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사랑 받기를 허락지 않는다 - 콩나물 팔다 세상을 뜬 경제학사 일제강점기 새로읽기 3
최영숙 지음 / 가갸날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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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숙.

1906년 경기도 여주 출생.

1921년 이화여자고보 졸업

1922년 중국 유학

1924년 흥사단 입단

1926년 6월 남경 회문여학교 졸업

         스웨덴행

1931년 스톡홀름 대학 졸업(경제학사)

         세계만유

         인도인 미스터 로와 결혼

         귀국

1932년 4월 23일 사망

 

 

여기에 실린 최영숙에 대한 글은 1930년대 초 신문이나 잡지에 실린 기사와 최영숙의 일기가 주를 이룬다. 지금 읽어보면 다소 투박하고 세련미도 없지만 시대를 감안해서 읽는다면 나름 읽는 맛도 있다. 다만 그때나 지금이나 사람들의 관심은 어떤 한 인간에 대한 진지한 성찰보다 '스캔들'에 쏠려있어 읽어나가기에 민망한 부분도 적지 않다. <최영숙 지하 방문기, 명부행 열차를 추격하면서>는 한 인간의 고통스러운 죽음을 희화화하는 과정이 잔인하고도 뻔뻔스럽기까지 하다.

 

최영숙의 이력만보아도 시대를 많이 앞서간 사람임을 알 수 있다. 게다가 재정이 넉넉하지 않은 상황에서 고학을 하며 스웨덴에서 대학을 다녔다는 것도 놀라운 일이다. 지금도 쉬운 일은 아니니까. 그러니 뭇사람들의 관심과 호기심의 대상이었을 텐데 아깝게도 뜻을 펴보기도 전에 젊은 나이에 태아를 사산하고 그 여파로 죽음에 이르고 만다. 

 

귀국한 이후 제대로 뜻을 펼치기는커녕 가족의 생계를 도맡아야 하는 과정도 눈물겹다.

 

서대문 밖 교남동 큰 거리에 조그마한 상점을 빌려서 장사를 시작하였습니다. 그래서 배추포기, 감자, 마른 미역줄기, 미나리단, 콩나물을 만지는 것이 스톡홀름 대학 경제학사 최영숙 양의 일상직업이 되었답니다.

 

이름없이 스러져간 많은 사람들을 생각하면 그래도 후대에 이름이 불리워지고 그 짧은 죽음을 안타까워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만 해도 그 사람의 삶을 헛되었다고만 볼 수는 없겠다. 좀 더 오래살아 자신의 뜻을 펼쳤다면 더 좋았을 테지만.

 

스웨덴은 예나 지금이나 부러운 나라임에 틀림없다. 최영숙의 글에도 부러움이 잔뜩 묻어있다.

 

물론 남녀는 절대평등으로 정치적으로나 경제상으로나 차별이 없습니다. (중략)

무슨 직업에고 조합이 있어서 노동시간 제한과 최저임금 제한이 있는 고로 공장주도 그 세력에 복종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중략)

스웨덴 가정의 특색으로 말하면 자유 평등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자녀들을 구속하지도 않고, 또 자녀 교육은 일종의 의무로 알아서 교육을 시키지만 그 대가를 얘기하는 일이 없습니다. 자녀를 다 길러서 성인이 되면 분가시켜 독립생활을 하도록 하되, 자녀에게 붙어서 얻어먹겠다는 관념은 조금도 없습니다. 그리고 부모 자식 간에나 부부 간에 절대로 평등입니다.

 

 

자식을 노후보험쯤으로 여기는 시대에 이쯤되면 불온(?)하다고 해야 할까. 이런 분이 오래오래 살았더라면 세상이 조금은 변하지 않았을까. 안타까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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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1-26 11:1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11-26 17: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여러 해 전 이야기이다. 나는 당시 남녀공학의 중학교 2학년 담임을 맡고 있었다.

