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장 내용과 감상 정리 


2장에서는 국가와 여성의 관계, 국가페미니즘이 어떻게 만들어졌고 어떤 딜레마에 빠지게 되었는지를 말한다. 이를 위해 국가와 폭력의 상관성을 먼저 이야기하고 있다. 여기 언급된 오쿠다 히데오의 소설 <남쪽으로 튀어>를 예전에 읽으면서 과연 이렇게 살 수 있을까, 와 더불어 국가의 '존재'에 대해 잠깐 생각했던 기억이 난다. 한국인으로 한국의 국적을 가지고 프랑스에서 살아가고 있는 내 위치에 대해서도 자주 생각하는데 시민으로 인정받는다는 것이 인종, 계층, 젠더, 그밖의 조건들에 따라 얼마나 달라질 수 있는지를 실감하며 산다는 건 매우 불쾌한 일이다. 저자의 말마따나 "국가의 시민이 되는 자와 그렇지 못한 존재들 사이에는 틈새가 있다. 그렇기 때문에 국적, 시민권, 영주권 등을 얻어 국가의 구성원이 됨으로써 인간대접을 받으려고 열심인 사람들의 입장에서 보자면, 우에하라의 저항은 웃음을 유발하는 사치스러운 놀이처럼 보일 수도 있다."(50) 그러니까 우에하라는 일본인이고 일본 국적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일본 땅에서 그렇게 '사치스러운 놀이처럼' 보이는 행동을 할 수 있었던 셈이다.(잘 기억나지는 않지만 아마 우에하라가 그러고 있을 동안 그의 아내는 돈을 벌었을 확률이 높다.) 프랑스인이 아니고 프랑스 국적을 갖고 있지 않은 나는 여전히 이 사회 이 국가에서 이방인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땅에서 살려면 끊임없이 나를 증명해야 한다. 내가 이방인이라는 것, 이방인이지만 이 국가에 '충성'하고 사회에 '이바지'할 수 있는지를, 돈을 벌어 세금을 낼 수 있는지를, 기타등등 기타등등. 증명하지 못하면 협박을 받는다. 못해? 그럼 너네 나라로 돌아가. 나는 선거권을 가진 프랑스 국민이 아니므로 '사치스러운 놀이'를 할 수 없다. 추운 겨울날 아침, 체류증 갱신을 위해 이민국 앞에서 찬바람을 맞으며 줄서서 두 시간을 기다린다. 굴욕적이라 느끼지만 하라는 대로 한다. 나에게 프랑스라는 국가는 무슨 의미인가?


("근대 민주주의는 한편에서 법적 수준의 평등을 실현하는 동시에, 다른 한편에서는 다양한 소수자 집단을 재생산해왔다. 이러한 기술은 법이 아니라 지식 권력에 의존한다. 배제의 원리가 가장 폭력적인 방식으로 실현되는 대상은 비시민 이주민 집단이다. 이들은 국가의 영토에 거주하지만, 국가법의 외부에서 살아가는 존재다. 여기에 다른 소수자 집단과 이주민의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국적nationality이 근대 시민성 모델의 핵심인 이상, 국가의 법이 국적 없는 인간을 평등한 권리의 주체로 인정할 방법은 없다. 그래서 이주민은 결코 포괄될 수 없고, 오로지 배제의 대상만 되는 특수한 집단이라고 할 수 있다."(박이대승, <임신중단에 대한 권리> 중에서) 아침에 읽고 있던 책에서 이 구절을 발견했다. 좀 이해가 간다.)


두번째 챕터 '국가법 이전 혹은 너머의 여성'에서는 국민일 수 없었던 여성, 국가법으로부터 벗어나 있었던 여성에 대해 이야기하고, 모성을 기반으로 한 보살핌의 윤리에서 우월성을 찾았던 페미니즘이 남녀평등으로 눈길을 돌리게 되면서 봉착하게 된 문제를 언급한다. "차이와 평등이라는 페미니즘의 의제 또한 현실적, 이론적인 딜레마에 처하게 된다. 남녀평등은 남녀의 능력에 차이가 없으므로, 여자도 남자처럼 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평등의 논리는 남성을 보편으로 설정하고 그런 보편적인 가치로 여성이 닮아가는 것이다. 남녀평등을 지향한 결과 모두 하나의 성이 되는 값비싼 대가가 기다리고 있었다. '모두가 남성이 됨으로써 동일성을 자기복제하는 것이 페미니즘의 목표인가'라는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다. 남성과 평등한 능력을 인정받아서 제도로 편입한다는 것은 국가의 가치를 보편적인 것으로 수용하겠다는 것과 다르지 않다. 그럴 경우, 차이의 정치에 바탕하여 여성의 특수성과 고유성을 주장하기 힘들어진다. 제도적인 문법을 받아들일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점에서 남녀가 평등하다고 주장했다면, 공적인 정치의 장 안에서 여성특유의 차이를 주장한다는 것은 자기모순이기 때문이다."(57) 성별간 평등을 주장하는 것, 정치의 장에서 여성정치인들이 보여지는 모습, 얼마간 남성과 대등한 위치에 있다고 '여겨지는' 위치에 있는 여성들, 에 대해 의구심이나 불편함을 가졌던 이유가 이것인가 싶다. 페미니즘은 성별간의 평등을 '이루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의 근거로 삼을 수 있는 부분이었다.


