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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을 읽기 어려워졌다고 작년 내내 생각하고 그렇게 말했다. 막연하게 이유를 알고 있었던 듯하지만 명료하지는 않았다. 어쩌다 소설을 읽으면 그래서, 뭐 어쩌라고?가 튀어나왔다. 해법을 제시하는 게 소설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기 싫었나 보다. 소설뿐 아니라 시도 그렇고 영상매체물도 그렇다. 모든 시각매체를 통해 전달하고자 하는 것, 재현되는 것, 보여지는 것, 에 민감하게 반응했다. 부정적인 면을 먼저 찾고자 했다. 먼저 눈에 띄는 것도 당연했다. 욕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현실을 그대로 혹은 비슷하게 재현하는 것에 어떤 의미가 있나를 생각했다. 그렇지 않으면 또 어떻게 현실을 알 수 있나도 생각했다. 이렇게라도 여성을, 약자를, 소수자를, 말하지 않으면 어떡하냔 말이냐고, 그러면서도 이렇게밖에 할 수 없느냐고, 이랬다 저랬다.

우연히 영화를 한 편 봤다. <불도저에 탄 소녀>. 제목도 맘에 안 들고 가족구성원에 엄마가 죽고 없는 것도 맘에 안 들고 어린 '남'동생이 있는 것도 맘에 안 들고 '소녀'가 주인공인 것도 맘에 안 들... 아 이건 아닌가. 아무튼 고구마 백만 개. 영화를 보는 내내 드는 감정은 분노다. 그와 더불어 분노라는 감정으로 우리가(여자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되묻는다. 분노는 힘이라 했고 분노는 용기라 했으며 분노는 누구나 누릴 수 있는 감정이라고 했다. 그러나 남자의 분노는 승인/정당화/우쭈쭈되지만 여자의 분노는 히스테리/미친/이상한,으로 취급된다. 영화 속 주인공, 이제 스물인 여자는 할 수 있는 게 없다. 그래서, 할 수 있는 게 없으니 그냥 가만히 입 처닫고 쭈그려 살라는 말인가? 그 아이는 도망갈 수도 없다. 어린 동생(왜 남자냐고!)이 있기 때문이다. 여자는 끝까지 어린 동생을, 아픈 엄마를, 별볼일 없는 아빠를, 껴안고 살아야 하는가? 왜? 여자는 돌봄의 동물이라서? (코웃음) 아무래도 의심을 거두기 힘들다. 시나리오 누가 썼는지, 여자인지 남자인지, 성감수성이나 의식이 얼마나 있는지, 알 수 없고 알 필요도 없지만 다시 한번 생각해 봤으면 좋겠다. 현실의 재현은 쉬운 것이 아니다. 재현 속에 적어도 생각의 방향은 실어야 하지 않겠는가. 고민한 흔적은 보여야 하지 않겠는가.

무슨 대상을 받았다는 청소년 소설을 읽었다. <훌훌>. 제목은 훌훌인데 내용은 '훌훌'하지 않다. 이 소설도 역시 (나는) 고구마 백만 개다. 주인공이 '소녀'이며 어리고 '배다른' '남'동생이 등장하는 것이 불도저 영화와 똑같다. 엄마가 없는 것도 비슷하다. 심지어 얘는 입양아야. 나는 입양이라는 문제를 다른 시각에서도 살펴볼 필요가 있고 인식을 바꾸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당사자가 아니니 그런 말을 하지, 뭐 그런 말 들을 수도 있지만, 으레 사람들이 그렇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저 관습일 뿐이다. 편협한 생각을 버리자. 어째서 주인공이 남자이고 그 남자가 어린 동생을 돌보겠다고 마음먹으면 안 되는가? (아무도 안 된다고는 안 했지. 다만 그렇게 안 쓸 뿐이지.) 입양된 남자가 한 명 더 나오기는 한다. 주인공의 처지를 이해하고 친구가 될 수 있는 관계로. 어째서 '또' 어린 여자가 어린 남자아이를 돌보겠다는 마음을 먹어야 하는가?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되는가? 사회적 지탄은 여성에게만 씌우는 굴레가 아닌가? 이 소설의 주인공 주변에는 그래도 친구들이 있다. 그 아이는 '나쁜' 짓을 저지르지 않을 것이고 소년원에도 가지 않을 것이다. 아픈 할아버지이지만 그에게는 손녀에게 물려줄 재산도 있다. 불도저 소녀에게는 아무도 없다. 친구도 다정한 어른도 아무도. 사회적 '매장'을 당하기 일보직전에 죽은 아빠의 보험금이 지급되면서 영화는 끝난다. 어쨌거나 큰 돈이 생겼으니 이제 이 소녀의 앞날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돈이 많으니 어린 남동생이 있어도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정말 그렇게 간단하게 해결이 되나요? 이게 현실인가요? 바람직한 결말인가요? 돈 때문에 그 사단이 났는데, 그래도 나쁜 놈은 승승장구하는 세상인데, 그냥 돈만 손에 쥐어주면 그만인가 말이다. 그렇게 관객을 일단 안심시키면 그만인가 말이다. 다행이야, 그래도 돈이 생겼네, 정말 다행이야. 그럼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집도 돈도 사람도 없는 사람들은?

