이면 안 하려고 했는데, 이 시리즈는 어차피 한 권당 한 사건인데다 진전도 거의(!) 없는 편이라 뭉뚱그려 리뷰하기도 편할 것 같고...나름 즐겨읽는 책이라서 도서관에서 빌려온 김에 리뷰를 해보기로 했다.

조앤 플루크의 살인사건 시리즈는 내가 좋아하는 로맨스와 추리를 적절하게 섞어놓은 소설이다. 주인공은 한나는 (자칭) 보기싫은 붉은 머리에 통통하며 늘상 (자신보다 외부 압력에 의한) 다이어트로 고민하는 소박한 베이커리 주인이다. 명실상부 미네소타주 최고의 베이커리 '쿠키단지'의 주인인 한나는 한 권, 한 권 읽기만해도 먹고싶어지는 다양한 빵/푸딩/케이크/과자를 구워댄다. 아, 저절로 씁쓸해지는 말투여... 이 시리즈를 읽을 때마다 유혹에 약한 나는 동네 빵집으로 달려가 빵을 입에 물고 돌아오곤 한다. 한나는 자기 다이어트는 물론 내 다이어트마저도 위협하고 있다...

입맛도는 한나의 레시피는 책의 중간중간에 실려있으나 라면물도 잘 못 맞추는 나는 레시피가 나오면 책장을 넘기기 바쁘다. 덕분에 한나의 레시피들이 실제로 무슨 맛인지는 상상에만 맡기고 있다.

이 베이커리 시리즈의 가장 큰 특징은 뭐니뭐니 해도 레시피도 살인사건도 아닌 '시리즈'라는 특징에 맡게 한나 주위의 사람들이 점점 등장하고 친근해진다는 점이다. 첫 권만해도 한나와 여동생 안드레아만 눈에 들어왔는데 <자두 푸딩 살인사건>에 이르러서는 고정적인 캐릭터만 해도 주인공 한나 외 9명에다가 그간의 시리즈를 통해 '알게 된' 이웃주민도 여러명이다. 개인적으로는 이 책 원작으로 미드 하나 나와도 재밌을 것 같다... 문제는 그 때마다 빵(혹은 과자 혹은 케이크 혹은 푸딩 등등)이 먹고 싶을 가능성이 98%라는 거.

사실 베이커리 살인사건 시리즈는 추리소설이라기엔 너무 전개가 뻔하고(한나는 매번 마지막에 죽을 위기를 맞고 늘 파트타임 남자친구가 구해준다) 로맨스라기엔 너무 진도가 느리다. 어느 한 쪽이다, 라고 말하기엔 어렵지만 두 분야에서 각각의 재미를 주니 큰 문제는 없다.

다만... 슈크림 살인사건과 자두 푸딩 살인사건을 연달아 읽고나니 '연애'와 '추리' 사이에서 '연애'부분 진도가 너무, 진짜로 너무 느리다!

읽어보신 분들은 알겠지만 한나는 그 머리카락색과 체형에도 상관없이 인성으로 두 남자를 매료시킨 잘나가는 여자()다. 한나 관점에서 진행되는 이야기기 때문에 진짜 다른 사람들이 한나를 어떻게 보는지 객관적으로 알 길은 없지만, 한나는 연거푸 자신의 머리카락(붉은색)과 체형에 대해 불만족감을 나타낸다. 어느 여자고 컴플렉스는 있는 법이고 당연한 일이라도..., 남들이 봐도 잘나가는 남자를, 그 작은 마을에서, 둘이나 반하게 해놓고 무슨 불평이야! 라고 소리치고 싶어진다. 이게 바로 잘 안 나가는(?) 여자의 화풀이일까...

한나의 파트타임 남자친구는 두 명, 한 명은 잘생기고 섹시한 경찰이고 한 명은 편안하고 배려심많은 치과의사다. 물론 시리즈 중간중간 한나에게 호감을 표하는 남자가 나왔다가 사라지곤 하지만 주가 되는 연애라인은 이 삼각관계다. 최근에는 한나를 둘러싼 두 남자가 친구가 되는 바람에 더욱 더 미묘한 관계가 되었다. (자두 푸딩 살인사건에서 보면 두 남자가 한나에게는 존댓말을 하면서 서로에게는 반말을 하는 게 보여서 둘이 참 친해졌구나- 싶었다.) 게다가 자두 푸딩 살인사건에서 시리즈 최초로 다음 권을 예고하는 듯한 엔딩으로 한나의 전 남자친구가 등장했다. 점점 추리보다 로맨스가 흥미진진해지는 듯 하다...

하지만, 내가 생각하는 문제는... 내가 이번에 시리즈 두 권을 연달아 보고 짜증이 난 점은... 그 두 남자의 캐릭터 차이다. 책 두 권을 후닥 읽어내려간 뒤 엄마에게 달려가 '이 남자는 이렇고 저 남자는 이런데, 이 여자는 저 남자를 선택하지 않고 둘 사이에서 방황해!! 이상해!!'라고 울부짖었다. 실생활 연애와는 거리가 멀어서 그런건지 낭만적이기보다는 현실적인 성격이라 그런건지 모르겠지만, 한나의 파트타임 남자친구(1)인 마이크는 알고지내기엔 좋지만 남자친구/남편하기엔 짜증나는 남자 스타일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잘생기고 섹쉬(시가 아니라 쉬)한 마이크는 걸핏하면 (여자 입장에서 봤을 때) 머리 비고 몸매 좋고 성격나쁜 여자들과 염문이 돌고, 경찰인 탓인지 한나를 종종 무시하는 듯한 발언을 하곤 한다. 시리즈를 읽으면서 난 마이크가 미칠듯이 잘생기고 섹시하고 신들린듯한 키스 테크닉을 가졌다는 확신이 들었다. 그게 아니고서야 여자가 그렇게 붙어있을리가 없으니까.

