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6월부터 한 3개월 해금을 배웠다. 어렸을 때는, 내 세대가 어디 그 흔해빠진 피아노 한 번 배워볼 세대였던가. 내 친구 중에 어려서 피아노 배운 친구는 하나도 없는 것으로 보아 내가 피아노를 배우지 못한 것은 우리 세대의 평균치라는 것, 그래서 창피하지도 부끄럽지도 않다는 것. 그런데도 그게 은근히 나를 열등감에 젖게 한다는 것이다. 아마도 이런 게 작용했을 터이다. 내가 해금을 배우게 된 게. 또 하나의 이유는, 이건 분명한 이유인데, 여행 다닐 때 해금을 옆구리에 끼고 다니고 싶다는 열망 때문이다. 인도의 우다이푸르의 어느 게스트하우스. 밤이면 여행자들이 끼리끼리 모여 옥상에서 작은 연주회를 갖는데 나는 그 "끼리끼리"에 낄 수 없다는 단절감 내지는 절망감에 왜 그렇게 쓸쓸하고 허망한지 나는 그 순간 악기를 꼭 배우리라 마음 먹게 되었는데 그 이후 내가 생각해낸 악기가 해금이었다. 우선 부피가 작으니 배낭 옆에 끼고 다니기에도 좋고 우리 악기니까 다른 나라 여행자의 시선도 끌 수 있을테고 줄도 두 줄이니 내가 열심히만 연습하면 섭렵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여러모로 좋은 점만 열심히 끌어댔다. 그래서 결국은 배워봤는데....결과는 ...이미 예상하고 시작은 했지만...참혹하다. 음악성 제로, 악착같은 끈질김 제로.
그러다 김훈의 <바다의 기별>을 읽다가 해금 이야기가 나오길래 다시 해금을 켜 볼 생각을 하는 중이다.
p.60. 해금은 놀라운 악기다. 해금의 음색은 그 악기를 연주하는 인간의 몸의 질감을 느끼게 한다. 모든 국악기는 양악기에 비해 훨씬 더 진하게 연주자의 몸을 느끼게 하지만, 그중에서도 해금이 풍기는 육체의 질감은 가장 깊고 진하다. 해금의 음색이 매우 비논리적으로 들리는 까닭은 이 육체의 질감 때문일 것이다.
p.111. 내 몽상 속에서, 오치균의 화폭에서는 해금의 음색과 선율이 들려온다....모든 현악기 중에서 해금은 인간의 육체에 가장 가깝고, 육체의 떨림이 동시에 발생하고 있는 느낌을 준다...해금 연주자는 손아귀로 줄을 쥘 때 소리의 진동을 몸 안으로 받아들이고, 다시 몸의 리듬으로 소리를 통제한다. 그래서 해금에서는 몸의 소리, 몸의 리듬에 가까운 소리가 나온다...해금의 소리는 논리적이지 않고 아정하지 않지만, 바닥을 긁어내는 소리로 아름다움에 대한 고정관념을 부순다. 손가락으로 주물러서 칠하는 오치균의 색은 시간과 뒤섞이고 시간 위에 올라타서 화폭 위를 흘러가는 것이다.몸이 그 색들을 이끌고 간다.....
이 부분을 읽어나가다가 나는 엉뚱하게도 음식을 손으로 먹던 인도에서의 경험이 떠올랐다. 밥을 손으로 떠 넘길 때에도 분명 어떤 떨림이 있었으니...
p.133. 더 나이를 먹고 내가 나의 언어를 확실히 장악할 수 있는 어느 날 나는 이 <난중일기>와 이순신이 처한 절망에 대해서 무언가를 말할 수 있게 되겠구나, 말할 수밖에 없겠구나 하는 것들을 느꼈죠.
나도, "내가 나의 언어를 확실히 장악할 수 있는 어느 날"을 간절히 꿈꾸었다는 것을 떠올리게 하는 이 구절을 읽고 나는 몸을 또 한 번 부르르 떨었다. 해금의 떨림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