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굴 황제 - 로마보다 강렬한 인도 이야기
이옥순 지음 / 틀을깨는생각 / 2018년 4월
평점 :
절판


 

무슨무슨 인도사를 읽어도 정리가 되지 않았던 무굴 제국의 역사가 이옥순 교수의 이 책으로 말끔히 정리되는 기분이 들었다. 1526년에 세워진 무굴 제국이 1857년 막을 내리기까지, 특히 제국의 전성기를 지낸 여섯 황제들 중심으로 쓴 책은 우선 재미를 보장한다.

 

여섯 황제: 바브르 - 후마윤 - 아크바르 - 자한기르 - 샤자한 - 아우랑제브

 

무굴 제국이 얼마나 잘 살았는 지를 일단 살펴보면,

 

  유럽에서 30년 전쟁(1618~1648)이 이어지면서 무굴 제국은 화약의 원료인 초석을 수출하여 많은 돈을 벌었다. 후대의 학자들은 무굴 제국의 재정이 동시대 유럽의 여느 국가보다 탄탄했ㄷ고 판단했다. 번영을 구가한 17세기 중반의 인도에는 델리와 아그라, 수라트, 라호르 등 인구가 20만이 넘는 도시가 아홉 곳이나 있었다. 동시대 유럽엔 그 정도 인구를 가진 도시가 영국의 런던, 프랑스의 파리, 이탈리아의 나폴리 세 곳뿐이었다.   163쪽

 

  제국은 땅과 인구만 거대한 것이 아니었다. 세계에서 가장 부유했다. 아우랑제브 시대인 1690년, 제국의 GDP는 약 4천 1백억 원(4억 5천 달러)으로 세계 1위였다. 당시 아우랑제브의 조세 수입은 동시대 프랑스의 열 배가 넘었다. 당시 프랑스는 화려한 궁정 생활로 소문난 루이 14세 치하였다.    =207쪽

 

 

샤자한의 공작 왕좌에 대한 얘기는 처음 접하는 부분이라서 더욱 놀라웠다.

 

  돈이 많고 아버지에게서 심미안까지 물려받은 샤자한 황제는 고대 솔로몬의 왕좌 같은 신의 왕좌를 꿈꾸었다. 그가 많은 돈을 들여 만든 공작 왕좌가 그 결과였다. 샤자한의 왕좌는 초록색 사파이어로 만든 깃털을 가진 공작이 의자의 기둥을 감싸는 모양이어서 공작 왕좌라는 이름을 가졌다. 1톤이 넘는 금이 들어간 초호화 의자로 당대 세계의 금값을 올릴 정도였다.

  보석과 금으로 꾸며진 왕좌의 제작 기간은 7년이었다. 제작비도 천문학적 수준이었다. 나중에 뭄타즈 마할을 위해 만든 타지마할 건축비의 두 배였다. 루비, 다디아몬드, 에메랄드, 진주 등 각종 보석을 20킬로그램이나 촘촘하게 박은 샤자한의 왕좌는 세상에 둘도 없는 명품이었다.   -165쪽

 

이 왕좌는 1739년 무굴 제국을 침략한 페르시아의 황제 나디르 샤가 약탈한 후, 반란을 일으킨 쿠르드족에게 넘어갔는데 이후 해체되어 지상에서 영원히 사라졌다고 한다. 현세의 가치론 10억 달러가 넘는 고가품이었다고 한다.

 

재미있는 영화는 직접 보아야하듯 이 책은 직접 읽어야 제 맛이어서 맛보기용으로 조금만 더 인용한다. 자한기르의 장진주사쯤 되는 시이다.

 

얼굴을 돌리지 마요, 그대 없인

한순간도 살 수 없어요.

당신이 주는 상처는

1백 건의 살인과 같아요.

 

내가 두 개의 입술을 가진 건

하나는 술을 마시기 위해서고

다른 이유는 사과하기 위해서라오.         -136쪽

 

 

 

 

그러나 이 책에서 치명적인 오타를 발견했다. 그것도 두 군데나.

