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렸을 때 밥상 위의 반찬이라곤 김치 두 어 가지가 전부인 날들이 많았다. 그럴 때 반찬 투정을 하면 엄마는 '아버지는 아무 말씀도 안 하시는데 니가 웬 투정이냐.'고 하시곤 했다. 멸치가 들어간 찌게가 밥상에 오른 날엔 키 작은 형제들이 허리를 펴고 찌게 속의 멸치 사냥에 혈안이 되곤 했다. 그러나 더 이상 소박할 수 없는 이 밥상에 제일 맏이인 언니는 끼지 못했다. 넉넉하게 사는 서울의 작은 아버지가 데려간 언니는 아침마다 작은 어머니가 떠주는 뜨거운 물로 세수를 하고 부잣집 딸처럼 잘 지내고 있다고 했다.

 

언니가 다시 집으로 내려온 것은 중학교 3학년 겨울방학을 앞두고 였다. 식구들이 묵묵히 먹고 있는 밥상에서 언니는 자꾸 이유없이 웃곤 했다. 아마도 서울까지 통학하는 게 힘들어서일꺼야, 라고 엄마인가 우리 형제들 중 누군가가 그랬다. 집안에 우울감이 팽배해오기 시작하던 몇 개월 동안 그래도 밥상에는 식구들 모두가 둘러 앉아  밥을 먹을 수 있었다.

 

2~3년 후 였나. 모처럼 온 식구들이 한 밥상에 앉을 수 있게 되었으나 언니의 병세는 훨씬 더 악화되어 있었다. 밥을 먹으며 아무도 즐거울 수 없었다. 그러나 언니와 함께 하는 이런 밥상도 얼마 이어지지 못했다.

 

몇 년마다 이따금씩 이런 우울한 밥상이 간헐적으로 이어졌으나 몇 년 후 부터는 아예 언니가 없는 식탁이 되어버렸다.

 

그 후 40여 년의 세월이 흐른 현재, 밥상에 둘러앉는 식구들의 구성원에 변화가 생겼다. 아버지의 자리는 영원한 빈 자리가 되었고 며느리 하나, 사위 하나, 남자 아이 둘, 여자 아이 하나를 위한 자리를 새로 만들게 되었다. 또 한 명의 며느리를 위한 자리는 글쎄 채워지는 날이 올지 어떨지 모르겠다.

 

어제 병원을 옮겨 입원하고 있는 언니한테 갔다. 새언니가 준비해 간 죽을 언니가 맛있게 먹었다. 죽 속에 들어간 버섯을 이가 다 빠진 잇몸으로 부지런히 먹고 있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흰머리가 듬성듬성 난 머리와 앙증맞고 귀여운 귀가 눈에 들어왔다. 

 

"우리 언니, 나보다 머리가 검네."

"큰 고모야 뭐 걱정거리가 있겠어요?"

 

병원의 저녁 식사 시간이 되어 면회를 서둘러 마치고 간호실 옆 로비로 나왔더니 30여 명의 환자들이 모두 나와 있었다. 탁자를 길게 붙이고 의자를 정렬해 놓고 무엇인가를 기다리는지 환자들 대부분이 주변에 서 있었다. 각자 식판을 갖고 자리에 앉는지 앉아 있으면 식판을 갖다 주는지 확인할 수는 없었지만 가벼운 설레임 같은 분위기는 느낄 수 있었다.

 

언니를 부축하며 2~3m 걸어가는데 어떤 환자가 다가와서 언니를 데려갔다. 구부러진 허리 때문에 언니는 예전보다 훨씬 작고 훨씬 연약해 보였다.

 

준비된 탁자 앞에는 언니의 자리가 따로 있어서 아무도 그 자리에 앉지 못하게 한다고, 자주 병원에 오는 새언니가 말해주었다. 간호사들이나 환자들이 언니를 귀여워 해준다고도 했다. 그러고보니 환자들이 언니를 기다리고 있는 듯도 했다. 순간 언니한테는 환자들이 식구였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같이 밥 먹고 밥 먹을 때 찾는 사람들이 식구지, 이따금씩 찾아오는 동생인 나는 손님이나 다를 바 없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언니가 아픈 이후로, 언니 옆에 있는 저 환자들처럼 언니를 기다리고 언니의 자리를 찾아주고 언니를 환대한 적이 있었던가. 내 식탁에 언니를 불러본 적이 있었던가.

 

미안해, 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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