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종기와 사투를 벌이다 - 조선의 역사를 만든 병, 균, 약
방성혜 지음 / 시대의창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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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어렸을때는 사극을 즐겨 봤습니다. 사극 중에서〈용의 눈물〉이나〈허준〉같은 경우 매주 방송시간을 기다리게 했던 작품들이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사극을 보면 자주 등장하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종기'입니다. 사극에서 종기는 극중 인물들의 생명을 위협하며 맹활약합니다. 놀라운 점은 위협받는 대상이 때론 왕이기도 하다는 사실입니다. 어렸을 때는 종기를 단순한 피부병 정도로만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에 한 나라의 왕이 한낱 종기에 죽임을 당한다는 것은 매우 놀라운 일이였습니다. 더 나아가 조선시대의 의학술, 기술력에 대한 편견이 생기게 했습니다. 하지만 저자는 이 책을 통해 그러한 생각이 부족한 지식으로 인한 선입견에 불과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과거에 종기라는 병은 때로 사람의 목숨을 앗아 갈 수도 있는 심각한 질병이었습니다. 죽음을 부를 수도 있었던 과거의 종기는 현재 우리가 생각하던 고약을 붙이거나 항생제나 소염제 처방으로 금방 낫는 병이 아니였습니다. 종기는 현대적으로 표현하면 붓고 열나고 아프고 붉어지는 염증이 생겼다는 말인데, 부었던 곳에 고름이 생겨날 때 이를 종기라 했습니다. 종기가 피부에 생기면 창양(瘡瘍), 근육이나 혈관에 생기면 옹(癰), 뼈에 생기면 이를 저(疽)라고 불렀습니다. 종기는 간이나 폐를 비롯해 몸 어느 곳에서나 생길 수 있었는데, 이를 뭉뚱그려 모두 종기라고 불렀던 것입니다. 종기의 현대적 개념은 봉와직염, 림프절염, 관절염 등을 비롯해 암까지 적용되는 질병이였습니다. 의학기술이 계속적으로 눈부시게 발전하는 현대에 들어서도 이러한 질병의 완치율이 100퍼센트가 아니며, 암이 여전히 사망률에서 차지하는 비중을 생각해 보면, 조선시대에 종기로 인해 심지어 왕까지도 죽을 수 있었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때문에 조선의 의료 역사는 종기와의 싸움이며, 이는 현대 의사들의 싸움과도 별반 차이가 없었습니다. 종기는 역사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기도 했습니다.《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조선의 왕 27명 중에서 종기를 앓았던 것으로 기록된 왕은 12명이나 됩니다. 현대에서도 대통령의 건강이 미치는 파급력이 엄청난데, 왕이였다면 그보다 더했을 것입니다. 문종의 경우 세자 시절에 시작된 종기가 낫지 못하고 일찍 죽는 바람에 단종이 어린 나이에 즉위해야 했고, 결국 세조로 이어지는 정치적 급류가 시작된 단초가 됩니다. 종기와 관련된 기록을 보면 성종의 경우 대장암을, 연산군은 모낭염을, 광해군은 화농성 이하선염을 앓았을 것으로 추측됩니다. 이러한 의학적 기록들은 현대인들의 질병이나, 조선시대의 사람들의 질병은 별 차이가 없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종기를 치료하는 것은 국가적 선결 과제였기 때문에, 효과가 있다고 알려진 약재나 용하다고 알려진 의원은 직위와 성별, 나이를 불문하고 받아들이는 개방적인 태도를 보였습니다. 인상적인 것은 종기 치료에 사용되는 여러 방법들이 현대에서도 사용될 수 있고, 사용되고 있는 방법이기도 하다는 것입니다. 대표적인 것이 거머리 치료인데, 중종과 문종의 경우 거머리 치료를 받은 기록이 있습니다. 중종은 거머리 치료의 효과에 만족해했는데, 중종실록 28년 2월 11일의 기록을 보면, '내가 여러 달 병을 앓다가 이제야 거의 회복되었다. 약방제조와 의원들에게 상을 주지 않을 수 없다. (중략) 동지 박세거와 홍침은 품계를 올리며 각기 쌀과 콩 6석씩 내리고, 김상곤은 품계를 올리며 아마 한 필을 내리고, 김수량, 노한명과 장무관원은 각기 아마 한 필씩을 내리고, 의녀 대장금과 계금에게는 쌀과 콩을 각각 15석씩, 무명과 베를 각기 10필씩 내리고, 탕약 사령 등에게는 각기 차등 있게 상을 내리라.'고 말합니다.