내 울부짖음에 엄마는 심드렁하게 TV 드라마를 보며 말했다. "여자는 나쁜 남자한테 끌리게 되있어." 그렇다, 마이크는 나쁜 남자의 집합체(잘생기고 섹시하지만 여자보다는 자기에게 중점을 두는 남자)고 노먼은 착한 남자의 집합체(편안하고 여자를 항상 배려하는데다 사소한 일까지 신경써주는 남자)다. 어떤 남자를 좋아하는지는 개인 취향일테니, 어떤 독자는 마이크를, 어떤 독자는 노먼을 응원하겠지.

하지만  이 미묘한 관계에 변화가 좀 생겼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하다. 삼각관계로 간볼 시기도 이미 지났고. 다행인지 불행인지 한나의 전 남자친구이자 인생의 전환점인 남자가 등장했으니 무슨 일이 터져도 크게 터질 듯 하다. (혹시 다음 권엔 그 남자친구가 죽는걸까?!)

리뷰를 한다고 해놓고 어째 한 사람의 흉만 실컷 본 것같은 느낌이 든다 - 지만 올라가서 그 구절을 모조리 지울 생각은 들지 않는게... 내 취향은 너무 확고하다... .
로맨스도 추리도 적절히 즐길 수 있는데다 요리를 하시는 분들이면 레시피까지 겟할 수 있는 다양한 매력이 있는 베이커리 살인사건 시리즈. 여타 추리소설이 너무 잔인하다고 생각하는 분들이나 로맨스와 추리소설 두 분야를 다 좋아하시는 분들은 재미있게 보실 수 있을 것 같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스톨른 차일드
키스 도나휴 지음, 공경희 옮김 / 작가정신 / 2009년 9월
평점 :
절판


읽기는 꽤 됐는데 시험을 핑계로 리뷰를 차일피일 미루고 있던, 스톨른 차일드.

 

언젠가, 아는 언니가 요즘 책 뭐 읽냐고 묻기에 막 읽기를 끝낸 스톨른 차일드의 이야기를 시작했던 적이 있다. '요정과 뒤바뀐 아이들의 이야기'라는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아직도 그런 판타지물을 읽고 있냐'는 장난기 어린 타박이 돌아왔다. 길고 나름 심오한 내용을 단순히 '요정과 뒤바뀐 아이들의 이야기'라는 서두로 시작한 게 문제였을까. 따지고 보면, 요정(페어리)라는 존재가 '판타지(공상)'에 가까우니 판타지물도 맞는 말인데 어쩐지 울컥해서 아니라고 정색하고 말았다. 어른스럽지 못하게 길거리에서 정색해버렸지만, 스톨른 차일드의 이야기를 '그런 판타지물'로 취급하는 건 너무하잖아. 다음부터는 처지가 뒤바뀐 아이들의 자아정체성 찾기, 라고 소개해야 할까.

 

요정, 이라고 하면 대부분 디즈니 만화에서 나오는 팅커벨같이 귀엽고 깜찍한 소녀들을 떠올릴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코난 도일이 좋아했다는 꽃의 요정들이라든가. (어렸을 적 내가 숭배하던 코난 도일이 좋아했다기에 믿거나 말거나 식의 요정 책을 사보고 이런 합성도 알아보지 못하다니, 하고 코난 도일에게 실망했던 쓰라린 기억이 떠오른다...) 하지만, <스톨른 차일드>에서 나오는 요정이란 그렇게 귀여운 존재가 아니다. 디즈니가 판타지 소설에서 미화된 존재라기보다 먼 옛날 서양 사람들이 '정의할 수 없는 것'으로 분류해 놓았던 정령에 가깝다. 숲 속 깊은 곳에서 사람들을 주시하고 장난치고, 악의라기보다 그 존재 자체가 그런 자연의 파생물들.

 

실제 서양에서는 아이를 창가에 홀로 두면 요정이 다가와 아이를 훔쳐가고 요정의 아이를 대신 놓고 간다는 전설이 있었다고 한다. (일본에서 아이가 없어지면 신이 데려갔다고 생각한 카미카쿠시와 비슷한 전설일까.) 이 <스톨른 차일드>는 그런 아이들의 이야기다. 요정(파에리)에게 삶을 빼앗긴 아이들. 그리고 앞으로 다른 아이의 삶을 빼앗을 아이들.

 

이 책의 요정, 즉 파에리는 군락을 이루며 살지도, 체계가 잡혀있지도 않은 오직 어린 아이들만의 모임이다. 천진난만해서 더욱 무서운 나이의 어린 아이들. 파에리들은 숲 속을 이동하며 살고 아이가 있는 집 하나를 물색해 목표로 한 아이의 모든 것을 흡수한다. 말투, 외모, 성격 등등. 때를 기다려 외모를 바꾸는 힘든 과정을 거쳐 그 아이 대신 그 집에 들어가 다시 인간의 삶을 살기 시작한다. 그렇게 뒤바뀐 아이는 없어진 파에리 대신 모임의 일원이 되어 숲 속에서 살아야 한다. 그리고 다시 자신의 차례가 오면-.