이런 '국가페미니즘(국가와 협상, 보호기능에 의존하면서 변화 가능성 탐색 - 국가페미니즘 (좁은 의미의 관료화/제도화된 페미니즘 포함) -> 여성권익보호를 위해 정부의 여성 관료가 되는 것을 의미)'이 한국에서 어떻게 변화했는지가 세번째 챕터의 내용이다. 국가에 복종함으로써 소멸을 자초했다는 관점. 예를 든 단체는 여성개발원(현 여성정책연구원)이다. 어용, 관변 페미니즘의 국가페미니즘으로의 대체. 핑계 같지만 모든 역사에 취약해서 1980년대의 정치사에도 까막눈이지만 여성단체가 어떻게 변화해갔는지를 간략하게 알 수 있었다. 이런 변화과정은 여성운동의 딜레마("여성운동을 위해 여성운동을 무력화시키는데 일조할 수 있다는 점"(61))를 보여주기도 한다. "...MB정권의 출범을 위한 인수위에서 정부부처통폐합대상으로 가장 만만한 여성가족부를 들고 나온 것은 놀라운 일도 아니다. 여성가족부와 여성단체를 제외하고는 보건복지부와의 통폐합을 아쉬워하는 분위기를 찾아보기 힘들다."(63) 10년도 전에 씌어진 글인데 현 세태를 그대로 반영한다. 그릇된 역사를 그대로 반복하는 일은 후퇴다. 지금 한국은 갑절로 후퇴 중이다.


마지막 챕터에서는 지금은 폐지(2015년)된 '간통법'으로 여성과 국가에 대해 말하고 있다. "인생에서 가장 잔인한 진실은 아무리 경이로운 것이라 할지라도 반복되면 경이가 사라진다는 점이다. 아무리 아름다운 경치도 그 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세월이 흘러감에 따라 그런 아름다움에 무감각해지게 된다. 심리학자들은 그런 현상을 습관화라 하고, 경제학자들은 그것을 한계효용체감의 법칙이라 하고, 세상 사람들은 그것을 '결혼'이라 부른다."(63) 매번 아름다운 경치에 감탄하며 살 수는 없지만 가끔은 똑같은 아름다운 경치에도 감탄하게 되듯 사람과 사람의 관계에도 그런 경이로움이 가능하면 좋겠다. 그러자면 열린 마음, 적당한 거리, 방기되지 않는 자유와 의무, 존중과 배려가 필요하다. "불륜은 불륜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무슨 일이 있더라도 대면하고 싶지 않은 '어떤 것'을 감추기 위한 핑계라고 프로이트는 분석한 바 있다. 그 '어떤 것'은 개인에 따라 다를 수 있지만, 인생의 끝에서 마주치게 될 죽음과 만나고 싶지 않다는 무의식적 욕망이 불륜을 꿈꾸도록 만드는 '특별한' 사유가 된다. 이 경우 불륜은 죽음과 허무를 지연시키는 아름다운 유혹으로 포장된다. 프로이트의 분석이 빈말은 아닌 것처럼 보인다."(67) 저자가 예로 드는 무수한(!) 남성작가들의 작품에서는 프로이트의 분석이 일견 맞을 수 있겠다. 그러나... 애인이나 결혼동반자가 있을 때의 '불륜'이 어째서 윤리적이지 못한가에 대해서는 상당한 고민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일단 무엇이 윤리인가, 무엇이 사랑인가, 이런 질문부터. 일평생 한사람만을 '사랑'하고(그 사랑 지속될 리 없지만 그렇다고 가정하고) 그 사람과만 섹스하는 것이 윤리적인가? 내 애인, 내 결혼동반자, 라는 개념이 그 사람을 소유하는 것이 아닌데 말이다. "사랑 없는 섹스는 범죄로 간주했고, 사랑 없는 결혼은 부끄러워해야 할 비윤리적인 것으로 취급했다. 도처에 편재한 사랑은 엄청난 축복으로 간주되지만, 일단 결혼하고 나면 배우자와의 배타적이고 독점적인 사랑만 허용된다. 사랑의 감정은 일생에 단 한 번 일어나는 일회적인 것이 아니다. 사랑은 배우자라는 한 사람에게만 영원히 유지되는 감정도 아니다."(67) 우리는 결혼 제도와 '바람 피우는 것, 불륜', 에 대해 지나친 잣대를 들이댄다. (주로) 이성애에 있어 신체접촉을 너무도 중요시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섹스가 사랑이라고 믿어서이기도 하다. 사랑이 무엇인지 몰라서이기도 하다. 성별 불문, 요즘 시대엔 바람 피우지 않는 사람이 없다고들 한다. 이것이 단순히 육체적 욕망만을 좇는 결과가 아니라는 건 명백하다. "불륜에의 욕망을 법으로 막는 것은 인권의 차원에서 보더라도 폭력적이다. 국가가 그 기원에서부터 폭력적이라면 그런 국가에게 여성들이 간통법 등을 통해 보호를 요청하는 것 자체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간통죄를 민사도 아니고 형사 처벌해 달라고 주장하는 것이야말로 인간의 행복권, 성적 자기결정권을 알아서 포기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더 큰 국가 가부장에게 가서 남편/아내를 혼내주고 자신을 보호해달라고 간청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 못하게 해달라고 가부장적인 국가에게 호소하여 금기를 계속 만들어낼 것이 아니라 금기를 풀어나가는 전략이 필요하지 않을까 한다."(69) 이렇게 되려면 사회경제적 약자인 여성을 보호하는 법안이 여러 방면에서 강화되어야 한다. 정당한 권리를 보장받을 수 있도록 말이다. 갈 길은 먼데 정치판은 쑥대밭이다...


