캠프힐 사람들 - 아름다운 동행, 발도르프 특수교육의 장애인복지 철학과 실천
로빈 잭슨 엮음, 김은영.나수현 옮김 / 지와사랑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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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아동 통합교육과 분리교육, 무엇이 옳은가

 

장애아동 통합교육 정책이 과연 옳은 것인가?

그렇다고 장애를 가진 아동과 장애가 없는 아동을 언제까지 분리시켜 놓을 것인가?

장애가 있고 없음을 기준으로 사람을 구별하여 교육한다는 것이 피부, 성별, 인종, 성적 지향을 이유로 사람을 차별하여 교육하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장애가 있음이 분리교육을 시켜야 할 정당한 이유가 되는가?

심각한 중증장애가 있는 아동에게 과연 통합 교육이 옳은 것인가?

 

<아름다운 동행 캠프힐 사람들>을 읽게 된 근본적인 이유는 내가 위에 쓴 의문들과 전혀 상관이 없다.

단지 [특수교육]이라는 단어와 [장애인복지]라는 단어가 이 책을 선택한 이유의 전부였을 뿐이고 책을 읽기에 앞서 발도르프라던가 캠프힐이라는 것에 어떠한 사전정보도 없었을 뿐이다.

 

내가 이 책을 읽은 후 갑자기 위와 같은 생각을 한 이유는 캠프힐이라는 곳이 장애를 가진 아동들을 교육하는 기숙학교였기 때문이다.

특히 '제19장 진정한 통합교육이란 무엇인가'를 읽고 나서 이런 의문이 생겼다. 내가 대학교 1학년 때, 통합교육이라는 것을 알게되었고 그 때 당시 일본을 제외한 전 세계적으로 장애아동 통합교육이 이슈화되어 막 진행되고 있는 상황일게다.

나는 장애아동과 비장애아동이 통합교육을 받는게 더 옳다는 입장이었고 그 이유는 어렸을 때부터 장애와 비장애 아동들이 통합교육을 받는다면 서로 다름에 대한 이해가 저절로 생기기 때문에 점차 사람에 대한 차별이 없어질 수 있을 거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애초에 차별이란 서로 잘 모르기 때문에 오는 두려움에서 비롯된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고 통합교육으로 어렸을 때부터 장애에 대해서 이해를 하게 된다면 두려움이 사라질 것이고 그로인해 차별이 조금씩 사라질 수 있을거라는 생각때문에서였다.

 

그러나 캠프힐 학교에서의 주장을 조금 다르다.

캠프힐에서는 통합교육이 장애아동이 가진 하나의 권리일 수는 있지만 그것이 의무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입장이다.

일단 장애의 특성이 다르고 일반학교(비장애학생이 다니는 학교)는 각 장애에 대하여 맞춤교육을 할 수 있을만큼 융통성 있지 않으며 비장애 또래 학생들에게 따돌림을 받아 사회적, 정서적으로 고립되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 캠프힐의 입장이다.

그에 반하여 캠프힐의 경우 장애에 대해 충분한 이해를 가진 교사들이 상주하며 오랜 시간을 거쳐 각 학생들이 필요로 하는 맞춤교육이 가능하기에 비록 분리교육이기는 하나 오히려 장애아동들에게는 통합교육보다 질적으로 더욱 좋은 환경을 제공하고 있다고 자부한다.

 

이것에 대한 나의 생각은 캠프힐의 특수교육이 가능한 이유는 교사들의 인프라가 충분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주 특수한 경우에 있는 소수의 중증장애 혹은 중복장애 같은 경우는 캠프힐의 특수교육이 더 알맞을 수 있겠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는 통합교육이 더 옳다고 생각한다.

책에서도 나온 바와 같이 캠프힐에서 교육을 받는 대부분의 장애아동들은 자폐성 장애, 지적 장애, 중복장애, 유전적 결함으로 인한 자폐 혹은 지적 스펙트럼 장애를 가지고 있다.

이런 경우는 각 학생들의 지적 수준과 이상 행동의 이유와 징후가 각기 다르기 때문에 통합교육이 어려울 수도 있다.

