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절한 이웃' 덕에 드디어 올봄에도 곰취를 먹는다. 어제 뜯었다며 한 봉지 주신다. 나는 아직 땅에 뿌리를 내린 곰취를 직접 채취해본 적이 없다. 곰취는 좀 만나기 어려운 상대라고나 할까.

저 숟가락은 밥숟가락이 아닌 티스푼, 엄청 큰 곰취가 되겠다. 근데 아깝다. 아무리 실하고 싱싱해도 나는 아직 곰취와 친하지 않다. 곰취 맛을 잘 모른다. 마치 술 중에서 소주 맛을 싫어하듯 봄나물 중 유독 곰취 맛을 즐기지 못한다. 고수의 독특한 향과 고들빼기의 쓴맛에는 환장해도 곰취의 쓴맛에는 마음과 손이 가지 않는다. 소주를 싫어하는데 특별한 이유가 없듯 곰취와 친하지 않은데도 뭐 특별한 이유같은 것은 없다. 그저 쓰다는 이유 하나. 내 인생의 쓴 부분 때문일까. 쓰지 않은 인생이 어디 있겠는가만. 그리고 언제까지나 쓴맛을 되새기며 살 수는 없는 노릇. 잠깐, 여기서 내가 말하는 소주는 알코올 도수 25도를 가리킨다. 처음부터 달달한 소주를 마셨더라면 삶이 덜 썼을라나. 가뜩이나 사는 게 쓰디쓸 때 소주의 쓴 맛까지 더하면 괴롭기까지 했다. 곰취 얘기하다가 소주 얘기로 흘렀다. 곰취 맛을 즐기고 싶은데 그게 마음대로 되지 않아서 이럴지도 모른다. 누구는 '곰취처럼 살고 싶다'는데 곰취 맛을 모르니 그 감정을 영 알 수 없는 것이다. 고들빼기와 고수를 사랑하는만큼 곰취를 사랑했으면 좋겠다. 인생 맛이 더 써야 그 맛을 알려나. 그렇다면 알고 싶지 않은 맛이다. 에이, 곰취 맛 몰라도 좋다. 곰취가 생기면 곰취를 좋아하는 사람에게 주면 되니까. 세상엔 곰취 맛을 아는 사람이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