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나의 바라나시, 너의 바라나시

   몇 번의 여행에도 도대체 면역체가 생기지 않는 곳이 있으니 그곳은 바라나시의 릭샤왈라들이다. 바라나시 정션역에서 부터 따라붙은 두 명의 릭샤왈라들에게 끌려 다니다시피 몇 개의 호텔과 게스트 하우스를 자의 반 타의 반 둘러보는 일은 악마의 유혹에 끌려 다니는 것이 이럴까 싶게 끔찍하고 치가 떨리는 일이다. 자신의 인내심을 시험해보고 싶거든, 사는 게 너무 따분하고 시시하게 여겨지거든 한 번 바라나시의 릭샤왈라들과 대결해 보시기를 권한다. 그악하기 그지없는 세계를, 그렇게 살지 않으면 살아남지 못하니까 그들도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이고 아귀다툼으로 살아들 가겠지만, 그래서 이해 못 할 일은 아니지만, 이성적인 납득이야 가지만, 한 번 부딪혀보시라.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3,000여 년을 이어온 고대 도시의 모습을 이번 여행에서야 어느 정도 제대로 볼 수 있었다. 지난 두 번의 방문은 여행사의 단체배낭프로그램에 합류해서 왔었기 때문에 우선 숙소부터 외곽에 위치하고 있어 접근성이 떨어졌었다. 이곳에서 종종 발생하는 불미스런 일 때문에 지금도 긴장을 풀 수 없는 곳이긴 하지만 예전과는 분명 다른 점을 내 경험해보리, 다짐을 하며 갠지스강변에 있는 숙소를 찾아보기로 했다. 끈질긴 릭샤왈라들에게 몇 군데 끌려 다닌 후 윽박질러서 겨우 내 뜻으로 찾아간 곳은 일본인이 운영하는 ‘구미코하우스’라는 게스트 하우스였다. 이유는 단순했다. 이곳에는 인도 악기를 배우는 여행자들이 거의 상주하고 있다는 것을 책에서 읽었기 때문이다. 다룰 줄 아는 악기 하나 없는 내가 새삼 무슨 악기를 배우겠는가? 주로 도미토리로 운영되는 이곳에서 하루 이틀 묵으며 음악에 몰입한 사람들을 옆에서 지켜보면서 그저 인도 음악에 젖어보고 싶었을 뿐이었다. 개별 배낭 여행자들(특히 일본인)에게 인기 있는 이곳은 늘 사람들로 북적거려 우리가 찾아갔을 때는 달랑 침대 두 개와 바닥에 깔고 자는 매트리스 몇 개가 남았을 뿐이었다. 침구 상태도 엉망이었다. 비좁은 것은 시커멓게 때에 쩐 것에 비하면 흠도 아니었다. 아그라행 야간 침대 버스의 매트리스가 더 좋았다고나할까. 아, 그래도 좋다. 젊은 애들이 넘보기 전에 얼른 ok를 하고는 남편과 딸아이의 허락을 구하기 위해 방을 보여주었더니, 아, 이 원망의 눈초리! 말도 안 된다는 표정이다. 로비로 쓰이는 방 한가운데서는 old lady 어쩌구 하는 그네들의 소리도 들려온다. 나를 두고 한 얘긴가? 포기다.

