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밥엔 장아찌 - 자연 품은 슬로푸드 발효음식
이선미 지음 / 헬스레터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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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구매함. 장아찌의 세계, 입문용으로 제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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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양 새한서점에서 구입한 책. 2002년에 나온 책으로 알라딘 상품 검색을 하면 개정판만 뜬다. 겨우 찾아서 복사와 붙여넣기 방법으로 사진을 올린다.

 

불교에 대해서 내가 뭘 알겠는가. 교회에 가면 눈 감고 기도하고, 성당에 가면 성호 긋고, 절에 가면, 좀 겸연쩍었는데 이제 겨우 법당에 들어가 삼배 올릴 정도가 되었을 뿐이다. 그러니 책을 읽어도 뭘 안다고, 뭐가 달라졌다고 할 수도 없다. 그저 마음을 울리는 문장을 만나면 한번 옮겨보고 되새겨보고자 할 뿐이다.

 

불공의 참의미

 

 "내가 말하는 것은 부처님 말씀을 중간에서 소개하는 것이지, 내 말이라고 생각하면 큰일납니다. 달을 가리키면 달을 보아야지, 가리키는 손가락을 보면 안 된다는 말입니다. 승려란 부처님 법을 배워 불공 가르쳐 주는 사람이고, 절은 불공 가르쳐 주는 곳입니다. 불공의 대상은 절 밖에 있습니다. 불공 대상은 부처님이 아닙니다. 일체 중생이 다 불공 대상입니다. 승려들이 목탁 치고 부처님 앞에서 신도들 명과 복을 빌어 주는 것이 불공이 아니라, 남을 도와주는 것이 참다운 불공입니다."  (143쪽)

(중략)

  성철스님은 갈멜수도원의 이 같은 기도, 즉 남을 위한 기도를 '기도의 근본 정신'이라고 강조했다. 또 먹고 사는 것은 스스로의 노력으로 해결하고, 대신 기도는 전부 남을 위해서 하는 삶을 '참 종교인의 자세'라고 역설했다. (144쪽)

 

'참 종교인의 자세'로 살기 어려워 종교를 멀리하고 있지만, 이런 참 종교인의 자세로 살다가 간 분의 글을 읽는 건 언제 읽어도 성찰의 시간이 되어서 좋다.

 

"절은 남을 위해 해야 하고, 생각이 더 깊은 사람이라면 남을 위해 아침마다 기도해야 합니다. 백팔 배를 하라는 것입니다. 나를 찾아오는 신도들에게는 꼭 새벽에 백팔 배를 하라고 시킵니다. 나도 새벽마다 백팔 배를 합니다."(145)

 

기도는 남을 위해서 해야 한다.....하나만이라도 잘 기억하자.

 

최잔고목(摧殘枯木)...'썩고 부러지고 마른 나무 막대기'

 

"부러지고 썩어 쓸데없는 나무 막대기는 나무꾼도 돌아보지 않는다. 땔나무도 되지 않기 때문이다. 불 땔 물건도 못 되는 나무 막대기는 천지간에 어디 한 곳 쓸 곳이 없는, 아주 못쓰는 물건이다. 이러한 물건이 되지 못하면 공부인(수행자)이 되지 못한다. 공부인은 세상에서 아무 쓸 곳이 없는 대낙오자가 되지 않으면 안 된다. 오직 영원을 위하여 모든 것을 다 희생하고, 세상을 아주 등진 사람이 되어야 한다. 누구에게나 버림받는 사람, 어느 곳에서나 멸시 당하는 사람, 살아나가는 길이란 공부하는 길밖에 없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세상에서뿐 아니라 불법 가운데서도 버림받은 사람, 쓸데없는 사람이 되지 않고는 영원한 자유를 성취할 수 없는 것이다."

  참으로 가혹하고 철저한 기준이다. 쓸모없는 인간이 도인이 된다는 얘기가 아니다. 스스로 철저하게 쓸모없는 인간이 되지 않고서는 도인이 될 수 없다는 가르침이다.

  세속의 삶과는 다른, 그렇게 가혹하고 철저하게 자신을 포기하는 삶이어야 도道(깨달음), '영원한 자유'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성철스님은 수좌들의 깨달음을 돕기 위해 스스로 최잔고목이고자 한 셈이다. (115쪽)

 

 

세습교회의 그 씁쓸하고도 말도 되지 않는 세태에서 성철스님의 결기있는 말씀이 참 그리워진다.

한편으론 참 종교인의 모습을 남에게서 바라지 말아야겠다는 생각도 든다. 종교가 따로 있겠는가. 내가 나답게 인간답게 자유롭게 살고자 한다면 그 근본이 종교와 닿아있지 않을까. 남을 탓하기 전에 나부터 철저하게 들여다봐야 한다.