+ 인용

"불륜의 플롯은 개인의 정체성의 문제를 협소한 의미의 가족관계(남편과의 불화, 시댁과의 갈등 등)로 환원함으로써 모든 문제를 '가족 문제'로 만들어버리는 것이다. 또한 이런 방식의 불륜의 플롯은 '가족은 해체되었다'는 소문을 무성하게 만드는 요인이 되며 이를 통해 가족 해체에 대한 근거 없는 위기감을 형성하는 것이다. 따라서 불륜의 플롯은 표면적으로는 가족 이데올로기를 비판하는 듯하지만 실제로는 가족 이데올로기를 재생산하는 주요한 요인이 되는 것이다.

가족 이데올로기는 남편과 아내라는 협소한 의미의 가족 단위의 문제가 아니라 이 사회 전체와 개인의 삶, 그리고 정체성을 구성하는 상상적 구조와 정치적 구조의 토대이다. 따라서 가족 이데올로기를 봉건적 속성으로 치부하는 담론은 가족을 시대착오적인 이데올로기로 스스로를 가치 절하시켜 여성 문제의 본질을 간과하는 것이다. 또한 가족을 자본주의적 모순의 층 속에서 생산/재생산이라는 경제적 모순의 차원에서 탐구하거나 가족 이데올로기를 계급 모순의 한 발현태로 해명하려는 시도 역시 권력 관계의 상상적 모델로서 작동하는 '가족'의 메커니즘을 해명할 수 없다."(권명아, <가족이야기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중에서)



그리 길지 않은 2장을 읽으면서 많은 질문을 던진다. 한국에서 멀리 있다는 이유로 어찌 보면 조금은 객관적인 눈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때로는(요즘은 매우 자주) 한국의 세태가 부끄럽고 때로는 (특히 누가 욕하려 할 때) 편들고 싶은 마음이 든다. 뿌리깊이 박힌 '민족'주의 때문일까. 국가란 나에게 무엇인가. 국가의 구성원이 된다는 것은 무엇인가. 여성인 나에게 국가는 지금 어떤 의미인가. 나는 국가에 무엇인가. 국가에 대한 환상은 어떻게 해야 깨어질 수 있는 것일까. 공적 영역에서 여성이 '남성화'되지 않고 행위주체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이런 추상적인 질문들을 어떻게 하면 구체적인 질문으로 바꿀 수 있을까.


+ 막 던져보는 질문 


* "많은 사람들은 '요즘 세상에 여성이 무슨 억압을 받는다고 그래'라고 하면서 오히려 남성에 대한 역차별을 거론한다."(62) "가부장적인 한국사회가 보기에 여성들은 차별받는 집단이 아니라 이기주의에 빠져있는 집단이다."(63)

-> 이 책이 씌어진 10여 년 전에도 이랬다. 지금도 그렇다. '현실'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이런 생각을 한방에 깨부술 수 있는 방법이 있으면 좋겠다. 이런 사람들을 만나면 가끔은 내가 안다고 생각하는 '현실'이 정말 현실인가 싶을 때도 있다.


*"사실 일부일처제는 남성을 길들여 가정화(혹은 가축화domestication)하려는 여성들이 이루어낸 하나의 성취라고 볼 수 있다."(64) -> 동의하는지? 이 관점에서 일부일처제를 생각해본 적은 없는데... (참고 : 초판 1쇄와 초판 3쇄 책의 문장이 다르다. 내 책은 초판 3쇄. 3쇄가 1쇄보다 더 강경...?)


