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 버는 '번듯한' 직업이 없는 것? 부끄럽지 않다.

일정하게 출퇴근하는 직장이 없는 것? 부끄럽지 않다.

세금신고서에 0이라고 적는 것? 부끄럽지 않다.

공공기관서류의 직업란에 '주부'라고 적는 것? 이건 얼마전까지도 좀 부끄럽고 싫었다. 왜? 사회가 주부를 바라보는 시선, 나 역시도 그 시선으로 나를 보았으니까.

부끄럽지 않다는 말은 딱 그만큼의 무게만을 가진다. 부끄럽지 않다고 해서 당당하다는 말은 아니다. 아무도 '네가 옳다'고 말해주지 않는다. '부끄러운 줄 알아'가 일반적이다. 사회는 사람들을 가스라이팅한다. 가끔 이런 생각들이 어떤 장면으로 상상되어 한꺼번에 몰려올 때 몸서리치게 세상이 무서워진다.


프랑스 생활 20여년 만에 구직사무소(?)에 이름을 올렸다.

국민에게 주는 보조금이 많은 나라, 소득별로 지급금액이 나누어지고, 권리를 누리라고 말하는 것처럼 보이는 관리체제에 들어가려면 증명해야 하는 것이 많은 나라.(어디든 그러하겠지.) 보조금 중 한 가지가 얼마전부터 나오기 시작했다. 그걸 계속 받으려면 일하려는 의지(?)가 있어야 한다고 공무원이 말했다. 그 의지를 증명하라 했다. 나온 돈은 얼마 되지 않는데 기준금액보다 단 1유로가 더 나오는 바람에 관리대상으로 들어갔고 직원이 붙었으며 복잡한 서류처리과정이 시작되었다. 일하지 않는 자, 먹지도 말라!


사회적 약자인 나는 시키는 대로 직업상담소에 이름을 올리고 상담을 받았다. 곧 쬐맨한 개인사업자 등록을 할 예정이기 때문에 사실상 구직을 위해 이름을 올린 건 아니고 보조금 지급관리를 위한 절차라 상담직원도 내 이력과 원하는 직장을 대충 입력하기 시작했는데, 전공이 무엇인지 묻고는 한국어교사,라고...ㅋㅋㅋ 이 좁은 시골에 한국어교사 구하는 데(학교)가 어딨...ㅎㅎㅎ 그 와중에, 이름을 올린 사실 하나만으로 지역교통수단과 전국박&미술관 등을 무료로 혹은 대폭할인가로 이용할 수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이 외에도 아마 '혜택'이 더 있을 것이다.) 처음엔 잠깐 기분이 좋았다. 그러나 잠시 생각해보라. 기차 75% 할인은 거주지 근방으로 한정된다. TGV 등을 제외한 그 지역 기차에만 적용되는 할인이다. 너는 되도록 빨리 일을 해야 하는 사람이니까 다른 지역으로 여행가지 말고 거주지 근방에 있어. 일을 해서 돈을 벌어 기차표를 사도록 해. 네네.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 없이 살기는 불가능하므로 우리는 시키는 대로 한다. 적게 버는 자, 장거리이동도 하지 말라! 경험 기회의 억압. 돈이 없어서 못하는 것들은 어떤 식으로든 그 사람에게 영향을 미친다. 미술관 관람은 반대의 경우라 할 수도 있다. 그러나 또 생각해 보라. 대부분의 박물관과 미술관들은 대도시에 집중되어 있다.(가까운 중소도시의 박/미술관은 이미 무료인지 오래다.) 지방에 사는 사람들은? 미술관 무료면 뭐해요? 가는 데 돈 드는데요? 기차비만 드나요? 잠은요? 식사는요? 사람은 기본욕구(의식주)충족이 안 되는 상황에 놓일 때 시야가 좁아진다. 오직 생존만이 목표다. 이렇게 되면 시간과 노력이 모두 생존에 투입된다. 오 자본주의!     


박물관 전시를 보기 위해 서류를 챙겼다. 매표소에서 '증명'하면 입장료를 내지 않아도 된다. 직원은 서류의 내가 신분증의 나와 일치하는지를 확인한다. 티켓에는 '구직자'라는 문구와 함께 0€가 찍혔다. 표를 받아드는데 미묘했다. 규정당하는 기분.