그러나 뇌병변장애, 시각 장애, 언어 장애, 청각 장애 등 지적 능력과 사회적 의사소통 능력이 비장애인과 같은 경우라면 분리교육보다는 통합교육을 하는 것이 더 옳다는 생각이 든다.

또 자폐성 장애나 지적장애, 중복장애 같은 경우에도 캠프힐과 같이 충분한 교사 인프라, 장애에 대한 감수성만 있다면 통합교육을 할 수 있을거라 생각한다.

단, 통합교육의 조건에는 학생들이 공부를 할 때 필요한 특별한 학습 기기나 활동보조 서비스의 지원 같은 사회적 지원이 필요하다.

분리교육과 통합교육. 무엇이 더 옳다고 할 수는 없다.

다만 장애에 따라 사회 서비스의 지원이 달라져야 한다는 것은 사실이다.

 

덧붙여서 말을 하자면 캠프힐은 이미 2~30년전의 구시대의 모델, 구시대의 발상이 아닐까?

2013년 영국에서의 캠프힐이란 한국의 장애인거주시설과 다름이 없고, 장애아동에 대한 교육은 통합교육을 지원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캠프힐을 본받아 한국의 캠프힐, 반기문마을 같은 것을 만들어 징애아동에 대한 분리교육, 나아가 장애인 마을 공동체를 만들자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근데 그것을 자세히 들여다 보면, 현재의 장애인거주시설과 다르지 아니하고, 오히여 장애와 비장애를 분리한다는 의도를 가진 것 뿐인것 같다.

나는 아무리 좋은 목적이라고 장애인이 특수한 장소에 고립되어 있는 것에 반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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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살을 할까, 커피나 한 잔 할까?
엘리엇 부 지음 / 지식노마드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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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에 이런 책 잘 안 읽는 편이다.

여러 사람들이 쓴 말, 사용한 말 중애 한 문장만 모아둔 책은 내 취향이 아니라서.

예를 들어 셰익스피어가 십이야에 쓴 "동정은 사랑의 시작이다." 라는 문장.

이 문장의 앞뒤맥락은 올리비아가 여성인 바이올아의 남장에 반하고 사랑고백을 하자

바이올라는 오라버니를 잃은 자신의 처지와 같은 올리비아를 동정하기에 "난 당신을 동정할 뿐이다."라고 했을때,

올리비아가 "동정은 사랑의 시작"이라고 말하며, 자신의 사랑을 계속 나타내고 있다.

 

근데, 앞뒤상황 모르고 "동정은 사람의 시작이다" by 셰익스피어, 희곡 십이야

라고 쓰여져 있을 때, 이 문장을 얼마나 이해할 수 있을까.

그래서 나는 유명인사들의 단편적인 문장을 모아둔 책을 싫어한다.

 

이 책이 조금은 신선해보였고, 구매를 선택했던 이유는 저자가 이런 인용구를 자신의 생각대로 변형한 것이 꽤나 재미있다고 생각해서이다.

근데, 문제는 다 읽고 나서 돈이 아깝다고 느껴졌다.

그 변형된 것이 어떤 깊은 맛이 있는게 아니라 인스턴트처럼 느껴졌기 때문일 것이다.

 

유명한 철학자나 명사의 사상과 생각을 더 잘 이해하려면 단편적인 문장이 아니라 그의 책 한권을 제대로 읽는 것이 중요한데, 이 책은 그건 아니다.

 

유명인사가 한 말을 변형시켜 길이 남기려면, 자신의 철학이나 사랑이 확고해야 한데, 그것도 아니다.

 

결국 이 책은 그저 인스턴트였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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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치 - 상 열린책들 세계문학 15
도스또예프스끼 지음, 김근식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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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스도예프스키의 백치를 읽게 된 결정적인 이유는 2010년에 연극 [백치, 백지]를 보고

책을 사게 된 결정적인 이유는 2011년에 연극 [백치, 백지]를 다시 보고.

 

도스도예프스키의 책에서는 명확하지 않았다.

오히려 연극을 보았기에, 연극 덕분에 책을 이해하기 쉬웠다.

