벤투의 스케치북
존 버거 글.그림, 김현우.진태원 옮김 / 열화당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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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은 아무때나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때에 따라 읽히는 책이 다르다. 잡지를 읽는 마음, 소설을 읽는 마음, 에세이를 읽는 마음, 원서를 읽는 마음이 다 다르다. 존 버거의 글을 읽으면서 '정확한' 구분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왜냐하면 이 책을 예전에도 읽으려다가 끝내 눈에 들어오지 않아 중도 포기하고 말았기 때문인데 이제 '맑은 정신'으로 찬찬히 읽어보니 읽히더라는 얘기다. 몸이 바쁠 때는 읽히지 않는 책이 따로 있다. 존 버거의 책은 그래서 정신이 맑을 때 읽어야 한다. 내 생각이다.

 

허나 맑은 정신으로 읽었다고해서 책 내용을 오래 기억하는 것은 아니다. 기껏 문장 몇 개와 분위기 정도? 존 버거에 따르면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게 있다. 같은 책을 읽는 사람들 사이에 발생하는 '말하자면 그 이야기의 후예(자)'가 된다는 것. 존 버거가 도서관에서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빌리려고 했는데 소장중인 두 권 모두를 다른 사람이 대출해간 것을 알고는 질문 하나를 떠올린다.

 

  그 두 독자들 중 한 명과 내가 마주친다면-일요일에 열리는 장터에서, 지하철역에서 나오다, 횡단보도를 건너다, 빵을 사면서-우리는 서로 조금은 의아하다고 느낄 어떤 눈짓을 주고받지 않을까. 우리는, 의식하지 못한 채, 서로를 알아볼 수 있지 않을까.

  어떤 이야기에 감명을 받거나 울림을 얻으면, 그 이야기는 우리의 본질적인 일부가 되는, 혹은 될 수 있는 무언가를 낳고, 이 일부가, 그게 작은 것이든 광대한 것이든 상관없이, 말하자면 그 이야기의 후예 혹은 후계자가 된다.

(중략)

  복잡할 것도 갈등도 없는 가족관계 안에서, 우리를 만들어낸 그 이야기들이, 생물학적 조상과는 다른, 우리의 공통 조상이 된다. (90쪽)

 

같은 책을 읽고 얻는 같은 생각, 즉 '공감'을 이렇게 멋지게 얘기하다니....

 

슈퍼마켓, 우리로 치면 대형할인마트쯤 되는 곳에 대한 얘기도 재미있다.

  슈퍼마켓 여기저기에 육십여 명 정도의 직원이 있고, 비슷한 숫자의 감시 카메라가 있다.(중략) 가끔씩, 따라온 아이들을 제외하면 아무도 말이 없다. 우리 모두-손님과 직원 들-용의자이고, 우리의 움직임은 하나하나 관찰당한다. 모두 물건을 집어 들고, 수레를 밀고, 물건을 살피고, 코드를 입력하고, 조절하고, 야채 무게를 달고, 일정을 생각하고, 계산한다. 그 모든 과정이 이루어지는 거대한 창고는, 절도(竊盜)라는 개념에 사로잡혀 있다.(중략) 창고형 슈퍼마켓에서는, 우리 모두가 잠재적인 도둑놈으로 여겨진다. (109~110쪽)

 

절도라는 개념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직원들의 초과근무, 허용되지 않는 병가, 무휴식, 무휴무는 '직원들의 권리에 대한 도둑질'이 된다. 땅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주도권을 빼앗는 것, 전 지구적인 식품유통업계와 연결된 것도 도둑질이다. 이 책에는 더 매혹적인 얘기도 많은데 나는 주로 이런 얘기에 흥분하는 경향이 있다.

 

중국의 대가 제백석(1864~1957)은 개구리를 즐겨 그렸는데, 마치 개구리가 수영 모자를 쓰기라도 한 것처럼 머리를 짙은 까만색으로 표시하곤 했다. 극동 지역에서 개구리는 자유의 상징이다. (129쪽)

 

제백석이라는 분이 궁금해서.

