쓸 만한 인간
박정민 지음 / 상상출판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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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은 한 편의 영화에서였다. 시에 관심이 가던 시기였고 시인의 삶이 궁금했다. 배우 강하늘이 나온다는 것만 알고 별 기대없이 혼자서 조조 영화를 보았다. 영화는 기대 이상이었고, 주인공의 마지막 한 마디 !’는 자막이 올라가는 동안에도 뭉클한 느낌으로 한참을 맴돌았다. 그와 함께 알게 된 배우 박정민.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었다. 더불어송몽규라는 인물도 영화를 통해 처음 알게 되었다. 윤동주 못지않은 비중으로 인상적인 사람이었다. 그가 안고 있던 세계는 박정민에 의해서 구석구석 세밀하게 표현되었다. 주인공이 두 명인 영화 동주는 이렇게 한 명의 배우를 새롭게 각인시켜 주었다.

 

책을 선택하기 전에 약간의 망설임은 있었다. 혹시 자기 자랑만을 장황하게 늘어놓거나 자신만의 세계에 빠져있는 협소한 글은 아닐까. 내 시간과 돈을 들여서 굳이 다른 사람의 삶을 구경하는 관람객이 되고 싶지는 않았기에 산문집을 그리 선호하지 않게 된 요즘이었다. 영화가 주었던 여운이 마음속에 잔잔하게 남아있었기에 한편으로는 궁금했다. 저런 연기를 하는 사람은 어떤 글을 쓸까.

 

20136월부터 20168월까지 4년간 topclass라는 잡지사에 연재한 칼럼들이다. 한 달에 한 편꼴로 작가 자신의 이야기로부터 주변에 이르기까지 삶의 소소한 풍경들이 담겨 있다. 치열하면서도 경쾌했다. 톡톡 튀는 문장에 미소가 지어지다가 썰렁한 농담에 큭큭 대기도 했는데, 매번 칼럼의 마지막에는 왠지 모를 여운이 뭉클하게 남았다. 영화 동주가 주던 느낌과 묘하게 닮아있었다.

 

글을 읽으면서 자꾸 뭔가를 하고 싶었다. 영화 동주의 제작 과정에 관한 글 <>을 읽을 때에는 나도 여러 사람들과 뭔가를 같이 하며 끈끈한 동지애를 느끼고 싶었다. <상실의 시대>에 얽힌 일화는 책을 더 많이 읽고 싶다는 생각을 불러일으켰다. <강박>에 대한 글은 내게도 있는 정리 벽을 생각하며 많은 동질감을 느꼈다. 사무실의 내 책상에 키 순서대로 정렬된 종이와 책들, 욕실에 키 순서대로 상표가 앞에 가게 놓여있는 샴푸, 린스, 바디 클린저 통을 생각했다. 배우라는 그의 직업상 영화와 연기에 대한 글이 많이 등장하는데, 생소한 분야의 이야기가 왜 그리 공감이 되던지. 그가 있는 삶의 자리에서 묘사한 이야기들은 나에게 그대로 적용해도 될 만큼 일반적이었고 설득력이 있었다. 담백한 에너지바를 먹고 마음을 충전한 듯한 기분이 들어 개운하게 마지막 장을 덮었다.

 

글을 말로 옮기는 일을 하다가 말을 글로 옮기고 싶어졌다.’(p11) 는 작가의 말이 인상적이었다. 생각해보니 나 역시 교과서에 나와 있는 글을 말로 옮기는 일을 하고 있지 않은가. 말을 글로 옮기고 싶어졌다는 말에 공감했다. 가끔 나와 주변의 이야기를 하고 싶어질 때가 있는데, 그런 기분과 비슷하지 않을까. 평소 내가 말로 옮기는 글은 다른 사람의 생각인 셈이니.

 

솔직한 심리 묘사와 간결한 문체가 마음에 들었고, 무엇보다 삶을 긍정적으로 바라보고 계속 도전하며 열심히 살아가려는 모습이 좋았다. 자기 자랑이 없으면서도 스스로에 대해 갖는 자신감이 좋았고, 뭔가를 하고 싶어지게 해주는 이야기들이 좋았다. 친근하고 유머러스한 표현 방식은 웃기지만 결코 우습지 않았다. 모든 칼럼의 마지막 부분에 담겨있는 삶에 대한 긍정은 많은 위안을 주었다. 다 잘될 거라는 내용으로 결말을 맺는 문장은 따끈한 호빵을 먹은 듯이 든든하고 훈훈한 마음을 안겨주었다.