 

1930년 → 1530년

 

1895년 → 1695년

 

옥에 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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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자스탄에 대한 설명을 다시 해야겠다. 라자스탄은 '왕들의 땅', 혹은 '라지푸트의 땅'이라는 뜻이다. 라지푸트족은 또 어떤 사람들인가.

 

라지푸트는 전쟁을 스포츠로 여기는 용맹하고 호전적인 집단이었다. 중세에는 축제가 끝난 뒤 군대를 이끌고 이웃 나라를 공격하는 왕을 이상적인 라지푸트 왕으로 간주할 정도였다. 그들은 무굴처럼 키가 크고 강건한 신체를 가졌다. 글자 그대로 '왕의 아들'이라는 의미의 라지푸트는 주로 서부 지방에 살았고, 힌두교를 믿었다. 그들은 명예와 충성을 소중하게 여겨, 무굴이 오기 전에도 델리의 이슬람 술탄을 상대로 오랬동안 저항을 계속했다.

 

그런 라지푸트들이 암베르 왕국에 이어 하나둘씩 아크바르에게서 칼을 거두고 종주권을 받아들였다. 황제는 품에 들어온 라지푸트 왕에게 돈과 직위로 보상했다. 반면에 라나 상가의 후손인 메와르 왕국처럼 자신에게 저항하는 라지푸트에겐 군사력으로 압박하고 무자비하게 공격하였다. 이른바 강온작전이었다. -<무굴황제> 이옥순 저, 91쪽       

 

     

메와르 왕조는 7세기부터 시작되어 현재까지 76대에 이르고 있으며, 수도를 우다이푸르로 옮긴 건 16세기 우다이 싱 때였다. 76대인 현재의 왕은 정치적인 권력은 없으며 주로 호텔사업(릴라그룹)을 하며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고 한다. 왕들을 지칭하는 단어로는 보통 '마하라자'를 사용하는데 이들 왕조는 한층 의미를 격상시켜 '위대한 전사'라는 뜻을 지닌 '마하라나'라는 호칭을 사용한다. 이유는 비록 전쟁에서 졌지만 계속 싸워왔기 때문이라고 한다. 자존심이 보통 강한 게 아니다. 이 메와르의 용기와 저항 정신을 엿볼 수 있는 유적이 치토르가르쿰바르가르이며, 우다이푸르는 말하자면 현존하는 메와르 왕조의 편린을 살펴볼 수 있는 곳이다. 현재의 우다이푸르는 호수가 있는 아름다운 도시로 인도인의 신혼여행지로 인기가 있으며 도시 전체에 흰색 건물이 많아서 '화이트 시티'로 불리우기도 한다.

 

 

치토르가르에 대해선 이옥순 교수의 글을 참조할 수 있는데 읽을 때마다 감동을 받곤 한다. 재인용한다. ( 2007.12.27일자 한겨레신문)

 

 

 

때로 한 토막의 이야기가 가슴을 뭉클하게 만든다. 수백 년을 떠도는 로하르 부족의 이야기가 그랬다. 인도 서부를 여행하다가 마주치는 영원한 방랑자인 그들은 뿌리가 강해서 뿌리 없는 삶을 자처한 사람들이다. 진정한 약속이 무엇인가를 보여주는 로하르 부족의 과거를 담은 치토르가르를 찾은 건 변화가 화두인 세상에 진저리가 나던 무렵이었다.

 

치토르가르는 평야지대보다 150m 높은 산정에 자리한 톱날 모양의 성벽을 가진 산성도시다. 놀이기구를 타고 공중으로 올라가듯 차를 타고 굽이굽이 돌고 돌아 견고한 일곱 개의 성문을 통과하면 모습을 드러내는 황량한 치토르가르는 영화로운 과거를 증명하는 많은 유적을 품고 나를 맞았다.

 

8세기에 세워진 치토르가르는 성이 많은 라자스탄에서 가장 오래된 성으로 슬픈 역사를 반복한 메와르 왕국의 수도였다. 메와르의 힌두 왕들은 영웅본색의 용감한 지도자였으나 우세한 이슬람 침입자들에게 패배했고 그 마지막은 1568년에 왔다. 무굴제국에게 승리를 내준 왕은 도주했다. 그리고 남은 군인과 여인들은 적에게 굴욕을 당하기보다 명예로운 자살을 택했다.

