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거미 클럽 동서 미스터리 북스 92
아이작 아시모프 지음, 강영길 옮김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200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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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책을 집어들면 제일 먼저 머리글을 읽고 다음으로는 후기를 읽는다. 상상력 넘치는 소설도 좋지만 그 작가나 작품을 번역한 역자의 머리글이나 후기는 더더욱 재밌다. 굳이 따지자면 메인 요리 전의 에피타이저 같은 느낌이랄까. 과연 어떤 소설일지 기대하고 작가와 역자의 글을 읽어내려가는 그 두근거림이란!

 

소설 속에 숨어있는 작가가 전면으로 드러나는 글이기 때문에 작가의 재기넘치는 면을 좀 더 생생하게 볼 수 있어 더더욱 좋다. 그런 의미에서 이 <흑거미 클럽>은 정말이지 서비스가 풍성한 책이다!

 

자칭 '허물없는' 아이작 아시모프는 친절하게도 독자들의 예상질문을 뽑아 길고 재미난 머리글을 써주었으며 심지어는 단편마다 꼬리글을 달아 단편의 헛헛함을 아낌없이 채워주었다. (내가 단편을 '헛헛'하게 여긴다는 것은 아니다. 난 단편도 무척 좋아하지만 너무 빨리 끝나는 게 가끔은 아쉽다.)

이 허물없는 아이작 아시모프씨는 SF계의 거물이닌가? 하며 의심스럽게 집어든 책이 이렇게 재미있을 줄이야. 이렇게 된 이상 아무리 내가 복잡하게 여기는 SF라도 볼 수 밖에 없겠다. SF계와 추리계를 넘나드는 작가라니 너무 천재적인 거 아닐까. 재능이 부럽지만 이 책을 읽어보니 재능도 재능이지만 관심사가 정말이지 광범위하다는 걸 깨달았다. 정말이지 잘 떠드는 회원들의 입을 통해 쏟아져 나오는 지식들을 살펴보다가. 옛말에 한 우물만 파라고 했는데 아이작 아시모프를 보니 또 그렇지만도 않은 모양이다. 현대는 역시 정보화 사회구나, 하고 쓸데없는 감탄사를 내뱉어 보았다. 나로서는 따라가기도 벅찰 정도지만 아이작 아시모프는 분명 자신이 좋아서 하고 있겠지 싶어서 또 한 번 작가의 다른 작품이 궁금해졌다.

 

어김없이 학교생활에 쫓기다보니 저절로 추리소설(그것도 자극적인 제목)에 손이가게 된다. 도서관에서 책장들 사이를 걸어가다 군데군데 숨어있는 추리소설을 한아름 집어들어 뒤뚱뒤뚱 대출대로 걸어가는 내 모습은 내가 생각해도 웃기지만 책가방이 묵직할 수록 (아직 읽지도 않았지만) 어쩐지 마음이 행복해진다.

 

<흑거미 클럽>은 사실대로 말하자면, 일종의 '골드 디거(돈을 노리고 남자에게 접근하는 여자)' 살인사건 같은건가~ 하며 집어들었는데 어디서 많이 본 작가에 잠깐 살펴보니 여자라곤 전혀 나오지 않는(!) 독특한 추리소설이었다. 아가사 크리스티의 <화요일 클럽의 살인>같이 매달 (대부분) 같은 멤버가 모여 사건을 실어나르고 어느 한 사람이 그 사건을 명쾌하게 풀어나간다-는게 표면적인 구성이지만, 이 <흑거미 클럽>에는 뭔가 특별한 게 있다. (꼬리말 뿐만이 아니라)

 