* '불륜'에 대한 지금의 생각은 어떠한가? 이 단어를 대체할 새로운 단어가 있다면? 대체해야 하나? 없애야 하는 단어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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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2-09-07 21:53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10년전의 현실이나 지금의 현실이나 별로 달라지지 않았는데, 그 현실을 옹호하려는 이상한 논리들은 더 많아지고 더 강경해진듯요.
저는 저기 남쪽으로 튀어 처음 읽었을 때 굉장히 충격적이었어요. 아 국가 역시 이런식으로 유동적으로 생각할 수 있구나라는걸 막 실감나게 느꼈달까요?
물론 난티나무님 말씀대로 그가 일본에 살고있는 일본 국민이기 때문에, 또 진짜로 생계는 아내가 다 해결해주기 때문에라는 단서가 붙었지만요. ^^

난티나무 2022-09-08 19:17   좋아요 2 | URL
맞아요, 거꾸로 가고 있는... ㅠㅠ
어쩌면, 인터넷 가상공간이라는 곳이 더 큰 영향을 끼쳤는지도 모르겠어요. 생각만 하던 것들을 가감없이 쏟아내도 아무렇지도 않은 공간... 말해지지 않았던 것들이 쏟아지는 거라는 생각이 들기도 해요. 그렇게 보면 원래 그렇게 이상한 논리를 내세우는 사람들이 많았다는?...^^;;;;; 그런 분위기에 여러 모로 쉽게 편승할 수 있는 조건이 만들어져있는 시대이기도 하고요. 그리고 이상한 논리들이 부각되기 좋은 조건이기도 하죠...

소설은, 맞아요. 저도 비슷했어요. 지금 다시 읽으면 어떨런지^^ 좀더 비판적인 입장이 될 것 같기는 합니다.ㅎㅎㅎ
 

돈 버는 '번듯한' 직업이 없는 것? 부끄럽지 않다.

일정하게 출퇴근하는 직장이 없는 것? 부끄럽지 않다.

세금신고서에 0이라고 적는 것? 부끄럽지 않다.

공공기관서류의 직업란에 '주부'라고 적는 것? 이건 얼마전까지도 좀 부끄럽고 싫었다. 왜? 사회가 주부를 바라보는 시선, 나 역시도 그 시선으로 나를 보았으니까.

부끄럽지 않다는 말은 딱 그만큼의 무게만을 가진다. 부끄럽지 않다고 해서 당당하다는 말은 아니다. 아무도 '네가 옳다'고 말해주지 않는다. '부끄러운 줄 알아'가 일반적이다. 사회는 사람들을 가스라이팅한다. 가끔 이런 생각들이 어떤 장면으로 상상되어 한꺼번에 몰려올 때 몸서리치게 세상이 무서워진다.


프랑스 생활 20여년 만에 구직사무소(?)에 이름을 올렸다.

국민에게 주는 보조금이 많은 나라, 소득별로 지급금액이 나누어지고, 권리를 누리라고 말하는 것처럼 보이는 관리체제에 들어가려면 증명해야 하는 것이 많은 나라.(어디든 그러하겠지.) 보조금 중 한 가지가 얼마전부터 나오기 시작했다. 그걸 계속 받으려면 일하려는 의지(?)가 있어야 한다고 공무원이 말했다. 그 의지를 증명하라 했다. 나온 돈은 얼마 되지 않는데 기준금액보다 단 1유로가 더 나오는 바람에 관리대상으로 들어갔고 직원이 붙었으며 복잡한 서류처리과정이 시작되었다. 일하지 않는 자, 먹지도 말라!


사회적 약자인 나는 시키는 대로 직업상담소에 이름을 올리고 상담을 받았다. 곧 쬐맨한 개인사업자 등록을 할 예정이기 때문에 사실상 구직을 위해 이름을 올린 건 아니고 보조금 지급관리를 위한 절차라 상담직원도 내 이력과 원하는 직장을 대충 입력하기 시작했는데, 전공이 무엇인지 묻고는 한국어교사,라고...ㅋㅋㅋ 이 좁은 시골에 한국어교사 구하는 데(학교)가 어딨...ㅎㅎㅎ 그 와중에, 이름을 올린 사실 하나만으로 지역교통수단과 전국박&미술관 등을 무료로 혹은 대폭할인가로 이용할 수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이 외에도 아마 '혜택'이 더 있을 것이다.) 처음엔 잠깐 기분이 좋았다. 그러나 잠시 생각해보라. 기차 75% 할인은 거주지 근방으로 한정된다. TGV 등을 제외한 그 지역 기차에만 적용되는 할인이다. 너는 되도록 빨리 일을 해야 하는 사람이니까 다른 지역으로 여행가지 말고 거주지 근방에 있어. 일을 해서 돈을 벌어 기차표를 사도록 해. 네네.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 없이 살기는 불가능하므로 우리는 시키는 대로 한다. 적게 버는 자, 장거리이동도 하지 말라! 경험 기회의 억압. 돈이 없어서 못하는 것들은 어떤 식으로든 그 사람에게 영향을 미친다. 미술관 관람은 반대의 경우라 할 수도 있다. 그러나 또 생각해 보라. 대부분의 박물관과 미술관들은 대도시에 집중되어 있다.(가까운 중소도시의 박/미술관은 이미 무료인지 오래다.) 지방에 사는 사람들은? 미술관 무료면 뭐해요? 가는 데 돈 드는데요? 기차비만 드나요? 잠은요? 식사는요? 사람은 기본욕구(의식주)충족이 안 되는 상황에 놓일 때 시야가 좁아진다. 오직 생존만이 목표다. 이렇게 되면 시간과 노력이 모두 생존에 투입된다. 오 자본주의!     