 

그렇게 몇 십년, 몇 백년을 지냈을까. 세상은 너무 많이 달라졌다. 그렇게 때문일까, '이번' 뒤바꾸기는 심상치가 않다.

 

<스톨른 차일드>는 '헨리 데이'로 바뀐 파에리와, '헨리 데이'였던 '애니 데이'의 이야기다. 두 아이는 서로의 반대편에 놓여있다. 한 번 교차점을 지났으니 다시는 되돌아가지 못하는 평행한 반대편에. 두 사람은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찾기 위해 애쓴다. 잃어버린 자신의 과거와 현재의 삶. 그 아슬아슬한 경계선 속에서 진정한 자신을 숨겨야만 하는 '헨리 데이'와 잊혀져 가는 과거를 기억하려고 노력하되 현재의 삶에 최선을 다해야만 하는 애니 데이는 각각 음악과 글이라는 분출구를 통해 과거에도 현재에도 얽매이지 않는 자신을 찾아가고, 또한 거울마냥 반대편을 비춘다. 두 사람은 서로의 과거이자 현재고 거울과도 같은 존재다.

 

난 기억상실증이라는 병이 참 흥미롭다. 물론 다양한 로맨스 소설/드라마/영화 등에서 사랑이 무르익을만 하면 (혹은 연인이 기다림에 지쳐 다른 사랑을 찾을까 하면) 등장하는 병 중 하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내가 흥미를 가지고 있는 건 기억상실 후 '나'를 이루고 있던 모든 기억들이 사라졌다면 과연 나는 '나'인가? 하는 생각 때문이다. 불행히도 흥미는 있지만 심리학이나 뇌과학에 조예가 깊지 않은지라 아직도 답을 모르고 있지만, 나는 개인적으로 자아라는 것은 경험이라고 하는 기억을 근간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기억이 완전히 상실되었다면 사실상 전혀 다른 사람이 아닐까- 하고 생각하고 있다. 기억 상실이라는 병에 대해서 그리 아는 게 많은 건 아니지만 그 나름에도 종류가 있다고 하니 사례마다 다르겠지만서도.

 

그렇다면, 기억이란 '나'인가? 어휴, 헷갈린다. 자아를 확립하는 시기는 분명 사춘기일진데, 사춘기를 훌쩍 뛰어넘고서도 어쩜 이렇게 말로 풀어놓기가 힘든건지. 헨리 데이였던 애니 데이는 헨리 데이로서의 기억을 하나하나 떠나보낸다. 그렇게 '헨리 데이'는 '애니 데이'가 되어 파에리로 살아가고, 파에리의 존재를 믿기는 커녕 알고 있지도 않은 인간 세상의 틈바구니 속에서 살아간다. '바꿔치기'를 도와줄 파에리들이 모두 뿔뿔히 흩어진 이상, 애니 데이는 아마 평생 작고 어린 파에리로 남아 있겠지. 그런 애니 데이는 "이야기는 글로 적혀 있었고, 책에 나온 말이 충분한 증거였으니까. 변하는 세상보다는 시간과 어휘에 영원히 고정된 말이 사람과 장소를 더 현실적으로 만들었다. 내게는 파에리들과의 삶이 헨리 데이로서의 삶보다 생생하다. (385)"라고 말한다.

 

반대로 뒤바뀐 '헨리 데이'는 먼 옛날 잊고있던 자신을 하나하나 기억해낸다. 구깃구깃 구석에 처박아둔 종이를 살그머니 펴보듯이. '자신을 아는 것'은 인간의 본능이고 헨리 데이는 한동안 늦깍이 '자신 찾기'에 돌입해 현재의 삶을 잠시 외면한다. 헨리 데이의 자아 찾기는 과거를 완전히 인정하기 위한 발버둥이다. 이제와 돌이켜봐야 가까스로 손안에 남을 기억을 찾으려고 애쓰는 헨리 데이를 보면 안쓰럽다. 마침내 과거와 대면한, 아니 자신이 바꿔치기한 아이와 마주한 헨리 데이는 비로서 과거를 놓아준다. "그 아이와 대면하자 나 자신과 대면할 수 있게 되었어. 내가 과거를 놓아버리자 과거도 나를 놓아주었지. (407)"

 

이제 헨리 데이는 현재의 삶에, '헨리 데이'에 충실해 행복을 찾을 수 있게 되었고, 작은 파에리인 애니 데이는 자신만의 여행을 계속하게 되었다. 어느 삶이 행복한지, 누가 불행한지 나로서는 알 수 없고 별로 알고 싶지도 않다. 그 두 사람은 힘겨운 숲 속을 어렵게 통과했고 각자의 길에 들어섰으니까.