 

   3월의 어느 평일 3교시 수업시간. 늘 하던 대로 교탁에 있는 컴퓨터 본체에 cd를 넣으며 출석부에 사인을 한다. 그런데 뭔가 이상하다. 어제까지도 멀쩡하던 컴퓨터가 작동하지 않는 것이다. Alt, Ctrl 과 Delete를 동시에 눌러 강제로 컴퓨터를 끈다. 전원이 꺼지자마자 다시 전원 버튼을 누른다. 역시 묵묵부답, 되살아날 기미조차 없다. 다급해진다. 컴퓨터가 없으면 수업하기가 몹시 힘들어지는데, 곤란하다. 아이들에게 물어본다.

 “언제부터 그랬니?”

  “1교시 때부터 그랬어요. 다른 시간에도 컴퓨터 사용하지 못했어요.”

  “오늘은 힘든 하루가 되겠군.”

점심시간에 겨우 짬을 내어 컴퓨터 담당자를 불러 원인을 물어본다.

  “아예 작동을 안 하는데요. 아무래도 cpu 쿨러에 문제가 있는 것 같습니다.”

  “cpu 쿨러? 그게 무엇인가요?”

  “컴퓨터 보조 장치인데 그게 없으면 컴퓨터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습니다.”

  “그렇군요. 그런데 그게 왜 없을까요?”

   종례시간. 아이들이 이구동성으로 하루 종일 컴퓨터를 사용하지 못했다며 담임인 나를 빤히 쳐다본다. 아무래도 학생 중에 누군가 cpu 쿨러를 빼갔을 것 같다. 교사보다 컴퓨터에 해박한 게 요즘 아이들이다. 게다가 개교한지 얼마 안 된 신설학교여서 교실, 책상, 교탁, 칠판, 컴퓨터 등 모든 것이 새것이다.

  “누가 그랬는지는 모르지만 컴퓨터에 손을 댄 사람은 양심껏 내일까지 원상 복구해놓기 바라. 그러면 오늘 일은 없던 일로 할게. 부탁이야.”

   다음 날. 컴퓨터는 그대로 먹통 상태. 전날 간절하게 호소했건만 달라진 건 없었다.

종례시간. A4 용지 여러 장을 4등분하여 45명의 학생들에게 나누어준다.

  “우리 반 컴퓨터 cpu 쿨러에 대해서 알고 있거나, 본 게 있으면 지금 나누어준 종이에 간단하게 적어. 아는 사실이 없으면 그냥 모르겠다라고 써도 돼. 이름은 안 써도 되니까 솔직하게 적어줘. 자수하면 더 좋고.“

급조한 설문지를 두 번 접게 한 후 뒤에서 걷어오게 한다. 설문지를 다 모은 후 짧게 종례를 마무리 짓고 아이들을 귀가시킨다. 아이들이 교실에서 다 빠져나간 후 좀 전에 걷은 설문지를 하나씩 펴본다. 대부분 귀찮다는 듯 모름혹은 모르겠다라고 성의 없이 크게 끄적여놓았는데 작은 글씨가 촘촘히 적힌 종이가 눈에 들어온다.

‘17번 사물함에 cpu 쿨러가 들어있어요.’

곧바로 확인해보니 역시 17번 사물함에 기계뭉치 같은 게 들어있다.

  “이게 cpu 쿨러라는 거군.”

   다음 날 아침. 컴퓨터 담당자에게 되찾은 cpu 쿨러 장착을 부탁한 후 전원을 켠다. 먹통이다. 고장난 cpu 쿨러였다. 원래의 것이 아닌 것이다. 누군가 새 컴퓨터에 있는 cpu 쿨러와 고장난 cpu 쿨러를 바꿔치기했음에 틀림없다. 그런데 누굴까? 어제 돌렸던 설문지 뭉치를 꺼내본다. 45. 45명이 한 장씩 써낸 것이다. 교탁 위에 45장의 작은 설문지를 넓게 펼쳐놓고 앞 줄 부터 한 사람씩 나오게 하고는 본인이 쓴 설문지를 고르게 한다. 다들 자기가 쓴 것을 알아본다. ‘모르겠음’, ‘모름’, ‘몰라요등 글자는 몇 자 되지 않아도 자신이 쓴 것을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는 게 신기하다. 마지막 세 장이 남고 자기 것을 아직 고르지 않은 아이도 세 명이 남았다. 마지막 세 장 중에는 ‘17번 사물함에 cpu 쿨러가 들어있어요.’ 가 있는데 마지막 남은 세 명 중 아무도 자기 것이라고 나서지 않는다. 이들을 제외한 42명의 친구들이 지켜보고 있는 곳에서 더 이상 얼굴 붉히고 닦달할 수는 없는 노릇. 조용히 세 명의 아이들을 데리고 교무실로 향한다.