<화요일 클럽의 살인>에서는 미스 마플이 주인공이었기 때문에 내 관심사는 온통 미스 마플에게 쏠려 있었다. 하지만 이 <흑거미 클럽>은 회원 모두가 주인공이기 때문에 어느 누구 하나 정이 안 가는 사람이 없다. 그리고 이 작품의 묘미는 사실 헨리(그 모든 사건을 명쾌하게 풀어나가는 급사)가 사건을 해결하기 전 회원들 사이에 오가는 온갖 추리와 설명, 주장들이다. 온갖 전문직업군에서 모여든 사람들이라 그런지 셰익스피어에 성경에 수학,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등등 다양한 주제와 더 다양한 해석이 책 속을 날아다닌다. 추리소설이긴 하지만 추리에 할애되는 시간보다 회원들의 추리(라고 주장하는 전문지식들)에 할애되는 시간이 더 많을 정도다. 그래서 이 책은 각각 관점이나 지식 수준이 다른 사람들이 어떤 식으로 생각하는지를 언뜻 비춰주는 작품이다.

 

개인적인 감상이지만... 난 어쩐지 헨리에게 정이 안 간다. 도대체 왜 일까-하고 혼자 고민해 봐도 딱히 뭐라 할 말은 없지만 그냥 '너무나도 정직한' 헨리가 무의식중에 꺼림칙한 것 같다. 하늘에 맹세할 필요도 없이 난 항상 정직하지만은 않은 사람이라서. 항상 정직하고 저렇게 척척 추리를 해내다니 잘난척쟁이 홈즈보다 더 완벽주의다. 요새는 인간적인 캐릭터가 각광받는 시대라고! 하고 소리쳐주고 싶지만 후기를 읽어보니 아이작 아시모프씨는 (당연히) 헨리를 엄청 좋아하는 듯 하다... 할 수 없이 회원들에게 못다한 내 정을 쏟을 수 밖에...

 

나 역시 아이작 아시모프처럼 안락의자 탐정(한 군데에서 사건을 듣고 해결하는 탐정)파이기 때문에 이런 류의 소설을 무척이나 좋아하는 편이라 이 너무 똑똑하고 사이좋은 회원들이 다시 모여 손님을 초대하고 (정직한)헨리의 시중을 받고 음식을 먹으며 고급 지식을 아무렇지 않게 던지는 모습을 다시 보고 싶다.

 

-모르실 겁니다. 여러분은 문외한이시니까요. 여러분이 아시는 거라곤 소설에서 읽은 것뿐일 겁니다. 그러므로 나 같은 일을 하는 사람은 연달아 생각을 해내어 어떤 사건이든지 반드시 척척 풀어낸다고 여기고 계십니다. 그러나 나는 이래봬도 탐정 축에 끼므로 그럴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여러분, 마지막으로 남겨진 오직 하나의 방법이란 손을 드는 것이었습니다. (37)

 

-샌드 씨는 거짓말이란 자기방어 본능이나 또는 사회적 관습에 사로잡힌 결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자기방어 본능이나 사회적 관습을 모두 덮어놓고 부정할 수는 없습니다. 거짓말이 나쁘다고 한다면, 우리 대신 진짜에게 거짓말을 시켜야 하니까요. (86)

 

-누구에게나 극적인 것이 진실이기를 바랄 때가 있으니까. 모두들 별에게 소원을 빌고 싶어하지. 불가사의한 능력을 지니고 싶어하며 여자로부터 덮어놓고 환영받고 싶어하네... 아무리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척해도 마음 속 어딘가에는 그런 것을 믿으려는 부분이 있다네. (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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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질링 살인사건 찻집 미스터리 1
로라 차일즈 지음, 위정훈 옮김 / 파피에(딱정벌레) / 200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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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조앤 플루크의 베이커리 살인사건 시리즈도 그렇고, 이 <다질링 살인사건>도 그렇고 외국에서는 음식업계에 종사하는 미혼여성의 아마추어 탐정소설이 인기인가 보다. 음식과 추리의 상관관계를, 난 도저히 이해하지 못하겠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처음 읽으면서 조앤 플루크의 베이커리 살인사건(스스로는 예쁘지 않다 칭하지만 매력남에 훈남까지 프로포즈하고 있는 여주인공이 사건을 해결하는 내용)이 자꾸 생각났다. 작은 가게를 가지고 있고 훌륭한 제품들을 자부심있게 판매하며 젊은 아가씨가 가게에서 일하고, 애완동물을 기르고 있는데다 미스터리에 엄청난 호기심으로 파고들어간다. 마지막으로...범인의 정체를 막판에 죽음의 위기와 함께 알아차리는 점이 꼭 닮았다. 예전 김전일과 코난을 번갈아 가며 읽을 때도 느꼈지만 베이커리 살인사건의 한나와 다질링 살인사건의 시어도시아를 만나게 해주고 싶어진다. 아마 둘이 서로 과자를 권하고 차를 권하고 화기애애하겠지...