 

"천하에 가장 용맹스러운 사람은 남에게 질 줄 하는 사람이다. 무슨 일에든지 남에게 지고 밟히고 하는 사람보다 더 높은 사람은 없다. 나를 칭찬하고 숭배하고 따르는 사람들은 모두 나의 수행을 방해하는 마구니이며 도적이다."(114)

 

 

수행자의 정신을 되새겨보는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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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1-02 12:4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11-02 13: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벤투의 스케치북
존 버거 글.그림, 김현우.진태원 옮김 / 열화당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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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은 아무때나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때에 따라 읽히는 책이 다르다. 잡지를 읽는 마음, 소설을 읽는 마음, 에세이를 읽는 마음, 원서를 읽는 마음이 다 다르다. 존 버거의 글을 읽으면서 '정확한' 구분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왜냐하면 이 책을 예전에도 읽으려다가 끝내 눈에 들어오지 않아 중도 포기하고 말았기 때문인데 이제 '맑은 정신'으로 찬찬히 읽어보니 읽히더라는 얘기다. 몸이 바쁠 때는 읽히지 않는 책이 따로 있다. 존 버거의 책은 그래서 정신이 맑을 때 읽어야 한다. 내 생각이다.

 

허나 맑은 정신으로 읽었다고해서 책 내용을 오래 기억하는 것은 아니다. 기껏 문장 몇 개와 분위기 정도? 존 버거에 따르면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게 있다. 같은 책을 읽는 사람들 사이에 발생하는 '말하자면 그 이야기의 후예(자)'가 된다는 것. 존 버거가 도서관에서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빌리려고 했는데 소장중인 두 권 모두를 다른 사람이 대출해간 것을 알고는 질문 하나를 떠올린다.

 

  그 두 독자들 중 한 명과 내가 마주친다면-일요일에 열리는 장터에서, 지하철역에서 나오다, 횡단보도를 건너다, 빵을 사면서-우리는 서로 조금은 의아하다고 느낄 어떤 눈짓을 주고받지 않을까. 우리는, 의식하지 못한 채, 서로를 알아볼 수 있지 않을까.

  어떤 이야기에 감명을 받거나 울림을 얻으면, 그 이야기는 우리의 본질적인 일부가 되는, 혹은 될 수 있는 무언가를 낳고, 이 일부가, 그게 작은 것이든 광대한 것이든 상관없이, 말하자면 그 이야기의 후예 혹은 후계자가 된다.

(중략)

  복잡할 것도 갈등도 없는 가족관계 안에서, 우리를 만들어낸 그 이야기들이, 생물학적 조상과는 다른, 우리의 공통 조상이 된다. (90쪽)

 

같은 책을 읽고 얻는 같은 생각, 즉 '공감'을 이렇게 멋지게 얘기하다니....

 

슈퍼마켓, 우리로 치면 대형할인마트쯤 되는 곳에 대한 얘기도 재미있다.

  슈퍼마켓 여기저기에 육십여 명 정도의 직원이 있고, 비슷한 숫자의 감시 카메라가 있다.(중략) 가끔씩, 따라온 아이들을 제외하면 아무도 말이 없다. 우리 모두-손님과 직원 들-용의자이고, 우리의 움직임은 하나하나 관찰당한다. 모두 물건을 집어 들고, 수레를 밀고, 물건을 살피고, 코드를 입력하고, 조절하고, 야채 무게를 달고, 일정을 생각하고, 계산한다. 그 모든 과정이 이루어지는 거대한 창고는, 절도(竊盜)라는 개념에 사로잡혀 있다.(중략) 창고형 슈퍼마켓에서는, 우리 모두가 잠재적인 도둑놈으로 여겨진다. (109~110쪽)

 

절도라는 개념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직원들의 초과근무, 허용되지 않는 병가, 무휴식, 무휴무는 '직원들의 권리에 대한 도둑질'이 된다. 땅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주도권을 빼앗는 것, 전 지구적인 식품유통업계와 연결된 것도 도둑질이다. 이 책에는 더 매혹적인 얘기도 많은데 나는 주로 이런 얘기에 흥분하는 경향이 있다.

 

중국의 대가 제백석(1864~1957)은 개구리를 즐겨 그렸는데, 마치 개구리가 수영 모자를 쓰기라도 한 것처럼 머리를 짙은 까만색으로 표시하곤 했다. 극동 지역에서 개구리는 자유의 상징이다. (129쪽)

 

제백석이라는 분이 궁금해서.

 

존 버거가 직접 그린 드로잉을 볼 수 있는 게 이 책인데, 그렇다면 존 버거에게 드로잉은 무엇인가.

  어쨌든 드로잉은 무언가를 지향하는 실천이며, 그렇게 때문에 자연에서 발생하는 다른 지향의 과정에 비유할 수 있다.