  “이제 그만했으면 좋겠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솔직하게 말해줘. 그러면 이번 일은 없던 일로 할게.”

순간 아무도 나서지 않는다. 이들 세 명 중 덩치가 제일 작은 아이는 매우 초조한 표정에 사색이 되어가고 있고, 두 번째로 키가 큰 아이는 무표정, 이들 중 덩치와 키가 제일 큰 아이는 무표정에 당당한 자세를 취하고 있다. 누굴까? 세 장을 동시에 내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자기 것을 고르게 한다. 먼저 모르겠음이라고 쓰인 종이를 두 번째로 키가 큰 무표정의 아이가 냉큼 고른다. 다음 순간 모름이라고 쓰인 종이를 집으려고 초조한 표정의 작은 아이와 덩치 큰 당당한 아이가 동시에 손을 내민다. 잠시 두 아이와 번갈아가며 눈을 맞춘 채 가만히 기다린다. 콩당콩당거리는 심장 소리가 들릴세라 얼굴에 힘을 준다.

   잠시 후, 초조한 표정의 아이에게 묻는다.

  “이거 네가 쓴 거 맞아?”

  “.”

눈빛이 간절하다. 휙 고개를 돌려 무표정의 당당한 아이에게 ‘17번 사물함에 cpu 쿨러가 들어있어요.’라고 적힌 마지막 종이를 들이민다.

  “이거 네 꺼지?”

  “.......”

  “네가 그랬구나.”

마지못해, 그러나 무표정하고 당당하게,

  “.”

범인을 밝힌 나는 안도감과 더불어 비애감에 젖어들었다. 이 무표정하고 당당한 태도에 어쩔 줄 몰라 하며. 왜 그랬니? 집에 있는 컴퓨터가 낡고 고장나서 그랬었노라고.

 

   자신이 어떤 잘못을 저지르고도 끝까지 발뺌하는 사람들을 볼 때 마다 나는 이 아이가 생각난다. 그 무표정하고 당당한 시선으로 허탈감에 쪼그라든 나를 내려다보던 얼굴이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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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니데이 2018-11-22 13: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nama님, 오랜만에 인사드립니다. 그사이 날씨가 많이 차가워졌어요.
오늘 아침에는 0도였다고 하는데, 이제 진짜 겨울인가봐요.
이 글은 오전에 한번 읽었는데, 마지막 부분이 생각나서 다시 한 번 더 읽었어요.
감기 조심하시고, 따뜻한 하루 보내세요. ^^

nama 2018-11-22 19:59   좋아요 1 | URL
늘 한결같은 서니데이님도 감기 조심하세요.
즐거운 날들 되시길 바랍니다.^^

oren 2018-11-22 17: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주 희귀한 경험을 하셨네요. 그런데 이 글을 읽는 도중에, 그리고 다 읽고 나서도 자꾸만 겹쳐 떠오르는 건 ‘혜경궁 김씨 사건‘이네요. 제가 보기에는, 이미 증거가 차고 넘쳐서 더 이상 부인하기가 민망할 지경인데, 과연 언제까지, 어디까지, 어디가 끝인지는 몰라도 정말 ‘갈 데까지 가보자‘는 것인지 그게 궁금할 따름이네요. 거짓말 하는 사람들을 보면 자꾸만 몽테뉴가 했던 기막힌 말들도 생각나고요.