 

다질링 살인사건은 주인공 시어도시아가 경영하는 작지만 기품있는 찻집을 배경으로 시어도시아 주변에서 일어난 사건을 흥미진진하게 따라간다. 분명한 건, 차에 대해서 어마어마한 정보와 팁이 책 속에서 쏟아져 나온다는 거다. 물론 차와는 거리가 먼 나로서는 거의 흘려읽었지만. 차를 좋아하시거나 관심있으신 분들께는 소설 + 정보니 일거양득이 아닐까 싶다.

 

난 피곤할 때 격하게 추리소설을 찾는 습관이 있다. 환상이 가득한 판타지 소설도 좋고 아기자기한 재미가 있는 동화도 좋지만 아무래도 머리가 복잡하고 손가락 하나 움직이기 싫을 때는 오히려 머리를 비워주는 -책에 집중해야 할 필요가 있는- 추리소설이 피곤을 덜어주는 기분이 든다. 그 중에서도 이 <다질링 살인사건>처럼 적당히 상냥하고 적당히 스릴있는 책이 가볍게 보기엔 더 좋다. 굳이 콕 집어 얘기하자면 일본 추리소설은 심리추리소설이 많아서 책을 덮은 뒤에 도리어 복잡해 지는 경우가 종종 있어서 어지간하면 잘 읽지 않는다.

 

오늘은 화창하진 않아도 적당히 뒹굴거리기 좋은 날씨에 머리 아픈 일이라곤 레포트밖에 없었지만, 마침 도서관 반납 날짜도 얼마 남지 않았고 하니 가장 가까이 있는 이 애교스러운 표지의 <다질링 살인사건>을 주워들었다. (책장에 책이 많아서 요즘은 바닥에 쌓아두고 있다)

 

단언컨데 수없이 많은 추리소설 중에서도 이렇게 아기자기한 표지는 찾아보기 힘들거다. 볼을 붉히며 윙크하는 찻주전자를 든 아가씨나, 애교스럽게 웃고 있는 강아지나. 딱 <다질링 살인사건>에 어울리는 표지다. 표지만 봐도 복잡한 일들이 잊혀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책의 전체적인 분위기와도 어울리고. 하지만 시어도시아는 좀 더 우아하게 생기지 않았을까- 하는 쓸데없는 생각을 잠시 해본다.

 

이 책은 굳이 얘기하자면 호흡이 좀 짧다. 덕분에 가볍게 읽기에는 좋지만 군데군데 떡밥을 던져놓고 그 뒤로 이야기가 이어지지 않는다는 생각이 가끔 들었다. 물론 이야기 전개에 그리 영향을 주는 건 아니지만, 앞서 말했듯이 조앤 플루크의 베이커리 살인사건이 자꾸 떠오르다 보니 비교가 되어서 그런지 그런 점이 좀 아쉽게 느껴졌다. 나야 딱히 꼬투리를 잡는 성격이 아니라 설렁설렁 넘어간다고 해도 세심한 분들은 (혹시) 그런 점들에 괴로워 할지도 모를 일이니까! 옴니버스 식이라 그런걸까, 생각해 봤지만 다음 시리즈를 읽어보지 못했으니 아무래도 판단은 미뤄둬야겠다.