  드로잉을 할 때 나는, 하늘 길을 찾아가는 새나, 쫓기는 와중에 은신처를 찾아가는 산토끼, 혹은 알 낳을 곳을 알고 있는 물고기, 빛을 향해 자라는 나무, 자신들만의 방을 짓는 벌 들에게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는 느낌을 받는다. (155쪽)

 

산책, 내가 즐기는 산책이 말하자면 존 버거의 드로잉이 되는구나, 이렇게 이해했다.

 

그러면 '벤투'는 누구? 바로 스피노자를 가리킨다. 그래서 책 곳곳에서 스피노자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데, 사실 내가 그 인용문을 전부 이해했냐면 그건 아니고, 이해되지 않는 부분은 이해하려고 노력하지도 않았다. 다만 다음 부분은 읽고 또 읽었다. 마음이 산란할 때 위안이 되는 글이다. 너무 길어서 사진으로 찍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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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bina 2019-02-03 21: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인간역량을 압도하는 실재를 내게 맞출 순 없지만, 내게 실재 할 수 없는 것을 포기
할 수는 있다는 것.어떨런지...
혹자는 포기란 단어 자체를 부정의 개념으로 인식들 하지만, 삶에 있어 적정선의
포기는 평정심에 도움이 되더군요.(포기를 대체할 긍정단어 뭐 없을까요)
다만,그 적정선의 포기가 비관이 된다거나 마음에 상처로 남으면 평정이 아니겠지요.
저의 졸견입니다. 그래서 요모양으로 사나 돌아볼 일입니다.ㅎㅎ

nama 2019-02-04 14:46   좋아요 0 | URL
포기... 마음 비우기, 혹은 내려놓기 ... 쯤 될까요?
좀 더 적극적으로는 비운다는 자체, 내려놓는 다는 자체도 인식하지 않는 것.
생각할수록, 말을 할수록 배배 꼬이는 것 같다는 생각도 드네요.
 

 

 

 

몇년 동안 차마 버리지 못하고 간직했던 알라딘 굿즈를 고은 덕분에 버린다.

T셔츠야, 네가 무슨 죄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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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우리 젊은날
시바타 쇼 지음, 김성연 옮김 / 한마음사 / 199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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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가 신형철이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 에서 인생 베스트 5 중의 하나로 꼽았던 책이다. 신형철이 읽은 책은 1993년에 나왔던 이 책이고, 내가 가지고 있는 책은 1980년에 출간된, 세로줄로 된 책이다.

아래 포스팅한 글에 사진을 올렸지만 다시 한번 올리련다.

 

             

 

먼저 제호. 초판본은 <그래도 우리들의 나날>이었는데 세월이 흘러 제호가 <그래도, 우리 젊은 날>로 바뀌었고, <그래도 우리의 나날>이란 이름으로 문학동네에서 올해 나올 모양이다. 흠, '그래도' 란 이름 덕분에 '그래도' 다시 세상에 나오게 되는가보다.

 

나이를 따져보면, 1980년에 나온 책이니 이미 한 세대(약 30년)가 지났고 새로운 세대로 진입한지도 9년 가까이 된 셈이다. 번역본이 그렇다는 얘기고 일본 원작은 1964년에 나왔다. 일본 현대 소설의 고전 중 하나라고 한다. 신형철이 소개했으니 머잖아 떠오르는 소설로 널리 읽혀질지도 모른다.

 

초판본을 소장하고 있으니 기분은 삼삼하나 이 책을 '제대로' 읽은 것 같지는 않다. '스무 살의 내게 도착했고, 삶에 대해 질문하는 '방법'과 '언어'를 건네주었다.'라고 신형철은 썼는데, 스무 살에 내가 이 책을 읽었더라면 거의 이해하지 못하지 않았을까 싶다. 그래서 어쩌면 읽었을 지도 모르는 이 책을 처음 읽는다고 생각하는지도 모른다.

 

20대에 이 책을 왜 제대로 읽지 못했을까. 이유를 추측해본다. 1980년은 5.18 이 일어난 해이다. 특별히 운동권이 아니어도 그 당시 대학생이면 그 영향권에서 벗어날 수 없는 시대였다. 그렇다면 일본 전후 학생운동 세대를 다루는 이 소설이 잘 먹혀들었을까, 그렇지 않았을까. 나 였다면, '피곤함'이 앞섰을 것 같다. 우리와 일본을 비교해보자는 호기심이 작동할 만도 한데 너무나 친숙한 주제로 다가와 이내 호기심을 거둬들였을 지도 모른다.

