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처럼 도서관에 갔는데, 아차, 안경을 집에 두고 왔다. 글자수 적은 책을 찾다가 이문재 시집을 발견. 안경없이 30분이 지나면 급난시가 되는 바람에 더 이상 책 읽기가 괴로운데 그 괴로움을 피할 요량으로 시 몇 편을 베껴 보았다. 베껴보니 시가 차분하게 가슴을 채워온다.

 

지금 여기가 맨 앞

 

나무는 끝이 시작이다.

언제나 끝에서 시작한다.

실뿌리에서 잔가지 우듬지

새순에서 꽃 열매에 이르기까지

나무는 전부 끝이 시작이다.

 

지금 여기가 맨 끝이다.

나무 땅 물 바람 햇빛도

저마다 모두 맨 끝이어서 맨 앞이다.

기억 그리움 고독 절망 눈물 분노도

꿈 희망 공감 연민 연대도 사랑도

역사 시대 문명 진화 지구 우주도

지금 여기가 맨 앞이다.

 

지금 여기 내가 정면이다.

 

*'끝이 시작이다'라는 말이 좋다. 그리움의 끝, 절망의 끝, 분노의 끝, 시대의 끝....끝은 시작이니 이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은 결국 다시 시작이다. 끝날 것 같지 않은 괴로움도 절망도 사랑도 기억에도 끝은 있고 다시 맨 앞에 설 수 있다고 믿는 것. 다시 살아갈 수 있는 힘이 생긴다.

 

 

오래된 기도

 

가만히 눈을 감기만 해도

기도하는 것이다.

 

왼손으로 오른손을 감싸기만 해도

맞잡은 두 손을 가슴 앞에 모으기만 해도

말없이 누군가의 이름을 불러주기만 해도

노을이 질 때 걸음을 멈추기만 해도

꽃 진 자리에서 지난 봄날을 떠올리기만 해도

기도하는 것이다.

 

음식을 오래 씹기만 해도

촛불 한 자루 밝혀놓기만 해도

솔숲 지나는 바람 소리에 귀기울이기만 해도

갓난아기와 눈을 맞추기만 해도

자동차를 타지 않고 걷기만 해도

 

섬과 섬 사이를 두 눈으로 이어주기만 해도

그믐달의 어두운 부분을 바라보기만 해도

우리는 기도하는 것이다.

바다에 다 와가는 저문 강의 발원지를 상상하기만 해도

별똥별의 앞쪽을 조금 더 주시하기만 해도

나는 결코 혼자가 아니라는 받아들이기만 해도

나의 죽음은 언제나 나의 삶과 동행하고 있다는

평범한 진리를 인정하기만 해도

 

기도하는 것이다.

고개 들어 하늘을 우러르며

숨을 천천히 들이마시기만 해도.

 

* 나의 퇴근길은, 자동차를 타지 않고 걷고/꽃 진 자리에서 지난 여름을 떠올리고/갈대숲 지나는 바람 소리에 귀기울이고/고개 들어 하늘을 우러르고/노을이 질 때 걸음을 멈추고/철새들 시선을 따라 먼 곳을 응시하고/늘 말없이 누군가의 이름을 불러주는데...나는 늘 기도하고 있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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