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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디 크레딧 - 성매매, 금융의 얼굴을 하다
김주희 지음 / 현실문화 / 2020년 7월
평점 :
(감상으로 대체하는 리뷰)
책을 읽는 내내 분노했다. 분노했으나 분노에 그쳤다.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마음은 짜증으로 이어졌다. 온 세상에 회색 비가 내리는 것 같았다. 티브이에 나오는 유명한 사람들, 그 중 남자들의 얼굴을 짚으며 저 사람들은 포르노를 보지 않을까, 생각했다. 길을 가는 사람들, 그 중 남자들의 얼굴을 보며 저 사람들은 '성매매'를 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집 안에 서식하는 남자들, 그 중 아이들의 잠든 얼굴을 보며 얘네들은... 하...
이 분노와 더불어 치솟아오르는 감정들은 매우 복잡하다. 분노의 이면에는 어쩔 수 없고 바뀌지도 않으리라는 일종의 체념 비슷한 감정도 자리한다. 체념이라는 단어는 지나치게 체념적이다. 차라리 슬픔,이라고 해두자. 분노한다고 해서, 열폭한다고 해서, 슬퍼한다고 해서, 내게서 바뀌는 것은 없다. 그런 감정들은 오히려 호사스러운 것이 된다. 가끔 그런 생각이 든다. 책을 읽으며 접하는 수많은 다양한 군상들 중 힘들고 불행하고 쥐어짜듯 착취당하고 죽지 못해 사는 사람들, 그 이야기를 읽고 분통을 터뜨리는 나는, 우리는, 이미 그 분통 만큼의 거리를 두고 있는 건 아닌가. 그런 불행이 내게 올 리가 없어, 그건 다른 세계의 이야기야, 나는 그런... 계층의 사람이 아니야, 정말 불쌍하다, 짠하다, 그 사람들의 삶이 슬프다... 아차 하는 순간에 나 또한 겪을 수 있는 일이라고는 생각지 않으려 하는 대책 없는 안일함. 스스로 만들어낸 안온함의 가면들.
돈이 없어 힘들었던 대학 시절을 생각한다. 닥치는 대로 아르바이트를 했던 것은 아니지만 갈 곳이 없어 입주 과외라는 것도 하고 선생님의 타이핑 작업을 돕기도 했다. 서빙 아르바이트 같은 걸 하지 않았던 이유로 내 용기없음을 꼽아왔는데 이제 보니 아닐 수도 있겠다. 나는 현실을 똑바로 쳐다보지 못했고 그래서 현실감 없이 돈을 벌었으며 당시 사귀던 남자친구에게 정서적으로 상당히 의존하고 있었던 게 틀림없다. 연애라는 환상적 감상 안에서 내가 처한 위치를 가늠하지 못했다. 등록금이 모자라 학과장 선생님께 돈을 빌릴지언정 다른 방법은 생각해내지 못했다. 내가 더 돈이 없는 상태였다면, 굶어죽을 지경이었다면, 빌린 돈을 갚을 수 없는 처지였다면, 아예 돈을 빌릴 사람이 아무도 아무 곳에도 없었다면, 나도 내 몸을 자원으로 삼아 돈을 벌 생각을 했을지도 모르겠다고, 책을 읽으며 생각했다. 학자금 대출을 갚기 위해 룸살롱을 찾아가는 대학생들. 나는 절대 그런 일을 하지 않을 거야, 내게는 절대 그런 상황이 생기지 않았을 거야,라고 말하는 것은 뻔뻔하다. 건방지다. 나락은 한순간에 펼쳐진다.
책을 읽었다고 쓰고, 다른 사람에게 읽히려고 애쓰고, 틈만 나면 이야기를 들춰내 떠벌리는 게 내가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일이다. 최소한을 뛰어넘는 또다른 일은 이렇게 지내다 보면 생길 것이다. 작은 단위의 경험은 큰 단위의 경험을 불러온다고 믿는다. 경험을 단위로 말하는 게 좀 웃기지만.
남자들이여, 지금 있는 그 자리, 안온하신가. 나와 상관없는 이야기라고? 포르노도 보지 않고 '성매매'도 안 한다고? 그래서 떳떳한가?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아가고 있는 한 우리 중 누구도 그 거대한 흐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성매매'와 아무 상관없어 보이는 각종 기관들이 어떻게 그 '산업'에 가담하고 공조하는 모양새로 기능하는지, <레이디 크레딧>을 읽으면 알게 된다. 아무 생각 없이 내뱉었던 평소의 '성매매' 혐오발언이 얼마나 어리석은 것이었는지 알게 된다. 두루뭉술하게 후려쳐서 생각하던 '성매매 산업'의 구조를 낱낱이 들여다볼 수 있다. 우리 사회가 얼마나 '성매매'로 뒤덮여있는지 실감할 수 있다. (내 생각에는 책에 나오지 않은 뒷배경이 더 있을 듯하다.) 다시 한번 되새긴다. 그 누구도 '성매매 산업'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남자도, 여자도.
회색 비가 내리는 마음 속에 아침의 환한 햇살이 내리쬔다. 창을 여니 발랄한 새들이 노래한다. 세상은 아름다울 수 있다.
(제목에 불행,과 안온,을 써놓고 보니 적절하지 못하다는 생각이 든다. 불행은 누가 판단하는 것인가? 어떤 것이 안온한 것인가. 그러나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는 알 수 있으리라 생각해 그냥 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