 

그래도 시어도시아는 훌륭하다! 열심히 미스터리를 판 것치고는 범인을 마지막까지도 알아채지 못한데다 헛다리 집는 일에 열중하긴 했지만 그 열정과 행동력에 감탄했다. 심지어 예쁘기까지 하다니 그녀가 실제한다면 먼 거리를 무릅쓰고라도 달려가 보고 싶은 심정이다. (차에 대해서는 하나도 모르지만 적당히 추천해 주겠지!)

 

다음 시리즈도 발표했다고 하는데 아직 한국에는 번역되지 않았나보다. 이 다정하고 매력적인 찻집 아가씨를 언제쯤 다시 만날 수 있을런지 기대해본다.

 

-싫든 좋든, 분명히 나는 이미 수수께끼에 허리까지 푹 잠겨 있잖아. (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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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선생님이 좋아요
하이타니 겐지로 지음, 햇살과 나뭇꾼 옮김 / 내일을여는책 / 199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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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리뷰하기 전에. 전 옛날 책을 가지고 있어서 일단 리뷰는 위의 책으로 합니다만...검색해 보니 2008년에 새로운 책이 나왔네요. 표지도 귀엽고 상큼합니다~


나는선생님이좋아요-3판

하이타니겐지로 | 햇살과나무꾼 옮김

양철북 2008.03.14

 

 

 

 

내가 어렸을 적, 엄마는 새로 전학간 초등학교에서 좋은 성적을 받으면 전집을 사주기로 약속했다. 이미 집에는 엄마 취향이 적극 반영된 셜록 홈즈 전집과 뤼팽 전집이 있었지만, 어릴 적부터 책 욕심이 많은 난 다다익선의 정신에 입각해 모처럼만에 공부에 집중했다.

 

그렇게 얻은 전집이, 지금은 구할 수도 없는 ( 중고시장 어딘가는 있겠지만 가격도 비싸고...) 에이브 전집이었다. 전 88권이지만 엄마 역시 중고시장에서 사온거라 중간중간 책이 빠져있었다. 그때는 당연히 몰랐지만 지금 새삼 검색해 보니 에이브 전집은 소위 해적판이라 부르는 책으로 작가의 허락없이 번역한 책들이었다. 그래도 훌륭한 책들이라는 것만은 변함없어서 몇 번이고 읽고 또 읽어도 질리지 않았다.

 

그 80여권의 책들 중에서 내가 특히 좋아하던 책이 있었다. <어른학교 아이학교>, <부엌의 마리아님>, <일곱 개구장이>. 아무리 읽고 또 읽어도 질리지 않고 심지어는 찡-한 감정이 밀려드는 책들이었다. 정식 번역판이 있을까 찾아보았지만 변변찮은 검색 실력 탓에 찾지를 못하다 요 근래 겨우 <어른학교 아이학교>가 <나는 선생님이 좋아요>라고 (심지어는 예전에!) 번역되어 나왔다는 걸 알았다. 이미 <어른학교 아이학교>가 집에 있긴 하지만 번역본은 과연 어떨까 궁금해서 도서관에 달려가 빌려와봤다.

 

책 제목이 <나는 선생님이 좋아요>라고 바뀌어서 잠시 헷갈렸지만 원제는 또 토끼의 눈이라고 하니 우리나라 번역제목이 더 마음에 든다. 왜 원제가 토끼의 눈,일까 했지만 본문 중 동자 조각상의 아름다운 눈을 '토끼의 눈'이라고 말하며 '그것은 기도하는 듯, 생각에 잠긴 듯 그윽한 빛을 띠고 다정하게 바라보고 있었다'라고 하자 고개가 절로 끄덕여졌다. 물론 개인적으로는 어릴적에 읽었던 <어른학교 아이학교>가 제일 맘에 든다.

 

도서관 책을 보다보면 가끔 누군가 낙서해 놓은 페이지가 있거나 아주 가끔 없는 페이지가 있는 경우가 있다. 대부분 낙서는 흥미롭게 읽고 넘어가고 없는 페이지에는 속상해 하지만, 이 책은 곳곳에 어린아이들을 이해하기 위한 글귀에 밑줄이 그어져 있어서 누군지 모를 사람에게 한없이 공감하며 책을 읽었다.