 

- 내 인생 전부가 고작 기억을 재구성한 것에 지나지 않는 것 같아서 씁쓸하다. (189)

-그 순간 나는 우리 모두 안에 있었더라면 차라리 나았을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나란히 누워서 모두 영원히 매몰되었으면 좋았을 것을. 그렇게 각자의 고통에서 벗어났으면 좋았을 것을. (289)

-세상에서 가장 무정한 것은 사랑이다. 사랑이 떠나가면 남아서 마음을 달래주는 것은 오로지 추억뿐이다. 친구들은 자의 또는 타의로 가버렸고, 그들의 흔적이 우리의 허전한 마음에 남아서 사랑의 빈자리를 메웠다. 오늘까지도 잃어버린 이들이 가슴속을 맴돈다. (307)

-두 가지 이야기가 동시에 흘러나왔다. 내적인 삶과 외부 세계가 대위선율로 흘렀다. 나는 각 화음을 중복해서 병치하지 않았다. 그것은 현실이 아니니까. 가끔 생각과 꿈이 우리의 실제 경험보다 현실적일 때도 있고, 우리가 겪은 일이 상상에도 영향을 미치는 경우가 있다. 나는 머릿 속에서 소리가 나는 대로 미처 다 받아 적지 못했고, 내면 깊숙한 곳에서 끊임없이 음표가 넘쳐났다. (389)


+이 책을 읽으며 가장 궁금했던 것 하나.

도대체 파에리들은 왜 생겨난거지? 도대체 무슨 목적으로? 지금까지도 도통 알 수가 없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모리 - 지구상에 단 한 명뿐인 죽음대역배우
이세벽 지음 / 굿북(GoodBook) / 2008년 3월
평점 :
품절


 

놈에게서는 태어날 때부터 사람을 공포와 연민으로 몰아넣는 죽음의 냄새가 났다.(11p)

처음 책을 펴들었을 때, 놈, 이라는 다소 비속어적인 호칭에 순간 움찔했다. 무엇보다 '모리'라는 단어에서 내가 연상했던 부드러운 스토리가 아닌데? 놈. 이름이 없어 불렀던 그 호칭이 소름끼친다. 시작부터 깔끔하고도 음습한 내음이 났다. 이름은 운명이라고 누가 그러지 않았던가. 이름은 그 자체로 존재감이라더라. 이름이 없으면 존재할지언정 정체성을 가질 수 없다. 남에게 불려야 쓸모 있는 그것이 없으면, 사람은 '사회적인 동물' 로서의 제구실을 못한다. 처음, 모리라고도 불리지 못했던 '놈'이 서로 의사소통하는 '사람'이 아닌 본능에 의해 살아가는 짐승으로 살아가게 되는 것처럼.

예상이 파격적으로 깨져버린 뒤 내가 처음의 모리에게서 느꼈던 것은 책 속의 인물들같이 죽음에 이를 정도의 오싹함도 혐오도, 심지어는 연민도 아니었다. 물론 죽음의 존재를 종이 너머로 인식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니까. 특히나 그게 모리의 몸에서 뿜어져 나온다면. 내가 느꼈던 것은, 어떻게 말하면 좋을까. 실험쥐를 바라보는 과학자 같은 순수한 호기심이라고 하면 좋을까. 이런저런 매체를 통해 죽음에 익숙해졌기 때문일까 형상화된 죽음이 가져올 결과가 궁금했다고 해야 할까.

특히나 이 소설이 '한국 소설'이었기에 더 했다. 장애인이 나오는 영화의 예를 한국 영화들이 차지하고 있는 걸 보고, 아 한국 소설이구나, 하고 느꼈다. 새삼스럽게. 거기에 네티즌이 반응하는 그 생생한 반응. 다른 어느 나라에 가도 우리나라처럼 인터넷 커뮤니티가 활성화되어 있기는 힘들 것으로 생각한다. 장점보다 부작용이 부각되는 우리 사회의 연예계 최대 이슈인 악성 댓글에 의한 자살이 이어지고 있는 현재라면 더더욱 그럴 테고. 그걸 고스란히, 한 인간이 인터넷상에서 왜곡되어 가는 과정이 처음부터 끝까지 담긴 소설이라 그 현실감에 헛웃음이 나올 정도였다. 르브낭이라는 이 세상에 존재하는지 알 수조차 없는 소재를 끌어와도 어디까지나 현실적인 책이었다. 방송계 쪽의 일은 모르지만, 돈과 시간, 건강, 그리고 죽음에 대한 생생한 공포가.

현실감 하니 르브낭이 실제로 있는지 너무나 궁금해진다. <모리>의 독자라면 누구나 조금씩은 궁금해 할 것이라 생각한다. 비록 이 소설이 그 수수께끼를 파헤치는 미스터리 소설이 아니라 모리가 부활한 죽은 자인지 아닌지, 어떻게 모리가 '죽음'에서 벗어났는지는 끝내 나오지 않지만 도처에 숨어 있는 현실의 트랩 덕에 '르브낭'은 이 세상 어딘가에 존재하는 무언가가 되어버렸다. 설령 존재하지 않는다 해도 르브낭이 대표하는 죽음은 어쨌거나 그 어딘가에 존재하니까. 죽음은 영리하다. 그보다 영리하고 약삭빠른 게 있을까. 피어오르는 어둠 속에 매혹적인 향기를 내뿜는 그것에 사람들은 굴복하고 만다. 매력 때문이든 두려움 때문이든 간에.

