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101빌딩을 나와 택시를 타고 근방에 있는 둔화난로점의 청핑서점을 찾아갔다. 2004년 미국 <타임>지에 의해 ‘아시아 최고 서점’으로 선정되기도 했으며 24시간 영업을 하는 곳이라기에 무척 궁금했다. ‘만약 하룻밤 잘 곳이 없으면 이 서점에서 책이나 보면 되겠구나,’라는 생각이 들기도 해서 답사 차 보러 가는 기분도 들었다. 주로 인터넷으로 책을 구입하다보니 국내에선 서점에 가는 일이 거의 없지만, 한때는 한 자리에 꼬박 서서 서너 시간은 족히 책을 읽고는 했었다.

 

 

 

 

   분위기가 어떤가? 상업적인 냄새보다 학구열을 자극하는 이 천국 같은 서점에서 체력만 된다면 하룻밤 거뜬히 둥지를 틀고 책에 파묻혀 보고 싶은 마음 간절하지 않은가. 그러나 여행객인 우리는, 그것도 4명으로 이루어진 단체여행객인 우리는 갈 곳이 많았다. 아쉬움을 사진에 담는 것으로 접고 지하1층의 음반 및 문구매장으로 향했다. 남미 여행을 계획하고 있는 종학이는 <부에나 비스타 소셜클럽> cd를, 나는 덩뤼쥔(등려군)의 cd를 한 장 골랐다.

   사실 나는 여행지에서 영화 한 편 보기를 즐겨한다. 다행히 영어 자막이 있으면 내용이야 대강 파악되는 거고, 그것보다 현지에서 보는 영화 한 편이 강한 인상을 주기 때문이다. 절대로 두 번 다시 오지 않을 공간과 시간을 온 몸으로 맞으며 영화 한 편에 깊이 빠져드는 맛은 여행이 주는 또 하나의 묘미이다. 그러나 겨우 4박 5일간의 여행에서 영화감상은 사치에 불과하니, 그저 cd 한 장으로 만족할 수밖에.

   여행 며칠 전에 읽은 최창근의 <대만, 거대한 역사를 품은 작은 행복의 나라>에서 덩뤼쥔에 관한 글을 접하고 비로소 그녀에 대한 호기심이 생겼다. 1953년~1995년. 겨우 42살에 삶을 마감한 비운의 가수로 중화권에서는 가히 국민가수 대열에 올랐다는 사실을 이제야 알게 되었다. 여행 후 돌아와서 그녀의 노래를 말 그대로 주구장창 듣고는 이런 생각이 들었다. 과연 프랑스의 에디뜨 피아프에 비견될 만할 인물이구나, 하고.

 

 

 

 

 

 

(이번 대만여행에 큰 도움이 되었던 책이다.)

 

 

 

 

 

 

 

 

   그녀의 노래를 듣다보니 그녀가 부른 <첨밀밀>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고, 그러다보니 홍콩영화 <첨밀밀>을 다시 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TV로 볼 때, 흑백으로 처리된 1993년의 옛 분위기에 흥미를 잃고는 그냥 잠들어버렸는데 이 영화에 덩뤼쥔의 노래가 몇 곡 나온다기에 집중에서 보니 장면 하나하나가 마음에 착착 안겨오기 시작했다. 두 주인공이 함께 하는 곳엔 늘 덩뤼쥔의 노래가 있었다. 꿈을 안고 작은 장사를 시작했을 때도, 피치 못하게 헤어질 때도, 다시 미국에서 극적으로 만났을 때도 늘 덩뤼쥔의 노래가 배경으로 깔렸다.  덩뤼쥔의 노래를 위해 만들어진 영화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영화 속 이야기가 1986년부터 시작되니 나도 그때는 비슷한 20대를 보내고 있었다. 난 그때 무엇을 하고 있었나? 이 영화가 이렇게 사랑스러울 줄이야. 무엇보다 남자 주인공인 여명의 선하디 선한 표정이 강한 인상을 남긴다. 저렇게 선한 얼굴의 남자를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으며, 저렇게 똑 부러지고 야무진 여주인공인 장만옥이 어떻게 음식을 마구 먹으면서도 사랑스럽게 보이는 걸까.