* * *

거짓말

거짓말이라는 것은 천한 악덕이다. 그리고 옛 사람(플루타르크를 말함)은 이것을 수치스럽게 묘사하며, 그것은 신을 경멸하고 동시에 인간을 두려워한다는 증거를 보여 주는 일이라고 하였다. 이 악덕의 흉칙스럽고 비굴하고 난잡스러움을 이보다 더 풍부하게 표현할 수는 없는 일이다. 인간에 대하여 비굴하고 신에 대해서 용감하다는 것보다 더 비굴한 일을 달리 상상해 볼 수 있는가? 우리들의 상호 양해는 오로지 언어를 통해 이루어지는데, 이 말을 그릇하는 자는 공공 사회를 배반하는 것이다. 말은 그 방법으로 우리의 의지와 사상을 서로에게 전달하는 유일한 연장이다. 그것은 우리들 심령의 통역이다. 말이 우리에게 없으면 우리는 서로 의지할 수 없으며, 알아보지도 못한다. 말이 우리를 속인다면 우리의 모든 관계를 부수며 우리 사회의 모든 연락을 무너뜨린다.

http://blog.aladin.co.kr/oren/9165803

nama 2018-11-22 20:15   좋아요 1 | URL
거짓말에 대한 기막힌 표현이네요. 거짓말은 천한 악덕...맞습니다.
끝까지 부인하는 모습이 보기에 딱하기도 하고, 안타깝기도 하고, 화도 나지요.
끝까지 우기는 모습이 참 초라합니다. 그걸 모를까요....

 

1.

 

 

 

 

 

 

 

 

 

 

 

 

 

'우주 그리고 그 너머에 관한 인터뷰'라는 부제가 붙은 책. 당장의 내 앞가림에도 헉헉대는데 우주를 생각한다는 건 어불성설, 감히 엿볼 생각도 없는데 어쩌다 손에 집어들었으니 칼 세이건의 한말씀을 옮겨본다.

 

우리는 한 평범한 태양 주변을 도는 이름 없는 바위와 금속 덩어리 위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 태양은 4000억 개의 다른 별로 이뤄진 지극히 평범한 은하의 외곽에 놓여 있고, 그 은하는 또 우주를 구성하는 약 1000억 개의 은하 중 하나일 뿐이며, 그 우주는 또 현재의 추측에 따르면 무수히 많은 - 어쩌면 무한히 많은 - 다른 페쇄 우주 중 하나일 뿐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자면 우리가 중심에 있다는 생각, 우리가 우주에서 조금이라도 중요한 존재라는 생각은 우스꽝스러울 따름입니다. (8쪽)

 

우주생물학의 크나큰 즐거움 중 하나는 그 덕분에 우리가 생물학에 관한 기존 가정들이 얼마나 편협한지를 직시하게 된다는 점입니다. 지구의 모든 생명은 사실상 다들 같습니다. 화학적으로 따지자면 인간은 세균이나 베고니아랑 똑같은 존재입니다.(48)

 

'나'라는 감옥에 갇혀있다는 기분이 들 때, 나의 고통만이 세상의 전부처럼 여겨질 때, 위의 글을 읽으면 위안이 된다. 우주의 크기로 생각해보면 슬퍼하는 것도 기뻐하는 것도 한낱 먼지의 투정에 불과할 뿐이다.

 

2.

 

 

 

 

 

 

 

 

 

 

 

 

 

이 책의 어떤 부분이라고 콕 찍어서 말할 수는 없지만, 책을 읽으면서 위안을 받았다. 옹졸하고 답답한 '나'에게서 벗어날 수 있었다. 장자를 이렇게 읽을 수도 있겠구나, 하는 깨달음은 덤.

 

세계에는 다양한 시스템들이 존재하고, 따라서 수많은 타자들이 존재한다. 중요한 것은 이런 다양한 시스템들이 서로 교차하고 충돌한다는 것, 다시 말해 우리는 타자와 마주칠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사실 삶에서 일어나는 모든 문제는 이런 마주침으로부터 발생한다. 자신이 무의식적으로 따르고 있던 삶의 규칙이 적용되지 않는 지점, 다시 말해서 타자와 마주치는 지점에서 우리는 어떤 임계점(critical point)에 놓이게 된다. 임계점이란 화학에서 사용하는 용어인데, 어떤 물질이 액체인지 기체인지를 규정할 수 없는 어떤 상태에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용어는 자신의 생각이 전혀 통용되지 않는 어떤 순간에 우리의 삶이 위기에 처할 수밖에 없다는 점을 보여준다.

