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비겁하다. 몇년 전만해도  현장학습(그 좋은 소풍이란 말을 두고 애써 이런 말을 쓰는 게 탐탁치않지만)은 학년별로 단체로 움직였다. 유명한 놀이공원이나 그 지역에 있는 명소를 정해 버스를 대절해서 가거나 가까운 곳은 개별적으로 가서 단체 입장을 하곤했다. 그때는 그게 불만이었다."애들이 짐짝이야? 어떻게 똑같이 움직이냐고?" 그러던것이 어느 해 부턴가 반별로 계획을 세워 담임 지도하에 현장학습을 실시하게 되었다. 처음엔 무지 반가웠다. 마치 엄격한 부모 슬하에서 드디어 독립을 쟁취한 것처럼 어깨에 힘이 갔다. 그런데 이렇게 개별 소풍을 몇 년 하다보니 다시 과거가 그리워지는거다. 밥 하기 싫을 때 누가 대신 밥상 차려주면 고맙고 반가운 것처럼 누가 대신 계획 세워주고 아이들 통솔해 준다면 무지 고마울 것 같다.

나는 비겁하다. 올 가을에도 어김없이 반별로 소풍을 가야한다. 그런데 나는 아이들 의견을 전혀 물어보지 않았고 소풍 계획에 반영도 안했다. 처음부터 그럴 생각도 없었다. 인천대공원으로 결정했다. 그것도 학교에서부터 걸어간다고 했더니 이건 지들 가르치는 담임선생한테 던질 수 있는 눈빛이 아니었다. 나를 잡아먹을 것 같은 식인종의 눈빛을 닮았다고나할까. 그래도 나는 그 눈빛 정도는 묵살할 만큼은 배짱이있다.

나는 비겁하다. 우리 반 아이들의 불만 소리가 왜 없겠는가. 다른 반 아이들이 우리 반 녀석들이 하는 말을 내게 전해준다. "그 ***(내 이름)말야. 쬐끄만 게 걷는 것만 좋아해. 으으으..."미치겠단다, 녀석들이. 흠. 니들이 선생을 이겨? 그러나 솔직히 말하면 나는 아이들을 설득시킬 자신이 없다. 온갖 미사여구를 아무리 늘어 놓아도 밋밋한 대공원이 놀이공원이나 영화관 만큼의 매력은 없지 않은가. 그래서 지레 겁먹고 아이들한테 설득 한마디 못했다.

그러나 나는 비겁하지 않다. 학교에서 대공원까지는 오로지 걷는 일에만 집중해서 걸어도 1시간 30분 거리다. 아이들 통솔해서 40명이 넘는 인원이 움직이면 최소 2시간 거리다. 중간에는 매점 하나 없다. 나무 그늘이라고 할 만한 것도 거의 없다. 횡단보도를 한 번만 건너면 작은 동네가 나오고 얼마 후 낚시터가 나오는 산 밑으로 해서 논밭을 지나고 얼마간의 비포장 도로와 아스팔트 길을 지나서 썩은 냄새가 나는 개천을 따라가면 나오는 대공원. 사실 볼 만한 것은 별로 없다. 그러나 이 황량하게만 보이는 포구의 갯벌에도 철새가 꽤 날아온다는 것, 자연의 법칙에 따라 썰물과 밀물의 흐름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다는 것, 개천가의 작은 땅뙈기를 일구는 부지런한 사람들이 있다는 것, 억새와 갈대가 지천에 깔린 길을 걸으며 그 둘을 구별해 볼 수 있다는 것, 너희들이 그냥 잡초라고 관심을 두지 않는 길가의 풀들도 다 제각기 이름을 갖고 있다는 것, 혹 길을 걷다가 오줌이라도 마려우면 친구들간에 작은 에피소드가 꽃 피울수 도 있다는 것을 나는 너희들에게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건 내 몫이 아니다. 너희들이 걸으면서 느껴야 할 것들이기에 나는 너희들에게 그런 기회를 주고 싶은 거다.

나는 비겁하지 않다. 나도 놀이공원의 놀이기구를 너무 너무 좋아한단다. 거의 안 타본 것이 없을 걸. 영화. 영화라면 나도 사족을 못쓰지. 내가 해외여행가서도 즐기는 게 영화 감상인데말야. 이것만은 자신있게 말하는데, 나는 여행 고수란다. 너희들보다는 훨씬 여행 고수지. 그래서 하는 말인데 소풍은 걸어가야 되는 거야. 너희들한테 말로 먹혀들지 않으니 그냥 밀고 나갈 뿐이라는 걸, 너희들은 언젠가 내 맘을 알아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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