그런 의미에서 모리, 라는 부드러운 어감의 이름은 그를 표현하기에 역부족이라고 생각했다. 그를 부르는 이름은 섬뜩하고 동시에 가여우며 매혹적이어야 하지 않을까. ‘죽음’을 대표하면서도 인간인 그를 위한 그 어떤 특별한 이름이 필요한 것이 아닐까. 사람을 꼼짝 못하게 하는 힘을 지닌 그를, 삶에 집착할수록 죽음에 가까워지는 그를 그런 부드러운 이름으로 부르다니. 불평 많은 독자인 내가 일단 의구심을 품게 되니 많은 사람이 죽음에 중독되어 갈수록 불만은 커져만 갔다. 하지만 모리가 끝내 사랑하는 사람을 죽이고 그토록 동경하던 삶을 되찾게 된 순간 생각했다. 성 감독은 그 이름을 통해 죽음의 공포를 극복해 보고자 했고, 작가는 그 이름을 통해 죽음에 삶의 이름을 주었다는 걸.

모리가 준수한 청년이 되는 것은 상당히 예상 외였다. ‘준수’하다니 말이다. 예전의 그를 편안하게 여긴 건 죽음을 갈망하고 시도했던 연주뿐이었다. 그녀는 모리에게 삶의 상징이 되었고, 모리는 그녀를 무작정 끌어안고 독차지하고 싶어 했다. 사진촬영 장면에서 보듯이 연주는 모리에게 ‘삶’ 그 자체였다. 삶을 동경한 죽음이라고나 할까. 그런 연주가 죽은 뒤에야 모리가 준수해 지다니. 이 무슨 아이러니한 일인가. 그녀가 모리에게 끌렸다면 그저 그런 연애 이야기가 되었을 테지만, 살아있는 자의 당연한 공포에 직면하게 된 그녀는 죽음을 동경하는 나약함에서 삶의 공포로 돌아왔다. 끝내 모리를 거부하다 죽음을 맞이한 그녀는 아이러니한 삶 속에서 죽음에 가장 근접한 인간이었던 셈이다. 그게 모리의 아이러니, 삶을 향해 다가갈수록 죽음의 본연에 다가가는 걸 더더욱 부각시키고 말았다.

다른 사람들은 어떤가. 성 감독과 종필은 같은 종류의 인간이다. 순수하리만치 자신만을 생각하는 사람들. 나쁘다고는 말할 수 없다. 누군들 자신이 소중하지 않겠는가. 누군들 자신 앞에 놓여 있는, 달콤한 기회의 끈을 망설이지 않고 도덕심으로 내칠 수 있겠냔 말이다. 물론 성 감독은 애초에 모리를 끌어들인 인간으로 일찍 죽어버리는 벌 아닌 벌을 받는다. 모리는, 죽음은 세상에 그런 식으로 보여져서는 안 되었다. 그가 쓴 마지막 시나리오가 앞날을 예견하면서 예언자의 성격을 띠지만 그래서 남는 것이 무어란 말인가.

종필은, 파멸했다. 욕심에 의해 죽음에 끌려들어 가면서. 그게 자업자득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거다. TV에서 보여지는 죽음이 가짜라고 해서, 그 섬뜩한 죽음을 끌어와야 했는가.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살아가며 묵묵히 치러야 할 일이다. 하지만 그런 죽음을 상품처럼 포장해서 내놓는 것은, 그 우울한 아름다움을 들이대는 것은 살인이나 마찬가지이다. 완벽한 살인. 죽음의 공포는 한순간 숨이 막히게 하지만 중독되듯 사람을 끌어당긴다. 인생의 마지막, 그 너머로 결코 다시 넘어올 수 없는 것이 있다는 것을 알기에 두려워하는 본능과 인간의 호기심이 양립하는 그 경계에서 많은 사람이 죽음에 탐닉했다.

그렇다면 모리를 동경하는 아이들은 순수한 피해자일까. 인간의 무의식적인, 죽음에 대한 동경을 상징하는 그들은 TV 속의 유행을 비판 없이 받아들이는 현 사태마저 풍자한다. 아이들이 죽음을 영웅처럼 떠받들어도 책을 읽는 내내 객관적인 관찰자이길 자처한 나는 그 아이들이 한없이 어리석어 보일 뿐이었다. 군중심리에 떠밀리지만 알아채질 못하는 사람들. 하지만 딱히 그 아이들만을 탓할 수는 없을 거다. 모리의 사진촬영 장면은 끊임없이 쏟아져 나오는 작가의 주문에 광기를 띤다. 줄줄이 이어지는 신화와 문학작품을 넘나드는 죽음의 화면이 이어진다. 그렇게 많은 이야기들이 존재했던가. 먼 옛날부터 인간은 죽음에 탐닉했고, 그것은 삶의 가장 극적인 일부분이었다. 비참함과 아름다움, 그 상반된 미를 동시에 풍기는. 죽음 앞에서 누가 가해자가 되고 피해자가 될 수 있을까. 그 앞에 우리는 평등한 것을.

나 역시 죽음에 막연한 동경을 가지고 있다는 걸 부인하진 않겠다. 수많은 문학작품과 각종 매체들을 통해 보여진 죽음은 가련하고 슬펐으며 아름답기까지 했으니. 그 비극적인 아름다움에 매료되었던 시절이 분명히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죽음은 그렇게 아름답기만 한 게 아니라는 것을. 죽음이 아름다워 보인다면 그것은 그 이면에 깔린 슬픔과 아픔 때문이라는 것을. 모리, 그는 내게 읽는 내내 불편함을 안겨주었다. 절대 가질 수 없는 것을 가지려고 발버둥치는 그가 어쩐지 측은하기도 했고 한 편으로는 어리석어 보이기도 했다. ‘죽음’이. 모든 것의 끝인 죽음이 그렇다는 게 특히나 그랬다. 하지만 그는 인간이었다. 다른 사람들과 얘기하고 공감하고 웃고 사랑하고 싶어 하는 보통 인간. 그래서 기뻤다. 그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죽은 뒤에라도 그가 ‘인간’임을 느낄 수 있는 순간이 있어서. 죽음이 삶을 가질 수 있어서 기뻤다.