며칠 전 읽은 이서수의 소설 <미조의 시대>도 여기에 약간 겹쳐진다. 고구마 백만 개, 어쩔 수 없이. 그러니까 나는 팍팍한 현실에 벗어날 길 없이 몸부림치는 사람들 특히 여성들의 삶을 보기 힘들다. 일면 나 같아서, 일면 견디기 힘들 것 같은 상황이 무서워서, 이런 현실이 죽을 때까지 반복되는 게 삶이라는 걸 어렴풋이 알아서, 인물에 너무 깊이 몰입해서, 온갖 상황들이 화나고 짜증나서, 이유를 줄줄이 댈 수 있게 힘들다. 주인공에게는 역시 부양해야 할 어머니가 있고 돈은 없다. 친구 언니는 혼자이지만 일과 윤리적 가치관 사이에서 원형탈모를 겪을 정도로 힘든 삶을 산다. 그래도 이 소설은 단순한 재현에 그치지는 않았다. 역사의 시공간을 현재에 잘 버무렸다. 버무렸다는 표현이 조금 가볍기는 하지만. 흔히 등장인물들 사이의 관계에 가미되는 평면성이 조금 덜한 것도 장점으로 보인다. 예를 들면, 너는 이게 시 같니? 라고 물으며 컴퓨터에 시를 쓰는 어머니나, 미조가 친구 언니를 생각하는 양가적 감정 같은 것들. 그러나 또다시 여성에게 전가되는 돌봄의 문제. 자본의 문제. 도돌이표처럼 반복되는 역사.

같이 책을 읽는 분이 추천하셔서 몇년 전 팟캐스트를 들었다. 한강이 초대손님이었다. 그의 작품은 신기하게 하나도 읽은 것이 없다.(이럴 수가) 너무 유명해서 꺼려했나? 아무튼 그러하지만 팟캐를 들으면서 소설가가 말하는 소설이란 무엇인가를 듣고, 생각했다. 모든 글이 그러하듯 전제는 질문이다. 무엇인가, 어떠한가, 왜 그러한가,를 끊임없이 던지고 답을 찾아나가는 과정. 이런 내용의 말을 조곤조곤 하는 한강은 멋있었다. 아마 스스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확률이 높지만, 우리들 대부분이 그러하듯. 결국 소설은 그런 것이다. 단순한데 단순하게 생각하기를 거부했던 모양이다. <채식주의자>를 검색했더니 전자도서관에 없다. 전자책이라도 사야 할까.

<한국의 탈식민 페미니즘과 지식생산>이라는 어려운 책을 읽다가 아래와 같은 구절을 만났다. 좀은 추상적이긴 해도 대략 무슨 의미인지 알 것 같다. 그래서 소설이 어려운 것이다. 그렇지, '제대로' 쓰기도 읽기도 어려운 거지.


"이러한 픽션화는 소위 사실·실재라는 것과 그것의 재현 사이에 있는 거리를 잠식해 매끈하게 통합된 하나를 보여주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드러냄으로써 역사 속의 여성들이 갖는 풍부한 결들과 질들을 풀어헤쳐 놓으려고 하는 것이다. 즉 서발턴 여성을 정확하게 온전하게 있는 그대로 재현한다는 게 아니다. 계보 속의 여성들에게 각각 있는 재현할 수 업는/재현되지 않는 부분들을 봉합하거나 총체화하지 않고 아이러니와 신화와 혹은 유령적 형상들로 분명 있지만 적확하게 재현되지 않은 여분의 공간을 남겨두는 것이다. 문학적 형상화란 인간, 세상, 관계들의 다의적이고 이질적이고 불연속적인 결들을 봉합하지 않고 오히려 그 솔기들을 뜯어내면서, 누구도 완벽한 이해에 도달하지 못하게 하는 묘연한 구석과 여운을 남기는 것이다. 즉 완전한 재현을 애초에 꾀하지 않으며 적확한 재현을 피해감으로써 텍스트 곳곳에 잉여와 초과 지점을 생성함으로써 새로운 상징적 의미화들이 텍스트를 흘러 넘치도록 한다."

<한국의 탈식민 페미니즘과 지식생산> 333




이 구절 읽으면서 자연스레(?) 김혜순이 떠올랐다. 나는 이 시인의 시 역시 제대로 읽은 것이 없다.(이럴 수가 2) 그럼 다른 책은 읽은 것이 있나? 아니다. 책 두세 권의 앞부분만을 읽었을 뿐이다. 그런데도 김혜순이 떠올랐다.



