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101빌딩을 나와 택시를 타고 근방에 있는 둔화난로점의 청핑서점을 찾아갔다. 2004년 미국 <타임>지에 의해 ‘아시아 최고 서점’으로 선정되기도 했으며 24시간 영업을 하는 곳이라기에 무척 궁금했다. ‘만약 하룻밤 잘 곳이 없으면 이 서점에서 책이나 보면 되겠구나,’라는 생각이 들기도 해서 답사 차 보러 가는 기분도 들었다. 주로 인터넷으로 책을 구입하다보니 국내에선 서점에 가는 일이 거의 없지만, 한때는 한 자리에 꼬박 서서 서너 시간은 족히 책을 읽고는 했었다.
분위기가 어떤가? 상업적인 냄새보다 학구열을 자극하는 이 천국 같은 서점에서 체력만 된다면 하룻밤 거뜬히 둥지를 틀고 책에 파묻혀 보고 싶은 마음 간절하지 않은가. 그러나 여행객인 우리는, 그것도 4명으로 이루어진 단체여행객인 우리는 갈 곳이 많았다. 아쉬움을 사진에 담는 것으로 접고 지하1층의 음반 및 문구매장으로 향했다. 남미 여행을 계획하고 있는 종학이는 <부에나 비스타 소셜클럽> cd를, 나는 덩뤼쥔(등려군)의 cd를 한 장 골랐다.
사실 나는 여행지에서 영화 한 편 보기를 즐겨한다. 다행히 영어 자막이 있으면 내용이야 대강 파악되는 거고, 그것보다 현지에서 보는 영화 한 편이 강한 인상을 주기 때문이다. 절대로 두 번 다시 오지 않을 공간과 시간을 온 몸으로 맞으며 영화 한 편에 깊이 빠져드는 맛은 여행이 주는 또 하나의 묘미이다. 그러나 겨우 4박 5일간의 여행에서 영화감상은 사치에 불과하니, 그저 cd 한 장으로 만족할 수밖에.
여행 며칠 전에 읽은 최창근의 <대만, 거대한 역사를 품은 작은 행복의 나라>에서 덩뤼쥔에 관한 글을 접하고 비로소 그녀에 대한 호기심이 생겼다. 1953년~1995년. 겨우 42살에 삶을 마감한 비운의 가수로 중화권에서는 가히 국민가수 대열에 올랐다는 사실을 이제야 알게 되었다. 여행 후 돌아와서 그녀의 노래를 말 그대로 주구장창 듣고는 이런 생각이 들었다. 과연 프랑스의 에디뜨 피아프에 비견될 만할 인물이구나, 하고.
(이번 대만여행에 큰 도움이 되었던 책이다.)
그녀의 노래를 듣다보니 그녀가 부른 <첨밀밀>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고, 그러다보니 홍콩영화 <첨밀밀>을 다시 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TV로 볼 때, 흑백으로 처리된 1993년의 옛 분위기에 흥미를 잃고는 그냥 잠들어버렸는데 이 영화에 덩뤼쥔의 노래가 몇 곡 나온다기에 집중에서 보니 장면 하나하나가 마음에 착착 안겨오기 시작했다. 두 주인공이 함께 하는 곳엔 늘 덩뤼쥔의 노래가 있었다. 꿈을 안고 작은 장사를 시작했을 때도, 피치 못하게 헤어질 때도, 다시 미국에서 극적으로 만났을 때도 늘 덩뤼쥔의 노래가 배경으로 깔렸다. 덩뤼쥔의 노래를 위해 만들어진 영화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영화 속 이야기가 1986년부터 시작되니 나도 그때는 비슷한 20대를 보내고 있었다. 난 그때 무엇을 하고 있었나? 이 영화가 이렇게 사랑스러울 줄이야. 무엇보다 남자 주인공인 여명의 선하디 선한 표정이 강한 인상을 남긴다. 저렇게 선한 얼굴의 남자를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으며, 저렇게 똑 부러지고 야무진 여주인공인 장만옥이 어떻게 음식을 마구 먹으면서도 사랑스럽게 보이는 걸까.