이제 그는 다른 사람들처럼, 삶과 죽음을 동시에 바라본다. 모리, 지구상에 단 한 명 뿐‘이었던’ 죽음 대역배우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클레오파트라의 꿈 - 간바라 메구미의 두 번째 모험 간바라 메구미 (노블마인) 2
온다 리쿠 지음, 박수지 옮김 / 노블마인 / 2008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제목에 클레오파트라, 라고 들어가 있어서 뭔가 했다. 내가 아는 '그' 클레오파트라? 로마의 영웅 두 사람을 함락(?)시키고 독사로 자살한 '그' 악명(?)높은 클레오파트라? 하고.

하지만 정작 그 역사적 이름이 갖는 무게에 비해 이름은 사실상 의미가 없었다. 다만 누군가를 가감없이 끌어들어 일을 복잡하게 만드는 데에는 같은 운명을 갖고 있었던 듯 싶지만.

 

간바라 메구미, 라는 주인공이 처음 등장했을 때 약간 헷갈렸다. 남자? 여자? 메구미라고 하면 여자 이름처럼 보이지만 분명 지문에는 '그'라고 되어있고....그래서 남자인가 했더니 말투는 여자 말투고.... 하지만 확실히 그는 매력있었다. 친구삼고 싶고 마주 앉아서 수다 떨고 싶은 매력이.

근데 스스로 머리가 잘 돌아가고 기억력이 끝내준다고 말하는 것 치고는 여러가지 추리가 다 틀린다.... 그냥 기억력만 좋은가봐........하고 멍하니 생각해도 그 기억력만큼은 확실히 부럽다. 컴퓨터에서 사진을 불러와 확대해 보는 것과 같은 느낌일까... !

 

쌍둥이라는 존재는 어렸을 적부터 부러운 존재였지만, 커서 보니 쌍둥이라고 해도 가깝지 않으면 나이 차이나는 형제자매와 다를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렸을 때 부러워했던 것도 학교 가기 싫을 때나 뭔가 하기 싫을 때 쌍둥이가 나대신 해주지 않을까- 하는 얄팍함이 깔려있었고. 지금 생각해보면 허무맹랑한 생각이다. 내가 하기 싫은 건 남도 하기 싫어할 것일뿐더러 나대신 쌍둥이가 학교에 가면 그 쌍둥이 대신 학교 갈 사람은 당연 내가 되는 거겠지...

 

온다 리쿠는 여행을 굉장히 좋아하는가 보다. 어느 작품에나 조금씩은 '여행'의 설레임, 불안함이 배어있다. 메구미만 해도 동생이 사는 도시라고는 해도 처음 와보는 도시를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생각에 잠기기 일쑤고. 온다 리쿠의 작품을 읽다보면 나도 한 걸음 한 걸음 모르는 동네를 하릴없이 걸어다니는 듯한, 공중에 붕 떠있는 여행의 긴장감이 느껴진다. 뭐랄까. 걷는 속도가 생생하다고나 할까. 걷는 시간에 오히려 생각을 많이 하게 되는데 그걸 차분하게 풀어놓고 있는. 새로운 풍경에 설레기도 하고 익숙치 않아 불안하기도 하고. 한 걸음 한 걸음이 모험인 것 같은 여행의 마력이.

 
온다 리쿠의 책이 으스스한 것은 어떤 '사건' 때문이 아니라 그 사건으로 인해서 드러나는 사람들의 '진심'때문인 것 같다. 대부분 읽고 나서 오싹해지는 책이 많지만 되집어보면 사실상 그렇게 큰 사건이 있다든가 잔인하다든가 하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다만 사람이 무섭다.
이번 작품에서 살짝 무서웠던 건 죽은 박사의 인상이 말하는 사람에 따라 바뀌는 것, 이었다. 직접 보지 않고서는 모른다. 봐도 잘 모르는 판에 듣는 것 만으로는 사람을 판단할 수 없다. 알고는 있었지만 살짝 엿보는 것만으로도 무서웠다. 과연 나는 다른 사람들의 눈에, 뇌리에 어떻게 남아있을까.

 

찾아보니 메구미가 등장하는 전작이 있다고 한다. 룰루랄라. 책이 다음책(이번 경우에는 전책(?)이지만)으로 이어지는 것만큼 가슴 설레는 일도 없다. 즐겁다.

 

클레오파트라의 꿈. 클레오파트라에 혹했지만 정작 비중은 꿈이라는 단어에 있었다. 모든이를 매혹시키는 꿈에.

 

++++

사담. 냉동귤.... 맛있을까?