"나는 여성시인은 이렇게 세 번의 죽음 경험을 통해 자신의 '시'라는, 여성시인만의 언술을 발명한다고 생각해왔다. 여성시인의 시는 첫번째 죽음 여행의 시, 두번째 죽음 여행의 시, 세번째 죽음 여행의 시로 구분할 수 있다. 첫번째 죽음 여행의 시는 자신이 버려짐, 부재, 쫓겨남에 처해진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거나 분노를 표출하는 시다. 이런 유형의 시는 대개 독백적 진술을 주로 하며, 자아를 극적인 무대에 세운다. 자신의 일상을 무대에 오르게 하고, 화자는 시 안에서 징징거린다. 이 유형의 시는 소녀인, 미성숙한 화자를 내세운다. 화자는 끝끝내 어머니로서의 정체성을 팽개치고, 자신의 태생적 한계 주변을 서성거린다. 두번째 죽음 여행의 시는 가정과 체제, 공동체 내에서 잠식당한 자아 정체성을 노래한다. 이 노래들은 한결 일상적이거나, 현실적인 문제들을 시의 배면에 품고 있으며, 시 안에서 성숙된 여인이 화자로 등장한다. 모성을 내세우거나 부과받은 모성성을 비난하며, 자신의 결혼, 관계, 노동을 화제로 삼는다. 세번째 죽음 여행의 시는 분열적이고, 산포되며, 공동체의 주문에 대해 분열된 자아 정체성, 분자화된 언술을 들이미는 발명자들의 시다. 이런 유형의 시의 화자는 어떤 복수성(複數性)을 내포한 듯 보이기도 한다. 이 유형의 시들은 언어의 운용, 모국어 문법에 대한 파괴에 열중하기도 하고, 남성과 여성으로 환원되는 은유 체계에 대한 전복, 다성악적 파동의 언술을 내보이기도 한다."

<여성, 시하다> 18~19



시인에 대해 말하고 있기는 하지만 시나 소설이나 그밖의 다른 창작물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되는 말 같다. 유독 '징징거린다'는 단어가 눈에 들어오는 것을 보니 나는 지금 징징거리고 있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미성숙한 화자'이자 독자. ㅋㅋㅋ

이 부분을 읽으면서는 또 <딕테>의 차학경이 떠올랐다. <딕테> 역시 아직 안 읽었다.(이럴 수가 3) 운 좋게 구한 책을 휘리릭 한번 넘겨보고 아, 이거 완전 읽기 어렵겠구나 싶어 덮어두었다. 한강 팟캐를 추천하신 그 분이 역시 추천하신(감사!~) 장혜령의 팟캐 차학경 편을 들었다. 간간이 그가 낭독하는 구절들을 들으며 역시 완전 읽기 어렵겠구나를 반복생각했고 이걸 내가 읽어낼 깜냥이나 되나를 생각했다. 아직 책을 읽기 전이지만 '몸으로 글쓰기'란 이런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나도 그렇게 쓰고 싶다,와 그렇지만 괴로운 건 싫은데, 사이를 얌체 같이 왔다갔다 하면서.

소설이란 무엇인가,로 시작해서 차학경의 <딕테>까지 왔는데, 오니까 그만 할 말이 떨어졌다. 틈틈이 소설을 읽으면서 계속 생각해야 겠다. 소설이란 무엇인가. 이 소설이 던지는 질문은 무엇인가. 거기서 나는 어떤 질문을 길어올릴 것인가. 나의 질문은 무엇인가.























<불도저에 탄 소녀> 영화 소개 ↓


https://movie.naver.com/movie/bi/mi/basic.naver?code=201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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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쟝쟝 2022-05-28 08:3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소설 잘 못읽어요! (영화도..) 뭐랄까 읽을 수 있는 양이 정해진 듯… 아무래도 ㅠㅡㅠ 만날 수 있는 사람 정해진 것과 비슷 ㅋㅋㅋ 사람 못만나는 거랑 같은 이유이지 않나 싶기도 해요..? 그래서 차라리 남의 독후감을 읽거나 평론을 읽 ㅋㅋ
그렇지만 제대로 읽은 것이 없는 과거의 나가 있으니 또 다르게 해석하기 위해 읽기를 멈추지 않는 나도 있지 않을까요?
진지하고 다정한 난티님! 언제나 자기 안에서 나온 것을 쓰는 걸 두려워하지 마세여^^ 난티님은 변할겁니다!! 그 변하는 과정을 써두세여 🔥😘

난티나무 2022-05-30 01:57   좋아요 0 | URL
주말에 노느라 ㅎㅎㅎ 답글 이제야 달아요.
영화 ㅠㅠ 드라마도 그렇고 입에 욕을 달고 봐야 해서 ㅎㅎㅎ
읽을 수 있는 양이 정해져 있다는 말씀 와 닿네요!!
진지 다정에 좀 욕심 부리면 유쾌 하고 싶네요.^^ 쟝쟝님처럼!!! 헤헤
🙏 좋은 말씀 고마워요~~~~~~^^
 













"남에게 무조건적 사랑을 받기를 원하는 태도는 용납하기 힘든 신경증적 환상이다." (161)


"미국에서는 개들에게 "무조건적 사랑"의 능력이 있다고 이야기하곤 한다. 사람은 다른 인간관계에서 겪는 복잡성, 모순, 오해의 짐에 짓눌린 나머지 자신이 키우는 개가 베푸는 무조건적인 사랑에서 위안을 찾는다는 믿음을 표현하는 말이다. 개를 자식으로 대하며 사랑하는 것이 다음 수순이다. 내 생각에 이 두 믿음 모두는 거짓까지는 아니어도 출발부터 실수였을 뿐만 아니라 그 자체로 개와 인간 모두에게 가학적이다." (158)




'신경증적 환상'을 갖지 않고 사랑하기. 세상 어려운 일. 그걸 못해 사람들은 그 난리를 피우지. 말못하는 동물에게 사랑을 가장한 복종을 구걸(요구/강요)하지 말지어다. 말하는 동물에게도 마찬가지이리라. 인간과 동물의 관계를 생각하는 것 자체가 이미 이분법적 사고방식이라는 사실, 다르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위선이라는 사실, 그리고 '애완'동물, '식용'동물, '감상'동물............ '해'를 끼치는 동물...... 복잡하고 비윤리적이며 인간중심적 사고방식. 인간은 신이 아니다. 신인 척 하는 사람은 역겹다. 알량한 호혜의식에 젖어들지 말 것. 개는 개다. 해러웨이는 난 사람이다.




