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날 아침은 하노이역에서 시작되었다. 전날 오후 8시 15분에 라오까이역을 출발한 열차는 다음날인 26일 새벽 5시도 안되어서 하노이역에 도착했다. 일단 택시를 타고 간 곳은 하노이 도착 첫날인 18일에 묵었던 Holiday Hotel 이라는 게스트하우스였다. 셔터를 두어 번 두드리니 안에서 인기척이 나면서 셔터가 올라갔다. 잠겨있지않은 출입문으로 들어서니 소파에서 자고 있던 종업원이 눈을 비비며 입을 연다. "Happy New Year!" 맙소사! 단잠을 깨운 이방인에게 건네는 새해 첫인사에 진한 감동을 받는다.
밤 늦게 자서 잠을 더 자야겠다며 안쪽 식당에 있는 컴퓨터와 노트북의 전원을 켜주며 다시 잠자리에 드는 종업원. 우리는 미안한 마음에 조용히 컴퓨터 앞에 앉았다. 네이버에 겨우 접속해서 <생활의 참견>이라는 인터넷만화를 숨죽이며 키득거리고 보았다. 이런 세계도 있었구나! 여행은 평소 해보지 못한 경험을 하게 한다.
체크인은 9시여서 어서 예약한 방 내놓으라고 할 수도 없는 상황이어서 종업원이 일어나 셔터를 올릴 때까지 기다렸다가 7시 넘어 밖으로 나갔다. 설날 아침 7시. 갈 곳도 없고 지리도 모른다. 거리 모퉁이를 돌아가니 목욕탕 의자 서너 개 놓고 차와 삶은 달걀을 팔고 있다. 뜨거운 녹차와 삶은 달걀 하나씩을 먹으니 행복감이 밀려온다. 몸에 따뜻한 기운이 들어가니 부슬부슬 내리는 비를 맞아도 견딜만하다.
지리를 익히기 위해서 하노이 구시가지의 중심 역할을 하는 호안끼엠 호수를 물어보며 이거리 저거리를 헤매다보니 저쪽 길건너 국수집에 사람들이 떼거지로 앉아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우리 역시 목욕탕 의자에 자리를 잡고 국수를 시키고 살펴보니 VTV 라는 베트남 방송국 사람들이다. 주인 아주머니의 국수 말아주는 모습을 찍는 것외에는 딱히 달리 하는 일도 없어보인다. 인터뷰를 요청하면 얼른 응해줄 수도 있는데.....
숙소 근처에 고딕 양식의 성당이 있는데 때마침 아침 미사가 있는지 사람들이 들어가기에 따라가본다. 미사가 조용히 진행되고 있어서 텅 빈 뒷좌석에 나란히 앉아본다. 한때는 독실한 카톨릭 신앙이 있었지, 내게도.
하루가 참 심심하게 흘러간다. 거리를 쏘다니는 일 밖에 할 일이 없는 날인데 베트남 최대 명절이라서 문을 연 상점도 드물어 눈요기 할 곳도 거의 없다. 외국인을 대상으로 하는 카페나 식당에는 각국에서 온 여행자들로 빈자리가 보이지 않을 정도이다.
할 일 없이 한가하게 설날을 맞다보니 잠시 한국이 그리워지기도하였으나 이제는 다시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을 것같다. 그러고 싶지도 않다. 멀리 떠나와보니 과거의 관습이나 편견들이 떠오르면서 다시는 그런 상황에 빠져들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한시도 주방에서 떠나지 못하고 이눈치 저눈치 살피면서 무슨 죄인처럼 명절을 보내야하는 한국의 어머니와 며느리들. 누군가의 말처럼 반노예 처지나 다름없이 나를 버려야하는 날이 명절 아니던가. 남자들이라고 편하겠는가. 오랜만에 만나는 형제들과는 돈독한 형제애만 오고가던가. 이런 전통이나 문화는 바뀌어야만 한다.
이런 저런 생각으로 낯선 이방의 거리를 쏘다니다보니 하루가 저물어간다. 어떤 집에서는 좁은 공간안에서 열 댓명의 식구들이 모여앉아 담소를 나누거나 식사를 하고 있다. 저들도 주방 한쪽에서는 숨죽이며 눈치보며 말없이 시중들고 있는 세상의 딸들이 있겠지. 그들도 변화를 꿈꾸고 있을까.
그래서였을까. 오후 8시. 호안끼엠 호수 옆 광장에 꾸며진 무대에서는 무료 서커스 공연이 펼쳐졌는데, 아슬아슬하고 자학적이기까지한 곡예를 지켜보면서 자꾸 마음이 무거워지고 슬퍼졌다. 서커스가 슬픔을 자아내는데 눈을 돌리고 안볼 수가 없었다. 그때 바로 앞에서 줄담배를 피워대는 남자가 나를 구원해주었다. 그 남자 욕을 하며 그 자리를 벗어날 수 있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