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종기와 사투를 벌이다 - 조선의 역사를 만든 병, 균, 약
방성혜 지음 / 시대의창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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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어렸을때는 사극을 즐겨 봤습니다. 사극 중에서〈용의 눈물〉이나〈허준〉같은 경우 매주 방송시간을 기다리게 했던 작품들이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사극을 보면 자주 등장하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종기'입니다. 사극에서 종기는 극중 인물들의 생명을 위협하며 맹활약합니다. 놀라운 점은 위협받는 대상이 때론 왕이기도 하다는 사실입니다. 어렸을 때는 종기를 단순한 피부병 정도로만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에 한 나라의 왕이 한낱 종기에 죽임을 당한다는 것은 매우 놀라운 일이였습니다. 더 나아가 조선시대의 의학술, 기술력에 대한 편견이 생기게 했습니다. 하지만 저자는 이 책을 통해 그러한 생각이 부족한 지식으로 인한 선입견에 불과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과거에 종기라는 병은 때로 사람의 목숨을 앗아 갈 수도 있는 심각한 질병이었습니다. 죽음을 부를 수도 있었던 과거의 종기는 현재 우리가 생각하던 고약을 붙이거나 항생제나 소염제 처방으로 금방 낫는 병이 아니였습니다. 종기는 현대적으로 표현하면 붓고 열나고 아프고 붉어지는 염증이 생겼다는 말인데, 부었던 곳에 고름이 생겨날 때 이를 종기라 했습니다. 종기가 피부에 생기면 창양(瘡瘍), 근육이나 혈관에 생기면 옹(癰), 뼈에 생기면 이를 저(疽)라고 불렀습니다. 종기는 간이나 폐를 비롯해 몸 어느 곳에서나 생길 수 있었는데, 이를 뭉뚱그려 모두 종기라고 불렀던 것입니다. 종기의 현대적 개념은 봉와직염, 림프절염, 관절염 등을 비롯해 암까지 적용되는 질병이였습니다. 의학기술이 계속적으로 눈부시게 발전하는 현대에 들어서도 이러한 질병의 완치율이 100퍼센트가 아니며, 암이 여전히 사망률에서 차지하는 비중을 생각해 보면, 조선시대에 종기로 인해 심지어 왕까지도 죽을 수 있었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때문에 조선의 의료 역사는 종기와의 싸움이며, 이는 현대 의사들의 싸움과도 별반 차이가 없었습니다. 종기는 역사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기도 했습니다.《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조선의 왕 27명 중에서 종기를 앓았던 것으로 기록된 왕은 12명이나 됩니다. 현대에서도 대통령의 건강이 미치는 파급력이 엄청난데, 왕이였다면 그보다 더했을 것입니다. 문종의 경우 세자 시절에 시작된 종기가 낫지 못하고 일찍 죽는 바람에 단종이 어린 나이에 즉위해야 했고, 결국 세조로 이어지는 정치적 급류가 시작된 단초가 됩니다. 종기와 관련된 기록을 보면 성종의 경우 대장암을, 연산군은 모낭염을, 광해군은 화농성 이하선염을 앓았을 것으로 추측됩니다. 이러한 의학적 기록들은 현대인들의 질병이나, 조선시대의 사람들의 질병은 별 차이가 없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종기를 치료하는 것은 국가적 선결 과제였기 때문에, 효과가 있다고 알려진 약재나 용하다고 알려진 의원은 직위와 성별, 나이를 불문하고 받아들이는 개방적인 태도를 보였습니다. 인상적인 것은 종기 치료에 사용되는 여러 방법들이 현대에서도 사용될 수 있고, 사용되고 있는 방법이기도 하다는 것입니다. 대표적인 것이 거머리 치료인데, 중종과 문종의 경우 거머리 치료를 받은 기록이 있습니다. 중종은 거머리 치료의 효과에 만족해했는데, 중종실록 28년 2월 11일의 기록을 보면, '내가 여러 달 병을 앓다가 이제야 거의 회복되었다. 약방제조와 의원들에게 상을 주지 않을 수 없다. (중략) 동지 박세거와 홍침은 품계를 올리며 각기 쌀과 콩 6석씩 내리고, 김상곤은 품계를 올리며 아마 한 필을 내리고, 김수량, 노한명과 장무관원은 각기 아마 한 필씩을 내리고, 의녀 대장금과 계금에게는 쌀과 콩을 각각 15석씩, 무명과 베를 각기 10필씩 내리고, 탕약 사령 등에게는 각기 차등 있게 상을 내리라.'고 말합니다.

종기와 싸운 조선시대 의학의 기록들은 매우 놀랍습니다. 많은 의학자들이 업적을 남겼는데, 그 중에서 임언국의 경우 십자형 절개법이라는 치료법을 선보였고, 이를 일본의 사학자인 미키 사카에는 임언국을 근대 외과학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프랑스의 피레에 견줄 만하다고 평하기도 했습니다. 또한 현대에 프로바이오틱스라고 부르는, 유익한 미생물 식품을 조선시대에서 치료용으로 사용했는가 하면, 현대의 항생제와 소염제에 해당하는 것들도 자연에서 찾아내 종기 치료에 사용했습니다. 당시 사용되었던 재료들은 얼핏 보기엔 원시적이고 비과학적으로 보이지만 현대적 관점에서 보면 나름 과학적인 요소가 곳곳에 배여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의학적 기반은 다른 분야에서도 사용함으로써, 전반적인 사회 발전에 큰 역할을 합니다.

역사적 기록으로 볼 때 우리나라의 검시제도가 가장 화려하게 꽃피기 시작한 것은 세종 20년 경이다. 놀라운 것은 검시방법 중에는 지금도 충분히 활용할만한 것이 있다는 사실이다. 중독사를 판단할 때 은비녀를 조각수로 깨끗이 씻어 시체의 목구멍 안에 넣고 입을 종이로 오랫동안 밀봉한 뒤 이를 꺼내보아 만일 그 색이 푸르거나 검게 변하였으면 다시 조각수로 비녀를 씻어 본다. 그래도 그 빛깔이 없어지지 않으면 그것은 독약을 먹고 죽은 것으로 판단하였다는 것이 그 유명한 '은채법'이다. 독을 먹은 지 오래된 시체에는 '조작훈증법'을 사용했다. -《죽은자의 권리를 말하다》, p.23 

이렇게 인상적인 조선의 의학 발전에도 불구하고 조선의 왕들은 종기로 많은 고통을 받았습니다. 당대 최고의 의학자들이 보필했음에도 불구하고 종기가 쉽게 낫지 않았던 이유는, 왕이라는 특수성 때문에 생활방식을 바꿀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루에 다섯 끼를 먹고, 가만히 앉아 있어야 했고, 하루 종일 격무에 시달리며, 정신적인 스트레스에 시달리는 생활이 병을 불러왔습니다. 조선시대 왕의 생활은 현대인들의 삶과도 많이 비슷합니다. 물론 현대인들은 점점 건강해지고 있습니다. 항생제와 소염제의 접근성도 그렇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주거 환경입니다. 하버드 의대 교수인 제임스 길리건은 "근대사회에서 수많은 병을 물리친 가장 효과적인 의학적 업적은 의사, 병원, 혹은 약의 역할이 아니며, 이 상하수도 체계야 말로 인류의 역사 중에서 가장 효과적인 의학적 업적이다."라고 평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런 진보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현대인들은 아픕니다. 여전히 암의 시대이고, 아토피의 시대입니다. 좀 더 건강한 삶을 위해서, 종기와 치열한 싸움을 벌였던 조선시대의 기록들이 말해주는 교훈을 경청할 필요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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