존재자들은 서로를 향해 뻗어나가며 "포착"이나 파악을 통해 서로와 자신을 구성한다. 모든 존재자는 관계에 선행해 존재하지 않는다. "포착"에는 결과가 있다. 세계는 운동 속의 매듭이다. 생물학적 결정론과 문화적 결정론은 모두 잘못된 곳에서 구체성을 구성한 사례들이다. "자연"이나 "문화"와 같은 잠정적이고 부분적인 추상 범주를 세계로 착각했다는 점에서, 그리고 잠재적 결과를 선행하는 기초로 오해했다는 점에서 그렇다. 미리 구성된 주체나 객체는 없으며, 단일한 근원이나 단일한 행위자, 최종 목적과 같은 것은 없다. 주디스 버틀러Judith Butler의 표현을 빌리면 "잠정적 기초contingent foundation"밖에 없다.  - P123

... 개는 인간 자신의 모습을 비추는 거울이 아니다. 바로 이 점에 개의 매력이 있다. 개들은 투사 대상도, 의도를 구현한 물체도, 다른 무언가의 텔로스도 아니다. 개는 개다. 즉, 인간과 의무적이고 구성적이며 역사적이고 변화무쌍한 관계를 맺는 종이다. 이 관계는 다른 관계들보다 특별히 나을 것은 없다. 기쁨·발명·노동·지성·놀이로 가득한 만큼, 낭비·잔인함·무관심·무지함·상실로 가득하기 때문이다. 나는 이 공동-역사의 이야기를 잘 들려줄 방법과 자연문화적 공진화의 결과를 물려받을 방법을 배웠으면 한다. - P129

우리는 또한 살/실체 속에서 이데올로기만으로는 다 설명할 수 없는 방식을 통해 함께 살아간다. 이야기는 이데올로기보다 허용 폭이 넓다. 우리의 희망은 여기에 있다. - P136

메타플라즘(이형변이)은 예를 들면 글자·음절·음소 따위가 추가·생략·도치·전도되어 말에 변화가 일어나는 현상을 일컫는다. 이 말이 유래한 그리스어 ‘metaplasmos‘는 구조 변경 및 형태 변경을 뜻한다. 메타플라즘은 뚜렷한 방향이 있는 경우와 없는 경우 모두를 통틀어, 말에서 일어나는 것이면 어떤 종류의 변화든 모두 포괄할 수 있는 유적類的, generic 용어다. 나는 메타플라즘이라는 말을 개와 인간이 서로 반려종이 되는 역사에서 육체를 개조改造, restructure하고 생명의 암호를 개형改形, reform한다는 의미로 쓴다.

......

메타플라즘은 실수나 헛디딤, 실체적 차이를 만드는 수사를 뜻할 수 있다. - P141


개는 돼지를 제치고 최초의 사육 동물이라는 영예를 거머쥐었다. 인본주의적 기술 예찬론자들은 길들이기를 자기 자신이라는 부모로부터 혼자 태어난 남성적 행위의 모범으로 그려내면서, 이 행위를 통해 (남성) 인간이 자신의 도구를 발명(창조)하며 자기 자신을 거듭 창조한다고 본다. 가축은 신기원을 이룩하는 도구이자 인간의 의도를 육신으로 구현하는 개-육체 버전의 자위행위다. (남성)인간은 (자유로운) 늑대를 잡아 (복종하는) 개를 만들고 그로써 문명의 가능성을 수립했다. 그렇다면 헤겔과 프로이트 사이에서 태어난 잡종견이라고 보면 될까? 개를, 길들인 동식물 전체의 상징으로 만들고 인간의 의도에 복종하게 만들되, 점차 진보할 것인지 타락할 것인지는 각자의 취향에 맡기면 될 것이다. 심층생태론자들은 그런 이야기를, 문화로 추락하기 전에 있었다는 야생의 이름으로 혐오하기 위해 기꺼이 믿는다. 인본주의자들이 문화에 대한 생물학의 침략을 막기 위해 믿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 P150

모든 것이 분산되어 있다는 것이 개집에서조차 세상만사의 상식이 되자, 위와 같은 관습적인 설명 방식은 최근 몇 년 동안 철저한 재구성의 대상이 되었다. 나는 이 전부가 스쳐 가는 유행일 뿐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이처럼 개(를 비롯한 다른 종들)에게 길들임의 첫수를 두게 하고, 이질적이고 분산된 행위 주체의 끝없는 춤을 안무하는, 재구성된 메타플라즘적 이야기들을 좋아하지 않을 수 없다. 일시적인 유행에 불과하더라도 이와 같은 새로운 이야기들이 진실에 가까울 가능성이 더 크다고 나는 생각한다. 소중한 타자성을 의도의 반영과는 다른 무엇으로 볼 방법을 가르쳐줄 가능성도 더 크다고 보기 때문이다. - P151