   이런 임계점에서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경우의 수는 사실 그렇게 많지 않다. 하나는 자신의 생각을 타자에게 그대로 관철시키고자 하는 '꿈의 길'이다. 다른 하나는 타자가 속한 시스템의 규칙을 배우면서 새로운 주체로 변형되는 '삶의 길'이다. 여기에서 장자의 선택은 명확하다. 그는 우리에게 '삶의 길'을 따르라고 권고하고 있기 때문이다. (131)

 

'나'는 우주의 먼지에 불과한 보잘것 없는 존재지만, 때때로 마주하는 삶의 위기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건 '새로운 주체로 변형'되어야만 한다는 뼈아픈 깨달음이다. 특히 나를 둘러싼 타자와의 관계에서.

 

니체는 우리의 정신이 세 가지 변화의 단계를 거쳐야 한다고 이야기했던 적이 있다. 낙타에서 사자로, 그리고 사자에서 최종적으로 아이로. 낙타가 자신의 것이 아닌 짐을 고집스럽게 짊어지고 살아가는 자를 의미한다면, 사자는 자신의 것이 아닌 것을 과감하게 내던져서 마침내 자유를 획득한 자를 상징한다. 그러나 사자는 아직도 부정의 정신 상태에 머물러 있다.

  기존의 모든 가치와 생각에 대해 과감하게 '아니오!'라고 할 수는 있지만, 사자는 아직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면서 '예!'라고 이야기하는 긍정의 정신에 미치진 못하고 있다.바로 여기에 인간의 정신이 최종적으로 사자에서 아이로 변해야만 하는 필요성이 존재한다. (150)

 

'아이'의 모습이란 무엇인가? 애써 쌓은 모래성이 파도에 따라 부서져도 아이는 까르르 웃는다. '자신이 애써 만든 모래성이 속절없이 파괴되는 것'을 보고 즐거워하는 건 그 자리에 새로운 모래성을 다시 쌓을 수 있다는 '생성의 가능성'을 아이가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아이는 순진무구함이며 망각이고, 새로운 출발, 놀이, 스스로 도는 수레바퀴, 최초의 움직임이며, 성스러운 긍정이 아니던가. 그렇다! 창조라는 유희를 위해선, 형제들이여, 성스러운 긍정이 필요하다. 이제 정신을 자신의 의지를 원하고, 세계를 상실했던 자는 이제 자신의 세계를 되찾는다. - 니체, <차라투스라는 이렇게 말했다> (149)

 

장자에 나오는 '양행'이란 개념을 설명하면서 나온 구절이다. 읽다보면 '아, 그렇군!'하면서 이해가 되는데 그걸 내 언어로 설명하는 건 어렵다. 이제 겨우 장자를 읽기 시작했으므로. 직접 읽어보는 수밖에.

 

'존재'(existence)의 관념이 그에 대한 반대자들뿐만 아니라 지지자들 사이에서도 근본적으로 오해되고 있음에 주목해야 한다. 그 어원(existence)에서 보이는 바와 같이 존재의 주요한 의미는 중심이 아니라 '탈중심'에 있다. 즉 '다른 사람들과의 세계' 및 '다른 사물들과의 세계'를 향한 자아의 탈중심성이 바로 그것이다. 탈중심적 존재로서 인간은 외부세계에 '노출'되어 있고 저편까지 넘어서 도달하려는 존재이다. 존재의 모토는 다음과 같다 : 안으로 들어가지 말라. 밖으로 나아가라. - 정희열, <몸의 정치> (156)

 

밖으로 나아가는 운명인 존재. existence라는 단어의 의미를 되새겨본다.

 

이 책을 읽다보면 글이 하나의 관점을 위해서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되고 지은이가 말하고자 하는 결론에 자연스럽게 이르게 된다. 그동안 겁 먹고 손도 대지 못하던 장자의 세계에 비로소 발을 들여놓은 기분이 된다. 정용선의 <장자, 위대한 우화>와 함께 읽으니 반복학습의 효과도 있어 좋다.

 

 

3.