박물관 전시를 보기 위해 서류를 챙겼다. 매표소에서 '증명'하면 입장료를 내지 않아도 된다. 직원은 서류의 내가 신분증의 나와 일치하는지를 확인한다. 티켓에는 '구직자'라는 문구와 함께 0€가 찍혔다. 표를 받아드는데 미묘했다. 규정당하는 기분.


전시를 보고 나와서 옆지기와 그것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옆지기는 직원이 무료티켓 끊는 우리를 좀 부러워하지 않을까 생각했다고. 일하고 있는 자와 일하지 않으면서 전시를 보러 온 자. 그 사이의 간극. 나는 생각이 달랐다. 과연 그럴까? 직원이 계약직이 아니라 정규직이라고 하고, 꼬박꼬박 안정적으로 월급을 받고, 일년에 한 달 휴가를 가고, 그래도 일 없는 우리를 부러워하겠니. 그 직원은 오히려 우리를 한심하게 생각할 수도 있어. 전문직에 종사하는 사람들이라면 직업상담소에 이름을 올리지 않을 테니까 말이야. 우린 실제로도 그렇지만 서류상으로도 저소득층의 사람들인 거야. 쉬고 있다고 말로 할 때보다 글자로 찍혀 나올 때 우리는 더 확실하게 규정당하는 거지.


물론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했을 수도 있다. 저것은 또다른 삶, 내가 뭐라고 판단하고 잣대를 들이밀 일이 아니라는 생각. 마찬가지로 다른 사람들도 직장을 찾고 있는 저소득층 사람들에게 별다른 감정이나 생각이 없을 수 있다. 열등감에서 나오는 생각일 수도 있고.

그러나... 자기가 내는 세금이 외국인/이민자 밑으로 다 들어간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과연 아무렇지도 않은 시선을 건넬 수 있을까? 정부보조금으로만 생활하는 프랑스인들도 얼마나 많은데? 저소득층을 위한 모든 제도는 사회적 규정짓기로 존재한다. 국가의 관리와 통제. 네가 국민이라는 것을 증명해라!

(+ 옆지기의 아무렇지 않은 당당함과 나의 생각의 차이는 또 젠더의 문제인가 싶어진다. 왜 나는 부러워할 거라는 생각을 털끝만치도 하지 않았지?)


시선의 문제. 나의 위치. 스스로 가난하다고 생각해본 적 없고 하층이라고 생각해본 적도 없는데, 나를 어떤 허상의 위치에 놓고 사는 것은 아닌가. 내가 돈이 없지 '가오'가 없나, 이런. 그러면서도 나는 그들과 달라, 나는 저렇지는 않아, 합리화의 언어로 포장한 시선을 은연중에 내비치며 살고 있지는 않은가. 다르긴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그 시선에 이미 차별이 들어있지 않나. 확실하게 선을 그었지 않나. 그런 의미에서, 외국인이기 때문에 은연중에 장착해버리는 열등감은 참으로 아이러니다.


구직사무소에서 메일이 왔다. 매달 너의 상황을 업데이트해라. 직장을 구하는 일은 잘 되어가고 있는지 보여라. 사업자등록을 했다면 알려라. 한 통이 더 왔다. 너의 체류증 만료일이 다가오네? 갱신한 체류증 갖고 와. 일하려면(정부 돈 받으려면) 체류증 있어야 되니깐. 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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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2-09-06 22:4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외국에서 산다는건 자신의 출신 국가에서 사는 것과는 다르게 신경쓰이는 면이 많겠죠.
며칠 안되는 기간 여행만 갔다와도 집가까운 랜드마크 이런거 보이면 갑자기 마음이 놓이고 편안해지는 기분인데요. 어디에서 살든 내가 정당하게 요구할 수 있는것을 요구하는건데 괜히 내 영역이 아니라고 생각하면 거기에 다른 자괴감이 끼어들기도 하고.... 사는건 이렇게 어디에서든 쉽지 않네요.
그래도 글로벌 시대잖아요. 지구 모두가 우리의 고향인걸요. 밥 맛있게 먹고 힘내요. 역시 우울할 땐 밥이 최고!!! ^^

난티나무 2022-09-07 04:03   좋아요 2 | URL
맞아요 바람돌이님. 어디나 힘든 점이 있고 삶은 쉽지 않죠..
저녁에도 밥을 배부르게 먹고 아직 안 꺼져서 ㅎㅎㅎ 훅훅거리고 있습니다.
우울하지 않아요.^^ 우울해지려고 할 때도 있기는 하지만... 가끔 하는 생각들이고요. 이런 생각이 생활을 이루고 있어서 ㅋㅋ
그래도 맛난 거 찾아댕겨야죠. 저는 식당 밥이 그렇게 좋더라고요? 푸핫
 

