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다란 비닐봉투에서 세면도구를 꺼내 이를 닦고 세수를 한다. 아차 스포츠타월을 큰 배낭에서 꺼내오지 못했군. 할 수 없지. 그냥 건조시키는 수 밖에. 록커에 비닐봉투를 넣고 열쇠를 뽑은 후 남편을 기다린다. 남자 화장실에 간 남편은 큰일을 보는 지 우리보다 늦게 나타난다.
2층 까지 한바퀴 대강 둘러본 후 통로에 나란히 있는 긴 의자에 남편과 딸아이가 함께 앉고 나는 옆 의자에 혼자 앉는다. 좌석 넓이는 2인용인데 뒤 등받이는 1인용의 삼각형 모양의 의자네, 특이하네, 중얼거리다가 눈을 감으니 그대로 잠이온다. 한 시간 쯤 자고 일어났을까. 아까부터 자기들끼리 이야기를 나누며 이따금씩 우리를 보고 있던 사람들이 그제야 시야에 들어온다. 눈을 붙이고 일어나니 정신이 좀 맑아지는 것 같다. 이곳은 하노이 역사박물관.
반미라 불리는 베트남식 바게트를 세 개 산다. 각각 닭고기, 소시지, 햄버거용 고기가 들어있다. 부슬비가 내리는 호안끼엠 호숫가 벤치에 앉아 가위 바위 보를 한다. 내가 이겨서 햄버거용 고기가 들어간 반미를 집고 딸아이는 소시지가 들어간 것을 좋아라 먹고 꼴등인 남편은 닭고기가 들어간 것을 먹는다. 4분의 3쯤을 먹고는 남편이 내 것과 바꿔 먹자고 한다. 내것은 채 반도 못 먹었는데. 그렇게 몇 번 바꿔 먹으며 우리는 애들처럼 재미있어했다. 오늘 하루의 점심 식사였다.
호숫가에 있는 빨간색 다리가 인상적인 사원도 들어가 보고, 하노이의 필수 관광 코스인 수상 인형극도 관람한다. 굳이 예매하지 않아도 쉽게 볼 수 있었다. 9시 출발 라오까이행 야간 열차를 탈 때까지는 그래도 시간이 많이 남아 본격적인 구시가지 탐색에 나선다. 신발 가게에 들어가서 신발을 신어보고 가격을 너무 많이 깎는 탓에 멋적어서 그냥 나오기도하고 길을 찾다가 엉뚱한 길로 접어들어 다시 물어물어 원위치로 돌아오기도 한다. 특별히 갈 데가 없으니 그래도 계속 길을 찾는 척 어슬렁 거리며 배회한다. 구정 명절을 앞두고 하노이 시민들이 모두 시장으로 나왔는지 오토바이에 스쿠터에 시클로에 자전거에 길이 미어터질 지경이다. 거기에다 우리 같은 외국 여행자들은 왜 그리 많은 지. 여기가 국제적인 도시는 도시인가보다.
너무 피곤한 탓인지 저녁으로 먹는 국수가 맛이 까칠하다. 한인 여행사에 맡겨둔 배낭을 찾고 역까지 가는 시내버스 노선을 물어본다. 11번과 40번 시내버스. 알기만 하면 택시로 가는 것보다 훨씬 마음 편하게 갈 수 있어서 좋다. 여행사의 젊은 사장은 여러 사람의 입소문처럼 굉장히 친절하다. 같은 사항을 반복해서 설명해준다. 마치 확인학습 시키듯. 고맙긴한데 살짝 짜증이 날 듯하다. 어디가면 제일 남의 말 안듣는 족속들이 선생이라고 하지않는가.
여행사에 충전을 부탁해놓은 딸내미의 mp3를 되찾으며 남편이 한마디 쓴소리를 한다. 귀 버릴까봐 안사주려고 했는데,하며. 그런데 그 목소리에는 오늘 하루의 피로와 고달픔이 고스란히 배어있었나 보다. 딸아이의 표정이 갑자기 굳어지더니 조용해진다. 속으로 눈물을 찔끔찔끔 흘리고 있을거다 분명. 그리고 그 후로 여행이 끝날 때까지 한 번도 이어폰을 귀에 꽂지 않았다.
살얼음판 같은 이 험악한 분위기에 숨 죽이며 겨우 하노이역에 도착하니 탑승까지 한 시간이나 남았다. 속이 불편한 남편은 다시 화장실로 향하고 우리는 말없이 조용히 대기실에 앉아 있는다.
드디어 열차에 오르고, 침대에 누워 보고는 우리의 기대 이상인 열차 시설에 감탄하며, 거짓말처럼 우리의 입이 열리기 시작했다. 그것도 헤헤 웃으면서.
야간 침대 버스에 시달리다 오전 7시경에 하노이에 도착한 이후 14시간 만의 우리 공간이었다. 오늘 밤 우리가 쉴 우리의 집이었고 우리의 방이었다.
집에 대한 고마움을 절실히 느낀 우리는 이후로 호텔 체크아웃 시간을 늘리는 방법으로 우리의 공간을 지켜나갔다. 보통 오후5시까지 체크아웃 연장을 기준으로 호텔에 따라 부과 요금이 다른 데 하루 숙박료의 30%에서 50% 혹은 75%까지 다양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