공작 뮈시킨이 예수의 이미지라는 것을, 나스타샤가 막달라 마리아와 같은 이미지 라는 것을

로고진은 유다같고, 뮈시킨 주위의 사람들은 예수를 따르면서 나중에는 그를 죽이고 비웃던 그 많은 사람들을 닮았다는 것을

연극을 보고 이미지를 이해한 뒤에 책을 읽으니 어지러운 관계도가 명확히 그려지고

문자로 읽어도 이해할 수 없고, 느낄 수 없는 감정을 이해하고 느낄 수 있었다.

 

배우들을 통해서 들렸던 그 대사와 공기를 통해 전달되었던 그 감정

뮈시킨 "왜 그래요? 당신 이런 여자 아니잖아요. 이러면 당신 가슴만 더 아프잖아요."

- 아파? - 응 - 너 돈 필요해? - 아니 - 그럼 왜 이래! 너만 힘들잖아!

 

극에서 뮈시킨과 나스타샤, 로고진에 초점을 두고 극을 꾸려갔기에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책에서는 나스타샤 뿐만 아니라 뮈시킨이 감싸안으려던 그 모든 사람과 상황이 겹쳐지기에 이해하기가 더 힘들었다.

 

고전이란, 사람의 심리와 당시의 상황, 저자의 철학이 깊게 녹아내려 있고.

한국과는 다른 나라 사람이 가진 감성과 문화를 알아야 하니, 더욱 이해하기 힘들다.

게다가 여기는 한국과 가깝지만 너무나 먼 나라 러시아이기에.

 

책으로 이 책을 이해하려면 몇 번을 더 읽어야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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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이 기둥에 걸려서 바닥까지 내려온 모양새를 하고 있는 무대.

그 무대의 중앙에 작은 모래바닥.

그리고 무대와 객석 사이에도 모래바닥 하나.

등퇴장 경로가 무대위에서도 이루어지지만

가끔씩은 객석의 계단으로 등퇴장하는 인물들.

 

그 옛날 읽었던 운영전이 무대로 올라왔다.

김진사와 궁녀의 사랑이야기

 

언제쯤인지 어떤 계절인지는 알 수 없다.

단지 꽃놀이를 하러 나온것을 보면 꽃이 만발한 4월이나 5월일까?

불이 켜진 무대위에는 두 명의 남녀가 앉아있고

다 낡은 도포자락을 훠이훠이 휘두르며 유영이 계단을 내려온다.

무대와 객석 사이에 있는 모대바닥에 앉은 유영이

시를 쓰다 책 한권을 발견하다.

그런데 뒤의 사람들이 이 책의 시를 알고있다?

 

이 시를 알고 있소?

 

아니, 그 전에 이 사람들은 누구일까?

누구이길래 이 한적한 곳에서 이 늦은 시간에

젊은 남녀가 함께 앉아 술을 마시고 있는 걸까?

 

그들은 김진사와 운영. 이제 두 남녀의 사랑이야기가 시작된다.

 

안평대군. 세종이 사랑했던 그.

세상에 때 묻지 않은 깨끗한 시를 쓰겠다며

순수한 여자아이 10명을 궁녀로 들여 6년간 시를 가르쳤다.

밖으로 내보배지 않고 사람들과의 접촉을 금한채로

나 안평대군 이 인간 싫다. 짜증난다.

왕의 핏줄이라는 이유로 권력을 다툼을 많이 보았을 터

그러기에 순수함이나 그런 것들에 집착할수 있다.

그러나 10세 내외의 여자아이들에게 사람들과 접촉시키지도 않고

궁 내에서만 생활하게하며 자신 멋대로 하는게 옳다는 말인가

아무리 왕족이라지만 이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운영'만 하더라고 13세때 이 곳으로 들어와 지금 19세이다.

'운영'뿐만 아니라 이 곳의 모든 궁녀들이 그러하다.

그들은 나이는 16세~20세 내외의 여인들.

한창 밖으로 나가서 세상을 보고싶은 그녀들인데 궁 안에만 머울러 있다.