관계는 다형적이며 위태롭고, 마무리되지 않으며 결과가 따른다. - P154

미국에서는 개들에게 "무조건적 사랑"의 능력이 있다고 이야기하곤 한다. 사람은 다른 인간관계에서 겪는 복잡성, 모순, 오해의 짐에 짓눌린 나머지 자신이 키우는 개가 베푸는 무조건적인 사랑에서 위안을 찾는다는 믿음을 표현하는 말이다. 개를 자식으로 대하며 사랑하는 것이 다음 수순이다. 내 생각에 이 두 믿음 모두는 거짓까지는 아니어도 출발부터 실수였을 뿐만 아니라 그 자체로 개와 인간 모두에게 가학적이다. - P158

남에게 무조건적 사랑을 받기를 원하는 태도는 용납하기 힘든 신경증적 환상이다. - P1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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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2-05-16 21:1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너무 좋아요, 난티나무 님. 저도 오늘 아침에 이 부분 읽었는데요.
팟캐 들을 때 진행자 중 한 명이 가장 인상적인 구절이 ‘개는 개다’ 라고 했어요. 난티나무 님이 딱 거길 짚어주시네요! 멋진 분 ㅠㅠ

난티나무 2022-05-17 00:50   좋아요 1 | URL
존재를 존재로 인정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싶어요... 사람 사이에서도 어려운데 하물며 ‘하등‘하다고 생각하는 동물과의 관계는 더 힘들겠죠. 저도 팟캐 들었어요! 덕분에~~~^^❤️❤️❤️

미미 2022-05-16 21: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58페이지 유독 기억에 남아요!
이런 인간중심적 사고 방식이
모든 문제의 근원이란 생각도
들고요. 최근에 수하님 리뷰보고<짐을 끄는 짐승들>
샀는데 접점이 있는것 같아요.
자꾸 관심가는 책들이 죄다
해러웨이랑 관련있는걸 보면
스팩트럼이 큰 책인게 분명!

난티나무 2022-05-17 00:51   좋아요 1 | URL
맞아요 미미님. 인간중심적 사고방식... 모든 문제의 근원!
책을 읽다 보면 이렇게 저렇게 다른 책 다른 주제들과 연결되는 것이 신기하기도 하고 당연한 걸 이제 깨닫는 것 같기도 하고요.^^;;;;
암튼 해러웨이도 언니! 대단한 언니!!!!🥰🥰🥰
 
















"나는 개들의 "엄마"라고 일컬어지는 것을 거절한다. 다 자란 개들을 어린아이로 취급하는 것이 두렵기 때문이고, 내가 원한 것은 개였지 아기가 아니었다는 중요한 사실을 오해하게 만들기 싫어서다. 나의 다종적 가족은 대리모나 대체물과는 관련이 없다. 우리는 다른 수사, 다른 메타플라즘을 살아가려고 애쓰는 중이다. 젠더의 스펙트럼에서 필요했던(그리고 여전히 필요한) 것과 정확히 마찬가지로, 반려종의 친족 장르에서 다른 명사와 대명사가 필요하다. 파티 초대장이나 철학 담론을 제외하면 소중한 타자라는 말은 인간의 성적 파트너를 일컫는 말은 아닐 것이다. 그리고 이 용어는 때맞춰 만든 개 세계 속 친족 관계의 일상적 의미를 더 잘 담아내지도 못한다." (234)




그렇다면, '엄마'는 아기를 돌보는 사람을 가리키는 단어인가. 한번 엄마는 죽어도 엄마라는 호칭을 떼지 못한다. 생각해 보자. 확실히 엄마,라는 단어는 문제적이다. 어린이에게 '엄마'와 같은 역할을 하는 어른은 필요하다. 여기서 엄마와 같은 역할을 한다는 말은 엄마의 역할이 대체로 아이를 책임지고 돌보는 역할이라는 뜻을 가진다.('아빠'는 조금 옆으로 제쳐두자. 사회적으로 통용되는 '엄마'의 의미로 한정해 생각해본다. 그리고 성차에 의해 '엄마' '아빠'로 지칭되는 문제도 제쳐두자.) 만약 아이를 돌보고 키우는 사람이 아빠 혼자라 하더라도 그 아빠가 엄마와 같(은 역할을 한)다고 말할 때 누구도 그것을 부정하지 않는다. 키우는 이가 누구든 그러할 것이다. 여자들이 원한 것은 영원한 아이가 아니다. 그래서도 안 된다. 그러면 아이가 커서 어른이 된 후 '엄마'라는 명칭은 폐기되어야 하는 것인가? 안 될 건 또 무어람? 평생을 엄마라는 역할로 살아가기에는 너무 긴 시간 아닌가. 엄마들을 해방시켜야지. 어쩌면 '엄마'라는 단어 하나 때문에 관계에 얽매이게 되는 것일 수도 있다. 관계에 대한 새로운 시각이 필요하다. 이렇게 또 해러웨이의 말 덕분에 '엄마'(그리고 '아빠')에 대해 한번도 가져보지 않았던 의문을 가져본다. 원래 그런 것은 없으니까. 단어들을 새로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 (뭐라고 하면 좋을까.) 대체해야 할 단어들은 또 얼마나 많냔 말이다. 틀 좀 깹시다. 우리는 '다른 수사'를 살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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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5-13 05:3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2-05-13 05:5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2-05-13 05: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2-05-13 05:58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다락방 2022-05-13 08:4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는 아직 저기까지 읽지 못했지만, ‘나는 개들의 ˝엄마˝라고 일컬어지는 것을 거절한다‘ 라는 문장이 너무 좋네요. 이게 왜그렇게 좋을까요.

