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꿈꾸는 나라

   아그라. 타지마할. 인도인 입장권 10Rs. 외국인 입장권 750Rs. (1Rs는 약 25원). 샤자한. 뭄타즈 마할. 건축 기간 22년. 아들 아우랑제브에 의한 유폐와 아그라성에서 보낸 권력자의 쓸쓸한 말년. 타지마할 주변의 ‘타즈 간즈’라는 여행자 거리를 접수한 부지기수의 인도판 한국 식당들. 투숙객 대부분이 한국인 천지인 어느 게스트 하우스에서 새벽 서 너 시에 듣게 되는 정겨운 콩글리쉬 발음.

   이것이 그 유명한, 인도를 상징하고 있는 타지마할에 대한 설명을 대신할 수 있는 단어들이라고 우긴다면 절세의 미인 타지마할은 무척이나 섭섭하겠지?  더욱 섭섭한 얘기지만, 나는 타지마할을 보러 가지 않았다. 그것도 타지마할을 제외하면 별달리 볼 것 없는 아그라에서.

   14년 전(1994년)의 첫 인도행은 가슴 떨리는 미지의 이상형과의 불꽃 튀는 만남이었다. 인도는 내가 한국인임을 모른다. 한국이 어느 곳에 있는 지 관심조차 없어 보인다. 그래도 나는 인도의 모든 것을 숨 막히게 빨아들였다. 맨발의 사원 입장, 흐드러진 부겐빌리아, 깊은 우물 같은 인도인의 커다란 눈. 현란한 색채의 시크교 터번, 셀 수 없는 무수한 힌두교 신들, 석가모니의 발자취, 끝도 없는 지평선, 길지 않은 형광등 두 개로 이루어진 시골길의 쓸쓸하고도 외로운 가로등...허름한 식당의 조악한 냅킨 한 장, 반 쯤 찢어낸 각종 입장권이나 휘갈겨 쓴 영수증 한 장. 모두가 소중한 기념품이 되어 앨범 속에 곱게 들어가는 영광을 누렸었다.

   7년 전(2001년)의 두 번 째 인도행은 첫사랑의 달콤함을 끝내 못 잊어 찾아 나선 여행이었다. 이제는 내가 한국인임을 알아준다. 잘 사는 나라에서 왔으니 팁이라도 두둑이 달라고 조르기도 한다. 샤자한과 뭄타즈 마할의 시신이 안치된 진짜 석관과 가짜 석관을 두루 보여 주었던 첫사랑은 간 데 없고 비싼 입장권을 통해서 내가 한낱 이방인임을 절실히 깨닫게 해주었다.

   3년 전(2005년)의 남인도.  너의 모든 것을 알고 싶어. 그래도 첫사랑이잖아. 네가 보여주지 않은 모습을 찾아내서 내 첫사랑을 다시 확인할거야. 역시 네 품은 다양해. 미안해. 역시 너는 품이 넓어. 다시 시작하자. 그런데 내가 한국인이건 미국인이건 그리 관심 없어하면서 우리나라와 인도의 환율을 궁금해 하던 너. 환율 덕분에 인도에 올 수 있는 우리들을 부러워하던 너.

   2008년. 네 번 째 인도. 내 사랑하는 가족이야. 내가 너를 지켜보았듯 이제는 나의 가족을 지켜봐 줘. 오고 가는 정이라는 게 있는 거잖아. 너를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너를 얼마나 사랑하느냐고 아, 묻지 않았으면 좋겠어. 몇 번씩이나 와서도 별 도움을 주지 못해 미안해. 고향을 그리워하는 한국인을 만나면 나눠주리라 하던 소주는 이미 무용지물이 되었고 길을 잃고 헤맬 때는 지나가는 한국인에게 길을 물어보면 되는 지금의 네 모습을 보며 옛날을 그리워하면 그건 내 욕심이겠지. 

   우다이푸르가 나를 역사적인 진지함과 숙연함으로 힘들게 하더니 아그라는 나를 철학적으로 고문한다. 노른자 빠진 달걀 프라이 같은 아그라. 남편과 딸아이에게 타지마할을 꼭 보여줘야 한다는 일념으로 16시간 동안 추위와 사투를 벌이면서 밤새 버스로 달려온 내게 이 고갱이 빠진 사색은 너무 한 것 아닌가? 아, 이 침대버스란 놈! 낡은 대로 낡고 먼지 풀풀 나고 모래 버석거리는 매트리스가 압권인 이 녀석! 1층은 좌석이고 다락같은 2층이 침대칸인데 처음 딸아이와 나는 2인실에, 남편은 통로를 사이에 둔 맞은 편 1인실에 각각 배정 받았는데 너무 추워서 우리의 2인실에 남편이 합류하여 셋이 꼭 껴안고 밤을 보내게 되었는데 창가에 자리 잡은 남편은 하마터면 동사할 뻔했다. 속옷에 부치는 1회용 1,000원짜리 온찜질팩 덕분에 겨우 눈을 부칠 수 있었다는 남편. 남편은 그날 밤 유물론적인 꿈에 시달렸을까 실존론적인 꿈에 시달렸을까? 여행 내내 어지러운 꿈자리를 호소하던 남편은 인도를 ‘꿈꾸는 나라’라고 불렀다.

   그래도 남편과 딸아이는 이 아그라가 좋단다. 타지마할 때문에? No! 바로 ‘Planet Hollywood'라는 거창한 이름의 아주 작은 식당이 있어서다. 가이드북에는 눈 비비고 찾아도 나와 있지 않은 곳으로 우리가 묵은 ’Hotel Raj'라는 게스트 하우스 바로 앞에 있었다. (아마도) 시크교도인 인상 좋고 과묵한 50대 후반의 주인아저씨의 말없는 환대와 가정식 백반 같은 깔끔한 음식이 과하지도 모자라지도 않고 편안하여 아그라에 머무는 동안 단골 식당으로 드나들다 보니 정이 들었나보다. 이곳에서 먹은 버섯 스프로 입맛을 찾은 딸아이는 이제 완전히 몸이 회복되었다. 대부분의 여행자들이 하루 정도 묵을 뿐인 아그라에서 우리는 이틀을 묵으면서도 떠나기가 아쉬웠다. 하루 이틀 더 묵으면 식당 안쪽으로 보이는 주인아저씨의 살림집도 구경하고 대화도 좀 나눠보련만, 나그네는 길에서도 쉬지 않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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