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주는 그간 알고 있던 수준을 뛰어넘는, 그러니까 업그레이드를 하는 시간을 보냈다. 한민족 디아스포라의 역사, 한민족의 만주 이주와 독립운동, 일본 영주 한인집단의 형성과정, 연해주 지역의 독립운동, 사할린 한인 역사, 하와이 독립운동 등 해당분야를 연구한 분들의 강의를 들으며 나의 얄팍한 지식과 인식의 바닥을 약간 단단하게 다졌다. 자못 의미있는 시간을 보냈다.

 

강의를 듣다보니 아무래도 영화 <암살>을 봐야할 듯 싶어 영화를 봤는데, 마침 그날밤 Jtbc 뉴스룸에서 영화감독 최동훈과의 인터뷰가 있었다.

 

(출처 http://news.jtbc.joins.com/html/200/NB10997200.html )

 

조금 소개해보면,

 

손석희:...대개 1930년대 얘기, 광복군의 얘기 하면 조금 흔히 하는 표현으로 올드하다 그래서 관객들이 찾아들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들을 충무로에서 다 한다고 들었습니다. 혼자만 달리 생각하셨습니까?


 

최동훈: 저도 걱정이 좀 많았고요. 심지어는 저한테 이 영화는 망할 것이다, 한국 사람들은 일제강점기를 되돌아보는 것을 고통스러워하거나 즐길 수 없을 것이라는 얘기를 했었어요. 그리고 저도 긴장을 하긴 했는데. 근데 저의 생각은 좀 달랐어요. 저는 상업영화라고 하는 것은 결국은 좀 더 새로운 것을 보여줘야 된다고 생각해요 아니면 아직 우리가 영화로 보지 못했던 모습들 영화가 가지고 있는 기본적인 스펙터클이라고 하는 것이 좀 더 새로운 걸 찾고자 하는 열망하고 붙어있는 것 같고요. 저는 그리고 이 시대가 정말로 패배의 시대인지는 되짚어 봐야 된다고 생각하는…

 

 

손석희: 영화에서 다룬 그 시대가? (네) 그건 좀 새로운 시각일 수도 있는데 왜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최동훈: 이 시대가 저희들한테 트라우마처럼 박혀있죠. 그렇지만 실제로 저희가 이 영화를 준비하면서 찾았던 책들에서 보면 아주 많은 분들이 압록강을 건너서 만주와 중국 상해 또는 뭐 미국이나 쿠바나 멕시코 같은 데서 노동을 하시면서도 돈을 계속 보내오고, 그리고 그 무장투쟁의 역사는 실은 45년까지 계속되거든요. 그러니까 그냥 나라가 없어졌다고 손 놓고 있지는 않았고 계속 싸우고 있었다는 것을 발견했고 그리고 그것을 관객분들에게도 전달해 드리고 싶었어요.

 

 

밑줄은 위 인터뷰에서 내가 크게 공감했던 부분이다. 일주일간 배운 내용이 바로 이 부분이기도 하다. 어떤 교수님에 따르면, 우리 나라 같이 독립운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한 민족이 없다고 한다. 필리핀이나 베트남도 우리처럼 끈질기고 독하게 독립운동을 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국내에서는 일제치하에서 신음하고 있었지만 해외 여러 지역에서는 말 그대로 아주 많은 분들이 독립운동에 보탬이 되려고 무진 애를 썼다고 한다.

 

역사는 지식이 중요한 게 아니라 역사인식을 어떻게 하느냐가 중요한 것이라는 교수님의 마지막 말씀이 묵직한 여운을 남겼는데, 제대로 된 역사인식을 위해선 일단 지식이 밑받침이 되어야 한다. 일단 아는 게 있어야지 생각할 근거가 생기는 거니까.

 

이런저런 강의를 듣고나니 최동훈 감독의 역사 인식이 만만치가 않구나 하는 생각도 하게 되었고 영화<암살>에 대해서도 다시 한번 생각해보게 된다.

 

 

 

 

연수를 받는 와중에 틈틈이 책 한 권을 읽었다. 밥장의 책이다. ( 재미있는 이 책을 여기서 요렇게만 언급하게되어 유감이다.)