부지런히 따라가겠습니다.

난티나무 2022-05-13 13:33   좋아요 1 | URL
저도 그 문장 좋았어요.^^ 팍 꽂히기도 했고요. 동물과의 관계에서도 역할론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생각과 말을 하고 있구나 싶었습니다.
저는 이제 조금밖에 안 남았어요. 헤헷

미미 2022-05-13 11:2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공감합니다~♡ 여성들은 출산과 동시에 엄마라는 역할에만 메이는 것도 같아요.
여성의 사회적 진출이 늘어나도 ‘엄마‘의 역할 때문에 불이익을 받거나 지례짐작되기도
하고요. 권리는 별로 없으면서 책임은 너무도 많아 여러가지 ‘가능성‘에서 쉽게 배제되는...
난티나무님 오늘도 생각꺼리를 던져주셔서 고맙습니다^^*

난티나무 2022-05-13 13:37   좋아요 1 | URL
권리, 라는 단어를 보니 엄마의 ‘권리’에 대해 촌철살인을 날린 에이드리언 리치의 책 구절이 또 떠오르네요.^^;;;;
그러니 ‘출산’이라는 행위가 개인적으로도 사회적으로도 얼마나 간단하지 않은 정치적 문제인가요. 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머리가 터질 것 같아요…ㅎㅎㅎㅎ
❤️❤️
 

어렵지만… 재, 재밌다!!!!!!@@

기술결정론은 세계를 읽고 쓰는 놀이play에 참여하는 과정에서 기계와 유기체를 코드화된 텍스트로 재개념화함으로써 열린 이데올로기적 공간 중 하나일 뿐이다. 포스트구조주의와 포스트모더니즘 이론은 모든 것을 "텍스트"로 만들면서, 자의적인 읽기 "놀이"가 근거하고 있는 삶 속의 지배 관계에 관해서는 마치 유토피아에 살기라도 하는 듯 무관심한 태도를 보였다는 이유로 마르크스주의자들과 사회주의 페미니스트들의 비난을 샀다.(주5) - P27

주 5) 프레더릭 제임슨 Frederick Jameson 은 "포스트모더니즘" 정치와 이론에 대해 도발적이고 포괄적인 주장을 내놓았다. 제임슨은 포스트모더니즘은 선택의 대상이거나 여러 스타일 중 한 가지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그 내부로부터 좌파 정치를 급진적으로 재발명해야 하는 문화적 우성cultural dominant 이라고 주장한다. 비판적 거리라는 속 편한 허구에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 장소는 더 이상 없기 때문이다. 제임슨은 본질적으로 도덕주의적 운동인 포스트모더니즘이 찬성과 반대의 문제가 아닌 까닭을 분명하게 밝힌다. 내 입장은 페미니스트들(및 다른 이들)에게 문화적 재발명, 가장 모더니스트적인 비판, 역사유물론이 계속 필요하다는 것이다. 사이보그에게만 그런 가능성이 있다. 백인 자본주의 가부장제라는 오래된 지배체제는 이제 향수를 불러일으킬 만큼 순수해 보인다. 그 지배 체제는 이질성을 남성과 여성, 백인과 흑인으로 정상화했다. "선진 자본주의와 포스트모더니즘은 규범 없는 이질성을 방출하며 우리는 헤어나지 못할 만큼 해로운 깊이를 요구하는 주체성을 버리고 평면화되었다. 지금은 《진료소의 죽음The Death of the Clinic》을 집필할 시기다. 진료소의 개입 방식은 신체와 노동을 요구했지만 우리가 지닌 것은 텍스트와 표면이다. 우리가 직면한 지배는 의료화나 정상화를 통해 작동하지 않는다. 현재의 지배는 네트워크, 통신의 재설계, 스트레스 관리를 통해 작동한다. 정상화는 자동화 및 철저한 정리 해고에 자리를 내주게 된다. 미셸 푸코의 《진료소의 탄생Birth of the Clinic》(1963), 《성의 역사History of Sexuality》(1976), 《감시와 처벌 Discipline and Punish》(1975)은 권력의 형태를 그 권력이 내파하는 시점에서 명명한다. 생명정치 담론은 첨단 용어를 동원하며 횡설수설하는 어구 및 - P88