종기와 싸운 조선시대 의학의 기록들은 매우 놀랍습니다. 많은 의학자들이 업적을 남겼는데, 그 중에서 임언국의 경우 십자형 절개법이라는 치료법을 선보였고, 이를 일본의 사학자인 미키 사카에는 임언국을 근대 외과학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프랑스의 피레에 견줄 만하다고 평하기도 했습니다. 또한 현대에 프로바이오틱스라고 부르는, 유익한 미생물 식품을 조선시대에서 치료용으로 사용했는가 하면, 현대의 항생제와 소염제에 해당하는 것들도 자연에서 찾아내 종기 치료에 사용했습니다. 당시 사용되었던 재료들은 얼핏 보기엔 원시적이고 비과학적으로 보이지만 현대적 관점에서 보면 나름 과학적인 요소가 곳곳에 배여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의학적 기반은 다른 분야에서도 사용함으로써, 전반적인 사회 발전에 큰 역할을 합니다.

역사적 기록으로 볼 때 우리나라의 검시제도가 가장 화려하게 꽃피기 시작한 것은 세종 20년 경이다. 놀라운 것은 검시방법 중에는 지금도 충분히 활용할만한 것이 있다는 사실이다. 중독사를 판단할 때 은비녀를 조각수로 깨끗이 씻어 시체의 목구멍 안에 넣고 입을 종이로 오랫동안 밀봉한 뒤 이를 꺼내보아 만일 그 색이 푸르거나 검게 변하였으면 다시 조각수로 비녀를 씻어 본다. 그래도 그 빛깔이 없어지지 않으면 그것은 독약을 먹고 죽은 것으로 판단하였다는 것이 그 유명한 '은채법'이다. 독을 먹은 지 오래된 시체에는 '조작훈증법'을 사용했다. -《죽은자의 권리를 말하다》, p.23 

이렇게 인상적인 조선의 의학 발전에도 불구하고 조선의 왕들은 종기로 많은 고통을 받았습니다. 당대 최고의 의학자들이 보필했음에도 불구하고 종기가 쉽게 낫지 않았던 이유는, 왕이라는 특수성 때문에 생활방식을 바꿀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루에 다섯 끼를 먹고, 가만히 앉아 있어야 했고, 하루 종일 격무에 시달리며, 정신적인 스트레스에 시달리는 생활이 병을 불러왔습니다. 조선시대 왕의 생활은 현대인들의 삶과도 많이 비슷합니다. 물론 현대인들은 점점 건강해지고 있습니다. 항생제와 소염제의 접근성도 그렇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주거 환경입니다. 하버드 의대 교수인 제임스 길리건은 "근대사회에서 수많은 병을 물리친 가장 효과적인 의학적 업적은 의사, 병원, 혹은 약의 역할이 아니며, 이 상하수도 체계야 말로 인류의 역사 중에서 가장 효과적인 의학적 업적이다."라고 평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런 진보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현대인들은 아픕니다. 여전히 암의 시대이고, 아토피의 시대입니다. 좀 더 건강한 삶을 위해서, 종기와 치열한 싸움을 벌였던 조선시대의 기록들이 말해주는 교훈을 경청할 필요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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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벨상 스캔들 - 세계 최고의 영광 노벨상의 50가지 진실과 거짓
하인리히 찬클 지음, 박규호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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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이 세상에는 많은 상이 있지만, 전 세계가 인정하는 권위를 가진 상은 매우 드뭅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세계에서 가장 권위있다고도 할 수 있는 상이 바로 노벨상입니다. 매년 노벨상 수상 시기가 다가오면, 언론에서는 누가 노벨상을 탈지 초미의 관심사를 보입니다. 또한 왜 우리 과학자들은 노벨상을 타지 못하냐? 노벨상을 타려면 어떻게 공부시켜야 되나? 와 같은 주객전도된 뉴스기사들이 나오는 것도 매년 있는 레파토리이기도 합니다. 노벨문학상 수상자가 발표되면 대형 서점들에선 수상자의 작품을 모두 모아 특별전을 열기도 합니다. 어떻게 보면 과도하다고도 할 수 있는 이런 반응들은 그만큼 노벨상이 권위를 가지고 있다는 반증이기도 합니다. 노벨상은 심지어 수상자에게 탁월한 건강보조제의 역할도 수행합니다.

