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탄 라오까이-하노이 왕복 열차는 4인실 소프트 침대칸이었다. 컴파트먼트로 되어 있고 시건장치도 완벽하여 독립적이면서도 쾌적한 공간이었다. 공동 화장실만 고장이 나지 않았다면 정말 완벽한 열차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였다.
하노이행 열차에서 우리 칸에 함께 탄 사람은 가이드로 일하는 20대 후반의 베트남 청년이었다. 나중에 보니 서양인 부부가 그의 고객이었다. 붙임성이 좋은 이 청년은 우리 딸아이를 보자 마치 말문이 터진 양 이것저것 물어보기도 하고 손금도 봐주는 등 잠시 우리를 유쾌하게 해주었다. 5개 국어를 할 수 있다는 이 청년은 확실히 언어 감각이 뛰어나 보였다. 우리끼리하는 우리말을 금방 따라하는 것으로 보아 영어도 어렵지 않게 배웠을 성 싶었다. 따로 영어를 배웠나싶어 물어보았더니 고등학교 때 배운 영어란다. 자신의 뇌는 95%가 언어를 조종하는 기능을 갖고 있어서 한 번 들은 말이나 사람의 얼굴은 절대로 잊어 버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총명한 눈빛과 영어 구사 능력으로 보아 언어 감각은 타고난 것처럼 보였다. 누구는 평생 영어 공부해도 늘 버벅거리며 잊어버리고 등 돌리면 다시 공부해야 하는 처절한 운명을 타고 났는데 말이다.
남편이, 베트남 사람들은 대부분 똑똑하고 부지런해서 앞으로 베트남이 크게 발전할 것으로 생각된다, 고 했더니 이 청년은 베트남 정부에 대한 불신감을 숨김없이 드러내보였다. 지도자들이나 공무원들은 나라를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 배 채우기만 할 뿐이라며 비난의 화살을 쏟아냈다. 아, 이런 젊음이 부럽다.
이 청년 얘기를 꺼낸 것은, 사실은, 이제 중학교 입학을 앞둔 우리 딸아이가 이 청년의 얘기를 대강은 알아듣고 질문에도 주저없이 대답을 한다는 사실을 말하기 위해서다. 물론 질문이라야 별 것 없지만 주저하지 않고 대답한다는 점을 주목하고 싶은 것이다.
육아일기 한 번 쓴 적 없는 어미로서, 이런 여행기를 빌어서나마 아이의 성장한 모습을 조금은 기록으로 남겨야하지 않을까하는 소박한 마음으로 몇 줄 써넣는 것이니 이 글을 읽는 분들의 너그러운 이해를 구하고자한다.
이 번 여행 중 딸아이한테서 다음과 같은 말을 들었다.
"엄마가 가끔 싫어질 때가 있는데...여행을 함께 다니다 보면 그런 생각이 들 때가 있어."
" 언제? 비행기에서 승무원 언니가 잃어버린 볼펜 주워서 엄마가 가졌을 때? 물건 값 깎을 때? 그리고 지난 번 버스 앞좌석에 앉겠다고 우길 때?"
"응."
.......
"그리고 가이드가 하는 설명을 못알아들었을 때 엄마한테 물어보면 내가 알아들은 말만 설명해주더라."
"너도 나 만큼은 알아들었어? 그러면 엄마 실력 다 알았어?"
"응."
......
" 너, 엄마가 싫을 때가 많지? 엄마도 그랬어. 엄마도 외할머니 싫어한 적 많아. 괜찮아. 그러면서 크는거야."
.......
부모와 자식간의 피할 수 없는 변증법적 애증 관계를 막 시작한 딸아이가 한편으로는 대견하다. 엄마, 아버지 늙어가는 것보다 더 빨리 자라거라, 딸내미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