 

존 버거가 직접 그린 드로잉을 볼 수 있는 게 이 책인데, 그렇다면 존 버거에게 드로잉은 무엇인가.

  어쨌든 드로잉은 무언가를 지향하는 실천이며, 그렇게 때문에 자연에서 발생하는 다른 지향의 과정에 비유할 수 있다.

  드로잉을 할 때 나는, 하늘 길을 찾아가는 새나, 쫓기는 와중에 은신처를 찾아가는 산토끼, 혹은 알 낳을 곳을 알고 있는 물고기, 빛을 향해 자라는 나무, 자신들만의 방을 짓는 벌 들에게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는 느낌을 받는다. (155쪽)

 

산책, 내가 즐기는 산책이 말하자면 존 버거의 드로잉이 되는구나, 이렇게 이해했다.

 

그러면 '벤투'는 누구? 바로 스피노자를 가리킨다. 그래서 책 곳곳에서 스피노자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데, 사실 내가 그 인용문을 전부 이해했냐면 그건 아니고, 이해되지 않는 부분은 이해하려고 노력하지도 않았다. 다만 다음 부분은 읽고 또 읽었다. 마음이 산란할 때 위안이 되는 글이다. 너무 길어서 사진으로 찍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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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bina 2019-02-03 21: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인간역량을 압도하는 실재를 내게 맞출 순 없지만, 내게 실재 할 수 없는 것을 포기
할 수는 있다는 것.어떨런지...
혹자는 포기란 단어 자체를 부정의 개념으로 인식들 하지만, 삶에 있어 적정선의
포기는 평정심에 도움이 되더군요.(포기를 대체할 긍정단어 뭐 없을까요)
다만,그 적정선의 포기가 비관이 된다거나 마음에 상처로 남으면 평정이 아니겠지요.
저의 졸견입니다. 그래서 요모양으로 사나 돌아볼 일입니다.ㅎㅎ

nama 2019-02-04 14:46   좋아요 0 | URL
포기... 마음 비우기, 혹은 내려놓기 ... 쯤 될까요?
좀 더 적극적으로는 비운다는 자체, 내려놓는 다는 자체도 인식하지 않는 것.
생각할수록, 말을 할수록 배배 꼬이는 것 같다는 생각도 드네요.
 

 

 

 

몇년 동안 차마 버리지 못하고 간직했던 알라딘 굿즈를 고은 덕분에 버린다.

T셔츠야, 네가 무슨 죄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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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우리 젊은날
시바타 쇼 지음, 김성연 옮김 / 한마음사 / 199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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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가 신형철이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 에서 인생 베스트 5 중의 하나로 꼽았던 책이다. 신형철이 읽은 책은 1993년에 나왔던 이 책이고, 내가 가지고 있는 책은 1980년에 출간된, 세로줄로 된 책이다.

아래 포스팅한 글에 사진을 올렸지만 다시 한번 올리련다.

 

             

 

먼저 제호. 초판본은 <그래도 우리들의 나날>이었는데 세월이 흘러 제호가 <그래도, 우리 젊은 날>로 바뀌었고, <그래도 우리의 나날>이란 이름으로 문학동네에서 올해 나올 모양이다. 흠, '그래도' 란 이름 덕분에 '그래도' 다시 세상에 나오게 되는가보다.

 

나이를 따져보면, 1980년에 나온 책이니 이미 한 세대(약 30년)가 지났고 새로운 세대로 진입한지도 9년 가까이 된 셈이다. 번역본이 그렇다는 얘기고 일본 원작은 1964년에 나왔다. 일본 현대 소설의 고전 중 하나라고 한다. 신형철이 소개했으니 머잖아 떠오르는 소설로 널리 읽혀질지도 모른다.