노벨상은 알프레드 노벨의 유언에 따라 지난해에 인류에게 가장 큰 공헌을 한 사람에게 수여하는 것입니다. 때문에 노벨상을 수상한다는 것은 많은 사람들에게 그 분야의 최고 권위자임을 입증함과 동시에 가장 큰 공헌을 했다고 생각하게 만듭니다. 노벨상이 수여된 과학적 업적들은 물론 탁월한 것들이였지만, 노벨상에는 여러 문제점이 있습니다. 먼저 '지난해에' 라는 노벨의 유언입니다. 이러한 노벨의 유언은 거의 매번 무시되고 있는데, 상은 대부분 수년 혹은 수십 년 전에 이루어진 업적에 돌아가기 때문입니다. 물론 학문적 업적은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른 뒤에야 의미와 중요성이 인식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노벨이 원래 의도했던 젊고 성실한 과학자나 예술가에게 막대한 상금을 줌으로서 연구와 작업에 어려움이 없도록 한 것이 퇴색되는 것도 사실입니다. 또한 많은 탁월한 노벨상 후보들이 평균 15년의 대기시간을 버티지 못하고 죽음을 맞이하는 바람에 수상자 명단에 들지 못하기도 합니다.

지난 50년간의 노벨 화학상과 노벨 물리학상 기록을 분석한 결과, 실제로 노벨상을 수상한 사람들은 후보에만 그친 사람들보다 더 오래 산 것으로 나타났다. 수상자들의 수명이 늘어난 것은 노벨상 상금 때문이 아니었다. 해당 연구에 참여한 앤드루 오스월드는 이렇게 말한다. "지위는 건강을 유지시켜주는 일종의 마법으로 작용하는 듯하다. 스톡홀름의 연단을 걸어가는 행위가 해당 과학자의 수명을 2년쯤 연장시키는 것으로 보인다." -《슈퍼 괴짜경제학》, p.123 

노벨상이 순수하게 학문적 성취를 겨루는 장인 것만은 아닙니다. 때론 정치적이고, 때론 과학자들간의 알력과 질투가 서려 있습니다. 아인슈타인이 상대성이론을 발표하며 위대한 과학적 업적을 이뤘지만, 노벨상 수상자였던 레나르트의 반유대적인 편견과 굴스트란드의 반대 때문에 상대성이론으로 노벨상을 타지 못하고, 광전효과에 대한 논문으로 노벨상을 수상하는 특이한 일이 발생하기도 했습니다. 또한 노벨상과 관련해서 수상자와 동등한, 혹은 거의 비슷한 수준의 업적을 달성했던 리제 마이트너를 비롯해 조슬린 벨과 같은 탁월한 학자들이 수상자의 조수나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하기도 했습니다. 물론 이러한 경향은 비단 노벨상과 관련된 문제만은 아니며, 아직도 학계에서 이어지는 문제들이기도 합니다.