 

 

 

 

 

(덩뤼쥔 cd지만 내가 구입한 것과는 다르다. 사진이 필요해서..)

 

 

 

 

 

 

 

 

 

 

 

(영화 <첨밀밀>)

 

 

 

 

 

 

 

옆에 덩뤼쥔의 cd가 있고, usb에 <첨밀밀>이 저장되어 있는 한 대만여행의 여운은 계속 될 것이다.

 

 

5. 밥 대신 과일을 좋아하는 종학을 위해 과일을 구하러 까르프에 가기로 했다. 국립고궁박물관을 나온 후 어느 택시기사에게 家樂福이라고 쓴 종이를 내밀며 데려다 달라고 했더니 어딘지 모른다고 한다. 다행히 박물관 앞에서 교통 지도를 하고 있는 순경이 우리 의도를 이해하고 택시를 세워서 우리를 그곳에 데려다 달라고 부탁해준다. 와중에 까르프를 家樂福이라고 한다는 것을 어떻게 알았느냐고 친구들이 나보고 호들갑을 떨어준다. 칭찬에 굶주리면 내 성질이 사나워진다는 것을, 내 친구들은 나의 모자란 성질을 잘 알고 있음에 틀림없다. “흐흐. 그 정도가지고 뭘.”

   까르프 매장은 2층에 있고 1층은 식당가이다. 이 식당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이렇게 소개하는 이유는 그 소박함이 마음을 끌기 때문이다. 우선 사진을 보시라.

 

 

 

   물론 모든 까르프 매장에 있는 식당이 이러리라고는 생각되지 않지만, 이 식당이 대만의 어떤 특성을 드러내고 있는 듯싶었다. 바로 소박함이다. 전체적으로 새로 단장한 분위기인데 눈여겨보면 탁자라든가 천장 장식, 진열장식에 쓰인 자재들이 모두 재활용된 자전거 바퀴라든가, 문짝, 낡은 판자조각들이다. 마치 세트장 같은 느낌이 든다.

 

 

 

 

   연극 무대 같기도 해서 금방이라도 배우들이 튀어나올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그러나 식당가에 손님이 별로 눈에 띄지 않으니 이걸 가지고 대만 전체를 상징한다고 볼 수는 없을 터, 다만 내 생각에 이름을 붙일 뿐이다. 소박함이라고.

   어디를 가기 위해 전철을 타려고 막 플랫폼에 내려설 때였다. 대부분이 칙칙하고 수수한 옷차림을 하고 있는데 개중 밝은 색의 세련된 옷차림이 눈에 띄어 돌아다보았다. 밝은 색의 환한 빛을 발하고 있는 사람은 바로 종학과 성란이었다. 주황색의 라운드티셔츠에 얇은 가디건 하나 걸친 종학이와 밝은 하늘색 니트 차림의 성란이가 세련된 모습으로 눈에 들어올 정도로 이곳 사람들의 입성은 정말로 소박했다. 그러나 표정은 우리처럼 굳어있거나 화난 얼굴 모습이 아니었다. 어딘지 모르게 평화로워 보였다. 여행하는 내 마음이 그 순간에 평화로웠을지도 모르겠으나 책에서 읽은 바로는 이들이 우리보다는 훨씬 덜 부대끼며 살고 있는 듯싶었다. 그 평화로운 삶의 한 단편을 나는 그네들의 소박한 옷차림과 표정, 그리고 위 사진의 소박한 식당에서 발견했다. 전철 안의 사람들을 사진에 담아보지 못한 게 못내 아쉽다. 나이든 노인에게 기꺼이 자리를 양보하는 장면도 흔하게 볼 수 있는데 언젠가부터 우리가 잃어버린 것들이어서 그런지 더욱 정겹게 다가왔다. 조금은 덜 세련되고 낡은 모습들이 그립게 다가왔다.