그리고 안평대군은 밖에서 진사들이나 생원들을 불러 시놀음을 할 때

이 여인들은 누구도 볼 수 없는 그들의 처소에서 하루를 보낸다.

 

어느 날, 안평대군은 궁녀들에게 시를 쓰라 하였고 그녀들은 시를 썼다.

근데 안편대군은 운영의 시가 사람을 그리워한다며 역정을 낸다.

하지만 이것은 그가 뿌린 씨였는데?

안평대군이 지난 가을 궁녀들의 처소로 들인 김진사.

운영은 김진사에게 반한 것이고 그 마음이 시에 녹아내린 것이다.

사실 이거 안평대군이 잘못 한거라 생각한다.

남자가 집 안으로 들어왔는데 여자만 10명이고

그녀들이 시와 미모가 출중하며 김진사도 모든 것이 뛰어난 사람일진대

궁녀들 중 한 사람이라도 그에게 반하지 않는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

뭐... 운영만 김진사에게 빠진 것이라면 그녀 혼자만 마음을 접으면 되는 것이지만

문제는 김진사도 운영에게 첫 눈에 반했다는 것.

그리고 그녀를 다시 보기위해 무녀까지 찾아가도

동네 건달 특에게도 여러가지 부탁을 한다는 거.

 

그리고 안평대군 몰래 사랑놀음을 하였지만 그게 그리 오래가지는 못하였다.

이 놈의 [특] 녀석이 운영이 김진사를 위해 빼돌린 패물을 가지고

놀음을 하다 모두 잃었고

그 패물이 안평대군 처소에서 나온 거라는게

온 저작거리에 소문이 다 퍼졌으니까.

 

결국 이 사실을 들은 안평대군은 화가나서 운영한데 죽으라며 역정을 내다

운영을 다른 곳에 감금을 하였는데

그녀, 결국 자살을 하고

운영의 죽음에 대한 슬픔을 이기지 못한 김진사로 죽음을 맞이한다.

 

되게 슬픈 이야기이고 멋드러진 한시가 끊임없이 나오는 공연

게다가 연극인데 러닝타임 150분.

하지만 후기쓰기 상당히 어렵고 기승전결도 무덤덤하게 흘러간다.

게다가 공연 본지 일주일쯔음 지나서 쓰는데 더 힘드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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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게쓰려고 했지만...  사실 본 지도 일주일 넘게 지나서 그냥 짧게 쓸란다. 연극 [아마데우스]는 1984년 만들어진 영화 [아마데우스]를 연극 무대로 옮긴 것이다. 영화 [아마데우스], 연극 [아마데우스], 뮤지컬 [모짜르트]를 비교해서 본다면 상당히 쟤미있는 글이 될 수도 있겠지만 난 영화 [아마데우스]는 기억이 거의 안 나고 뮤지컬 [모자르트]는 보지 못 했다는 것이다.

 

영화[아마데우스]는 살리에르가 모짜르트를 독살하고 시간이 많이 흐른 후 그것을 회상하며 자신의 죄를 꼬뺶한따는 냬용이라면 연극 [아마데우스]는 모짜르트가 죽은 뒤 32년 후, 살리에르가 자신이 모짜르트를 죽였다고 거짓으로 스캔들을 낸 후 모짜르트의 이름과 함께 자신의 이름도 후세에 영원히 남기기로 한 것이 다르다.

 

살리에르는 모짜르트에게 다양한 감정들을 가지고 있다. 신을 선택을 받은 사람에 대한 시기와 질투, 그리고 부러움. 후세에 전해질 악보를 그리는 사람에 대한 질투. 그를 이겨보려 갖은 노력을 하지만 그럴 수 없다.

 

그 시대의 많은 사람들은 살리에르를 더 인정했다. 그러기에 살리에르는 궁정제1작곡가라는 자리가지 올라갈 수 있었다. 하지만 살리에르의 눈에 다른 사람들에게 인정받은 것은 그닥 큰 가치가 없었다. 그에게 필요한 것은 신의 인정이었다. 모자르트가 그린 악보 원본을 보았을 때, 그는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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