 

로하르 부족도 치토르가르를 탈환한 뒤에야 돌아오겠다고 왕에게 맹세하고 정처 없이 도시를 떠났다. 그때까지 절대로 영구한 거처를 마련하지 않을 것이며, 동아줄을 써서 우물물을 긷지 않을 것이라고 다짐했다. 밤에는 촛불을 밝히지 않고, 침대에서 편히 잠들지 않겠다고 서약했다. 왕의 고통과 왕국의 운명을 함께 한다는 의미였다.

 

왕은 끝내 치토르가르에 귀환하지 못했다. 그는 인근에 새로운 도시를 세우고 죽었다. 영원히 지킬 수 없는 약속 때문에 고향에 돌아가지 못하게 된 로하르 부족은 이후 다섯 가지 서약을 지키며 400년 동안 유랑하였다. 로하르 부족의 서약을 가슴 아프게 여긴 네루 총리는 그들을 설득하여 치토르가르에 정착하도록 도왔다. 맹세 때문인지, 유랑생활이 편해서인지 그러나 그들은 곧 유랑생활을 재개하였다.

 

본업이 대장장이인 로하르들은 농기구를 고치고 막노동을 하며 지금도 무리를 지어 여기저기를 떠돈다. 여러 도시의 변두리에 천막을 치고 잠시 거주하는 그들은 이동이 어려운 우기에는 먹을 것을 구하기 쉬운 한 장소에서 지낸다.

 

방금 전의 약속도 깨는 세상에서 4세기 동안 갈 수 없는 고향을 그리며 지킬 수 없는 약속을 지키는 그들을 생각하면 가슴이 먹먹해진다. 옛날의 그 땅이 아니라고 가지 못하는 그들의 고향을 두 번이나 찾은 이방의 나는 무상한 세상에서 항상 그대로인 것이 그리울 때마다 그들을 떠올린다.

 

치토르가르의 성채는 비장미를 가진 남성적인 모습이다. 아름답고 아기자기한 곳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겐 덜 매혹적이지만 로하르 부족의 일편단심이 향하는 웅장한 치토르가르는 되돌릴 수 없는 시간의 엄숙함을 일러주며 오늘도 너른 벌판을 내려다보고 있으리라. 사람은 시간을 기다리지만 시간은 사람을 기다리지 않는다고.

 

 

    

 

 인도의 만리장성이라 불리우는 쿰바르가르는 이 용감무쌍한 메와르의 저항정신을 엿볼 수 있는 곳이다.

 

 

 본론으로 돌아와서 이제 우다이푸르를 감상하시라.

 

 

피촐라 호수

 

 

 

 

 

 

 

 

 

 

 

 

 

 

 

 

 

 

 

 

 

 

 

일명 화이트 시티

 

 

 

 

 

 

 

시티팰리스

 

 

 

 

 

 

 

 

 

 

 

 

 

 

 

 

 

 

 

 

 

 

 

 

 

 

 

 

우다이푸르에 메와르만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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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nine 2018-06-04 17: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원경 사진도 잘 찍으시네요 ^^
아래에서 네번째 사진, 창살은 우리 나라 창살과 너무 비슷해요 (가운데 오른쪽 창살이요).
역시 건물은 조명을 받으면 열배는 더 멋있어보이는 것 같아요.

직접 다녀오셨으니 이옥순 교수의 책 읽으시면서 내용이 얼마나 머리에 쏙쏙 들어왔을지 짐작이 갑니다.

nama 2018-06-04 20:32   좋아요 0 | URL
인도는 웬만하면 카메라만 들이대도 사진이 잘 나와요.^^

이옥순 교수의 책이 머리에 쏙쏙 들어오고, 이번 여행지도 두 번째 방문인데, 그래도 여전히 이해 안되는 게 많아요.