 

글은 곧 그 사람이라는 이야기를 믿는다.’(p186)라 말하는 그의 글에는 박정민이라는 사람이 그대로 투영되어 있다. 그가 궁금해졌다. 이런 책을 쓸 만한인간이라는 생각을 하게 했고, 책을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스스로가 쓸 만한인간이라는 생각이 들게 해준 그가 조금 더 궁금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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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퉁이 책 읽기 - 여자들의 책 읽기 책 속의 여자 읽기
안미선 지음 / 이매진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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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와! 엄마, 모자 샀어? 이쁘다!”지난 토요일, 결혼기념일을 맞이하여 커플티를 사드리려고 부모님을 만났다. 멋진 자주색 모자를 조금은 어색한 듯 쓰고 나오신 어머니. “머리가 자꾸 빠져서 샀어. 괜찮니?”유방암 치료 과정에서 어쩔 수 없이 나타나는 현상인가. “너무 멋져! 하나 더 사 줄까?”5만원도 넘는다고 비싸다며 손 사레를 치신다. 딸의 반응에 기분이 좋으신 지 배시시 웃음이 맑다.

 

<여자들의 책 읽기, 책 속의 여자 읽기>란 부제가 달린 모퉁이 책읽기에는 여자들의 삶이 등장한다. ‘모퉁이에게 날갯짓하다, 경계의 문턱 너머, 모퉁이 길을 품다, 모퉁이에서 만난 세상4부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 안에는 공통적으로 여자가 있다. 다양한 책들을 소개한 리뷰이면서 저자 주변과 세상의 풍경을 묘사한 수필의 냄새가 강하다.

책을 읽으면서 답답했고, 화가 났고, 외로우면서도 따뜻했다. 모퉁이에 있는 책 속의 여자들은 눈에 띄지 않는다. 자기 소리를 낼 수 없거나 소리를 내는 방법조차 모르는 존재이다. 굳어져가는 어깨처럼 화석화된 구조 속에서는 가운데로 나아가 자신의 말을 외치는 것이 오히려 어색하게 여겨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퉁이를 박차고 앞으로 나아가는 용기가 담겨있다.

 

<엄마의 세월, 여성의 시간>은 제목만으로도 울컥하다. 기억 저편에 계신 젊은 시절의 어머니로부터 며칠 전에 뵈었던 모습이 영화 필름처럼 펼쳐지며 겹쳐진다. 더듬어보면 뭔가를 하고 싶다거나 갖고 싶다거나 어머니의 욕구를 단 한 번도 들어본 기억이 없다. 늘 가족을 위하던 어머니의 삶 속에서 모퉁이로 내몰려졌을 여자로서의 삶을 생각한다.

 

주변에 순응하며 살아왔던, 주로 구석을 찾아다니던 내 모습도 떠오른다. 목소리가 없고 바보스럽기까지 했던 나는, 저자의 말에 작은 위안을 얻는다. ‘모퉁이의 함정은 고립이고, 모퉁이가 줄 수 있는 축복은 연결이다.’(p8) 나만 그런 것은 아니었구나 싶기도 하고, 이런 글을 읽고 공감하는 여자들이 조금씩 자기 소리를 내다보면 또 다른 연결 고리로 이어질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저자는 책에서 많은 위안을 얻었다고 했다.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혼자라고 느낄 때 내 앞에서 유일하게 마주보는 친구가 책이었다.’(p7) 마주보는 친구라니! 책이란 대상을 마주보는 친구라고 여겨본 적은 없었는데. 책을 마주하고 그 안에 담긴 글을 읽어가는 시간 동안 나를 돌아볼 수 있으니 어쩌면 거울과도 같이 나를 비추고 위로를 주는 존재일 수 있겠다. 저자의 생각에 공감하는 부분이 있다면 저자와 나 적어도 두 명은 같은 마음이라는 말이니까.

 

힘들었고 나에게만 왜 이런 일이 일어나나 싶은 생각이 온통 머릿속에 가득했던 순간도 있었다. 하지만 이 모든 시간을 넘어왔기에 내 몸에 켜켜이 쌓인 경험들이 굳은살이 되어 그만큼 나를 강하게 했으리라 믿는다. ‘결국 우리가 살아낸 시간이 우리의 책이 된다고 믿는다.’(p9) 이제 조금씩 나의 목소리를 내야할 때가 다가오는가 보다. 이런 글을 읽고, 여러 문장에 공감하고, 나의 이야기를 누군가에게 다시 말을 하고 싶은 생각이 드는 걸 보면.