[돌봄 선언] 서문 밑줄

돌봄의 위기는 지난 40년 동안 특히 심각해졌는데, 이는 많은 나라가 수익 창출을 삶의 핵심 원리로 보편화하는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 원칙을 받아들이면서다. 이는 곧 금융자본의 이익과 흐름을 조직적으로 우선시하는 반면 복지국가와 민주적 절차와 제도들을 무자비하게 파괴하는 것을 의미했다.
우리가 보아왔듯이 이런 종류의 시장 논리는 현재 팬데믹 통제역량을 현저히 줄어들게 한 긴축정책으로 이어졌다. 많은 병원이 의료 종사자들에게 필요한 가장 기본적인 개인용 보호장구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채 방치된 것이다.
그러나 돌봄과 돌봄 노동의 폄훼에는 더 오랜 역사가 있다. 돌봄은 대체로 여성, 여성적 또 ‘비생산적‘ 이라고 여겨지는 돌보는 직업과 연관되어 오랫동안 평가절하되어왔다. 그래서 돌봄 노동은 변함없이 저임금과 낮은 사회적 지위에 묶여 있었다. 고도의 훈련을 거친 엘리트 계층을 제외하고는 말이다. 지배적인 신자유주의 모델은 단순히 더 오래된 평가절하의 역사를 이용해 불평등을 변형하고 재구성하고 또 심화했을 뿐이다. 어찌 됐든, 신자유주의 주체의 원형은 타인과의 관계를 경쟁과 자기 향상의 틀 안에서만 추구하는 기업가적 개인이다. 그리고 사회조직의 지배적인모델은 협력보다는 경쟁에 기반을 둔 형태로 나타났다. 다시 말하면, 신자유주의는 돌봄의 효과적인 실천을 수행할 수 없고 돌봄에 관한 개념도 없다. 이는 끔찍한 결과를 초래했다.
팬데믹은 우리 대부분이 제대로 돌봄을 제공하지 못하고 또 받지도 못하는 결과를 낳은 신자유주의 시장에 의해 자행된 폭력을 극적으로 드러냈다. 우리는 오랫동안 낯선 사람들이나 우리와 거리가 먼 사람들은 돌보지 않아도 된다고 여기도록 부추김을 받으면서, 가장 친밀한 관계에 있는 사람들을 돌볼 수 있는 역량마저 위축되었다. 놀랍지 않은 일이지만, 우익과 권위주의 정부의 포퓰리즘이 유혹적이라는 것이 다시 한번 증명되었다. 무관심한 세상에서 산다는 것이 심각한 문제들과 견디기 어려운 집단적 불안을 내포함을 감안하면, 쉽게 부추겨졌던 것이다. 방어적 이기심은 이런시기에 번성한다. 안전과 안락에 대한 감각이라는 것이 매우 예민해지면, 다른 사람은커녕 자신을 돌보는 것도 힘들어지기 때문이다. 이런 방식으로 우리가 가지고 있는 돌봄 성향을 ‘우리와 같은사람들‘을 향하도록 재설정하고 재조정하는 전체주의, 민족주의, 권위주의 논리에 돌봄이 가려졌고 또 계속 가려지고 있다. 다름을 배려하고, 또는 더욱 확장된 형태의 돌봄을 개발하기 위해 우리에게 주어진 공간들이 빠른 속도로 줄어들고 있다.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의 잘 알려진 용어를 빌리자면, 우리가 일상적으로 행하는 무관심이 구조적 수준의 ‘평범함banality‘에 젖어들고 있다. 익사한 수많은 난민이나 거리에 점점 많아지는 노숙인들에 대한 뉴스를 듣는 것은 일상이 되어버렸다. ‘돌보지 않는‘ 행위 대부분은 무의식중에 일어난다. 우리 대부분은 필요한 돌봄을 받지 못한 채 고통받는 타인들을 보는 것을 즐긴다거나 가학적 파괴적 충동을 공유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사회적으로 한계 지어진 돌봄 역량과 실천, 그리고 돌봄에 대한 상상력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여기에서 우리는 묻는다. 우리가 돌봄을 우리 삶의 중심에 놓으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
이 선언문에서 우리는 돌봄을 전면에 내세우고 중심에 놓는 정치가 시급하다는 것을 주장한다. 우리가 말하는 돌봄은 ‘직접‘ 누군가를 보살피는 것, 즉 다른 사람에게 육체적·심리적 도움을 직접 제공하는 일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물론 이런 차원의 돌봄도 중요하고 긴급하지만 말이다. (15-16%)