   강변에 위치한 호텔 중 제일 깨끗해 보이는 호텔(‘시타 게스트 하우스’)로 들어가 제일 전망 좋은 방을 얻는다. 양 면에 창문이 달려있어 창을 열면 그대로 갠지스강이고 쪽문을 열고 나가면 그대로 발코니여서 가트(강변을 따라 형성된 계단)가 발 아래로 내려다보인다. 갠지스 일출을 방안에서 볼 수 있다니 이 웬 호사이랴, 후훗. 호텔에 딸린 식당에서의 웃지못할 에피소드도 지나고 보면 귀여운 일이고...첫날 밤 9시 무렵, 술이나 한 잔 할까하고 어렵게 구한 술을 들고 가서 안주삼아 계란 프라이를 시켰더니 늦은 밤인데도 귀찮아하지 않고 one side or two side..하며 열심히 주문을 받기에 좀 미안한 감이 들기도 하여 마음 좋은 남편은 그 중 나이 먹은 직원에게 인심 좋게 술도 권했다. 얼마 후 내 온 계란 프라이. 삶은 달걀을 종으로 반을 잘라 살짝 기름을 두른 희한한 모양새인데 언제 삶아놓은 달걀인지조차 의심스럽고, 헛헛헛, 헛웃음이 나오는 데 이 녀석들 낄낄거리면서 이게 인디안 스타일이라는 거다. 다음 날 주인장한테 있었던 일을 그대로 얘기했더니 미안해하면서 그래도 자기네 식당을 이용해 달라기에, 난 당신네 직원들 싫어서 이용하지 않을 거다, 라고 했더니 남편은 뭐 그런 얘기까지 하느냐고 한다. 마지막 날 체크 아웃할 때, 술을 한 잔 얻어 마셨던 그 직원이 사과를 해온다. 농담이었노라고. ‘너희는 손님한테 농담을 그런 식으로 하냐?’고 싶었지만 “한국에 가면 우리 호텔 홍보 좀 많이 해 주세요” 하며 미안해하고 아쉬운 표정을 짓는 게 아닌가. 정말 진지하게.




   핵심을 파고 들어가야 한다. 내가 생각한 바라나시의 핵심은 화장터도 아니고 힌두교인들이 성스럽게 여기는 강물도 아니다. 바로 수백 년 간 이어져온 골목길이다. 예전에 왔었을 때는 한낮에도 혼을 빼놓을 정도로 비좁고 더럽고 으스스하던 미로 같던 골목들, 한 번 미궁에 빠지면 절대로 빠져 나올 수 없을 것 같던 그 골목들이 하나하나 눈에 들어오고 사람도 눈에 들어온다. 난데없는 자신감이 생긴다.

이 자신감을 바탕삼아 마지막 날 밤에는 전통 공연장을 찾아갔다. ‘International Music Centre Ashram'. 세계적인 여행 안내서인 <Lonely Planet>에는 소개가 되어 있지만 우리나라 여행자들 대부분이 들고 다니는 <인도100배>에는 소개가 되지 않아서인지 수십 명의 관객 중에 한국인이라고는 우리뿐이다. 골목에 있는 작은 악기점에서도 악기를 배우고 있는 한국인들이 종종 눈에 띄건만 이 동네에서는 너무 흔한 공연이어선 지도 모르겠다.

   100줄이 넘는 현으로 이루어진 산뚜르(Santoor), 몸체가 나무로 된 오른쪽 북 다얀(dayan)과 금속으로 된 왼쪽 드럼 바얀(bayan)으로 구성된 타블라. 생소한 산뚜르가 내는 지루하고 졸린 듯한 연주도 타블라 주자의 빠른 손놀림과 왼쪽 드럼에다 손바닥을 북북 문지르는 야릇한 음색이 더해지면 묘한 음악적인 분위기에 빠져든다. 1부가 끝나고 시작된 2부는 카탁(Kathak) 댄스로 주로 북인도의 궁정에서 공연되었다는 전통 춤이다. 춤을 추는 무희는 10대 중반의 소녀로 딸아이 보다 서너 살 많아 보인다. 어쩌다 한국에서 보았던 연륜 있는 춤꾼에 비해 춤사위가 날렵하고 경쾌하고 분명하다. 타블라 주자와 주거니 받거니 하는 공연이 잠시 펼쳐진다. 예를 들어 타블라 주자가 10박자의 리듬을 연주하면 무희는 그 10박자에 대응하는 춤사위를 발로 두드리는 식이다. 타블라와 겨루는 발 춤사위가 기가 막히게 흥겹고 얼마나 멋진지 딸아이는 넋 놓고 지켜보다가는 몇 번이나 혀를 내두른다. 놀랍다는 표정이다. 2시간 남짓 공연을 보고 나니 밤 10시, 미로 같은 골목을 빠져 나오며 딸아이가 던지는 한마디가 나를 고무시킨다. “나도 타블라 한 번 배우고 싶어.” 7살에 시작한 피아노를 단 2개월 만에 “피아노 계속하면 나, 병원에 가야할 것 같아.”하면서 손을 놓고 말았었다. 왼손잡이인 딸아이에게는 참기 힘들었던 모양이었다. 음악의 아름다움에 젖어 보기도 전에 기능부터 익히도록 하여 음악을 멀리하게 만든 결과가 되어 버렸었다. 안타깝고 부끄러운 일이다.