심지어는 자신의 아이디어를 도둑맞기도 합니다. 피치오니는 이탈리아에서 미국으로 건너가 세그레에게 자신의 방법을 제안했고, 세그레는 공동 실험을 위해 빠른 시일 안에 그를 초청하겠다고 했지만 세그레는 피치오니를 부르지 않고 실험을 실행해 반양성자 발견에 성공합니다. 결국 세그레는 노벨상을 수상했고, 피치오니는 소송을 걸었지만 법원은 세그레의 잘못을 인정하지만 공소시효가 지났기 때문이라는 이유로 소송을 기각해 버립니다. 공식적으로 법원이 피치오니가 사기를 당했다고 인정했음에도 불구하고 학계는 오히려 피치오니를 적대시했는데, 학문적 다툼을 법정으로 가져갔다는게 그 이유였습니다.

또한 노벨상은 노벨의 유언에 있는 인류에게 가장 큰 공헌이라는 부분을 통해 과학에 중요한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원소를 이용한 암모니아 합성에 성공해 노벨상을 탄 프리츠 하버의 경우를 생각해 봅시다. 그는 암모니아 합성을 통해 탁월한 학문적 업적을 이루었고, 농업에도 큰 도움을 준 역할을 했습니다. 동시에 하버는 철저한 민족주의자이자 주전론자로서 전쟁에 자신의 능력을 마음껏 발휘했고, 가스전의 아버지라는 명예롭지 못한 별명도 생겼습니다. 나치가 집단수용소에서 대량살상에 사용한 독가스도 그의 작품이였습니다. 이런 행적에도 불구하고 그는 최후까지 자신의 행동을 자랑스럽게 여겼고, 전쟁에 대한 벌도 받지 않았으며, 자신의 이름을 단 연구소도 생겼습니다. 이런 일화는 굳이 하버가 아니더라도 많은 과학자들에게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100년이 넘는 역사를 지닌 노벨상은, 현대과학이 놀라운 발전을 이룩했던 시기와 맞물려 있습니다. 놀라운 발견과 발명 뿐만 아니라 과학의 어두운 측면들까지 모두 포함하는 노벨상은 그야말로 현대의 지성사라고도 부를 만 합니다. 이 책은 노벨상과 관련된 50가지 스캔들을 다루고 있지만, 저자가 말하고 있는 것처럼 노벨상의 권위와 명망을 전복시킬 의도로 씌어진 것은 아닙니다. 다만 노벨상이 쉽게 생각하고 있는 것처럼 순수한 업적들의 경쟁의 장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노벨상 수상자나 고매한 심사위원들은 실수를 모르는 영웅들이 아니라, 우리와 같은 사람인 것입니다. 노벨상 수상에 관한 부분에서 인간적인 오류가 있다고 해서 노벨상의 명성이 실추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노벨상을 수상한 거의 대부분의 과학적, 문학적 업적들은 분명 인류의 보물들인 것은 틀림없기 때문입니다. 노벨상과 관련된 스캔들이 말해주는 교훈들을 잘 경청하고 변화할 수 있다면, 앞으로도 노벨상은 탁월한 명성을 유지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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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으름에 대한 찬양 - 개정판
버트란드 러셀 지음, 송은경 옮김 / 사회평론 / 200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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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을 돌아다니던 중 인상깊은 글을 본 적이 있습니다. 조선시대 왕으로서의 삶과 현대의 평범한 시민으로서의 삶 중 어떤 것을 택할 것이냐고 묻는다면, 현대인의 삶을 택할 것이라는 글이였습니다. 수없이 많은 사람들로 구성된 계급의 꼭대기에 있는 과거의 왕보다 평범한 현대인의 삶이 더 가치가 있다고 한 답변은 우리 인류가 그동안 달성한 진보를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바쁘게 달려오면서 많은 것들을 얻었습니다. 하지만 바쁘게 달려왔기 때문에 잃어버린 것 또한 존재합니다. 만약 그 잃어버린 것이 우리가 가장 가치 있게 여기는 행복한 삶에 필수적인 요소라면 어떨까요? 저자 버트런드 러셀은 현대사회를 조명하면서 좀 더 바람직한 사회의 모습을 제안합니다. 그 사회는 바로 사람들이 현재보다 게으른 사회입니다.

