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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네시아 Etc. - 남들 가는 대로 안 가서 더 많은 것을 보고 느낀 인도네시아 여행기
엘리자베스 피사니 지음, 박소현 옮김 / 눌민 / 2025년 11월
평점 :
3년 전 자카르타 여행을 앞두고 여행서적을 찾아봤는데 유독 발리 관련 서적만 많았다. 인도네시아 전체를 아우르는 여행 안내책자로는 론리 플래닛에서 나온 영문책자를 구입했었다. 인도네시아에 관한 국내 저작으로는 인도네시아어를 공부하는 어학책이 많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기이하다고 생각했었다. 12박 14일동안 자카르타, 족자카르타, 솔로를 대충 돌다가 왔는데 그것으로는 인도네시아에 대해 입을 벌릴 수준이 못 된다는 것만 뼈저리게 깨닫고 왔다. 그보다 훨씬 전에 다녀왔던 발리를 보태봐도 마찬가지였다.
작년 <향신료 전쟁>으로 시작되는 일련의 대항해시대 책을 섭렵하다가 그 정점에 있던 곳이 인도네시아여서 한동안 인도네시아에 대한 관심을 거둘 수가 없었는데 드디어 대물을 만났다. 바로 이 책.
2024년 2월, 주간지 <이코노미스트>는 인도네시아의 오늘날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책 여섯 권을 선정, 그중에서 단 한 권만 읽어야 한다면 이 책 엘리자베스 파사니의 <인도네시아 Etc.>를 읽으라고 권했다고 한다.
사진 한 장 없이 빽빽한 글자만 있는 여행기를 읽는 괴로움과 즐거움이라고 할까. 넓디 넓은 인도네시아 전체를 아우르고 있는 것만으로도 숨이 막힐 지경이다. 여행 방법은 말할 것도 없고. 3년 전 12박 14일간의 뒤죽박죽 여행을 통해 알게 된 건, 인도네시아를 기사가 딸린 차량으로 여행하지 않는 한 고생은 각오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나마 접했던 국내 저자의 인도네시아 기행문도 대부분 승용차를 이용한 여행으로 알고 있다. 인도네시아에 살고 있는 한국인이라면 감히 생각해보지도 않을 여행(내 친구의 친구가 자카르타에 살고 있다,)을 만날 수 있는 책으로, 책을 통해 용기를 내보시면 어떨까 싶다.
13장으로 구성된 목차를 잠시 살펴보면,
*인도네시아가 탄생하기까지
*자카르타에서 수하르토식 근대화의 공과를 돌아보다.
*숨바에서 아닷의 원형을 마주하다.
*플로레스에서 인도네시아인의 이주를 생각한다.
*누사퉁가라와 말루쿠에세 탈중앙화의 현실을 둘러보다.
*방가이섬과 케이제도에서 관료제의 명암을 살펴보다.
*술라웨시와 말루쿠에서 천연자원의 축복과 저주를 목격하다.
*북술라웨시에서 인프라 문제를 지켜보다.
*북수마트라에서 분리주의의 과거와 현재를 추적하다.
*수마트라에서 두 세계 사이에 걸친 존재들을 만나다.
*칼리만탄에서 인종 문제를 고민하다.
*자바와 롬복에서 종교적 극단주의를 들여다보다.
*자바에서 봉건주의 청산을 낙관하다.
그러니까 이 책은 단순한 여행기가 아니라는 거다. 인도네시아의 역사, 정치, 종교, 이주문제, 인종문제, 경제, 관료제 등을 두 발로 걸으면서 체험하고 취재한 다큐에 가깝다. 인도네시아를 통으로 접합 수 있는 흔치 않은 책이다.
내 얄팍한 경험으로 더 다가왔던 부분이 있는데,
p. 294
경제전문가들은 노동 가능한 젊은 층이 불룩 튀어나온 인도네시아의 "인구 분포"에 열광했다. 그런 분포도는 자카르타나 홍콩의 컴퓨터 모니터로 보기에는 좋아 보인다. 이론적으로는 젊은 가구가 은행에 저축을 하고 은행은 그 저축액을 새로 사업을 하려는 이들에게 빌려준다. 젊은 노동자가 많으면 많을수록 생산하는 사람이 늘어나고 더 많은 부가 창출된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인도네시아 젊은이의 3분의 1이 아무것도 생산하지 않고 성인 인구의 5명 중 4명은 은행계좌가 없으며 은행은 사업을 하려는 사람이 아니라 물건을 사려는 사람들에게 돈을 빌려준다.
젊은 층으로 넘쳐나는 자카르타 거리를 걷다보면 '발전가능성'이라는 단어가 쉽게 떠오른다. 부럽기까지 하다. 우리나라 어떤 교수가 쓴 책에서도 그랬다. ' 대학시절 교수님이 인도네시아는 젊은 나라여서 발전가능성이 무궁무진하다고 말했다. 지금은 교수가 된 나도 학생들에게 같은 말을 한다. 인도네시아는 젊은 나라여서 발전가능성이 무궁무진하다고.' 한 세대가 흘러도 여전히 발전가능성을 논하는 나라. 달리 말하면 '발전가능성'만을 말하는 나라에 대해서 위의 대목은 현실을 잘 포착하고 있다. 이 책이 돋보이는 점이다.
p.313
인도네시아를 여행하면서 도시 사이를 오가는 미니버스들이 시동을 켜놓고 연료를 태워 없애고, 출발지에서 목적지로 바로 가지 않고 손님을 더 태우려고 한두 시간씩 시내를 빙빙 도느라 수백 시간을 허비하는 것을 수없이 보았다. 보조금 덕분에 휘발유값이 리터당 4,500루피아에 불과하기 때문에 버스기사들을 연료비는 걱정하지 않고 요금을 더 받을 궁리만 한다.
3년 전에 갔을 때도 그랬다. 족자카르타에서 오후 8시에 출발한다는 미니버스가 10시 넘어서 출발, 자카르타의 예약한 호텔까지는 20시간이 걸려 도착했다. 그 비효율성의 저변에는 저런 내막이 있을 줄 몰랐다.
이런 굉장한 책을 만나면 계속 횡설수설하게 된다. 미처 소화시키지 못한 과부하 상태가 된다. 여행 중반에 접어든 저자의 울음에 동참하고 싶은 심정이 된다고나 할까.
p. 383
아직도 배를 긁고 있던 경찰은 계속 나를 못 본 척했다. 이 무정한 동네에서 훌쩍이면서 길거리에 앉아 있을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중략) 잽싸게 어두침침한 내 방으로 들어갔다. 방문을 닫고 나니, 습기 차고 창문 없는 방에서 보낸 일곱 달, 모스크의 기도 소리에 네 시에 깨고 닭 울음소리에 다섯 시에 깨고 다시 여섯 시에 학교 가는 아이들 소리에 깨즌 아침들, 왜 아이가 없는지, 왜 친구 없이 혼자 다니는지 묻는 말에 나를 방어하고, 젊었을 때는 예뻤을 것이란 소리를 들어온 일곱 달, 화장실 휴지도 술도 영어 대화도 없는 일곱 달, 끝없이 짐을 풀고 싸고, 발에 알 수 없는 반점 같은 염증을 달고 산 일곱 달, 대체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을 이해하려 애써온 일곱 달, 무엇보다도 내 것이 아닌 세상에 나를 끼워 맞춰보려 애쓴 일곱 달의 고난과 피로가 한꺼번에 몰려왔다. 나는 진짜 꺽꺽거리며 울기 시작했다.
** etc. 라는 단어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단어 중의 하나. 이 책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도 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