 

이 이야기는 학교 옆 쓰레기장에서 사는 아이들과 젊은 여선생의 이야기다. 흔히들 더럽고 제멋대로라고 학교에서 싫어하는 아이들을 젊고 경험없는, 그야말로 곱게 자란 여선생이 어떻게 대하고 어떻게 성장해 나아가는지를 -그렇다, 단순히 아이들만의 성장기가 아니라 어른들의 성장기다 - 섬세하고 가슴 따뜻해지는 이야기다.

 

아이들은 순수하고 귀엽고 착하지만 그만큼 잔인하다. 계산이 없는 대신 너무 솔직하고 어른들의 나쁜 점을 가감없이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주인공 데쯔조와 친구들은 쓰레기장에서 살고있는만큼 다른 아이들보다 더럽고, 부모님들도 바빠서 집에 잘 들어오지 않아 일상 생활도 아슬아슬하다보니 '다름'에 민감한 아이들에게 소위 말하는 왕따를 당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하지만 아이들은 결국 아이들일 뿐이다. 단순히 환경의 문제일 뿐, 아이들 자체는 착한 것이다. 겉만 보고 무서워하던 여선생님이 점차 아이들과 가까워지고 공감하면서 자신의 환경을 되돌아보게 된다. 그렇게 어른도 아이도 함께 성장해간다.

 

이 책을 읽다보면 어느새 데쯔조와 심지어는 애완곤충(?)인 파리까지 귀여워지니 책이란 신기한 매체다. 나온지 꽤 되는 책에 나름 유명한 책이지만 꼭 더 많은 분들이 읽고 나처럼 데쯔조를 귀여워 하는 사람이 많아졌으면 한다.

 

 

-데쓰조한테 보물이 잔뜩 쌓여 있을지도 모른다고 했는데, 그 보물이란 무엇일까? 데쓰조는 글씨도 쓸 줄 모르고, 말도 하지 않는데, 도대체 어디에 보물인지 뭔지가 숨겨져 있는 걸까. (15)

 

-바다로 돌려보내니까 거북은 목을 꼿꼿이 세우고 네 발을 휘적거리며 헤엄쳐 갔다. 이 넓은 바다에서 왠지 그것은 우스꽝스러운 동작이었다. 하지만 우스꽝스럽기에 그 거북의 진지함이 더욱 가슴을 쳤다. (24)

 

-파리는 태어나면서부터 부모한테 버려진 채 평생 친구도 가족도 집도 없이 혼자 산다. 항상 벌, 거미, 참새 등의 위협을 받지만 남을 위협하는 일은 없고 먹이라고는 사회의 폐기물에 지나지 않는다. 파리의 생태는 전혀 아름답지 않지만 잔인하지도 않고, 극히 조촐한, 말하자면 서민의 생활과 같다. (70)

 

-난 미나코가 공책을 찢어도 화 안 내구요. 책을 찢어도 화 안 내요. 필통이랑 지우개를 빼앗아도 화 안 내고 기차놀이를 하고 놀았어요. 화 안 내니까 미나코가 좋아졌어요. 미나코가 좋아지니까 귀찮게 해도 귀엽기만 해요. (126)

 

-그게 눈앞의 욕심이 아니고 뭡니까. 우린 교육이 뭔지는 모르지만 자기 아이만 좋으면 된다는 그런 생각에는 찬성할 수 없습니다. 물론 이건 그럴싸한 소리죠. 하지만 이런 듣기 좋은 소리나 지껄이고 있다가는 이 세상을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감히 말씀드리는 겁니다. 그런 세상이니까 학교에서는 더욱 서로 돕는 마음을 가르쳐야 한다고 봅니다. 서로 돕는 마음은 시대에 뒤떨어진 생각처럼 들립니다만, 우리 장사치들은 그런 것으로 신용을 얻기도 하죠. 그럴 때마다 사는 보람 같은 것을 느끼기도 합니다. (128)