생명체에게 있어서 진화라는 것이 오랜 세월에 걸쳐 일어나는 것처럼, 우리 사람들이 가진 노동에 대한 인식 또한 먼 과거와 비교해봐도 크게 변화하지 않았습니다. 과거엔 소수의 사람들만이 잉여 자원을 가질 수 있었고, 그로 인한 여가를 누릴 수 있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겐 여가를 가질 수 없는 환경이였기 때문에, 근로는 바람직하다는 사상이 받아들여졌습니다. 이런 사고는 계속 이어져 현대인들에게 힘 닿는 데까지 노동할 것을 요구합니다. 심지어는 지쳐 쓰러질때까지 일하라고 요구하는 직업도 있는데, 이런 직업은 때론 유망직종으로 분류되며 이상적인 배우자의 기준이 되기도 합니다. 이는 우리 사회가 소비사회이며, 가장 중요한 것이 돈이기 때문입니다. 러셀은 이에 대해 이익을 낳는 것만이 바람직한 행위라는 시각이 모든 것을 전도시켜 버렸다고 지적합니다.

이러한 현대의 노동윤리는 금전적 여유가 없는 사람들은 물론이거니와 금전적으로 풍족한 사람들마저도 여가를 즐기지 못하게 만듭니다. 역사적으로 여가를 즐길 수 있었던 사람들이 남겨놓은 것들이 우리 사회의 기반임을 감안하면 이는 참으로 안타까운 현상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에겐 다른 선택지도 남아 있습니다. 현대의 기술은 여가를 소수 특권 계층만의 전유물에서 벗어나 공동체 전체가 고르게 향유할 수 있는 권리로 만들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 줄 수 있습니다. 때문에 러셀은 기술의 혜택을 더 많은 부를 생산하는데 사용하는 것보다 더 많은 여가를 위해 사용하자고 말하는 것입니다. 러셀은 놀랍게도 4시간 노동제를 주장합니다. 사회를 현명하게 조직해서 적정한 양만 생산한다면, 하루4시간으로도 충분하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러셀의 주장은 일견 유토피아적으로 보이기도 하지만, 이런 주장에 호응해 20세기 초에 실제로 노동의 변화를 이끈 시기가 있었습니다. 노동자계급에 있어서 가장 큰 진보는 일하는 시간을 줄이는 것이라고 외치며 대중여가의 가치를 중요시하는 계몽된 산업가들이 받아들인 자본주의 사상이 있었습니다. 이 사상은 사람들이 충분하게 가질수 있는 수준 이상의 무한경제성장을 추구한다면 자연이 파괴될 것이라는 존 스튜어트 밀과 사이먼 패튼 등의 사상과, 서구가 직면한 가장 중요한 문제는 여가를 노동시간 단축의 형태로 가질 것이냐, 실업의 형태로 가질것이냐라고 말한 달버그의 사상 등을 통해 생성되었습니다. 이 사상은 실제로 기업들에 의해 실천되었고 노동시간이 6시간까지 단축되기도 했습니다. 후버 행정부 뿐만 아니라 미국 제조업 협회, 노동 총연맹, 각종 유명 언론과 기업인들도 6시간제 도입에 지지를 보내고 미국 전역에 확대되어 1932년에는 전체 노동자 25%이상이 이 운동의 덕을 보기도 합니다.