 

 

 

 

 

 

 

 

 

 

 

 

 

 

머리 아플 때 읽으면 좋은, 가독성 최고의 책. 이렇게 유쾌한 책을 읽는 것도 좋다. 꼭 머리 쥐어짜는 책이 최고라고 할 필요는 없으니까. 읽다보면 깨달음을 주는 구절이 많다.

 

나는 문장이 아니라 문단이야말로 글쓰기의 기본 단위라고- 거기서부터 의미의 일관성이 시작되고 낱말들이 비로소 단순한 낱말의 수준을 넘어서게 된다고 - 주장하고 싶다. 글이 생명을 가지 시작하는 순간이 있다면 문단의 단계가 바로 그것이다. 문단이라는 것은 대단히 놀랍고 융통성이 많은 도구이다. 때로는 낱말 하나로 끝날 수도 있고, 또 때로는 몇 페이지에 걸쳐 길게 이어질 수도 있다. 글을 잘 쓰려면 문단을 잘 이용하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 그러며면 많은 연습이 필요하다. 장단을 익혀야 하기 때문이다. -스티븐 킹 (93)

 

 

프랜시스 베이컨은 먼지로 그림을 그린 것으로 유명하다. 프랑스 북부 브르타뉴를 그릴 때 작업실의 먼지를 사용했다. 바닥의 먼지를 모두 그러모은 다음 헝겁으로 먼지를 닦아 젖은 물감에 올려놓았다. 어떤 그림에는 물감을 전혀 사용하지 않고 바닥의 먼지를 얇게 한 겹으로 발라 회색 옷을 표현하기도 했다. (중략) 그는 수십 년 동안 단 한 번도 작업실 청소를 하지 않았다고 한다...먼지를 수집할 때 그는 넋이 나갔을 것이다. 먼지가 흩어지지 않게 하기 위해 집중하고 또 집중했을 것이다. (232~233)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먼지로 그린 그림이 궁금하다.

 

좋은 묘사와 나쁜 묘사를 구분하는 방법이 있다. 나쁜 묘사는 예쁘기만 할 뿐 정확하지 않고, 좋은 묘사는 선명하지 않지만 정확하다. 나쁜 묘사는 셀카와 같고, 좋은 묘사는 스냅샷과 같다. 나쁜 묘사는 최대한 포즈를 취한 수 어색한 미소로 찍는 사진이고, 좋은 묘사는 친한 친구들과 놀다가 자연스럽게 찍히는 사진이다. (257)

 

소설가란 잡학다식해야겠다는 생각이 들게 한 책. 잡다해서 재밌게 읽은 책이다.

 

 

 

4.

 

 

 

 

 

 

 

이 책을 빌리려고 도서관에서 헤맸다. 어린이책 코너에 있었다.

 

그런데 이 책, 왠지 으스스하다.

 

"도서관에서 일하고 싶어요."

"그럴 수는 없습니다."

 

시카고 공립도서관 용지에 "죄송합니다."로 시작하는 글을 적었다.

욕실에 들어가 약장을 열었더니 신경안정제 열네 개가 있었다.

알약을 삼키고, 확실히 하기 위해 손목도 그었다.

 

이 부분이 자꾸 마음에 걸린다. 그림책이지만, 난 이 책이 어렵고 두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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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을 사랑할 수 있어 참 좋았다 - 곽재구의 신新 포구기행
곽재구 지음, 최수연 사진 / 해냄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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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이 단조로워지니 책 읽기가 훨씬 수월하다. 산문집 한 권 읽기도 빠듯하던 시절이 언제였나 싶다. 늘 시인의 삶을 추구하는 시인의 산문집을 읽는 맛이 각별하다. 내겐 이름도 낯선 포구들이 시인의 눈과 글을 통해 가을 낙엽처럼 혹은 눈송이처럼 소복하게 내려 앉는 듯하다. 정신이 맑아진다.