(이어짐) 명사를 줄줄이 이어 붙이는 언어에 자리를 내준다. 다국적 기업의 영향을 받아 모든 명사는 온전성을 상실하게 되었다. 《사이언스Science)의 한 호가 제시하는 목록에 따르면 이런 기업들의 이름은 다음과 같다. 기술-지식Tech-Knowledge, 지네테크Genetech, 앨러겐 Allergen, 하이브리테크 Hybritech,
컴펍토Compupto, 지넨-코어 Genen-cor, 신텍스Syntex, 얼릴릭스 Allelix, 애그리제네틱스 주식회사 Agrigenetics Corp., 신트로 Syntro, 코돈 Codon, 리플리겐Repligen, 사이언 주식회사 Scion Corp.의 마이크로 앤젤로Micro-Angelo, 퍼콤 데이터Percom Data, 인터시스템스Inter Systems, 사이보그 주식회사 CyborgCorp., 스태트컴 주식회사Statcom Corp., 인터텍Intertac. 우리는 언어에 구속되었고 그 감옥에서 탈출하려면 그와 같은 코드를 자를 수 있는 문화적 제한 효소와 같은 무엇, 즉 언어의 시인들이 필요하다. 사이보그 이언어성은 급진 문화 정치의 한 형태다. - P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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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2-05-05 02: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이제 시작해야 하는데 주 재, 재밌다라는 말에 불안이 스멀스멀... ㅎㅎ

난티나무 2022-05-05 03:40   좋아요 0 | URL
ㅎㅎㅎ 바람돌이님 저도 불안불안합니다.^^;;;;;

책읽는나무 2022-05-05 09: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ㅋ
재...재밌다!!
왜 처연하게 들리죠?ㅋㅋㅋ

난티나무 2022-05-05 20:10   좋아요 0 | URL
처연…..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언니의 이야기를 읽고 그 느낌을 시로 쓰고 싶은 충동을 느꼈습니다. 그러나 시는 어떻게 쓰는 것인가요? 저는 아직도 잘 모르겠습니다. 언니는 많이 쓰셨잖아요? 끊임없이 쓰셨잖아요? 정말 시인은 태어나는 것인가요? 운명인가요? 본 적 없는 언니의 방을 상상합니다. 생각보다 좁아서 놀랐다고 마리아 포포바는 말하더군요. 책상도 아주 작았다고요. 저는 큰 책상을 갖고 있습니다. 책이 마구 쌓여있고 커다란 컴퓨터도 있고 책을 읽기 좋게 독서대도 올려두었지요. 무언가를 쓰기에 적합할까요? 글쓰기에 적합한 무엇이 있을 수 있을까요? 책상이 크다고 글이 커지는 건 아니겠지요. 나는 지금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습니다. 펜으로 연필로 글자를 적는 것보다 속도가 훨씬 빨라요. 썼다가 지우기도 쉽습니다. 게다가 내 방은 큽니다. 타자가 빠르다고, 방이 크다고, 글이 커지는 것도 아니겠지요. 어린아이 침대 크기에 몸을 웅크려 잤을 언니를 생각합니다. 신체적 고통에 몸부림쳤을 시간을 생각합니다. 창으로 바깥 세상을 바라보았을 눈을 생각합니다. 어쩌면 언니와 내가 비슷하게 느낄 수 있는 건 햇살과 바람과 새 소리가 아니었을까 생각합니다. 오늘 아침에는 유난히 새가 맑게 이야기하더군요. 그걸 종이에 옮겨적으면 시가 될까요. 그러나 그 시도 완전히 자유롭지는 못할 겁니다. 새의 날개가 자유롭기만 한 것은 아니니까요. 언니는 이 모든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언니를 스스로 가둔 새장에서 날아오른 자유의 새라고 말하는데, 언니는 후대의 우리들이 이렇게 언니에 대해 많이 이야기할 것도 알고 계셨나요? 사람들의 평가가 마음에 드시나요? 아무렴 무슨 상관이겠어요. 아무도 언니를 언니가 생각하는 방식으로 평가하지는 못할 거라는 생각이 들어요. 시를 살았다고 말하는 건 쉽습니다. 칭송 또한 그러하죠. 그러나 삶이 그렇게 쉬운 것이던가요. 나는 언니를 모르고 언니의 시도 읽지 않았습니다. 너무 어려워요. 때로는 시가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에 어려운 건 아닐까 생각도 합니다. 시를 몸으로 살아낼 정도가 되어야 비로소 시라는 것을 알게 되는 걸까요. 언니의 이야기를 읽을수록 점점 더 시가, 삶이 어려워지는 느낌입니다. 만약 언니가 방에서 나왔다면, 그랬다면 뭔가 달라졌을까요. 누군가의 말처럼 평범한 여자의 삶을 살아버리고 말았을까요. 예술가는 어떤 식으로든 결핍과 부재와 고통을 겪어야만 위대한 작품을 만들어낼 수 있는 걸까요. 우리는 그 위대한 작품을 칭송하고 향유하지만 과연 그것이 온당한 것인가 의문도 생깁니다. 위대함의 반열에 오른다는 것은, 언니가 생각했던 것처럼 먼지에 불과한 것일까요. 이것도 잘 모르겠습니다. 온통 모르겠는 것 투성이네요. 그래도 다행입니다. 늦게나마 인생을, 예술과 삶을 다시 생각하게 되었으니까요. 인간이라는 존재와 크고도 작은 이 세상에 대해서도 마찬가지고요. 몰랐던 언니를 한 명 더 알게 되었다는 - 안다고 말하는 것이 폭력일 수 있다고 했지만 - 지극히 개인적인 만족감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언니의 시집을 사서 읽거나 하게 되지는 않을 것 같아요. 이 점은 미안하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언니는 개의치 않을 듯 싶어요. 중산층 이상의 생활을 한 시인이라서, 백인이라서, 일종의 반감이 생기면서도, 여성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그저 지지하고 싶은 이 마음은 또 무엇일까요. 참 신기합니다. 내가 태어나고 자란 나라에도 언니와 같은 사람이 있었을 텐데 말입니다. 알려지려면, 알게 되려면, 영어로 표현되어야만 한다는 사실은 또다른 반감을 불러일으킵니다. 언니가 영어 아닌 다른 나라 말을, 소수 민족이 쓰는 말을 사용해서 시를 썼다면 어땠을까요. 그런 생각 해본 적 있으세요? 영어를 쓰지 않는 많은 예술가들이 그렇게 숨겨져 있었을 겁니다. 언니 이전에도 이후에도 말이에요... 다른 책에서 언니의 하얀 옷에 대한 해석을 읽었습니다. 우연찮게도 오늘 아침 또 다른 책에서 남성작가가 쓴 하얀 옷을 입은 여자에 대한 글을 보았어요. 한숨이 나왔습니다. 남성들이 가지는 환상, 클리셰들이 가득하더군요.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만 이 또한 편견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떻게 그러지 않을 수 있겠어요. 언니도 아셨다시피 이 세상은 온통 클리셰로 가득합니다. 그 남성 작가는 아름다운 문장으로 칭송받는 작가라는데, 실망했지요. 언니가 하얀 옷으로 표현하고자 했던 것은 무엇일까 생각해요. 해석을 읽었음에도 모호하다는 말은 모호함을 언니가 너무 잘 표현했기 때문이 아닐까,라고도요. 흰 옷만 입는 시인이라는 소문에 너털웃음을 터뜨렸을 언니를 상상해요. 놀랍게도 지금은 2022년입니다, 언니.





