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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계행성으로 ㅣ 시와정신시인선 13
안창현 지음 / 시와정신사 / 2006년 8월
평점 :
품절
안창현의 시는 아날로그적이다. 글쎄 그러면 디지털 같은 시는 뭐냐고 묻는다면 딱히 대답할 말은 없지만 말이다.
쓸쓸함, 외로움, 자기성찰, 삶의 스산함 등이 깊이 밴 그의 시는 우선 어렵지 않아서 좋다. 자신을 쉽게 드러내지 않기위해 꽁꽁 싸매거나 어딘가 숨어버린다든가 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내놓고 드러내는 모습과는 거리가 멀다. 아파도 속으로 울고 조용히 눈을 껌벅이며 자신을 들여다 볼 뿐이다. 이런 시적 분위기는 내가 어렸을 때 배웠거나 혹은 생각했던 시 그대로이다.
소박하면서도 정갈한, 그러면서도 마음 한 끝이 시려오는 아련함이 시 곳곳에 배어있다. 내가 처음으로 시를 알게 되었을 때의 원형 같은 모습이 살아있다. 마치 통기타의 추억 같은 것을 떠올리게 한다. <먼지1>라는 시를 읽어본다.
한눈을 파는 사이/ 펴놓은 책 위에 내려앉는/ 시끄러우면 일어나는/ 조용하면 가라앉는/ 없는 끈기로 바닥에 앉아 붙는/ 벽에는 서서 붙는/ 사랑받지 못하는 물건에는/ 더 많이 쌓이는/ 그윽한 사랑
먼지를 관찰하는 사람이라니...'사랑받지 못하는 물건에는/ 더 많이 쌓이는' 먼지를 노래부르는 시인은 자신이 먼지 같은 존재일까 늘 자문하는 사람일지도 모른다. <달은 알약처럼>에서 시인은 스스로에게 묻는다.
...검푸른 밤 허공중에 달/ 물 속 알약처럼 풀어지고 있네/ 밤은 거대한 유리잔/ 그 속에 검푸른 물 그득한 데/ 달은 알약처럼 풀어지고 있네/ 우주가 몹시 아파서 알약을 드셨나 보다/ 이 밤 나만 아픈 줄 알았더니/ 우주도 아픈가 보다/ 나는 우주에서 무엇인가
허세를 부릴 줄 모르는 소박한 심성의 시인은 또 이렇게 노래한다. '..나는 내 높이를 갖고 있다/ 모든 것은 제 키를 갖고 있다'( <높이>에서)고. 늦가을 고구마 이삭을 캐면서 읊는 <이삭>이라는 제목을 붙인 시 한 구절이 마음 한구석에 쓸쓸한 바람을 일으키기도 한다.
삽질에 목이 잘린 것, 못 자라 길쭉한 것들이 쌓여가고/ 그러기를 서너 시간, 손에 물집이 잡히고 허리도 뻐근했다/ 나의 일에 그렇게 몰두했다면 지금/ 다가오는 겨울에 얼어 썩어버릴/ 고구마를 찾지는 않았을 것이라 생각하며.....나의 자리는 어디인가/ 속삭이는 바람 속 어디로 뻗어나가 뿌리를 내릴까/ 고구마들 몸 숨기는 노을 속에/ 나는 다시 삽을 꽂는다
가난이 감지되는 시들이다. 가난을 모르고서야 먼지의 그윽한 사랑이나, 알약처럼 풀어지는 달을 보고 자신의 아픔을 달래거나, 볼품없는 고구마 이삭을 캐며 지난 날을 후회하는 일 따위는 없었을지도 모른다. 사물을 가난하고 아픈 시선으로 바라볼 줄 아는 것. 이것이 내가 처음으로 시와 시인에 대해서 배웠던 것들이다. 그런 의미에서 안창현 시인은 아날로그적 시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