혼자서 여행을 해본 적이 없다. 이번 겨울에는 버킷리스트를 작성해보려 한다. 그동안 하지 못했던 것을 적고 하나하나 실천해보려 한다. 그 과정에서 다가온 느낌과 생각을 나의 목소리로 조금씩 말하고 싶다. ‘우리의 느낌과 생각을 우리의 언어로 말해야 한다.’(p110)고 말한 저자처럼.

 

어머니는 식사하시는 내내, 옷을 입어보러 탈의실로 들어가시는 순간에도 모자를 벗지 않으셨다. “엄마! 다 갈아입었어?”얼핏 탈의실을 들여다본 순간, 철렁 가슴이 내려앉는다. 윗머리가 생각보다 더 많이 훵하다. 마음이 짠하다.

매장에서 나오니 첫 눈이다. 아이처럼 마냥 좋아하시는 어머니.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어머니의 모자가 계속 마음에 남았다. 이뻤는데, 너무 이뻤는데, 이뻤던 만큼 마음이 아팠다. 소녀처럼 예쁜 털모자를 사드려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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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6-11-28 20: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부모님 결혼기념일 축하드립니다. ^^

나비종 2016-11-28 21:13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말씀 전해드릴께요ㅋㅋ 11월 27일, 어제이셨거든요^^
 
- 한강 소설
한강 지음, 차미혜 사진 / 난다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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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을 색으로 표현한다면 흰 색이 적절할까, 검은 색이 적절할까? 장례식장을 다녀왔다. 검은 옷을 입고 검은 옷을 입은 직장 동료를 마주한다. 아버지를 잃은 눈이 슬픔을 넘어 처연하다. 젖어있는 흰 자위에 검은 눈동자가 탁한 듯 맑아 보인다. 오래 전 우리의 선조들은 죽음의 자리에서 흰 소복을 입었다. 그렇다면 죽음은 흰 색과 가까울까, 검은 색과 가까울까?

 

한강의 소설 <>은 죽음을 흰 색으로 묘사한다. 제목만 보고 흰 색 표지만 보고 깨끗하고 맑고 아름다운 이야기를 상상하며 책장을 넘겼다가, 먹먹한 마음을 안고 마지막 장을 덮게 되는 책이다.

전체적으로 주인공 의 의식을 지배하는 것은 스물세 살의 엄마가 낳았다 두 시간 만에 죽어버린 언니의 죽음이다. 하얀 배내옷이 수의가 되어버린 아기의 죽음을 전해들은 는 배내옷과 수의 사이에 펼쳐질 수 있었던 수많은 이야기들을 조심스레 펼친다.

1에서는 내 시각에서 바라보는 흰 것들에 대한 사유가, 2그녀에서는 그 때 태어났으면 내가 존재하지 않았을 언니의 시각을 상상하며 이끌어간 흰 것들이 있다. 3모든 흰에서는 그녀로 일컬어지던 주인공의 언니가 당신으로 지칭되며 그녀와 나의 이야기가 마무리하듯 서술된다. 소설인 듯 수필인 듯, 산문인 듯 시인 듯 경계가 뚜렷하지 않은 서술 방식은 소설에 흐르고 있는 흰 것의 상징과 어쩐지 닮아있다.

글을 쓸 때에는 반복을 경계한다. 같은 의미라도 그것을 표현할 다른 낱말을 찾아 대체하려 한다. 어떤 단어나 문장을 반복한다는 것은 의미를 강조하기 위한 목적이 대부분이다. 이 책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말은 죽지마라 제발’(p21 배내옷, p36 빛이 있는 쪽, p38 그녀, p128 작별)이다. 언니가 죽지 않았기를, 자신과 함께 소소한 일상을 공유하는 존재가 되었기를 바라는 마음이 바탕화면처럼 주인공의 마음에 깔려있다.

찬란한 컬러 사진이 등장했을 때 한동안 흑백 사진이 볼품없어 보일 때가 있었다. 그런데, 나이가 들어가면서 흑과 백으로만 이루어진 사진이 고급스럽고 우아해 보인다. 흑과 백을 사이에 두고 스펙트럼처럼 펼쳐지는 채도로도 무언가를 표현해내기에는 부족함이 없다. 오히려 흑백 사진에는 그 미묘한 색감의 차이에 시선을 집중시키는 힘이 있다.