 

-연인의 휴대전화나 수첩을 몰래 훔쳐봐야 하는 사랑. 그건 상대에 대한 믿음이 흔들리고 있다는 증거다. (37)

 

-암처럼 신변 정리와 작별 준비를 할 수 있는 죽음은 사고나 돌연사보다는 좋은 죽음에 속한다고 말하는 이도 있다. 아무런 예고도 없이, 아무런 준비도 없이 황망하게 소중한 사람을 잃은 충격은 그 순간부터 점점 심해진다고 한다. (46)

 

-그러니까 제가 하고 싶은 말은 세계는 극적으로 변화하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확실한 뭔가가 있을지는 모르지만, 그곳까지는 무수히 많은 점으로 이어져 있고, 그 점 하나하나가 조금씩 변해간다는 말을 하고 싶었습니다. (137)

 

-적막한 어둠. 이렇게 어둠 속에 가만히 누워 있을 때마다 실은 내 몸은 어둠 속에 이대로 누워 있었고, 지금까지 나는 인생이나 현실이라는 꿈을 꾸고 있었던 건 아닐까 하는 의혹이 들었다. 호접몽이다. (213)

 

-그 정도로 빈약하고 위험한 외줄타기에 인류의 운명이 맡겨져 있는 게 우리 현실이라는 거야. (260)

 

-이 세상에는 그와 비슷한 위험 상황이 엄청나게 많지만 믿을 수 없을 정도의 행운으로 지금까지 어찌어찌 지탱하고 있는 건 아닐까? 세상에는 매일매일 누군가가 외줄타기를 하고 있어. (260)

 

-꿈은 꿈으로 족한 겁니다. (281)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프래그먼트 - 5억년을 기다려온 생물학적 재앙!
워렌 페이 지음, 하현길 옮김 / 비채 / 2009년 9월
평점 :
품절



난 어릴 적부터 일어날 확률이 희박한 공포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아이였다. 그와 반대로 일상에서 흔히 일어날 수 있는 일(예를 들자면 시험?)들에는 좀 둔감했다. 괴물영화라도 볼라치면 옆에서 동생이 새근새근 자든말든 그게 집에 쳐들어올까봐 잠이 오지 않았다. 영화 <불가사리>를 본 날밤, 난 1층인 우리 집 바닥에서부터 그 지렁이를 백만배쯤 확대한 것 같은 괴물이 갑자기 튀어올라 우리 가족을 다 잡아먹지 않을까 하는 근거없는 걱정에 휩싸였고 엄마에게 이 아파트 밑으로는 20m도 넘는 시멘트가 있다는 지금 생각해보면 왜 납득했는지 이해가 안 되는 설명을 듣고서야 안심하고 잠이 들었다.

 

어렸을 때부터 하지 않아도 좋을 걱정을 사서 하는 나에게 점점 쏟아지는 재난물은 현실과 다른 세계 사이의 어중간한 걱정을 피부로 느끼게 만들어주는 '매우 피곤한' 장르였다.

그런 의미에서 '이제 좀 어른이 됐으니 재난물에 도전해볼까-'하는 봄철의 호기로운 시도는 '아...난 아직 멀었어...' 하는 자괴감으로 끝이 났다. <프래그먼트(Fragment)>는 괴물영화를 무서워 하는 내게는 너무도 높은 벽이었다...

 

프래그먼트(Fragment)는 영어단어로는 조각,파편 이라는 뜻이 있다. 뭐, 영어 단어 외우기라면 질색하는 나지만 책을 다 읽고보니 도대체 이 제목의 뜻이 뭔지 궁금해 견딜수가 없었다. 조각, 파편이라니 우리 생태계와 동떨어진 파편이라는 뜻인지 아니면 다른 멋진 뜻이 숨어있는지 아직 '헨더스 섬'의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머리로는 가려내질 못하겠다.

 

<프래그먼트>는 다소 두꺼운 책으로 표지의 붉은 제목과 기상천외한 생물들의 (지나치게) 섬세한 그림에 사전처럼 늘어선 그 생물들의 영어 설명, '5억년을 기다려온 생물학적 재앙!'이라는 글귀 하나로 독자를 압도한다. 그렇다. 허무맹랑하며 때로는 아침부터 날 오싹하게 만드는 이야기들이 잔뜩 나오는데도 호기심은 무럭무럭 자라나 괴물들의 정체가 무엇인지 밝혀야할 사명감마저 든다.

 

<프래그먼트>는 경쟁에서 밀려난 피디가 과학쇼로 기획한 버라이어티 쇼로 과학자와 연예인들을 실고 바다를 여행하다 인간의 손이 전혀 닿지 않은, 인류 역사의 사각지대에 있던 한 섬에 내리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그 섬은 피디가 기대했던 것처럼 신선한 특종이긴 했지만 배에 타고 있던 식물학자 넬이 기대했던 것처럼 '완벽한 생태계'를 보여주진 못했다. 반대로 섬은 출연자들의 대부분을 한순간에 삼켜버렸고 그 장면을 생방송으로 보던 시청자들은 얼어붙었다. '헨더스 섬'이라고 불리는 그 섬은 '우리'의 생태계와 한참전에 뿌리가 갈린 외계라면 외계인 생태계를 유지하고 있었고 좁은 섬 안에서 살아남게 된 생물들은 상상도 하지 못할 정도로 잔인했다. 전 세계 사람들이 술렁이고 최고의 과학자들과 군이 나서서 섬을 탐색, 연구하지만 수수께끼가 풀릴 수록 피해는 늘어나고 절망만 깊어질 뿐이었다. 미지의 생태계, 헨더스 섬. 생태계의 뿌리에서 떨어져나온 파편인 그 곳에서 학자들은 무엇을 발견했을까.