(<진리의 발견> '에밀리 디킨슨' 부분을 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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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이 2022-04-29 08: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크리스티앙 보뱅이 말한 이는 클리셰라기보단 죽은 자신의 연인을 뜻하는 걸로 알고 있어요. 죽은 연인을 뜻하기에 하얀 원피스를 입은 걸로 표현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저도 궁금해서 이리저리 찾아보다가 오늘 아침 알게 됐어요.

난티나무 2022-04-29 17:12   좋아요 0 | URL
악 이름 밝히고 싶지 않았는데 ㅎㅎㅎㅎ
그렇군요. 그럼 그 원핏은 수의겠네요….. 다시 읽어봐야 겠습니다.^^

미미 2022-04-29 09: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머 난티나무님! 에밀리 디킨슨이 읽는다면 미소지을 것 같은 편지네요. 빨려들듯 읽었습니다.^^*

난티나무 2022-04-29 17:16   좋아요 1 | URL
편지를 빙자한 중얼거림이죠. ㅎㅎㅎ 🙏 🙏 🥰🥰

거리의화가 2022-04-29 09: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난티나무님 시를 읽고 경험한다는 게 어떤건가 생각해보게 됩니다.
저는 이 글에서 묻혀있는 글들이 얼마나 많을까 생각했습니다. 영어가 모국어인 글들 중에서도 묻혀 있는 글들이 수두룩할텐데 영어가 아닌 타 언어로 된 글들 중에서 얼마나 많은 글들이 묻혀 있을지요. 그래서 역사에 묻혀 있는 글들을 계속 들춰보고 꺼내보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네요. 좋은 글 감사합니다.

난티나무 2022-04-29 17:22   좋아요 1 | URL
맞아요, 거리의화가님. 영어라는 언어 자체가 갖는 힘, 다른 언어로 된 작품은 모두 영어로 번역되어야 세상에 알려지는 현실, 아이러니하면서 엄청 폭력적인 일이죠. 이렇게 서양의 작가/예술가들의 이야기를 읽으면 한국의 경우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고 또 저의 무지를 탓하지 않을 수가 없어요. 🙏

공쟝쟝 2022-04-29 11: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에밀리 디킨슨은 정말 부럽고 좋고........ 멋지고 사랑하고..... 그러고 질투나고......... 동경하고......... 또......... 어떤 의미에서는 짠하고..... 그런 시인. 언니는 누구일까? 하면서 읽다가 디킨슨인거 알고 너무 좋아 너무좋아! 이랬어요 ^^

난티나무 2022-04-29 17:28   좋아요 0 | URL
공쟝쟝님 좋아하시는군요.^^ 맞아요 짠하지만 시에 대한 정열은 멋지고! 방에서 안 나왔다는 게 한편으론 너무 이해되기도 하고요.
😍😍

하늘바람 2022-04-29 18: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시를 쓰고 싶다고 하시는 말씀이 넘 아름답게 들려요

난티나무 2022-04-29 20:54   좋아요 0 | URL
그렇게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하늘바람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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