 

-효과가 있으면 하고 효과가 없으면 안 한다는 생각을 합리주의라고 할 수는 있겠지만, 이것을 인간의 생활 방식에 적용시키는 것은 잘못입니다. 이 아이들은 이곳에서의 하루하루가 인생인 겁니다. 그 인생을 이 아이들 나름대로 기쁨을 가지고 충실하게 살아가는 것이 중요한 겁니다. 우리의 목표도 여기에 있습니다. (148)

 

-하지만 지금 고생하면 나중에는 꼭 잘했구나 생각하게 돼요. 고생이란 좋은 거죠. 좀더 고생해서 사토루의 머리를 좋게 만드세요. 글을 쓴다는 것은 힘든 일이죠. 선생님도 하룻밤 글을 쓰고나면 이가 와들와들 떨립니다. 밥을 먹으면 이가 아프죠. 사투루는 글을 다 쓰고 나면 이가 아파요? 안 그렇죠? 아직도 더 노력할 수 있다고 선생님은 생각해요. (213)

 

-약한 자, 힘이 없는 자를 소외시키면 소외시킨 자가 인간적으로 못쓰게 됩니다. (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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銀耀夜 2009-10-02 21: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고1 막 입학사고 4월 되던 때, 우여곡절 끝에 이 책을 읽게 되었는데,
음, 파리 이야기가 정말 뇌리에 쏙 박혀있네요.
그래서 더럽게 뭐람, 싶었는데 읽다보니 감동적이고 그래서 여러 친구에게 권했지만, 제일 인기 없는 책이 되었답니다. 허허허.
영화 감상 보러 왔는데, 흠흠흠, 리뷰 잘 감사하고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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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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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도 속 빈 강정이라고 표현하고 싶네요. 그래도 애쉬튼 커쳐는 멋졌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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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써틴
볼프강 홀바인.하이케 홀바인 지음, 이병서 옮김 / 예담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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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13. 써틴. 처음 이게 주인공의 이름이라는 소리에 한 번 놀라고 동화치고는 엄청난 두께(어지간한 소설보다 두꺼운!)에 또 한 번 놀랐다. 택배로 도착한 책을 보고 엄마는 '넌 이제 호러소설도 읽냐'고 질린 듯이 말했다. 응? 하며 다시 한 번 표지를 살펴보니 이게 일단은 '동화'라는 걸 모르는 엄마가 착각할만도 했다. 커-다란 보름달 배경에 웅장하지만 으스스한 저택, 잡초가 무성한 정원...거기다 으스한 글씨체의 제목까지.

 

철썩같이 '동화'라고 믿고 있었는데 엄마 말 듣고 표지를 보니 불안이 밀려왔다. 이미 시간은 저녁, 거기에 난 나이와 상관없이 무서운 거라면 질색하는 겁쟁이니까! (자랑은 아니지만) 조마조마해 하며 책을 펴들었지만 순식간에 '써틴'의 모험 속으로 빠져들어갔다.

 

책을 다 읽고나니 내가 써틴을 따라다니며 모험을 한 것마냥 피곤했다. 아니 물론 저녁이라 내 체력이 바닥나서 일수도 있겠지만 안 그래도 두꺼운 이야기를 단숨에 읽어나가려니 머리가 어찔어찔했다. 혹시 저녁에 피곤할 때 읽으실 분이 계신다면 저녁을 든든히 먹고 읽으시길 추천하고 싶다...

 

13은 익히 알다싶이 외국에서는 불길한 숫자로 통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4'와도 같은 위치인 듯 싶지만 그리 심각하게 신경쓰지 않는 우리와 달리 외국의 13은 유난히 문화적 영향력이 큰 듯 싶다. 영화소재로도 종종 등장하고, 심지어는 컴퓨터 바이러스로도 등장하고. 내가 알기론 예수의 13번째 제자, 유다가 예수를 배신한 이후로 13이 악마의 숫자가 됐다고 하는데 확실한 건 잘 모르겠다. 확실한 건 13이라는 숫자가 외국에서 굉장히 불길한 숫자로 통하고 있다는 거다. 분명, 이름으로는 절대 쓰지 않을 그런 숫자로.