 

초판본을 소장하고 있으니 기분은 삼삼하나 이 책을 '제대로' 읽은 것 같지는 않다. '스무 살의 내게 도착했고, 삶에 대해 질문하는 '방법'과 '언어'를 건네주었다.'라고 신형철은 썼는데, 스무 살에 내가 이 책을 읽었더라면 거의 이해하지 못하지 않았을까 싶다. 그래서 어쩌면 읽었을 지도 모르는 이 책을 처음 읽는다고 생각하는지도 모른다.

 

20대에 이 책을 왜 제대로 읽지 못했을까. 이유를 추측해본다. 1980년은 5.18 이 일어난 해이다. 특별히 운동권이 아니어도 그 당시 대학생이면 그 영향권에서 벗어날 수 없는 시대였다. 그렇다면 일본 전후 학생운동 세대를 다루는 이 소설이 잘 먹혀들었을까, 그렇지 않았을까. 나 였다면, '피곤함'이 앞섰을 것 같다. 우리와 일본을 비교해보자는 호기심이 작동할 만도 한데 너무나 친숙한 주제로 다가와 이내 호기심을 거둬들였을 지도 모른다.

 

또 하나. 등장 인물을 계속 괴롭히는 질문, "죽는 순간에 나는 무엇을 생각하게 될까?" 이 질문이 가슴에 다가왔을까? 당시 대학에서 부전공으로 국문학을 수강했던 나는 '죽음'에 대해 집요하게 천착했던 어떤 교수의 수업에서 '죽음'에 대한 공부를 '강제로' 하고 있었다. 20대 초반의 어린 나이에 죽음이란 주제는 다룰 성질이 못된다는 걸 이제야 깨닫는다. 피상적으로 다가오는 죽음에 대한 공부의 피로감. 그러니 "죽는 순간에..."라는 질문을 거부했을 지도 모른다.

 

이 책을 읽었더라도 등장 인물들을 지배하는 어떤 정신적인 공허감이나 허무를 어느 정도는 이해했을 것이다. 대학 때는 특히 그런 정신세계에 접어드는 시기이기도 하니까. 그러나 읽었더라도 눈으로만 읽었을 확률이 높다. 학창시절 국어책에 나오는 아무리 좋은 글도 단지 시험 대비용 글로 읽었을 뿐 가슴으로 읽은 적이 없었으니까. 배움에 대한 개념이 있었을까 싶다.

 

그래서 이 책을 읽었나, 안 읽었나. 읽은 것도 같고 안 읽은 것도 같다는 얘기. 이제라도 책을 읽을 때 밑줄 긋는 습관을 들여야겠다. 정신적인 흔적은 둘째치더라도 물질적인 흔적이라도 남겨야 읽었다는 증거가 되니까.

 

 

 

이제는 이 책이 잘 읽힌다. 재밌다. 마치 이제야 <장자>를 읽게 된 것처럼. 그렇다고 <장자>와 같은 깊이를 요구하는 소설이냐는 별개의 문제다.

 

다음에 옮기는 구절은 지금 시각으로 보면 구닥다리 표현으로 보이겠으나 내게는 20대로 돌아간 기분이 든다. 그때는 그런 식으로 번역된 책들을 읽었으므로. 다소 틀린 맞춤법도 그대로 옮긴다.

 

제가 언제나 상대방의 사람과 그 무엇인가를 공유하고 싶다, 두 사람의 생활 속에 그 어떤 공통의 의미를 갖고 싶다고 원한 것도 이 망막한 세계 속에 확실한 말뚝을 뿌리박고 싶다, 그것을 한 개 한 개씩 뿌리박음으로써 거기에 단순한 시간의 흐름만이 아니 역사라고 부를만 한 것을 생성하고 싶다고 원했기 때문이며, 또한 그럼으로써 우리는 비로소 우리의 주위에 펼쳐져 있는 이 무한한 공간, 우리들을 이윽고 죽음 속으로 소멸시켜 갈 이 무한한 시간에 견뎌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추구하기에 곤란한 것이었는지는 모르지만, 추구하지 않고 지낼 수는 없는 것이었읍니다. (117쪽)

 

