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으로 몇시간이 지나면 30일 일정으로 중앙아시아 여행을 떠난다. 자유여행이면 좋겠지만 여러 여건상 세미패키지 형태로 가게 되었다. 그러니 여행 준비랄 것도 없이 돈과 여권 챙기고 옷 몇벌, 비상식량 몇가지 정도 챙기면 되는데 문제는 내 몸이다. 정확하게는 내 위장이다. 열흘 정도 비실비실 아픈 듯 안 아픈 듯 감기인 듯 아닌 듯 병원에 가야할 듯 가지 말아야 할 듯,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다가 오늘 동네의원에 가서 약을 처방받고서야 위염(식도염)임을 확인했다. 먼저 살던 인천의 30년 지기 단골의사샘께서는 알아서 신경안정제를 넣어주셨는데...빨리 새동네 의사와도 친해져야겠다.


이번에는 왜 위장에 탈이 났을까. 6도 6촌의 생활, 즉 6개월은 도시에서 6개월은 산골에서 지낸 지 수년째 접어들어 어느정도 틀이 잡혀가고 있는데, 슬슬 산골집으로 손님이 찾아들기 시작했다. 몇년 전에는 내 친구들 여러 명을 한꺼번에 초대하는 바람에 홍역을 치르고나서 학을 떼어 다시는 그런 짓(?)을 삼가고 있는데 이번에는 남편 친구들이 열을 맞춰 찾아들기 시작했다. 올해들어 세 차례, 여행 후 한 차례 더 남았다. 평소 먹기를 산중의 스님처럼 간소하게 먹는 탓에 손님을 대접할 만한 솜씨를 계발하지 못했다. 솔직하게 말하면 평소 책상에 앉아 책 읽기에 전념하느라 밥할 시간이 없어 밥을 대충 먹게 된다. 그러잖은가. 책 읽기가 재미있지 밥하기가 재미있겠는가. 오랜 학생생활과 교사생활로 주로 남이 해주는 밥을 먹다보니 밥하는 기능이 쇠퇴하기도 했다. 버지니아 울프가 글을 쓰는 삶을 영위할 수 있었던 것은 옆에서 밥과 청소, 빨래 등을 해주는 사람들을 고용했기에 가능했다. (감히 버지니아 울프를....) 책 읽기도 그렇다는 얘기다. 책에 빠져들다보면 어느새 밥때가 다가오는데 그렇게 징그러울 수가 없다. 깊은 산골 오두막의 200리터가 갓넘는 냉장고는 작은 김치통과 반찬 그릇 몇개, 과일 서너개 넣으면 속이 다 차버린다. 틈새에 끼워넣은 두부 한 모, 콩나물 한 봉지는 비상식량으로 아껴둔다. 문앞 쿠팡이츠 같은 게 있다면 텃밭에 심은 상추 모종(잦은 비 때문에 거의 성장을 멈추었다.), 작년에 심은 대파, 쑥쑥 자라는 게 보이는 가지, 이파리 뒷면에 곰팡이 활동이 왕성한 들깻잎 정도. 읍내 마트에 가려면 자동차로 왕복 두어 시간. 거의 여름 내내 내리는 비에 개울의 폰툰다리마저 끊기기 일쑤. 그래도 이런 산골 생활이 좋은 것은 오로지 책 읽기에 몰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책에 몰입하면 행동이 미련해진다. 독서 모드에서 밥하기 모드로 쉽게 바뀌지 않는다. 이게 여자라고 해서 자연스럽게 바뀌는 게 아닌데 세상의 남자들은 여자들이 밥하는 것을 디폴트값으로 여긴다. 밥하는 것은 오랜 시간 수련을 쌓는 행위이다. 책에 몰입하는 것만큼 아니 그 이상으로 요리에 몰입해야 결과물을 얻을 수 있는 정직한 행위이다. 밥 한끼가 저절로 주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남자들은 제대로 경험해봤을까. 


어려서부터 '남자같다'는 말을 어른들로부터 종종 들어온 사람으로서 밥하기는 참으로 고역 중의 고역이다. 남자처럼, 나의 남편처럼 공부하고 돈 벌고 똑같이 해왔는데 왜 밥하기는 내 차지가 되는지, 손님 상차림은 왜 내 차지가 되어야 하는지...이런 생각에 빠져들다보니 위장에 탈이 났다. 하루에 열시간 꼬박 앉아 책을 읽는 건 어렵지 않으나 두세 시간 밥하는 건 그렇게나 어려운 내 자신도 사실은 마음에 들지 않는다. 사람의 오랜 습성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 이제 점점 나이가 들어 책 읽을 시간도 줄어드는데 밥은 여전히 숙적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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