 

 

 

(까르프 식당가에서 밥을 먹고 난 후 호텔로 돌아갈 걱정을 하고 있는데 여주인이 친절하게 적어준 글이다. 타이페이는 지하철이 매우 편리하여 사실은 이런 쪽지 없어도 대충 물으며 다닐 만하다. 하여튼 대만 사람들은 대체로 무척 친절한 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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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a 2014-03-22 20: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위 까프프매장은 젠난루역 메리화백화점 뒤에 있다.
 

(내 몸이 내 몸이 아닌 요즘이다. 방학이지만 발수술 끝에 이어지는 연수, 여행으로 몸이 폭삭 늙어버렸다. 그래도 기록은 남겨야겠기에 쓰긴 쓰지만 어떻게 될 지는 모르겠다. 끝까지 쓰기 위해서 조금씩이나마 올려본다. 더불어 이 기록은 여행을 함께 한 친구들과 추억을 나누기 위한 순전히 사적인 기록임을 밝힌다.)

 

1. 이번 여행은 2010년 중국동관여행, 2012년 일본교토여행에 이은 고향 친구들과의 여행 제3탄이다. 작년 1월부터 매달 10만원씩 여행적금을 착실하게 불입하여 꿈에 부푼 날들을 보냈다. 지난 일본여행하고 남은 60여만 원의 금액도 더해져 통통한 볼 살을 키우고 있었다.

   10월 초 인자의 제안으로 대만이 입에 올라 얼떨결에 이번 여행지는 대만으로 결정이 났다. 물론 만장일치는 아니었다. 내가 그 자리에 없었을 뿐 아니라 나는 이미 2005년 여름에 가족과 함께 5박6일간 타이페이 시내를 땀을 뻘뻘 흘리며 싸돌아다닌 경험이 있었다. 허나 그게 뭐 대수이랴. 친구들이 자의반 타의반으로 인정해주는 여행선배인 내가 그냥 선배 구실을 하면 될 터. 인정받는 재미로 총대를 멘다고나 할까. 흐흐.

   일찌감치 항공권 예매와 호텔 예약을 얼추 끝내고 일상의 의무에 충실하던 중...2년 전부터 시작된 무릎 인대의 통증이 서서히 발바닥으로 내려와 1년 이상 보행에 어려움을 주더니 이번엔 아예 발가락 아래 부분의 발등에 이상한 혹이 울퉁불퉁 솟아나기 시작했다. (병명이 지간신경종이라고 한다.) 나름 지난한 과정을 거쳐 수술로 혹을 제거하기에 이르렀다.

   지난한 과정? 학교 선생은 아파도 방학 때 아파야 하고 수술도 당연 방학 때 해야 한다는 암묵적인 불문율을 무시하고 방학을 며칠 앞 둔 시점에 병원에 입원했기 때문이다. 2~3일간 실시되는 시험기간에 연가나 병가를 내면 그 사람이 해야 할 시험 감독을 누군가가 대신해야 하기 때문에 나는 그 기간에 연가를 쓰는 사람들에 대해서 몰염치한 인간으로 치부해왔었다. 그런데 그 짓을 내가 하게 되었다. 시험기간 이틀과 그 다음 날 까지 3일간 병가를 쓰겠노라고 했더니 교장으로부터 한 말씀 들어야 했다. 수술 같은 건 방학 때 해야 하는 거라고. 물론 나도 말실수를 하긴 했다. 방학 때 해야 할 일이 많아서 그때까지 기다릴 수 없노라고 했으니. 차라리 몹시 아파서 더 이상 참을 수 없다고 엄살이라도 떨어야 하는데 엄살떨기가 싫었다. 단지 사실 그대로를 말했을 뿐이다. ‘방학 때 해야 하는 일’로는 방학 시작하자마자 5일간 연수가 있고 연수가 끝나는 다음 날 친구들과 대만 여행을 떠나야 하는 일이었다. 발 통증이 점점 심해져서 도저히 이 발 상태로 여행을 떠날 수는 없었다.