우리는 5년 동안 실제 경험으로 증명해 왔다. 노동시간을 줄이면 효율성과 노동자의 직업 정신이 매우 향상되며 사고와 보험료율도 매우 개선되고 단위당 생산 비용도 매우 낮아져서, 우리는 각각의 노동자에게 8시간제 때 지급하던 것과 비슷한 수준의 보수를 6시간제에서도 지급할 수 있다. -《8시간 VS 6시간》p.69 

현대사회가 적은 노동으로도 충분히 생필품을 공급할 수 있는 상황에서, 러셀은 노동을 최고의 가치로 받아들이지 않는 사회, 더 나아가 노동이 만들어내는 부에 집착하기보다는 더 많은 휴식을 즐길 수 있는 사회가 더 나은 사회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돈에 구애받는 사회에선 돈과 관련된 지식과 행동만이 대접받습니다. 현대사회는 돈을 많이 벌어다주는 지식이 최고의 지식이며, 돈을 많이 버는 직업이 최고의 직업인 것입니다. 하지만 러셀은 단호하게 그렇지 않다고 말합니다. 돈과 관련이 없는 지식도 유용할 수 있으며, 무엇보다 사색이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이를 위해선 여가가 필요합니다. 과거 여가를 즐길 수 있었던 소수의 사람들이 현대사회의 기반을 만들었습니다. 만약 현대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여가를 즐길 수 있다면 미래는 아마 더 찬란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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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사회와 그 적들 - 콤플렉스 덩어리 한국 사회에서 상처받지 않고 사는 법
이나미 지음 / 추수밭(청림출판)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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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제목을 본 순간, 칼 포퍼의《열린사회와 그 적들》이 생각났었습니다. 20세기의 대표적 지성 중 한명인 칼 포퍼는 플라톤, 헤겔, 마르크스를 열린사회의 적들로 규정하며 전체주의 정치체제를 통렬하게 비판했습니다. 이 책의 저자도 제목이 포퍼의 저서의 패러디라고 말하며, 폐쇄적인 전체주의에 반대한 포퍼의 생각이 저자와 일맹상통한다고 말합니다. 저자의 말대로라면, 책의 제목인《한국사회와 그 적들》이 의미하는 것은 한국사회가 폐쇄적인 전체주의적인 부분이 있음을, 열린사회의 적들이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저자는 융 분석심리학자답게 콤플렉스와 집단무의식과 같은 개념을 사용해 이러한 사고방식이 한국사회를 살아가는 사람들을 어떻게 힘들게 하는지 다양한 사례를 통해 분석합니다.

저자는 사교육 열풍, 부동산 광풍, 조기 유학, 명품병, 호화 결혼식, 과다 혼수 등이 한국인들의 삶을 힘들게 하는 것의 원인을 한국인의 심리에서 찾습니다. 결혼식의 경우 심리적으로 물신 숭배의 병증이 드러나는 것 중 하나입니다. 대부분 웨딩홀에서, 웨딩드레스를 입고, 앨범을 찍고, 해외여행을 갑니다. 다른사람의 결혼식을 갈때 진정으로 결혼을 축하하기보다는 축의금을 내러, 과거에 축의금을 받았으니 빚 갚는다는 식으로 갑니다. 결혼식의 주인공이 신랑, 신부가 되지 못하고 신랑, 신부의 부모님이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결혼식이 두 남녀가 결합하는것을 주변 사람들에게 사회적으로 공표하기 위함을 생각하면, 굳이 누구나 똑같이 결혼식을 할 필요는 없습니다. 한국인들에게 있어서 경조사비가 삶을 힘들게 하는 원인 중 하나라면, 경조사비를 줄이는 것이 가장 합리적입니다. 그렇게 되기 위해선 스스로 결혼식과 같은 행사에 있어서 남들이 하니까 따라하는 식의 의식을 버릴 필요가 있습니다.