 

여행이란 이런 것이구나, 라는 걸 겸허한 마음으로 깨닫게 된다. 작은 포구를 찾아나서고, 일부러 길을 잃고 낯선 곳을 거닐어보고, 예전 추억이 깃든 곳을 다시 찾아가보는 여행. 여행이라기 보다는 '바람 쐬는' 것 같은 소소하지만 다정한 산책 같은 행위. 이런 일상으로 산다면 외로움이나 을씨년스러움도 발걸음의 동무가 될 터. 나도 시인처럼 낯선 포구를 찾아 허름한 식당에서 해물칼국수 한 그릇 억고 싶어진다.

 

여행 중에 내가 휴대하고 다니는 책은 읽을 책이 아니라 다 읽은 책들일 경우가 많다. 따뜻하게 읽은 책들과 함께 길 위에 서면 든든한 도반과 함게 여행하는 기분이 든다. (138쪽)

 

이런 경지를 나는 아직 모른다. 여행 중에는 늘 새로운 책을 챙겼다가 그마저도 읽지 못하고 그냥 되가져오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으므로. 좀 부끄러운 생각이 들었다.

 

사람들이 내게 묻곤 한다. 왜 인도 여행을 하는가? 스무 시간이 넘는 버스 여행, 마흔 시간이 넘는 기차 여행을 하고 처음 만나는 도시에 들어섰을 때 마음속으로 나마스테! 인사를 한다. 당신이 사랑하는 영혼이 있다면 그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을 내게도 조금 나눠주시길. 난 이 도시에 처음 들른 외로운 이방인이니까. 나 또한 당신이 사랑할 인간 중의 하나이니까. 이렇게 인사를 하는 동안 마음은 한없이 사랑스러워지고 설레게 된다. 내가 사랑할 세상이 이 지구 어딘가에 꼭 있으리라는 추상이 마음 안에 새겨지는 것이다. (162)

 

이런 구절만 읽어도 '내가 사랑할 세상이 이 지구 어딘가에 꼭' 있으리라는 확신이 드는 것이다.

 

그때서야 오래전 봄날 이 길을 스쳐 지나간 적이 있다는 생각이 떠오릅니다. 알 수 없는 이유로 마음 안이 어둡던 그해 봄길 참 아름다웠지요. 어디서 시작해 어디로 가는지 모르는 길을 따라 걷다가 마음 안의 어둠이 사라졌습니다. 어두운 인간의 마음을 치유해줄 수 있는 가장 좋은 약이 길이라는 것을 그때 알았지요.(219)

 

 

마지막 문장을 읽고 또 읽는다. 어, 이건 내 생각인 줄 알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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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벼운 나날
제임스 설터 지음, 박상미 옮김 / 마음산책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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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쓰기가 겁나는 소설인데, 완독 후 아무런 흔적을 남기지 않기도 어려운 소설이다. 단숨에 몰아쳐 읽는 소설이 아니어서 완독 그 자체에도 의미가 있으나, 머지않아 사라져버릴 감흥이나 느낌을 몇 문장으로나마 적어둬야 할 것 같다. 이런 소설은 도저히 안 읽은 체하며 넘어갈 그저 그런 소설이 아니다. 나 이런 책 읽었어, 하며 꼭 홍보를 해야 할 것 같은 책이다. 단 한 권의 책만 읽어야 한다면 바로 이 책이 아닐까 싶은 책, 다른 많은 책을 읽지 않아도 배가 불러오는 책. 자꾸 칭찬이 과해진다.

 

줄거리는 그리 중요한 것 같진 않다. 이 책의 묘미는 갈피마다 박혀있는 보석같은 짧고 간결한 문장을 읽는 맛이다. 순간 순간 심호흡을 가다듬게 되는, 읽고 또 읽게 되는, 정곡을 파고드는 정확한 표현들을 대하는 맛이다. 학교 교사의 능력을 교실(수업)장악 여부로 따진다면 소설가의 능력은 소설장악이 될 텐데 이 소설이 바로 그런 소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완독하는데 시간이 걸리고, 바쁜 일상에서 한가롭게 읽기는 더욱 어려운 소설이지만, 이 소설을 읽고나니 무언가 세상이 달라져 있는 듯한 기분이 든다. 읽기 전과 읽은 후, 내 주변의 공기의 흐름이 달라져버린 것 같은 느낌이다.

 

밑줄 그은 문장들이다.