   내가 엄살 대신 사실을 중시한 것에 대해서, 다시 이 같은 일이 생겨도 별로 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나는 어느 때부턴가 8시 30분 출근시간에 맞춰 출근해 본 적이 거의 없다. 한 시간 빠른 7시 30분 전에 이미 교무실에 도착하기 때문이다. 시간에 대한 성실성만큼은 철저하다고 여겨왔기에 내가 설사 학기 중에 병가를 쓴다고 해도 내 성실성이 의심 받으리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그러나 이건 내 착각이었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주어진 시간에 제 할 일만 하면 되는 게 조직사회라는 것을. ‘열 개중 아홉 개를 잘해도 한 개를 잘못하면 그 한 개 때문에 욕먹는 게 조직사회’라고 넌지시 위로 아닌 위로를 남편이 건넨다. 열 개중 한 개를 정도 이상으로 잘해도 다른 한 개를 대체할 수 없다는 이 가차 없는 현실이 참으로 씁쓸했다. 평소에 아부라도 좀 해둬야 하는 건데..

 

   그간 혹사하던 발을 2주 동안 발에 붕대를 감은 채 살살 모셔가며 겨우 겨우 출근했다. 짓궂은 녀석들은 몰래 내 뒤에서 절뚝거리는 흉내를 내곤 했는데 뭐 괜찮다. 애들은 원래 그런 거니까. 이번에 나도 새롭게 깨달은 점이 있었는데, 툭하면 발이나 팔에 붕대를 감고 오는 아이들이 많은 학교에서 이제야 비로소 그 다친 학생들의 입장을 생각해 볼 수 있었다는 것이다. 발이나 다리에 깁스를 하고 다니는 아이들에게 나머지 한 쪽 발에 실내화를 신으라고 하는 게 얼마나 모질고 배려가 없는 처사인지를 알게 되었다. 두 다리가 균형이 맞지 않아 바닥이 납작한 실내화보다 바닥이 두툼한 일반 운동화가 그나마 통증을 완화해준다는 사실을 내가 발에 깁스를 하기 전까지 전혀 생각해 보지 못했다. 이 점에선 아이들이 선생이고 나 역시 조직화된 맛대가리 없는 인간이었다.

 

2. 욕먹는다고 굴할 나냐, 그래도 여행은 계속 되는 거지. 그런데 이번엔 인자에게 문제가 생겼다. 아파트 관리소장인 인자는 특히 겨울을 더 두려워하는 것 같다. 대만여행을 먼저 제안한 사람이 인자였는데 ‘눈이 많이 오면 여행을 못 갈지도’ 모른다고 해서 눈이 오지 않기만을 기도하고 있었는데 직원 한 명이 과로로 쓰러지는 불상사가 일어났다. 가뜩이나 겨울엔 적설에, 동파에 아파트관리에 정신이 없다고 하는데 와중에 직원까지 병원 중환자실로 실려 가는 일이 발생하니 여행을 포기하기에 이르렀다. 포기하기 전에 날짜를 연기하면 어떻겠느냐고 하여 다시 날짜 조정에 들어갔는데 항공일정과 호텔예약 상황을 새롭게 짠다는 건 사실 내 알량한 일머리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여행 날짜가 보름 남짓 남은 시점이었다. 결국 인자는 여행을 포기하게 되었는데 성실 그 자체인 인자로서는 당연한 선택이겠지만 추진하는 내 입장에서는 난감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항공권 취소도 짜증나고, 두 군데의 호텔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주펀의 <진스커잔>에는 4명이 간다고 이메일까지 다 보냈는데 다시 수습해야 했다. 빈 한 자리가 못내 아쉬움으로 남아 있었는데 마침 미선이가 안부전화를 걸어왔다. 얘기 중에 대만여행계획이 나왔고 이러저러한 일로 한 명이 빠지게 되었다는 말에 미선이가 끼고 싶다는 의사표시를 했다. 종학과 성란은 미선을 모르는 상황인데 이 친구들에게 타진을 해보니 ‘뭐 이 나이에 사람을 가리냐.’는 너그러운 마음씨를 보여 나를 감동시켰다. 항공권 구하기가 쉽지 않았지만, 미선은 하루 늦게 출발하고 귀국 편은 같은 항공권을 구했다. 그렇게 해서 조합이 약간 어색한 구성원이 되었다.