욕망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지는 자연스러운 심리입니다. 문제는 자기 내부의 솔직하고 건강한 욕망을 인지하는 것이 아니라, 외부로부터의 인정과 관심을 지나치게 욕망한다는데 있습니다. 대표적인 것으로 다이어트를 지적합니다. 자신이 정말로 살이 찐 것이 건강에 악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살을 뺀다기보다는 다이어트를 한 몸매가 이상적인 여성이라는 외부의 평가에 너도나도 다이어트를 합니다. 아이러니한점은 다이어트를 할때 지방이 든 음식을 피하기 때문에 지방이 재료인 여성호르몬 분비가 안되서 오히려 여성적인 매력이 떨어진다는 점입니다. 인간은 우월한 유전자를 선호하며 그것이 좋은 외모로 표현되는것은 사실이지만, 사람은 배우자를 선택할 때 시각 뿐만 아니라 무의식적으로 후각, 촉각 등을 통해서도 선택한다는 점에서 이런 외부의 인정에 너무 집착하는 심리는 우리의 삶을 더 힘들게 만들 수 있습니다.

행복의 아이러니 중 하나는 행복하게 살기 위해 태어난 것이 아니라, 태어났기 때문에 행복하게 살려고 애쓴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현대사회는 개인에게 당연히 행복해질 권리가 있다고 가르칩니다. 수없이 쏟아져 나오는 행복에 대한 서적, 에세이, 강의는 비현실적인 낙관주의나 소비와 탐욕을 부추기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행복은 당연히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은 행복한 순간보다 고통스러운 순간이 더 많게 태어났습니다. 때문에 꼭 행복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은 오히려 행복에게서 멀어지게 만듭니다. 그리고 그 방법을 물질적인 곳에서 찾을 경우 행복과 더 멀어질 수도 있습니다. 인간은 적응하는 생물이기 때문에, 행복을 언제나 물질적인 방법으로 만족한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저자는 한국인의 삶을 힘들게하는 원인 중에는 심리적인 부분만 바꿀 수 있다면 극복할 수 있는것이 많이 있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미처 의식하지 못해도, 한국사회에서 살다보면 안고 있을 수 있는 콤플렉스들이 삶을 힘들게 한다는 것입니다. 결혼식을 소박하게 한다고 해서, 명품을 사지 못한다고 해서, 강남8학군에 자기 자식들을 보내지 못한다고 해서 삶이 불행해질거라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마음을 비우고 차분히 생각해보면 이러한 집착이 사실은 아무것도 아니였음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쉽게 이런 인식을 할 수는 없습니다. 저자는 마음이 불안할수록 무의식에 귀를 기울이고 진정으로 자신이 원하는 심리를 찾으라고 조언합니다. 콤플렉스는 우리를 괴롭히기도 하지만, 동시에 우리를 성장시키기도 합니다. 콤플렉스를 억압하고 부정하기보다는 이해하고 극복할 때 새로운 삶의 에너지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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옷장 심리학 - 여자의 마음을 치유하는
제니퍼 바움가르트너 지음, 이현정 옮김 / 명진출판사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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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와 중국음식을 먹으러 가기 위해 지하철에 탔을 때 한 할아버지를 본 적이 있습니다. 지하철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었지만, 그 할아버지는 단연 독보적으로 눈에 띄었습니다. 멋쟁이 노신사풍의 패션이였는데, 구두부터 양말, 바지, 벨트, 상의에 안경, 모자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이 형광 연두색이였기 때문입니다. 형광색 탱탱볼 같은 할아버지의 인상적인 패션은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저런 옷을 걸치고 다닐까?' 와 같은 생각을 하게 만듭니다. 저자는 바로 이런 질문에서 심리학을 시작합니다. 이상한 옷차림의 주인공들은 단지 옷에 관심이 없거나 패션 센스가 부족한 것보다는, 내면의 심리적인 문제가 표출된 것으로 보아야 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입니다.