   바라나시 시장에서 인도 옷 한 벌을 사는 데 한마디의 영어도 필요하지 않았다면 믿어지려나. 호객 행위부터 흥정까지 우리말을 아주 자연스럽게 잘 구사하는 인도인 옷가게에서 옷 한 벌을 사들고 나오면 이상한 성취감에 빠져든다. 미처 정신을 수습하기도 전에 들려오는 우리말 외침이 여기저기서 들려온다. “어디가요?” “릭샤 필요해요?” 걸음을 떼놓기가 무섭게 들이대는 “어디가요?”에 질렸는지 한 번은 딸아이가 묻는다. “우리가 어디 가는지 알아서 뭐해요?”를 영어로 어떻게 하냐고. 영어 문장을 알려 주었더니 열심히 외운다. 한 번도 써먹지 못해 다행이긴 했지만. 해외 여행가서도 영어 대신 우리말을 사용한다면 영어 배워 뭣하지? 이곳 북인도만 해도 지천에 널려 있는 게 한국 식당인데-드물긴 하지만 어느 거리 식당에서는 한국어 메뉴판도 있다- 머잖아 이곳처럼 한국어가 많이 쓰인다면? 죽도록 영어 배워 몇 마디 써 보는 것보다 국력을 길러 외국인들로 하여금 우리말을 배우게 하면 좋지 않겠느냐는 해묵은 해법이 머잖아 가능해지지 않을까? 앵무새식 영어 배우기에 심신이 거덜 난 나는 여기 바라나시에서 잠시 행복한 영어를 꿈꿔본다.




   이 글을 쓰고 있자니 이따금 딸아이와 남편이 한마디씩 거들며 자신들의 목소리를 들려주고 싶어 한다. 남편은 인도의 현실에 자못 비판적이다. 첫날 델리에서 부터 그랬다. 인간 대접도 못 받는 사람들, 돈 앞에서는 비열할 대로 비열한 모습을 그대로 드러내는 사람들, 아귀같이 서로 등쳐먹는 사람들,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불쌍한 거지들을 보고는 경악했고 인도라는 나라에 오게 된 걸 무척이나 괴로워했다. 그에게는 ‘인권’이라든가 ‘인간에 대한 예의’ 라는 표현은 너무나 점잖은 표현이었다. 때로 동정이 지나쳐 화를 낼 정도였다. 어떻게 이런 나라가 있을 수 있냐고, 이런 나라가 그렇게도 좋으냐고도 물어온다. 여기 바라나시에서도 그랬다. 골목 탐험을 완성한 나는 바라나시를 정복한 양 들떠 있는데 남편은 강변에서 본 쓰레기 처리 장면을 끝내 이 이야기에 덧붙여 달란다. 양수기로 강물을 퍼 올려 한군데에 쌓아놓은 온갖 쓰레기를 강물로 밀어 넣던 장면을 꼭 넣어 달라고 한다. 그에게는 거의 다 타서 머리와 다리만 삐죽 남아있는 화장터의 시신이나 강물에서 신성한 목욕을 하는 사람들보다, 이 쓰레기 처리 장면이나 강변을 향해 맨 엉덩이를 내밀며 큰일을 보고 있는 남자의 뒷모습에서 인도의 현실을 읽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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