이윽고 우리들이 정말로 나이들었을 때 젊은이들이 물을지도 모른다. 당신들의 시절엔 어땠었느냐고. 그때 우리들은 대답하리라. 우리들 시절에도 똑같은 곤란이 있었다. 물론 시대가 다르니까 다른 곤란이었겠지만, 곤란이 있었다는 점에서는 똑 같았다. 그리고 우리들은 그것과 친숙해지면서 이렇게 늙어왔다. 하지만 우리들 중에도 시대의 곤란으로부터 탈출하여 새로운 생활로 용감히 진출하려고 했던 사람이 있었다고.

그리고 그 대답을 들을 젊은이들 중의 누군가 한 사람이 그런 것이 옛날에도 있었던 이상 지금 우리들에게도 그러한 용기를 갖는다는건 허용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거기까지 늙어갔던 우리들의 생에도 그 나름의 의미가 있었다고 할 수 있을는지도 모른다.

 

 

지금 생각해보면 과거의 이런 번역체가 문제였을지도 모른다. 글이 명료하고 분명해야 생각도 명료하고 분명해지고 생각을 거치는 표현도 정확해진다. '정확성'이란 표현을 정확하게 좋아하게 되는 이유다.

 

새로 번역된 책이 나오면 읽어보고 싶다. 그러면 또 헷갈리려나? 과연 이 책을 읽었나, 안 읽었나,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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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알벨루치 2018-10-26 14: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신적인 흔적은 물질적인 흔적으로 표해야겠네요 ㅎㅎ 글 잘 읽었습니다 선배님~

nama 2018-10-26 17:43   좋아요 0 | URL
불질적인 흔적을 남겨도 나중에 보면 낯설게 다가오지요. ˝내가 읽은 게 맞아?˝하면서요. 그런 경험 때문에 언젠가부터 밑줄을 긋지 않았거든요. 하기야 늘 새로운 것도 나쁘진 않아요.^^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
신형철 지음 / 한겨레출판 / 201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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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몇 페이지를 넘기는 순간 나는 이내 감이 왔다. 이 저자를 좋아하게 되겠구나, 라고. 여간해서는 책을 접거나 밑줄을 긋거나 하지 않고 흔적없이 읽는 게 내가 책을 대하는 태도인데 이 책은 그럴 수가 없었다. 정확하고 깔끔하고 아름다운 글 앞에서 그 도저한 문장들을 그대로 둘 수가 없었다. '폐부를 찌른다'는 표현이 이런 것이구나, 하면서 밑즐을 긋기 시작했다.

 

'트라우마에 의해 인간은 꿰뚫린다.'  ... 한 인간이 어떤 과거에 대해 '주체'가 아니라 '대상'이 되어버리는 고통이 얼마나 참혹한 것인지 당사자가 아닌 이들은 짐작하기 어렵다. 그러나 그렇게 때문에 더 많이 공부하고 더 열심히 상상해야 하리라. 그러지 않으면 그들이 '대상으로서'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잊는다. 그걸 잊은 사람들이 그들에게 말한다. 이제는 정신을 차릴 때가 되지 않았느냐고, 더 이상 다른 사람을 불편하게 만들지 말라고. ....당신의 고통이 나를 불편하게 한다는 말은 얼마나 잔인한가, 우리가 그렇게 잔인하다.'(42~43쪽)

 

'진정으로 비정한 일은, 네가 아픈 만큼 나도 아프다고, 그러니 누가 더 아프고 덜 아픈지를 따지지 말자고 말하는 일일 것이고, 그렇게 말하는 사람이 실제로 덜 아픈 사람이다."(53쪽)

 

이런 문장들을 읽으며 적잖이 위로를 받았다. 누군가의 무심한 말 한마디에 내가 상처를 받았듯 누군가에게 무심코 던진 나의 한마디가 그에게 뼈아픈 상처가 되겠구나, 하는 가슴 서늘한 반성도 하게 되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이런 것이 물론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나 때때로 정신 차리고 성찰하지 않으면 누군가를 슬픔에 더 빠트릴 수도 있기에 '슬픔을 공부'해야 한다고 이 책은 여러 예를 들어 조곤조곤 말하고 있다.