(덩뤼쥔 cd지만 내가 구입한 것과는 다르다. 사진이 필요해서..)
(영화 <첨밀밀>)
내 옆에 덩뤼쥔의 cd가 있고, usb에 <첨밀밀>이 저장되어 있는 한 대만여행의 여운은 계속 될 것이다.
5. 밥 대신 과일을 좋아하는 종학을 위해 과일을 구하러 까르프에 가기로 했다. 국립고궁박물관을 나온 후 어느 택시기사에게 家樂福이라고 쓴 종이를 내밀며 데려다 달라고 했더니 어딘지 모른다고 한다. 다행히 박물관 앞에서 교통 지도를 하고 있는 순경이 우리 의도를 이해하고 택시를 세워서 우리를 그곳에 데려다 달라고 부탁해준다. 와중에 까르프를 家樂福이라고 한다는 것을 어떻게 알았느냐고 친구들이 나보고 호들갑을 떨어준다. 칭찬에 굶주리면 내 성질이 사나워진다는 것을, 내 친구들은 나의 모자란 성질을 잘 알고 있음에 틀림없다. “흐흐. 그 정도가지고 뭘.”
까르프 매장은 2층에 있고 1층은 식당가이다. 이 식당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이렇게 소개하는 이유는 그 소박함이 마음을 끌기 때문이다. 우선 사진을 보시라.
물론 모든 까르프 매장에 있는 식당이 이러리라고는 생각되지 않지만, 이 식당이 대만의 어떤 특성을 드러내고 있는 듯싶었다. 바로 소박함이다. 전체적으로 새로 단장한 분위기인데 눈여겨보면 탁자라든가 천장 장식, 진열장식에 쓰인 자재들이 모두 재활용된 자전거 바퀴라든가, 문짝, 낡은 판자조각들이다. 마치 세트장 같은 느낌이 든다.
연극 무대 같기도 해서 금방이라도 배우들이 튀어나올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그러나 식당가에 손님이 별로 눈에 띄지 않으니 이걸 가지고 대만 전체를 상징한다고 볼 수는 없을 터, 다만 내 생각에 이름을 붙일 뿐이다. 소박함이라고.
어디를 가기 위해 전철을 타려고 막 플랫폼에 내려설 때였다. 대부분이 칙칙하고 수수한 옷차림을 하고 있는데 개중 밝은 색의 세련된 옷차림이 눈에 띄어 돌아다보았다. 밝은 색의 환한 빛을 발하고 있는 사람은 바로 종학과 성란이었다. 주황색의 라운드티셔츠에 얇은 가디건 하나 걸친 종학이와 밝은 하늘색 니트 차림의 성란이가 세련된 모습으로 눈에 들어올 정도로 이곳 사람들의 입성은 정말로 소박했다. 그러나 표정은 우리처럼 굳어있거나 화난 얼굴 모습이 아니었다. 어딘지 모르게 평화로워 보였다. 여행하는 내 마음이 그 순간에 평화로웠을지도 모르겠으나 책에서 읽은 바로는 이들이 우리보다는 훨씬 덜 부대끼며 살고 있는 듯싶었다. 그 평화로운 삶의 한 단편을 나는 그네들의 소박한 옷차림과 표정, 그리고 위 사진의 소박한 식당에서 발견했다. 전철 안의 사람들을 사진에 담아보지 못한 게 못내 아쉽다. 나이든 노인에게 기꺼이 자리를 양보하는 장면도 흔하게 볼 수 있는데 언젠가부터 우리가 잃어버린 것들이어서 그런지 더욱 정겹게 다가왔다. 조금은 덜 세련되고 낡은 모습들이 그립게 다가왔다.
(까르프 식당가에서 밥을 먹고 난 후 호텔로 돌아갈 걱정을 하고 있는데 여주인이 친절하게 적어준 글이다. 타이페이는 지하철이 매우 편리하여 사실은 이런 쪽지 없어도 대충 물으며 다닐 만하다. 하여튼 대만 사람들은 대체로 무척 친절한 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