 

 

 

 

 

 

 

 

 

 

 

 

 

글도 맛깔스럽고 내용도 탄탄해서 야금야금 조금씩 읽는 맛이 좋았다. 책에 소개된 여행지, 영화, 책, 음악도 한결같이 호기심을 불러일으켰다. 그런데 어느 페이지에서 눈이 멈췄다. 독립운동가 최재형을 소개하는 부분이었다. 연수 첫날부터 언급된 최재형은 낯선 분이어서 얼른 감이 오지 않았는데 마침 이 책에서 소개하고 있었고, 그 다음날쯤 다시 어떤 교수로부터 구체적인 내용을 듣게 되었다. 잠깐 인용해보면,

 

'최재형은 1858년 함경도에서 노비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열 살 때 형과 아버지를 따라 연해주로 이주했지만 배고픔을 참을 수 없어 열두 살에 가출하였습니다. 우연히 한 러시아인 선장을 만나게 되었는데 선장은 그를 친아들처럼 키웠습니다. 6년간 함게 배를 타고 아시아, 아프리카, 유럽 남부 해안까지 여행을 떠났습니다. 그 뒤로 한인으로는 처음으로 러시아 학교에 입학하였습니다. 세계를 경험한데다 러시아어까지 유창해서 열여덟 살에 그는 이미 '글로벌 인재'가 외었습니다. 극동에 얼지 않는 항구를 개척하려는 러시아의 정책에 힘입어 1880년 블라디보스토크는 연해주의 중심 도시가 되었습니다. 그는 러시아어를 모르는 이주 한인 노동자들을 대변하며 도로건설에 참여하였스빈다. 군납업에도 뛰어들어 러시아 군인들에게 생필품도 납품하였습니다. 현지인 같은 러시아어 실력, 그를 따르는 한인들의 노동력, 뛰어난 사업 수완 덕택에 한인이자 러시아인이었던 그는 연해주에서 존경받는 사업가로 크게 성공하였습니다. 그런데 1904년 러일전쟁에서 러시아가 지고 1905년 을사조약으로 대한제국의 외교권은 일본으로 넘어갑니다. 1907년에는 헤이그 밀사사건을 계기로 고종은 퇴위되고 군대도 해산됩니다. 마침내 그는 연해주와 러시아에 흩어져 있던 한인 의병들을 모집하여 1908년 동의회를 결성합니다. 그리고 국내 진공 작전을 펼칩니다.' (177~178쪽)

 

 

1909년 안중근이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할 때 그 뒤를 봐준 사람이 바로 최재형이라고 한다. 결국 1920년 최재형은 일본군에게 체포되어 취조나 재판 없이 그대로 총살되었다고 한다. 검색해보니 이 분에 관한 책이 몇 권 있다.

 

 

 

 

 

 

 

 

 

 

 

 

 

또 한 분, 이승만의 라이벌이자 하와이에서 활동한 박용만이라는 분도 알게 되었는데 앞으로 어느 순간 다시 접하게 되겠지 싶다.

 

 

또 하나. 우리 나라 해외 동포의 수가 약 750만 명이라고 한다. 열 명 중 한 명이 타국에서 살고 있는 셈이다. 비율로만 보면 유대인을 제외하고 세계 1위라고 한다. 집 떠난 자식이 이렇게나 많다는데 놀랐다.

 

 

오늘도 내가 살고 있는 아파트에서는 태극기 게양하라고 난리다. 8월초부터 게양하라고 떠들어대기에 시큰둥했는데 오늘은 한번쯤 태극기를 휘날려야 할 듯 싶다. 

 

오늘 페이퍼는 태극기 게양 대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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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bina 2015-08-23 17: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해외 동포수가 그리 많은지 몰랐네요.
유대인 다음 이라니 더욱 의외다 싶구요.
이또한 일제강점기의 영향이 아닐까 하는 생각에 일본이 더욱 미워집니다.
한 나라, 한 민족에게 백년에 가까운 세월이 되도록 끝나지 않을 영향을 끼치고도
진정 반성의 자숙을 회피하는 일본은 뭔지 ... 적개심 마저 듭니다.
위안부로, 징용으로 우리의 젊은,아니 어린(열한 살에 끌려간 위안부도 있었다네
요.)사람들 개개인의 엉망이 되어 버린 인생에 대해서 언제나 속죄 하려는지...
가슴이 먹먹해집니다.
해외동포 이야기에서 좀 옆으로 나와 혼자 흥분했네요. ㅠ

nama 2015-08-25 07:44   좋아요 0 | URL
흥분할 만하지요, 두고두고.
그러나 일본에는 양식과 양심이 있는 멋진 사람들도 많아요.
일본이라는 나라와 일본인이라는 한 개인을 분리해서 생각해야 할 때가 많아요.
무작정 미워할 수만도 없는, 참 착잡한 나라가 일본인 것 같아요.
계속 공부해야 할 나라지요.

sabina 2015-08-25 15: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맞습니다.
극명한 예로,극우파의 말도 안되는 거친 시위에 맞서서 항의하는 양식있는 일본인만 보더라도 일본인이 다 나쁘달 순 없죠.
일본인이아니라, 일본은 반성과 사과를 해야 지요. 그 억울한 사람들에게.
몇 번이라도...
독일처럼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