   사람이 뒤끝이 짧아야 되는데, 그게 가까운 사이라면 더욱 그래야 되는데 나는 그렇지가 못하다. 몇 년 전 라오스에 갈 때도 준비를 다 해놓았는데 인자와 성란이가 갑자기 못 가겠다는 말을 전해 왔다. (물론 성란이의 교통사고 같은 피치 못할 이유야 있었지만 나는 내 서운함만 우선한다.) 항공권 취소, 열차 예약 취소 등으로 골머리를 앓았었던 기억이 더해져 내 심사가 사나워졌다. 인자야, 다음 여행은 네가 기획하고 항공권 예매, 호텔 예약 다 해봐라. 그런데 실제 인자가 주장이 되어 여행 기획을 하게 된다면 이 뒤끝 질긴 나 같은 친구는 끼어주지도 않을 터, 미우나 고우나 다음 여행에도 내가 기획하여 인자랑 함께 하게 되겠지? 인자가 빠진 우리는, 맵고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나 예쁜 옷을 걸어놓은 옷가게를 지나칠 때마다 함께 하지 못한 서운한 마음에 ‘인자가 있었으면....할 텐데’를 연발했으니까. 글쎄 내가 빠지면 우리 친구들은 뭐라고 연발하고 다닐까. ‘얘가 있었으면 한 성깔 부렸을 텐데 없으니 조용하네.’라고 할까.

 

3. ‘타이페이101빌딩에서 입장료 안 내고 35층 전망대에 오르는 방법’을 얘기하고자 한다.

높이로 세계2위를 자랑하는 이 빌딩의 89층 전망대에 오르는 게 일반적인 관광 코스인데 비싼 입장료(16,000원 정도)도 그렇고 전망도 그게 그거 아니겠나 싶어 현지인만 아는 방법(?)을 써보기로 했다. 종학이가 알아온 정보에 의하면 지하1층에 있다는 스타벅스에서 커피를 마시면 35층 전망대에 있는 스타벅스에서 90분간 체류할 수 있다는 쿠폰을 준다는 것이다. 그런데 지하 1층에는 스타벅스가 없고 대신 지상1층에 있다는 것을 겨우 알아내고 점심밥부터 해결하였는데, 다음에 대만여행 하는 분들을 위한 조언인데 이 101빌딩 지하 식당 밥이 최고로 맛이 없었다는 사실이다. 첫날 용산사 뒤편에 자리한 허름한 길거리 식당에서 먹은 베트남국수와 스프링롤이 훨씬 더 저렴하고 훨씬 더 감동적인 맛이었다.