 

그런 의미에서 '써틴' (본명 안나 마리아)는 13이라는 숫자에 얽힌 것만 치자면 그 나이또래 중 불행의 최고도를 달린다. 태어난 날짜도 시간도 13, 인생 곳곳에 숨은 13이 그녀를 불안하게 만든다. 그리고 읽는 사람도.

 

'써틴'은 아버지를 여의고 결국 어머니까지 돌아가시자 어머니의 유언대로 유일하게 남은 가족인 할아버지를 만나러 독일로 가게 된다. 하지만 비행기에서 그녀를 죽이려는 누군가와 마주친 그 순간부터 영문도 모르는 적과 마주하게된다. 어딘가 음침한 할아버지의 집부터 영혼이 빠져나간 사람들까지. 차례차례 밀려오는 적과 음모에도 '써틴'은 도망치고 포기하기보다는 맞서싸우는 쪽을 선택한다. 아슬아슬하게 두 세계를 넘나들며 적의 실체를 알아가던 '써틴'. 이 모든 것이 할아버지로부터 시작됐다는 것을 알게되는데...

 

-라고 요약해 봤지만 이 이야기의 모든 것을 담기엔 너무 요약한 듯 싶다. 역시 책은 읽어야 맛이다.

 

이 책의 특이점을 말한다면 뭐니뭐니해도 독특한 구성을 빼놓을 수 없다. 몇 번이고 말하지만 동화치곤 방대한 양은 둘째치고 중간중간 2단으로 나뉘어 이쪽 세계와 저쪽 세계를 그야말로 동시상영(!) 하는 부분은 두 부분을 한꺼번에 읽어야 할지 혹은 한 쪽을 먼저 읽고 다른 쪽을 읽어야 할지 날 계속해서 고민하게 만들었다. 게다가 조금 헤갈리게도 했고.

 

'써틴'은 이야기 속에서 집의 탈을 쓴 무언가를 경계로 이쪽 세계와 저쪽 세계를 건너다닌다. 처음 엄마를 잃고 홀로 남아 할아버지를 찾아가려던 연약한 소녀는 우연히 만난 친구들과 함께 하면서 자신의 길을 자신이 결정해나간다. 따지고 보면 이 이야기는 단순한 호러동화가 아니다. 성장스토리에 영혼을 빼앗긴 듯 살아가는 어른에 대한 이야기인 것이다. 영혼을 저쪽 세계에 빼앗긴 사람들은 건강하고 능력있고 심지어는 성공까지 했지만 사랑과 우정 같은 따스한 감정은 모조리 잊어버린다. 오로지 성공, 그리고 자신의 목적만을 위해 달릴 뿐이다. 작가는 그런 사람들이 '원래부터' 그런 것은 아니었다고 거듭 말한다. 모든 사람 속의 나쁜 부분이 튀어나온 거라고. 감정보다 차가운 이성이, 자신의 이익부터 생각하는 그런 면이 누구에게나 있는거라고. 그래서 '써틴'은 생각한다. 그렇게 수많은 방해를 받고도 그 사람들이 '안됐다'고.

 

이게 아이의 시선이라면, 아이들은 한없이 일에 치여 사는 어른들을 그렇게 바라보는 걸까. 아이도 아니고 어른도 아닌 어정쩡한 난 '써틴'에 동감했고 그 '성공한 어른들'의 성공만큼은 부러웠다. 슬프게도.

 

여름은 다 지나갔지만, 계절에 상관없이 스릴있게 읽을 수 있는 소설이다. 동화라고 하지만 판타지 소설의 대가인 작가의 작품인만큼 어른들도 재미나게 읽을 수 있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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