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cm 예술
김점선 지음, 그림 / 마음산책 / 2002년 7월
평점 :
품절


새학교로 옮긴 지 한 달이 되어서야 겨우 학교도서관에 갔다. 숨통이 트이고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계약직으로 온 사서교사의 이름이 낯익어서 그저 동명이인쯤으로 여기고 있었는데 정말 내가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딱 10년 전, 당시 중학교 1학년이던 우리 반 학생이었다. 올해 대학을 졸업하고 첫직장이란다. 

10년 전, 이 여학생은 참 예쁜 아이였다. 장래희망이 아나운서여서 학교 방송부에 들어가 활동도 열심히하고 공부도 꽤나 잘 했다. 이 아이라면 화려한 날갯짓을 하지 않을까, 은근히 기대도 했었다. 10년의 시간이 흐르는 동안 이 아이는 자신의 꿈을 하나씩 하나씩 접으며 얼마만한 아픔을 겪어야했을까. 도서관 사서라는 직업을 경시해서 하는 말이 절대 아니다. 앞으로도 정식 사서 자리를 얻기 위해 지금보다 훨씬 큰 마음 고생을 해야하는 게 안타까워서 하는 말이다. 

이 책은 이렇게 이 아이의 손을 거쳐 내 손으로 넘어왔다. 손길이 느껴진다고 할까. 

김점선의 책으로는 두 권째이다. 그의 결혼 이야기 부분은 이미 다른 책에서 언급한 내용이라 알고 있는 것이지만 다시 읽어도 재미있다. 과감하게 툭툭 던지는 말투에서는 뭔지 모를 에너지 같은 게 흘러나온다. 생전에 직접 뵈었더라면 아주 좋아했거나 아주 싫어했을 성싶은 사람이었으리라. 아마도 싫어하기는 더 힘들지 않았을까에 가깝지만. 

어떻게 읽으면 한마디 한마디가 경구처럼 읽히기도 하는 묘한 매력이 있는 글이다. 툭툭 던지는 말투는 단단한 사고에 길들여진 무뎌진 두뇌를 탁탁 두드려대면서 생각을 깨우기도 한다.

p.125...사람들은 동물이 자신들의 먹이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사람들은 동물의 영혼을 무시해버린다. 사람들은 염소를 진지하게 대하지 않는다. 뚱뚱하게 살찌기만 바라고 아무 때나 끌고 가서 먹어버린다. 성경에서도 툭 하면 염소를 불에 태운다. 희생인지 번제인지 뭐라고 부르면서, 하느님께 바친다는 이유로 염소를 수없이 죽인다. 심지어 어미 염소가 보는 앞에서 새끼 염소를 끌고가 잡아서 둘러앉아 먹는다. 염소의 영혼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한 사람은 인류 역사상 아무도 없었다. 왜 염소의 영혼에 대해 아무도 이야기하지 않는가. 인간들의 비천한 무관심, 주변의 다른 생명체에 대한 이기적인 사고, 먹이로만 보는 시각, 생명체 자체에 대한 공정한 사고를 하지 않고 오로지 먹잇감으로만 보는 인간들의 시각. 나는 강둑에 앉아 염소를 보면서 오직 자신의 위장에 국한되어 있는 우리들의 생각에 대해 용서를 구했다. 

그래서 그는 염소를 그리고 코끼리를 그리고, 말, 새, 토끼, 닭, 학, 고양이, 여우, 용, 게사니를 그리며 그들과 대화를 나누었다. 두껍지 않은 이 한 권의 책에 실린 이런 그림들을 건성건성 보기가 참 아쉽고 미안한 일이다. 그림 한 장쯤 걸어두고 오래오래 음미하면 좋으련만... 

그의 백합 이야기를 더 읽어본다. 

p.160...감당하기 힘든 현실의 고통 속에서도 아버지는 백합 심는 일을 포기하지 않았다. 맨몸으로 피난을 나와 고생하던 시절에도 아버지는 어디에선가 백합을 구해 와서 마당에다 심었다. 우리는 아무도 모른는 사이에 백합 향기를 통해 감당할 수 없는 불안을 누그러뜨렸다. 평화를 숨쉬었다. 그 전쟁의 고통을 백합 향기가 없었다면 어떻게 견뎌냈을까...내 거칠고 불만에 찬 성격을 백합을 통해 미적 감각으로 승화시켜준 아버지. 어려웠던 그 시절 백합 향기를 맡게 해준 아버지의 선험적 인식과 실천적 행위와 놀라운 지혜에 경의를 표한다. 

이제는 내가 자식을 위해, 아이들을 위해 백합 심는 일을 해야 할 나이가 되었다. 새로운 고민이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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