 

(용산사 경내)

 

     

 (베트남 쌀국수 NTD 85$, 스프링롤 NTD100$)

 

   지상1층의 스타벅스에 갔더니 로비에 있는 안내처에서 다시 물어보라기에 쭈르르 몰려가 보았더니 열댓 명의 사람들이 닭장안의 닭들처럼 어떤 표시선 안에 무리지어 줄 서 있었다. 뭐시여, 이건? 35층에 있는 스타벅스에 들어가기 위한 번호표를 나눠주고 순서를 기다리는 곳이었다. 역시 정보시대라는 생각에 내심 외국인인 우리도 이 대열에 합류했다는 묘한 성취감 같은 흥분을 느끼며 기꺼이 동참했는데...한참(여행지에서 보내는 무의미한 10분은 마치 1시간 같은 초조함을 일으키지 않는가.)을 기다린 끝에 드디어 35층 스타벅스에 입성했는데...전망대? 내 작은 손으로도 한 뼘쯤 될까 말까한 각도를 가진 유리창문이 있었다. 여느 커피숍과 다를 바 없는 그저 그런 카페였다.

 

(35층에 자리한 스타벅스)

 

속았다는 생각이 순간 들었다. 스타벅스 찾는데 걸린 시간과 줄서서 기다린 시간, 기대감에 찬 흥분의 시간, 게다가 일인당 한 잔씩은 꼭 마셔줘야 한다는 커피 값까지 따지면 역시 싼 게 비지떡이라는 옛말이 틀린 말이 아니었다. NTD(뉴타이완달러)450불을 주면 5층에서 87층까지 37초 만에 올라가는 그 희열감에, 87층 전망대에서 내려다보는 아찔함을 맘껏 만끽할 수 있으련만, 언제 또 이곳에 오겠다고 그걸 아끼나...그러나 난 괜찮다. 그 둘을 다 경험해봤으니까.

 

 (1층에서 받은 스타벅스방문객카드를 35층 스타벅스에 제시하고 최소 일인당 한 잔씩의 음료수를 마시되 주말에는 90분으로 제한한다는 내용의 푯말이다.)

 

 (아예 엘리베이터를 스타벅스가 있는 35층으로 고정시켜놓았다. 일부 고급 식당과 지하층의 쇼핑몰을 제외하고는 다른 곳으로 갈 수 없는 폐쇄된 공간이 101빌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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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을 찾아서
박정석 지음 / 민음사 / 200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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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네시아 발리에 대한 흥미를 자극하고, 유쾌하고 재밌지만, 치기어린 제호가 어색하고 인간에 대한 깊이가 좀 아쉬운 여행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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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렌즈 타이완 (13'-14') - Season 2 프렌즈 Friends 6
조현숙 지음 / 중앙books(중앙북스) / 201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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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대만 관련 안내책자 중에서 편집이 깔끔하고 내용이 알차서 여행따라하기에 매우 적합함. 양념으로 들어간 잡다한 팁이 특히 도움이 됨. 두번 째 대만여행에 이 책을 끼고 다녔음. 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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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글 '가정통신문을 이렇게 써도 될까?'라는 페이퍼의 밑에서 세번 째 줄에 적힌 "아까운 수재, 청소할 때 무한 매력 발산'의 별칭을 얻는 녀석에게 다섯 권의 책을 보냈다.

 

      

                                

    

 

 

 

 

 

 

 

 

 

 

 

 

 

1학기 때는 게임중독에 빠져 이따금 무단결석도 하고, 2학기 때는 친구들과 어울려 흡연을 시작하는 등 여러가지로 담임인 나를 애태우던 녀석이었다. 고집은 또 얼마나 세고 제멋대로인지, 전화를 해도 받는 일이 없고 문자메세지는 아예 아이들 표현대로 '씹어버린다.' 그래서 한번도 전화로 목소리를 들어본 적도, 답신 메세지를 받은 적도 없다. 보통의 아이들이라면 학교에서 응당 '선생님'이라는 호칭을 입에 달고 살건만, 이 녀석에게서 '선생님'이라고 불려본 적이... 딱 한번은 있었다. 그것도 자기가 아쉬울 때.

 

이 아이가 세상과 단절하고 자기만의 세계에 빠진 건 아마도 어린 시절 겪었던 부모의 이혼이 아니었을까 싶은데 그건 어디까지나 내 추측일 뿐이다. 한번도 얘기를 나눠본 적이 없으니 쉽게 속단할 일은 아니다. 하여튼 어떤 계기로 인해, 한때는 영재라는 말을 듣던 아이가 공부를 손에서 놓고 세상과는 담을 쌓고 살았던 것이다.