 

'우리가 흔히 삶의 진실이라고 부르는 것은 저 인생의 얼굴에 스치는 순간의 표정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56쪽)

 

이렇게 힘을 주지 않은 문장조차도 숨을 멎게 한다. 한 권의 책에 쓰인 문장들 하나하나에 힘을 주어 읽지 않을 수 없게 한다.

 

'자신의 진실을 충분히 설명하지 못한 채 규정되는 모든 존재들은 억울하다. 이 억울함이 벌써 폭력의 결과다.....폭력이란? 어떤 사람/사건의 진실에 최대한 섬세해지려는 노력을 포기하는 데서 만족을 얻는 모든 태도.' (92~93쪽)

 

나의 슬픔을 대하는 타인의 태도, '섬세해지려는 노력을 포기하는 데서 만족을 얻는 태도'가 폭력이고 그 폭력에 상처를 받는다. 이런 섬세함을 말하는 이 책을 사랑할 수 밖에. 한 문장도 놓칠 수 없는 책이다.

 

'언젠가 이런 문장을 적었다. "단편소설은 삶을 가로지르는 미세한 파열의 선 하나를 발견하는 것으로 이루어진다." 이번에는 이렇게 써보려고 한다. "단편소설은 삶을 가로지르는 미세한 단절의 선 하나를 발견하는 것으로 이루어진다.' ... 파열선이 뒤늦게 깨닫게 되는 비극의 선이라면 단절선은 지금까지의 삶 바깥을 향하는 도주의 선이라는 점에서 두 선은 다르다.'(118쪽)

 

이 문장을 읽고 이제야 단편소설을 제대로 읽게 되겠구나 싶었다. 이 명료한 정의가 무엇보다 마음에 들었다.

 

"내가 좋은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 순간, 나는 아주 조금 더 좋은 사람이 됩니다."

인간은 무엇에서건 배운다. 그러니 문학을 통해서도 배울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무엇보다도 자기 자신에게서 가장 결정적으로 배우고, 자신의 실패와 오류와 과오로부터 가장 처절하게 배운다. 그때 우리는 겨우 변한다. 인간은 직접 체험을 통해서만 가까스로 바뀌는 존재이므로 나를 진정으로 바꾸는 것은 내가 이미 행한 시행착오들뿐이다.'(176쪽)

 

글을 옮기다보면 끝이 없을 것 같아서 여기서 멈춘다. 이렇게 글에 빠지다보니 문득 예전의 평론가 김현이 떠올랐다. <행복한 책읽기>를 읽고 얼마나 행복해 했던가.

 

 

1992년에 출간된 초판본이다. 그 당시엔 재밌게 읽었는데 지금 다시 들춰보니 글이 직설적이고 무례한 부분도 적지 않게 눈에 띈다. 그래도 행복하게 읽었던 기억이 난다. 당대엔 김현이 대세였으니까.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은 마지막까지 독자에 대한 배려를 잊지 않는다. 부록으로 실린 추천리스트를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신형철이 추천해주는 책을 어떻게 그냥 넘어갈 수 있으리. 그중 '인생의 책 베스트 5'는 이렇다.

1. 릴케<두이노의 비가>

2. 손턴 와일더 <산 루이스 레이의 다리>

3. 시바타 쇼<그래도 우리의 나날>

4. 존 윌리엄스 <스토너>

5. 휴버트 드레이퍼스 · 숀 도런스 켈리 <모든 것은 빛난다>

 

김현의 <행복한 책읽기>를 책장에서 찾다가 우연히 낯선 책이 눈에 들어왔다. 대분분의 책은 기억이 나는데 이 책은 도저히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게 바로 이 책.

 

 

 

 

 

 

 

 

 

 

신형철은 이 책에 대해 이렇게 썼다.