저자는 옷장에 걸린 옷들은 우리의 생각과 감정이 담겨 있기 때문에, 그 사람의 무의식을 반영한다고 말합니다. 옷장에 있는 옷들의 다양한 형태를 통해 저자는 심리적인 문제를 찾고자 합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은 옷이 지나치게 많은 경우입니다. 능력이 된다면 얼마든지 사도 상관은 없지만, 난방비가 밀려있고 굶으면서까지 옷을 산다면 그것은 분명 심리적인 문제가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쇼핑중독증입니다. 또한 항상 동일한 색상의 옷만 입는다면, 그것은 무기력감의 표현입니다. 저자는 이렇게 동일한 색에 집착하는 경우 우울증까지 이어질 수 있다고 지적합니다.

요새 뉴스에 여고생들이 너무 치마를 짧게 입는다는 기사가 실린 적이 있습니다. 이처럼 어울리지 않게 노출하는 것은 심리적인 문제인 과다 노출증을 가질 수 있다고 말합니다. 사회심리학적으로 남성은 여성을 두 가지 관점으로 해석합니다. 때문에 여성은 이 두가지 관점을 강요받는 불안한 결정을 하는데, 사회심리학 용어로 '마리아-창녀 콤플렉스'라는 것입니다. 순결한 여성인 마리아와 잠자리를 하고 싶은 여성, 창녀라는 두 개의 배타적인 영역에서 과다노출증 여성들은 무의식적으로 창녀의 영역에 서게 됩니다. 저자는 여성의 경우 2차 성징이 빠를수록 과다 노출증에 걸리기 쉽다고 말합니다. 신체적으로 빨리 성숙하는 경우 큰 옷으로 가리거나, 오히려 심하게 노출함으로서 불편함을 상쇄시키려 합니다. 이런 과한 노출 현상은 성적, 심리적 모욕의 결과일 가능성이 크며, 내면의 성장을 방해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명품만을 과도하게 선호하는 사람들의 경우 자아의 정체성이 상실된 경우입니다. 자신감이 없기 때문에 브랜드에 집착하며, 브랜드 속으로 숨어드는 것입니다. 브랜드는 광고를 통해 만들어지는 이미지를 사람들에게 브랜드라는 로고에 각인시키는데, 이는 파블로프의 개 실험에서 사용된 고전적 조건화 작업입니다. 이런 이미지는 다른 사람들도 인정하기 때문에 자신에게 부족한 점을 브랜드로 메우는 선택은 아주 쉬운 선택입니다. 하지만 재정적으로는 심각한 타격을 받으며, 내면의 부족한 부분을 메꾸기 위해 외적인 요소에 너무 집착하는 것은 한계가 있습니다. 브랜드로 문제를 해결하는것은 일시적이며, 문제 해결의 해답이 되지 못합니다.

메건의 프로필은 마치 이력서같았다. 지금까지 무얼 해냈고 어떤 기관에 소속되어 있는지 등이 나열되어 있었고, 게시된 사진은 마치 성공 카탈로그 같았다. 자신을 자랑스러워하는 것은 전혀 문제될 게 아니다. 그러나 메건의 프로필은 외부의 평가 모음집에 지나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의 평가를 빼고 나면 메건 자신의 가치에 대해 알 수가 없었다. 메건은 '의사, 1등, 아이비리그 출신'이라는 단어 외에는 자신을 나타내는 내면의 특징을 제시하지 못했다. 성취만 남고 자신의 본 모습은 없어진 상황이었다. - p.197 

저자는 이 외에도 너무 헐렁한 옷을 입거나, 나이에 맞지 않는 옷을 입거나, 장소에 맞지 않는 옷을 입거나, 여성들이 아줌마가 되었을 때 파마머리와 같은 동일한 패션에 집착하는 등 다양한 상황에 대한 심리적인 문제와 그 해결책들을 논하고 있습니다. 사람은 심리적인 문제가 해결되었을 때는 그 변화를 겉모습에서부터 느낄 수 있습니다. 반대로 말하자면, 겉모습에서부터 심리적인 문제를 치유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심장에 병이 났을때 의사가 심장을 열듯이, 이 독특한 심리학자는 사람들의 마음에 난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옷장을 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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