전시를 보고 나와서 옆지기와 그것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옆지기는 직원이 무료티켓 끊는 우리를 좀 부러워하지 않을까 생각했다고. 일하고 있는 자와 일하지 않으면서 전시를 보러 온 자. 그 사이의 간극. 나는 생각이 달랐다. 과연 그럴까? 직원이 계약직이 아니라 정규직이라고 하고, 꼬박꼬박 안정적으로 월급을 받고, 일년에 한 달 휴가를 가고, 그래도 일 없는 우리를 부러워하겠니. 그 직원은 오히려 우리를 한심하게 생각할 수도 있어. 전문직에 종사하는 사람들이라면 직업상담소에 이름을 올리지 않을 테니까 말이야. 우린 실제로도 그렇지만 서류상으로도 저소득층의 사람들인 거야. 쉬고 있다고 말로 할 때보다 글자로 찍혀 나올 때 우리는 더 확실하게 규정당하는 거지.


물론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했을 수도 있다. 저것은 또다른 삶, 내가 뭐라고 판단하고 잣대를 들이밀 일이 아니라는 생각. 마찬가지로 다른 사람들도 직장을 찾고 있는 저소득층 사람들에게 별다른 감정이나 생각이 없을 수 있다. 열등감에서 나오는 생각일 수도 있고.

그러나... 자기가 내는 세금이 외국인/이민자 밑으로 다 들어간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과연 아무렇지도 않은 시선을 건넬 수 있을까? 정부보조금으로만 생활하는 프랑스인들도 얼마나 많은데? 저소득층을 위한 모든 제도는 사회적 규정짓기로 존재한다. 국가의 관리와 통제. 네가 국민이라는 것을 증명해라!

(+ 옆지기의 아무렇지 않은 당당함과 나의 생각의 차이는 또 젠더의 문제인가 싶어진다. 왜 나는 부러워할 거라는 생각을 털끝만치도 하지 않았지?)


시선의 문제. 나의 위치. 스스로 가난하다고 생각해본 적 없고 하층이라고 생각해본 적도 없는데, 나를 어떤 허상의 위치에 놓고 사는 것은 아닌가. 내가 돈이 없지 '가오'가 없나, 이런. 그러면서도 나는 그들과 달라, 나는 저렇지는 않아, 합리화의 언어로 포장한 시선을 은연중에 내비치며 살고 있지는 않은가. 다르긴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그 시선에 이미 차별이 들어있지 않나. 확실하게 선을 그었지 않나. 그런 의미에서, 외국인이기 때문에 은연중에 장착해버리는 열등감은 참으로 아이러니다.


구직사무소에서 메일이 왔다. 매달 너의 상황을 업데이트해라. 직장을 구하는 일은 잘 되어가고 있는지 보여라. 사업자등록을 했다면 알려라. 한 통이 더 왔다. 너의 체류증 만료일이 다가오네? 갱신한 체류증 갖고 와. 일하려면(정부 돈 받으려면) 체류증 있어야 되니깐. 알지?



댓글(2) 먼댓글(0) 좋아요(2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바람돌이 2022-09-06 22:4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외국에서 산다는건 자신의 출신 국가에서 사는 것과는 다르게 신경쓰이는 면이 많겠죠.
며칠 안되는 기간 여행만 갔다와도 집가까운 랜드마크 이런거 보이면 갑자기 마음이 놓이고 편안해지는 기분인데요. 어디에서 살든 내가 정당하게 요구할 수 있는것을 요구하는건데 괜히 내 영역이 아니라고 생각하면 거기에 다른 자괴감이 끼어들기도 하고.... 사는건 이렇게 어디에서든 쉽지 않네요.
그래도 글로벌 시대잖아요. 지구 모두가 우리의 고향인걸요. 밥 맛있게 먹고 힘내요. 역시 우울할 땐 밥이 최고!!! ^^

난티나무 2022-09-07 04:03   좋아요 2 | URL
맞아요 바람돌이님. 어디나 힘든 점이 있고 삶은 쉽지 않죠..
저녁에도 밥을 배부르게 먹고 아직 안 꺼져서 ㅎㅎㅎ 훅훅거리고 있습니다.
우울하지 않아요.^^ 우울해지려고 할 때도 있기는 하지만... 가끔 하는 생각들이고요. 이런 생각이 생활을 이루고 있어서 ㅋㅋ
그래도 맛난 거 찾아댕겨야죠. 저는 식당 밥이 그렇게 좋더라고요? 푸핫