 

'이 소설은 내가 어떤 유형의 소설에 감응하는 독자인지를 일찌감치 깨닫게 해준 소설이기도 하다......덕분에 나는 소설이 인간의 내면(성)을 거의 '창조'라고 해도 될 만큼 섬세하게 '발견'해내는 현장이 될 수 있음을, 소설 속의 질문이 내 삶 속으로 곧장 날아와 꽂히는 일이 일어날 수 있음을 처음 알았다.'(423쪽)

 

'돌아보면 내가 이 책을 읽은 게 아니라 이 책이 나를 읽었다는 생각이 든다.'(422쪽) 

 

연도를 봐선 분면 대학시절에 읽은 것 같은데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이런 아둔함이라니. 이 책이 나를 읽긴커녕 내가 이 책을 읽기나 했는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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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밥엔 장아찌 - 자연 품은 슬로푸드 발효음식
이선미 지음 / 헬스레터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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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관에서 빌려온 책이다. 그날따라 눈에 들어오는 책이 없었다. 동네 도서관은 이용하긴 편하나 구색이 빈약하다. 여간해서는 내 돈 주고 사지 않는 책이 요리책이니 그나마 고마운 마음으로 들고왔다.

 

빌려온 이유가 있다면 장아찌에 관심이 있어서라기 보다 별별것으로 장아찌를 담그는 게 신기해서 한번 살펴볼 요량이었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먹는 채소는 대부분 장아찌로 담글 수 있다니 놀라웠다. 책을 보니 하나쯤은 해보고 싶었다. 그래서 고른 것이 깻잎 장아찌.

 

아침나절 두어 시간을 바쳤다. 깻잎 씻어서 쪄내기, 마늘 까서 다지기, 생강 씻어서 즙내기...안경을 썼다 벗었다 하며 책을 들여다보면서 겨우 완성하고는 뿌듯한 마음으로 카메라에 담았다. 책을 덮으려던 찰나. 아니 이게 뭐야. 마지막에 맛국물에 된장을 넣고 1~2분 끓이라는 부분을 그만 생략한 게 눈에 들어왔다.

 

벽돌 쌓듯 깻잎을 한 장 한 장 쌓아올린 공이 아깝고 안타까워, 이런 장아찌도 제대로 담가보지 못한 내 자신이 한심해서 마지막 구절은 그냥 못 본 걸로 해버렸다. 두어 시간 책 읽는 건 일도 아니건만 반찬 만들기는 왜 이리 힘든 건지.

 

'집밥'이란 무엇일까? 누군가 집에서 해주는 밥이 집밥일 때 그 밥은 가정적이고 편안하고 안정적으로 다가온다. 그러나 나 자신이 그 누군가가 되어 집밥을 차려주는 입장이 되면 집밥은 편안하거나 다감하게 다가오지 않는다. 내가 만들어야 하는 집밥은 어디까지나 일이고 노동이다. 그래서 나는 '집밥'이란 단어가 붙은 책이나 방송 프로그램을 보면 슬그머니 짜증부터 나곤 한다. 내가 해야 하는 입장이라서.

 

지난번 강원도 양양 시장에서 깻잎 장아찌를 사면서 "여긴 우리동네보다 비싸네."했던 말이 떠올랐다. 조금 더 비싼들, 깻잎에서 모래가 약간 씹힌들, 그걸 만든 분의 노고를 생각하면 차라리 고맙게 여겨야겠다, 고 모처럼 착한 마음을 먹게 되었다. 집밥을 차리는 노동에서 벗어나게 해주므로.

 

집밥을 강조하는 요리책은 가급적 경계하자. 굴레가 된다. 이렇게 정성을 다하지 않으면 집밥이 아니니라, 라고 쓰여있는 것 같다. 그냥 대강 먹고 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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얄라알라 2018-11-09 15: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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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a 2018-11-09 15:40   좋아요 0 | URL
ㅎㅎㅎ 대강 먹고 살기 위해 끝내 이 책을 구입했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