‘돌봄‘은 사회적 역량이자, 복지와 번영하는 삶에 필요한 모든 것을 보살피는 사회적 활동이다. 무엇보다도 돌봄을 중심에 놓는다는 것은 우리의 상호의존성interdependency을 인지하고 포용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선언문에서 ‘돌봄‘이라는 단어를 가족 간의 돌봄, 돌봄 시설이나 병원에서 돌봄 종사자들이 수행하는 직접적인 돌봄, 교사들이 학교에서 수행하는 돌봄, 그리고 다른 필수 노동자들이 제공하는 일상적인 서비스로서의 돌봄을 모두 포함하는 확장된 개념으로 사용한다. 그러나 또 돌봄은 사물도서관Library of things, 협동조합 형태의 대안경제나 연대경제, 주거 비용을 낮추는 정책들, 화석 연료의 감축과 녹지 공간 확대를 위해 일하는 활동가들이 제공하는 돌봄도 포함한다. 돌봄은 누구나 가지고 있는 개인적 능력이다. 이 능력은 이 지구상에 사는 대부분 사람과 생물체들이 번성하고, 지구도 함께 번성할 수 있도록 하는 정치적·사회적·물질적·정서적 조건을 마련한다.
이 선언문에서 취한 우리의 접근 방식은 돌봄을 모든 규모의 생명체에 활성화되어 있고 필요한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우선, 우리의 선언문은 현재 무관심의 지배가 어떻게 모든 규모의 삶을 가로지르며 연결되어 있는지 그 속성을 진단한다. 우리는 기후위기를 유발하는 전 지구적 차원의 문제와 사람보다 이익을 우위에 두는 경제로부터 출발해, 무관심한 국가와 공동체를 거쳐, 무관심의 일상화가 궁극적으로 인간관계의 친밀성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까지 목적의식을 가지고 살펴본다. 그러고는 다시 개인 간 관계로부터 시작해서 지구적 차원으로 규모를 넓혀가며 살펴본다.
이러한 여정은 현재 우리가 처한 무관심 상태에 대안이 될 만한 돌봄 체계에 대한 윤곽을 그리기 위함이다. 이렇듯 다양한 규모를 넘나드는 구성을 택한 이유는 우리의 돌봄 역량이 상호의존적이라는 것과 무관심한 세상에서는 발휘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다. 관습적으로 돌봄으로 여겨지는 실천들, 예를 들면 양육과 간호 같은 행위에 대해 돌봄을 제공하는 사람이나 받는 사람 양쪽에ㅡ즉 우리 모두에게-지원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적절한 돌봄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돌봄이 역량과 실천으로서, 평등을 기반으로 교육되고 공유되고 사용될 때 가능하다. 돌봄은 ‘여성의 일‘이 아니다. 착취되거나 평가절하되어서는 안 된다. 그래서 우리는 어떻게 또 왜 사회적 무관심이 삶의 수많은 영역을 구성하고 장악하게 되었는지를 보여주면서 돌봄 위기의 속성을 진단한다.
그런 후 과거의 예와 현재 상황과 미래의 가능성까지를 참고하여 상호연결된 돌봄체계를 상상해보고 그 밑그림을 그림으로써 해결책을 제시한다. 내일의 정치를 발전시키길 희망한다면 돌봄의 상호의존성에 관한 재고가 오늘날 정치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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얄라알라 2022-09-12 00: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얇지만 강렬했던!
옮긴이가 의외여서 더 좋았던 책인데, 역시 난티나무님 서재에서 다시 만나게 되네요^^

난티나무 2022-09-12 05:56   좋아요 0 | URL
얄라알라님 읽으셨군요.^^
옮긴이가 의외요? 왜요? 궁금^^

2022-09-12 08: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2-09-12 23: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eBook] 임신중단에 대한 권리 - 비합리는 헌법재판소에서 시작된다 오봄문고 2
박이대승 지음 / 오월의봄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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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신중지 이슈에 있어 태아의 생명과 생명권(인간인가 아닌가 언제부터 인간인가)에 대한 이해를 돕는 책. 로대웨이드판결(지금은 뒤집혀 난리났지만), 권리 설명도 유용. 헌법의 오류를 조목조목 지적, 알려주니 임신중지에 대해 혼란을 느꼈다면 꼭 읽어보시길. 제대로 된, 조속한 입법을 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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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9-12 00:0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2-09-12 05: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인간과 비인간, 법적 인간과 권리