 

우선, 고백하자면 난 고등학교와 대학의 교육에도 불구하고 생물을 전체적으로 보는 시각에는 매우 취약하며 날아다니는 모든 것 - 심지어 나비라도 - 을 싫어한다. 난 아직까지도 인간의 몸의 메카니즘에 감탄하고 신기하다고 생각하며 배우고 배워도 도통 이해가 안 간다고 생각한다. 진화란 훌륭한 것이다! 무섭기도 하지만.

 

이런 짧은 지식을 가지고 이 책의 생물학적 이론들을 보고 있으면 졸음이 가득하던 생물시간에 좀 더 잘 들어볼걸, 하는 생각이 든다. 제프리나 넬이 하는 말을 척척 알아들으면 '헨더스 섬'의 생물들을 좀 더 알 수 있을까. 저자 소개란을 보니 저자인 워렌 페이는 수많은 과학자들과 아티스트들에 둘러싸여 '우리' 생태계와 동떨어진 '새로운' 생태계를 만들어냈다고 하니 얼핏 읽기엔 절대 세상 어디에고 없을 것 같은 그 '생물'들의 바탕엔 실재할 수 있는 생물로서의 가능성이 깔려있는 것이다!

 

이 책은 처음부터 외래종이 토종을 말살할 가능성이 높다, 는 것을 역설하며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우리 나라의 사래만 봐도 그렇다. 황소개구리는 우리나라에서 기하급수적으로 번식하며 참개구리를 먹기 시작했고 키가 큰 외래종 식물에 밀려 우리나라 토종 식물들이 햇빛과 영양을 못 받아 말라죽는 일도 다반수라고 한다.

 

인간 세계도 치열하지만 생태계의 경쟁은 더욱 더 치열하다. <프래그먼트>를 보자니 상상도 못할 정도로 치열한 (물론 픽션이지만) 경쟁에 소름이 끼친다. 하지만 책 속 '대처'라는 과학자를 보자니 생태계 어느 동식물보다 인간이 가장 위험한 것 같다. 아무리 무시무시한 생물이라도 그것들은 '생존'을 지상명제로 삼고 살아간다. 살아남는 것, 후손을 남기는 것이 그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다. 하지만 사람 중에서는 정치/사회적인 목적의 '생존'을 위해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는 사람도 있는 것이다. 부끄럽게도.

 

'헨더스 섬'의 생물체들은 끔찍하다. 삽화를 보고 책을 읽으며 이 생물이 어떻게 움직이고 어떻게 먹이를 먹는지 상상만 해봐도 어지간한 괴물영화와 맞먹는다. 이게 실제의 이론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는 게 더욱 끔찍한 이유겠지만. 하지만 그런 생태계 속에서도 평화를 사랑하고 자신들의 문화를 유지하는 지성체가 있었다. 인간과 전혀 다르지만 인간과 달라서 더더욱 사랑스럽게 느껴지는 생물이.

 

생태계 안에서 먹지도 않을 거면서 생명을 죽이는 생물은 인간이 유일하다고 한다. 그런 면에서 '대처'의 인간이 생태계를 망치고 있다는 이론은 맞다. 인간은 오만하다. 난 그런 오만한 인간이기에 이 책이 무섭고 또 무서웠다.

두껍고 어려운 생물이론이 곳곳에 있어도 <프래그먼트>는 흥미진진하고 한시도 눈을 뗄 수가 없는 책이다. 외계생물체, 괴물, 그리고 생태계 파괴에 관심 많으신 분이라면 더더욱 좋아하실 책이 아닐까 싶다.

 

 

- 실제로 지구 상에서 인류가 활용하지 못할 것이 없고, 기회만 주어진다면 '개량하지' 않을 것도 없을 것이네. 그리고 무엇이 나오든 간에 신경 쓰지 않고 쉽게 버리지. 공해와 지구 온난화는 다가올 환경적 재앙의 예고일 뿐일세. 만약 인류가 스스로를 멸망시키지 않는다면, 아니 스스로를 멸망시켰다고 하더라도, 금세기가 다 가기 이전에 어머니 지구가 들어 있는 관에 최후의 못을 박아 넣을 걸세. (300)

 

- 장교들과 민간인들, 그리고 과학자들은 모두 익히 알고 있는 지구 상의 괴물들이 손쉽게 살육당하는 모습을 보고 동요와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비록 그것들이 치명적이고 문제를 일으키는 놈들이긴 했지만 그래도 '우리'의 치명적인 종이었다. 그것들이 순식간에 몰살당하는 광경을 보니 어떤 충성심이 공격받는 느낌이었다. (333)

 

- 넬의 심장은 마구 쿵쾅거리며 두방망이질을 했다. 인류보다 수백만 년이나 앞선 종족일지도 모르는 지구인들의 앞에 있으려니 넬 자신이 오히려 외계인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건 여간해서는 맛볼 수 없는 특이한 감동이었다. "지적인 종임에 틀림없어." 그녀는 작은 소리로 중얼거렸다. (416)

 

- 헨더는 물결치는 듯한 눈부신 색상을 뿜어내며 갑자기 모습을 드러냈다. "헬로, 여러분!" 그는 플루트 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우릴 구해줘서 고마워요!"
다른 헨드로들도 모두 선명한 색상을 밝게 빛내며 헨더의 옆에 모습을 드러내고 피치의 카메라를 향해 손을 흔들며 플루트 같은 목소리로 일제히 합창했다. "고마워요! 고마워요! 고마워요!" (497)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