인도는 끝없는 이야기 같아요.~~
 

 

쿰바르가르는 메와르 왕조에 있어서 치토르가르 다음으로 중요한 곳으로 15세기에 세워진 요새이다. 둘레가 38km에 달하며 해발 1,100m고지에 장엄하게 자리잡고 있다. 이 요새는 비상시에 왕들이 후퇴하던 곳으로 무굴황제 악바르의 연합군조차도 그 방어벽을 뚫고도 겨우 이틀간 버티었을 뿐이라고 한다. 인도의 만리장성으로 불리운다.

 

그러나 사진 찍기에는 너무나 벅찬 곳이었다. 사진을 찍으려면 일단 마음이 움직여야 하는데 이 튼튼한 요새에서는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다. 애닲을 것도 안타까울 것도 서러울 것도 없다. 그들이 애써 이런 요새를 지으면서까지 지키려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막바지 더위에 헉헉거리며 나는 그저  해 저물 무렵의 그림자 놀이에 빠져 히히덕거릴 뿐이었다.

 

 

 

 

 

 

 

 

 

 

 

 

 

 

 

 

 

 

 

 

 

 

 

원숭이의 표정이 마치 요새의 견고함을 닮은 것 같다.

 

 

 

 

밤에는 조명을 밝힌 멋진 모습을 볼 수 있다고 하나, 안타깝게도 우리가 도착한 날에는 불을 켜지 않았다. 대신 건너편에 있는 호텔의 야경을 감상했다. 꿩 대신 닭이라도.

 

 

 

 

이방인의 카메라에 기꺼이 응해주는 인도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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섭씨 40도가 넘는 기온에 내리쬐는 뙤약볕 속을 거니는 건 꼭 건식 사우나탕에 들어간 것과 같다. 공기 자체가 화끈하고 뜨거워 얼마 지나지 않아 얼굴이 붉게 달아오른다. 그나마 그늘로 들어서면 언제 그랬냐는 듯 그럭저럭 참을 만해진다. 습도가 높지 않아 끈적거리지는 않는다. 물론 과도한 수분 섭취로 배에 가스가 차고 더부룩해지면서 쉽게 지치고 만다. 신경은 또 어떤가. 빵빵하게 공기를 불어넣은 풍선처럼 건드리면 터질 것 같은 경지에 이르기도 한다. 이 열대의 나라에서 온갖 종교가 태동한 것은 이런 날씨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기도 하다. 숨쉬는 자체가 이미 고행이나 다름없다.

 

이러다가 우기에 접어들면 비가 내려 더위를 식힐 수 있다지만 그건 또 다른 사우나탕으로 바뀔 뿐이다. 습식 사우나탕이 되는 것이다. 한마디로 여행하기에는 적절치 않은 날씨이다. 그러나 이런 험한 날씨야말로 여행자에게는 좋은 기회가 되기도 한다. 일단 여행객이 줄어드는 비수기가 되니 여행 경비가 적게 든다. 비싼 호텔을 저렴하게 이용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잡게 된다. 유명 관광지에 인파가 몰리지 않으니 한층 여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다. 비용 절감을 기회로 열사병을 무릅쓰고 여행하는 자, 그대가 진정 여행자이다.

 

라낙푸르는 우다이푸르에서 약 60km 떨어진 외진 곳에 자리하고 있는 자이나교 사원이다. 우선 사진부터 올리지만 사진이 시원치 않다. 십 년 전에도 왔으니 이번이 두 번째 방문이련만 사진은 별로 찍지 못했다. 십 년 전엔 딸아이가 병이 나서 남편과 번갈아가면서 급하게 보느라고 사진 찍을 겨를이 없었다. 이번엔 너무 더운데다가 무릎이 나오는 옷을 입으면 입장이 허락되지 않아 급하게 차량으로 뛰어가 옷을 가지러 다니느라 그나마 남아있던 기운마저 다 써버렸기 때문이다. 바깥에서 신발을 벗고 사원으로 들어가기 전의 짧은 보도블럭은 잘 달궈진 후라이팬과 다름 없었다. 약간 과장을 하자면, 발바닥에서 고기 굽는 냄새가 날 정도이다.