 

입학 첫 날의 마치 당장이라도 창문 밖으로 뛰어내릴 것 같은 가라앉은 표정을 잊을 수가 없다. 처음부터 가슴을 쓸어내리게 하는 그 침울한 표정 때문에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었다. '선생님'이라는 소리를 한번도 못들으면서도 꾸준히 이 아이를 지켜보는 일은 쉽지 않았다. 한번은 마음을 단단히 먹고 학생부 선도위원회에 올려 단발령과 교내봉사라는 처벌을 받게 했는데 참으로 미안하고 마음이 아팠다. 일종의 충격요법이 필요하다 싶어서 내린 내 나름의 가혹한 방법이었는데 그게 효과가 있었는 지는 모르겠다. 한번도 녀석과 대화를 나눠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드디어 2학기 때는 세상 밖으로 나오기 시작했다. 친구들과 어울리기 시작한 것이다. 마치 바람난 사람처럼 오로지 친구들과 어울리는 일 외에는 어떤 것에도 관심을 두지 않았다. 교과 선생님들이 불러도, 담임이 뭐라해도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고문관처럼 행동했다. 청소? 그냥 가버렸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일단 대답은 '네'한다는 것, 상대방을 불쾌하게 하는 말은 절대로 입 밖으로 내지 않는다는 것, 반발하거나 반항적인 말을 절대로 하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웃는 표정이 매우 선하고 예쁘다는 것이다.

 

이제는 친구들과 너무 어울리다보니 오히려 걱정거리가 되었다. 방학을 맞아 특단의 조치를 내리지 않을 수 없었는데, 멀리 있는 누나한테 보내서 그간 등한시한 공부도 하게 하고 친구들과도 떨어뜨려 놓는 일이었다. 방학식이 있던 날, 누나한테 내려간다는 녀석의 얼굴은 퍽으나 가라앉아 있었는데 한편으로는 고소(?)하고 한편으로는 몹시 외로워 보였다.

 

그간 녀석에게서 영어자습서를 거절당해본 적이 있었던지라, 학습서는 빼고 딸아이가 읽던 책을 골라서 우편으로 보냈다. 깁스에서 갓 벗어난 발을 끌며 남편과 우체국으로 가면서 이 또한 괜한 짓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책 중에는 나도 재미있게 읽고 딸아이도 재미있게 읽었던 <용의자X의 헌신>이나 <인생>은 사실 좀 아깝기도 했다. 손때가 묻어 있고 추억이 어린 책이기 때문이다.

 

우편물 배송 완료했다는 우체국 문자가 오기가 무섭게 또 한 통의 문자가 왔다.

 

'선생님 책 잘 읽을게요.' 녀석이 보낸 최초의 문자였다!

 

답신을 보냈다. '헌 책이라 미안해. 다 읽으면 문자해. 새 책 보내줄게. 내가 책을 좀 알거든 ㅎㅎ'

 

녀석의 두번 째 답신이 왔다. '네'

 

이 문자를 기억하리. 그리고 다 잊으리. 그간의 불응과 무례와 굳게 다물었던 입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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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nine 2014-01-07 21: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감동이네요. 선생님의 마음이 아이에게 통했나봐요. 비딱하게 나가는 아이 모습에서 '외로움'을 읽으셨다는 말씀에 저도 뭉클해요.

nama 2014-01-08 07:59   좋아요 0 | URL
이 아이는 일 년 내내 외로운 모습이었어요. 그래서 밉다가도 다시 안쓰러워지고, 포기하다가도 다시 눈길이 가곤 했어요. 지난 일 년 동안 제가 양육한 기분이었다고나 할까요. 꼭 제 자식 같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