<임신중단에 대한 권리> 밑줄

물론 그렇다고 해서 동물을 인간으로 인정하는 민주주의적 법체계를 상상해보는 게 불가능하지는 않다. 예를 들어 고통을 느낄 수 있는 동물 종을 권리의 주체로 인정하는 경우를 상상해보자. 그것이 구체적으로 어떤 형태가 될지는 모르지만, 다음 내용만은 분명히 말할 수 있다. 첫째, 인간과 비인간의 경계는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고통을 느끼는 동물 종과 느끼지 못하는 동물 종 사이로 이동한다. 인간 범주는 단지 확장될 수 있을 뿐, 모든 존재자를 포괄하지는 않는다. 둘째, 고통을 느끼는 동물 종은 우리와 똑같이 인간으로 인정되어야 한다. 법적 인간 개념의 외연이 완전히 달라지는 것이다(편의상 우리를 "우리 인간" 인간 범주에 새롭게 포괄된 동물을 "동물-인간"이라고 부르자). 그럼 동물을 자기 행위의 책임을 지는 권리와 의무의 주체로 간주해야 한다. 예컨대 우리 인간이 동물-인간을 죽이는 행위는 물론, 동물인간이 다른 동물인간을 죽이는 행위도 살인으로 처벌해야 한다. 반면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동물을 죽이는 건 여전히 허용될 것이다. 더 나아가 동물-인간의 참정권을 어떻게 보장할 것인지도 고려해야 한다. 인간이 가진 권리 중 가장 결정적인 것은 정치적 삶에 참여할 권리이기 때문이다. 개별 인간은 정치적 참여를 통해 자신의 권리와 의무를 스스로 정한다. 이러한 민주적 참여에서 배제된 존재는 결코 자율적 인간의 지위를 온전하게 획득할 수 없다. 이런 식으로 상상해보면, 근대정치체제가 전제하는 존재론과 민주주의의 기본 원리를 유지하면서 동물을 법적 인간으로 인정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쉽게 알 수 있다.

대부분의 사람은 동물을 인간으로 인정할 수 있느냐는 질문에 별 관심이 없지만, 태아가 법적 인간이라는 주장은 진지하게 토론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어쨌든 모든 자율적 인간은 태아가 성장한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태아가 법적 인간이냐는 질문을 깊이 탐구해보면, 동물을 법적 인간으로 인정할 때 발생하는 것과 거의 같은 어려움을 직면하게 된다. 일단 태아는 자신의 지성을 사용할 줄 아는 자율적 인간이 아니다. 합리적 판단에 기초해서 자신의 의지를 형성하고, 그에 따라 행위하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기 행위의 책임을 지는 권리와 의무의 주체라고 할 수도 없다. 흔히 태아를 "잠재적 인간"이라고 말하는 경우가 많은데, 잠재적이라는 것은 아직 인간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러나 태아의 경우에도 인간으로 인정하는 게 절대적으로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드워킨은 이렇게 질문한다. 태아의 생명권을 부정한 로대 웨이드 판결에도 불구하고, 주 법률은 태아를 생명권의 주체인 법인격으로 인정할 수 있는가? 물론 가능할 것이다. 기업에게 법인격을 부여하듯이, 심지어 나무를 법인격으로 보는 법체계를 생각해볼 수도 있다. 단, 법이 나무를 인간으로 규정했다면, 나무를 베는 행위를 살인으로 처벌해야 한다. 어떤 경우든 법은 일관성과 체계성을 갖추어야 하기 때문이다. 15 마찬가지로 태아를 법적 인간으로 인정한다면, 어떤 경우에도 임신중단에 대한 권리는 인정될 수 없다. 출생의 배경이 무엇이든 살아 있는인간을 살해할 수 없는 것처럼, 강간이나 근친상간에 의한 임신이라고 해서 태아의 생명을 빼앗을 수는 없다. 또한 태아가 모체의 생명을 위협한다고 해도 임신중단은 허용되지 않는다. 한 인간이 살아 있다는 사실 자체가 다른 인간의 생존을 위협한다고 해서 그를 죽일 수는 없기 때문이

다. 물론 모체의 생명을 살리기 위해 태아의 생명을 빼앗아야 하는 극단적 상황이 발생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선택은 사실상의 차원에서는 임신중단과 같을 수 있겠지만, 권리상의 차원에서는 결코 임신중단이라는 개념으로 규정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법적으로 동일한 지위를 가진 두 명의 인간이 신체적으로 결합해 있고, 둘 중 하나를 살리기 위해 다른 하나를 희생해야만 하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모체를 살리기 위해태아를 희생하는 경우, 그리고 태아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모체를 희생하는 경우는 동등한 두 가지 선택지로 고려되어야 한다. 이런 의학적 선택을 정당화하는 법률을 만들 수도 있겠지만, 그것은 임신중단을 허용하는 법 조항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을 것이다.
태아를 인간으로 인정하는 법체계를 구축하려면, 임신중단 말고도 여러 가지 문제를 고려해야 한다. 예컨대 태아가 자연유산되었을 경우, 인간이 사고나 질병으로 사망한 것과 동일한 법적 절차를 밟아야 할 것이다. 난임 여성이 체외 수정을 시도할 때 다태아 임신을 방지하기 위해 선택적 유산을 시행하는데, 이것도 금지되어야 한다. 이미 착상된 태아를 유산시키는 것은 살인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16 한국의 민법과 형법은 각각 출생 시점과 진통이 시작된 시점을 기준으로 태아와 인간을 구별하는데, 이런 기준도 다 바꿔야 한다. 이러한 문제들을 하나씩 검토하다보면, 태아 생명의 가치를 강조하는 사람은 많아도, 태아를 인간으로 분류하는 법체계를 구축하자고 주장하는 사람은 왜 없는지 이해할 수 있다. (35~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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