 

 

 

 

 

 

 

 

 

 

 

 

 

 

 

 

 

 

 

 

 

 

 

 

 

 

 

 

 

 

 

 

 

 

 

 

 

 

 

 

책도 어느 정도 읽을 만해야 집어들듯이 사진도 대상이 어느 정도 눈에 들어오고 만만해야 찍을 수 있다. 상상 이상의 압도적인 건물이나 자연 경관 앞에서는 사진 찍을 엄두가 나지 않을 때가 있다. 내게는 직감적으로 카메라를 들이댈 수 있는 곳과 카메라를 들이댈 수 없는 곳으로 구별이 될 때가 종종 있는데 이 라낙푸르는 쉽게 카메라를 들이댈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규모면에서나 섬세함에 있어서나 두 손 들고 말았다. 저 엉성하게 찍은 전면 사진이라니. 카메라 기능이 모자라서가 아니라 내 마음이 이미 사진 찍기를 거부하고 있었다. 난 안 돼.

 

저 사원안에는 각각 문양이 다른 1,444개의 대리석기둥이 있다고 한다. 그 숫자가 믿기지 않아 하나하나 세어보고 싶지만 언감생심, 할 일이 아니다. 온갖 화려한 기둥에서 눈을 돌려 고개를 들면 천장의 문양에 연거푸 감탄이 절로 나온다. 눈을 이리저리 돌리다보면 카메라를 든 손이 부끄러워지고 마음이 의기소침해진다. 사진은 무슨...

 

내가 알고 있는 종교 중에서 가장 겸손하고 순수한 사람들이 믿는 종교가 자이나교이다. 불살생을 철저히 실천하는 사람들이라 혹여 입 속으로 살아있는 날벌레가 들어올세라 마스크를 착용하고, 걸어다니는 발 밑으로 혹여 개미라도 죽일까싶어 빗자루로 앞 길을 쓸며 다니는 사람들이다. 가죽으로 된 물건을 사용하지 않으며, 농사를 지으면 살아있는 생물을 해칠 수 있어 주로 상업에 종사한다고 한다. 신앙심이 아주 깊은 수행자들은 아예 몸에 옷을 걸치지 않는다고 한다. 옷이란 신분을 나타내는 것이기에 그마저 거부하는 것이다. 간디의 비폭력도 이 자이나교에서 나왔다고 한다. 자이나교가 주창하는 것을 단순하게 정리하면, '알다', '깨닫다', '살다' 라고 한다. 일단 알아야 하고, 알아야 깨달을 수 있는 것이고, 깨달았다면 그것을 행동으로 옮겨야 한다. 실행을 강조하는 것이다.

 

이런 겸손하고 실천을 강조하는 사람들이 지은 사원이 바로 라낙푸르이다. 내가 그동안 다녀본 동서양의 어떤 종교의 어떤 사원보다도 화려한 곳이 이곳이다. 여기서 화려함이란 (감히) 영혼이 화려한 것을 나타낸다고 할 수 있다. 그들의 영혼은 대리석처럼 맑으면서도 다채롭고 화려할 것 같다. 이 화려한 사원을 내 보잘것 없는 카에라에 도저히 담을 수 없는 이유이다.

 

 

*딸이 찍은 사진을 첨가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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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밀한 부분을 읽어내기 위해선 역시 영화보다 원작을 읽어야 한다. 아무리 잘 만들어진 영화도 원작의 섬세함을 제대로 살려내기 힘들다. 어디까지나 내 생각이지만.

 

 

 

 

 

 

 

 

 

 

 

 

 

 

 

이 책을 읽으며 '개츠비의 위대한 점'이 무엇일까'을 생각하며 읽었다. 더불어 그의 매력이 무엇일까, 생각하면서 읽었더니 아름다운 구절이 눈에 속속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가 사려 깊은 미소를 지었다. 아니 사려 깊다는 것 이상의 의미가 담긴 미소였다. 그것은 변치 않을 확신이 담긴, 일생에 네다섯 번쯤밖에 마주치지 못할 특별한 성질의 것이었다. 잠깐 전 우주를 직면(혹은 직면한 듯한)한 뒤, 이제는 불가항력적으로 편애하지 않을 수 없는 당신에게 집중하고 있노라는, 그런 미소였다. 당신이 이해받고 싶은 바로 그만큼을 이해하고 있고, 당신이 스스로에 대해 갖고 있는 믿음만큼 당신을 믿고 있으며, 당신이 전달하고 싶어하는 호의적 인상의 최대치를 분명히 전달받았노라 확신시켜주는 미소였다.  -65쪽

 

이 부분을 영화에서 어떻게 처리했는지 궁금하다. 어떤 사람에게서 위와 같은 미소를 발견했다면 이미 친구 이상의 영적교류가 통한 것은 아닐지....

