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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의 사생활 ㅣ 창비시선 270
이병률 지음 / 창비 / 2006년 11월
평점 :
이병률의 유명한 여행 에세이 <끌림>을 아직 읽지 않았다. 따라서 이병률의 시도 이 시집이 처음이다. 그렇다. 잘 모른다는 얘기를 하고 싶은 거다. 그렇잖은가. 무엇인가의 첫인상을 말하기는 쉬워도 친숙해지고 잘 알게되면 한마디로 표현하기가 더 어렵다는 것을.
앞으로 계속 읽을 것 같은 이병률의 시와 에세이를, 더 확장된 세계를 접하기 전에 처음 내가 접한 <<바람의 사생활>>에서 마음에 와 닿았던 시들을 베껴보고 싶은 거다.
<여전히 남아 있는 야생의 습관>
서너 달에 한번쯤 잠시 거처를 옮겼다가 되돌아오는 습관을 버거워하면 안 된다
서너 달에 한번쯤, 한 세 시간쯤 시간을 내어 버스를 타고 시흥이나 의정부 같은 곳으로 짬뽕 한 그릇 먹으러 가는 시간을 미루면 안 된다
죽을 것 같은 세 시간쯤을 잘라낸 시간의 뭉치에다 자신의 끝을 찢어 묶어두려면 한 대접의 붉은 물을 흘려야 하는 운명을 모른 체하면 안 된다
자신이 먹는 것이 짬뽕이 아니라 몰입이라는 사실도, 짬뽕 한 그릇으로 배를 부르게 하려는 게 아니라 자신을 타이르는 중이라는 사실까지도
'자신을 타이르는 중'...나도 자신을 타이르기 위해서 수원으로 천안으로 서울로 싸다니곤 했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시간이 누구에게나 있는 법이려니...나이를 먹어도 죽지 않는 이 몸에 밴 '야생의 습관'...이 시인이 여행가라는 건 어쩔 수 없는 거다.
또 한 구절을 발견한다. <시장 거리>에서다.
그는 눈을 가늘게 살살 뜨고 여기 시장 거리에 사는 일년 동안은 슬픈 일도 기쁜 일도 정말 많았어요, 하고 누긋하게 말하지만 내겐 그런 곳이 없다는 것
괜히 그 말에 눈가에 핑그르르 핏물이 돌았으나 나를 휘감은 건 그 도저한 감정 둘이 한자리에 고이는 일이 없었다는 사실
나도 사년을 시장 거리에 몸 기대고 산 적 있으나 기쁘지 않았으며 단지 조금 휘청였을 뿐
순댓국 한 그릇씩을 비우는 동안 아무 말도 못하고, 각자 잊었는지 소주병은 따지도 않은 채 물리고 떡집 지나 닭집 지나 반찬가게를 지나 시장 거리를 빠져나오는 길
트럭에서 막 부려져 번거로이 아우성을 떠는 가물치때 미꾸라지떼
그래도 더 번거로운 일은 박하게도 흐벅지게도 살아야 하는 일, 쓸쓸한 일
일상은 슬프지도 기쁘지도 않은 그저 '쓸쓸한 일'이다. 시장 거리에 몸 기대고 살아도 단지 조금 휘청일 뿐이다. 이곳도 저곳도 나를 슬프게도 기쁘게도 하지 못한다. 이 시인이 세계를 떠도는 여행가라는 건 그래서 어쩔 수 없는 것일 게다.
그의 시를 계속 읽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