 

또 하나. 등장 인물을 계속 괴롭히는 질문, "죽는 순간에 나는 무엇을 생각하게 될까?" 이 질문이 가슴에 다가왔을까? 당시 대학에서 부전공으로 국문학을 수강했던 나는 '죽음'에 대해 집요하게 천착했던 어떤 교수의 수업에서 '죽음'에 대한 공부를 '강제로' 하고 있었다. 20대 초반의 어린 나이에 죽음이란 주제는 다룰 성질이 못된다는 걸 이제야 깨닫는다. 피상적으로 다가오는 죽음에 대한 공부의 피로감. 그러니 "죽는 순간에..."라는 질문을 거부했을 지도 모른다.

 

이 책을 읽었더라도 등장 인물들을 지배하는 어떤 정신적인 공허감이나 허무를 어느 정도는 이해했을 것이다. 대학 때는 특히 그런 정신세계에 접어드는 시기이기도 하니까. 그러나 읽었더라도 눈으로만 읽었을 확률이 높다. 학창시절 국어책에 나오는 아무리 좋은 글도 단지 시험 대비용 글로 읽었을 뿐 가슴으로 읽은 적이 없었으니까. 배움에 대한 개념이 있었을까 싶다.

 

그래서 이 책을 읽었나, 안 읽었나. 읽은 것도 같고 안 읽은 것도 같다는 얘기. 이제라도 책을 읽을 때 밑줄 긋는 습관을 들여야겠다. 정신적인 흔적은 둘째치더라도 물질적인 흔적이라도 남겨야 읽었다는 증거가 되니까.

 

 

 

이제는 이 책이 잘 읽힌다. 재밌다. 마치 이제야 <장자>를 읽게 된 것처럼. 그렇다고 <장자>와 같은 깊이를 요구하는 소설이냐는 별개의 문제다.

 

다음에 옮기는 구절은 지금 시각으로 보면 구닥다리 표현으로 보이겠으나 내게는 20대로 돌아간 기분이 든다. 그때는 그런 식으로 번역된 책들을 읽었으므로. 다소 틀린 맞춤법도 그대로 옮긴다.

 

제가 언제나 상대방의 사람과 그 무엇인가를 공유하고 싶다, 두 사람의 생활 속에 그 어떤 공통의 의미를 갖고 싶다고 원한 것도 이 망막한 세계 속에 확실한 말뚝을 뿌리박고 싶다, 그것을 한 개 한 개씩 뿌리박음으로써 거기에 단순한 시간의 흐름만이 아니 역사라고 부를만 한 것을 생성하고 싶다고 원했기 때문이며, 또한 그럼으로써 우리는 비로소 우리의 주위에 펼쳐져 있는 이 무한한 공간, 우리들을 이윽고 죽음 속으로 소멸시켜 갈 이 무한한 시간에 견뎌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추구하기에 곤란한 것이었는지는 모르지만, 추구하지 않고 지낼 수는 없는 것이었읍니다. (117쪽)

 

이윽고 우리들이 정말로 나이들었을 때 젊은이들이 물을지도 모른다. 당신들의 시절엔 어땠었느냐고. 그때 우리들은 대답하리라. 우리들 시절에도 똑같은 곤란이 있었다. 물론 시대가 다르니까 다른 곤란이었겠지만, 곤란이 있었다는 점에서는 똑 같았다. 그리고 우리들은 그것과 친숙해지면서 이렇게 늙어왔다. 하지만 우리들 중에도 시대의 곤란으로부터 탈출하여 새로운 생활로 용감히 진출하려고 했던 사람이 있었다고.

그리고 그 대답을 들을 젊은이들 중의 누군가 한 사람이 그런 것이 옛날에도 있었던 이상 지금 우리들에게도 그러한 용기를 갖는다는건 허용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거기까지 늙어갔던 우리들의 생에도 그 나름의 의미가 있었다고 할 수 있을는지도 모른다.

 

 

지금 생각해보면 과거의 이런 번역체가 문제였을지도 모른다. 글이 명료하고 분명해야 생각도 명료하고 분명해지고 생각을 거치는 표현도 정확해진다. '정확성'이란 표현을 정확하게 좋아하게 되는 이유다.

 

새로 번역된 책이 나오면 읽어보고 싶다. 그러면 또 헷갈리려나? 과연 이 책을 읽었나, 안 읽었나,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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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알벨루치 2018-10-26 14: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신적인 흔적은 물질적인 흔적으로 표해야겠네요 ㅎㅎ 글 잘 읽었습니다 선배님~

nama 2018-10-26 17:43   좋아요 0 | URL
불질적인 흔적을 남겨도 나중에 보면 낯설게 다가오지요. ˝내가 읽은 게 맞아?˝하면서요. 그런 경험 때문에 언젠가부터 밑줄을 긋지 않았거든요. 하기야 늘 새로운 것도 나쁘진 않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