 

  6월의 아름다운 밤에 그가 원했던 것은 찬란한 별들만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는 무의미한 화려함의 자궁에서 벗어나, 드디어 살아 있는 한 인간으로 내 앞에 나타났다.

 "그는 알고 싶어해요." 조던이 말을 이었다. "당신이 데이지를 오후에 당신 집으로 초청을 하고 자기도 불러줄 수 있는지를요."

  요청 한번 겸손했다. 오 년을 기다린 끝에, 고작 잘 알지도 못하는 남자네 정원에 잠깐 놀러가기 위해 불빛으로 나방들이나 끌어모을 대저택을 산 것이다.     -100쪽

 

 

5년을 기다렸다. 그토록 사랑하던 여인을 한번 만나기 위해 매일 밤 화려한 파티를 열면서 기회를 기다리는 조심스럽고 겸손한 남자기 개츠비였다.

 

 "안개만 없었다면 해협 너머에 있는 당신 집도 보였을 텐데." 개츠비가 말했다. "당신 집 잔교 끝에는 언제나 초록색 등이 켜 있더군."

  데이지가 갑자기 팔짱을 껴왔다. 하지만 개츠비는 조금 전에 자신이 한 말에 푹 빠져 있는 것 같았다. 아마도 그 초록빛의 심대한 의미가 영원히 사라져버렸다고 생각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자신과 데이지 사이를 갈라놓았던 그 광대한 거리에 비하면, 그 초록빛은 거의 데이지를 만지고 있는 거나 마찬가지로 느껴졌을 것이다. 달 주위에서 반짝이는 별처럼 말이다. 이제 그것은 그냥 잔교 끝의 초록색 등으로 돌아와 있었다. 찬탄의 대상 중 하나가 줄어든 것이다.                - 117~118쪽

 

이 소설에서 가장 아름다운 부분이 아닐까 싶다. 사랑하는 여인의 집 잔교 끝에 켜 있는 초록색 등을 지켜보는 남자의 심정. 그 아련함과 그리움을 절절하게 느낄 수 있다. 개츠비의 시인 같은 감성이 느껴진다.

 

  악수를 나누고 나는 그 집을 떠났다. 그러나 울타리에 도착하기 직전에 뭔가 생각이 나서 돌아섰다.

  "다을 썩었어." 내 외침이 잔디밭을 건너갔다. "너는 그 빌어먹을 인간들 다 합친 것보다 더 가치 있는 인간이야."

  그렇게 말했던 것이 지금도 기쁘다. 처음부터 끝까지 그를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게 내가 그에게 해주었던 유일한 찬사였다. 그는 먼저 겸손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 마치 우리가 오래전부터 공모하며 입을 맞춰오기라도 했던 것처럼, 그의 얼굴에 모든 걸 이해한다는 찬란한 미소가 퍼졌다. 그가 입은 화려한 핑크색 정장이 흰 계단을 배경으로 밝은색 반점처럼 남은 모습을 보니, 문득 석 달 전 그의 고풍스러운 저택을 처음 찾아가던 밤이 떠올랐다. 찬디밭과 차도는 개츠비가 암흑가의 인물이라고 추측하는 자들로 가득 차 있었다. 그때 그는 저 계단에 서서 자신의 영원히 더럽혀질 수 없는 꿈을 숨긴 채 그들에게 손을 흔들어 작별 인사를 하고 있었다.        -192쪽 

 

'영원히 더럽혀질 수 없는 꿈'을 간직한 개츠비의 운명은 결국 죽음으로 끝나고 말지만 그의 '영원히 더럽혀질 수 없는 꿈'에 대해서 두고두고 생각해보게 되는 게 이 소설을 읽는 재미다. 개츠비는 위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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