 

이 세상엔 두 종류의 삶이 있다. 비리의 말처럼, 사람들이 생각하는 당신의 삶 그리고 다른 하나의 삶. 문제가 있는 건 이 다른 삶이고 우리가 보고 싶어 하는 것도 바로 이 삶이다. (51쪽)

 

인생이 숭배하는 건 열정과 에너지와 거짓말이다. 그래도 인류가 보고 있다면 어떤 것이라도 참을 수 있다. 순교자들이 이를 증명한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주목 속에 산다. 꽃이 해를 향하듯 우리는 그쪽으로 고개를 돌린다. (67)

 

책은 그녀의 무릎 위에 있었다. 그녀는 더 이상 읽지 않았다. 사람의 인생을 바꾸는 건 결국 하나의 문단, 하나의 진술이다. 우리의 내부로 파고 들어오는 문장들은 가느다랗다. 수영할 때 민물 가자미가 몸속으로 들어오듯. (238~239)

 

그는 그런 나이에 가까워지고 있었고, 바로 그 가장자리에 서 있었다. 세상이 갑자기 더 아름다워 보이고 특별한 방식으로 보이기 시작하는, 지붕과 벽의 모든 디테일이 눈에 들어오고, 비 오기 전 나뭇잎이 바람에 미세하게 흔들리는 것까지 보이는 그런 나이. 세상은 자신을 허락하듯이 몸을 여는 거였다. 이제 남은 인생이 길지 않으니 한번 길고 절실하게 세상을 보라고, 그래서 그동안 잡고 있던 것들을 세상이 놓아주는 것이었다. (291)

 

"맞아요, 하지만 당신과 비리든, 누가 됐든 헤어질 때는 통나무를 자르는 것과 같아요. 그 잘라진 조각이 똑같지 않은 거죠. 둘 중 한 명이 그 중심부를 가져가죠."(351~352)

 

하지만 그녀는 완전히 평화로운 나날을 보냈다. 그녀의 삶은 잘 보낸 한 시간 같았다. 그 비결은 그녀가 후회나 자기 연민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녀는 정화된 자신을 느꼈다. 날들은 바닥나지 않는 채석장에서 캐내는 돌 같았다. 그 안에는 책과 사소한 볼일들, 해변, 그리고 가끔씩 오는 우편물이 있었다. 그녀는 볕에 앉아, 천천히 조심스럽게 우편물들을 읽었다. 마치 해외에서 날아오는 신문을 읽듯. (353)

 

"나는 언제나 중요한 것들은 어떻게든 남을 거라 생각했어." 네드라가 말했다. "하지만 그렇지가 않더라고." (374)

 

 

신형철의 글을 읽고 이 책을 읽었는데 역시 신형철의 평은 '정확하다'.

 

'...'정확하다'라는 평가는 우리가 소설가에게 바칠 수 있는 최상급의 찬사 중 하나일 것이다. 설터가 어떤 감정을 묘사하면 그것에서 불명확한 것은 별로 남지 않는데, 그럴 때 그는 마치 다른 작가들이 같은 것에 대해 달리 쓸 수 있는 가능성을 영원히 제거해버리려는 것처럼 보인다. 예컨대 한때 내가 가장 사랑한다고 믿은 대상이 이제는 내 삶의 무의미를 극명하게 증명하는 것처럼 보일 때의 그 비감을 설터만큼 잘 그려내는 작가는 많지 않을 것이다.'

 

 

매끄러운 번역 덕분에 문장을 잘근잘근 씹는 맛을 느낄 수 있었으니 번역하신 분에게도 감사하는 마음 가득하다. 덕분에 잘 읽었노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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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나무 2018-11-09 12: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그래도 오늘 신간소식에 설터의 산문집이 보여서 간만에 다시 설터의 소설들을 읽어보자 했는데 이런 리뷰 만나니 반가워요. ^^
설터의 소설은 줄거리보다는 분위기로 읽게 되는 것 같아요. 정말로~

nama 2018-11-09 15:41   좋아요 0 | URL
그렇지요. 분위기와 곱씹는 문장이지요. 신간 소식, 저도 반갑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