소설 중간 중간에 삽입되어있는 차미혜 미술가의 흑백 사진이 글과 잘 어우러진다. 눈인지 별인지 얼핏 보면 구별이 되지 않는(p102~103)사진이 가장 좋다. 한낮에 펑펑 내리는 눈도 벅차지만, 한밤중에 펑펑 내리는 눈은 별이 쏟아지는 것 같아서 더욱 포근하다. 별의 본질은 스스로 타는 천체이니 뜨거운 별이 쏟아지는 느낌이라서 일까.

 

한글 문서를 작성하며 글자색을 바꾸려 할 때 간혹 묘한 기분에 사로잡힐 때가 있다. 하양을 클릭하면 ‘RGB 255, 255, 255’, 검정은 ‘RGB 0, 0, 0’으로 뜬다. 흔히 흰 색은 아무 것도 없는 것으로 인식되는 데, RGB로 표현할 수 있는 최대치의 숫자라니.

초등학교 때 물감을 사용하며 여러 색이 겹쳐질수록 어두워지는 장면만 보다가, 빛의 3원색을 배우고 나서 신기해했던 기억이 있다. 겹쳐질수록 점점 환해지다 모든 빛이 합쳐지면 흰 빛이 된다는 사실이 모순처럼 느껴지면서도 놀라웠다.

흰 색의 물체는 부딪히는 모든 종류의 빛을 반사한다. 그 빛들이 합쳐져서 우리 눈에는 흰 색으로 보인다. 어떤 종류의 빛도 허용하지 않으니 흰 색은 그런 면에서 차갑다. 반면, 검은 색은 모든 빛을 흡수하여 우리 눈에 도달하는 빛이 없어 검게 보인다. 그런 면에서 검은 색은 따뜻하다. 그런데, 어쩐지 검은 색은 차갑게 느껴진다. ‘차가운 어둠이라는 말이 자연스럽다. 빛이 있는 낮이 따뜻해서 그런 걸까, 늘 빛과 공존하는 색이라서 일까. 흰 색은 차가우면서 따뜻하다고 표현하는 게 적당해 보인다.

 

작가의 말을 연상케 하는 서두에서 강보, 배내옷, 소금, , 얼음, , , 파도, 백목련, 흰 새, 하얗게 웃다, 백지, 흰 개, 백발, 수의’(p9~10)라는 단어들을 나열한 작가는 독백처럼 어떤 의미가 있을까, 이 단어들을 들여다보는 일엔?’(p10)이라 내뱉는다. 잠시 작가의 마음이 되어본다. 그녀는 흰 색 죽음을 통한 깊은 사유의 치열함 끝에 삶을 매달고 싶던 것은 아니었을까.

빛의 본질에 대해 알게 된 후로 흰 종이에 검은 펜으로 글씨를 쓸 때 이런 상상을 한 적이 있다. 모든 것을 흡수하는 검은 펜으로 쓰는 글이 모든 것을 반사하는 흰 종이 위에 따뜻함을 꾹꾹 불어넣고 있는 장면을. 검은 펜으로 쓰는 글은 어쩐지 따뜻한 마음의 숨결을 담고 있어야 할 것 같다.

물끄러미 표지를 바라본다. 헝겊처럼 보였던 표지의 배경이 배내옷이며 수의였음을 깨닫는다. 검은 글씨로 쓰인 이란 제목을 바라본다. 삶과 죽음이 동시에 담긴 소설의 내용을 생각한다. 작가와 나 사이에 경계처럼 놓인 책을 바라본다. 갑자기 흘러나오는 찡함이 내게서 온 건지 책에서 온 건지. 모든 경계에는 찡함이 있다, 삶과 죽음의 경계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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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6-11-13 17: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모나미 검정색 펜을 흰 종이에 쓰면 똥이 생겨서 오래전부터 잘 안 쓰게 됐어요. ^^;;

나비종 2016-11-13 21:01   좋아요 0 | URL
한동안 나의 친구(mon-ami)였는데 말이죠ㅎㅎ
필기감은 ㅈㅌㅅㅌㄹ이 정말 좋더군요^^;
 
그럴 때 있으시죠? - 김제동과 나, 우리들의 이야기
김제동 지음 / 나무의마음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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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에게 빠졌다. 이 나이에, 스무 살 가까이 어린 사람에게 반하다니! 나의 눈과 귀와 집게손가락을 사로잡은 <, , >. 몇 번이나 반복해서 들었는지 모른다. 수십 번의 조회 수는 한 사람의 소행임을 살짝 고백한다. 방탄에 빠진 딸내미의 마음을 거의 완벽하게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뮤직 차트 순위 좀 올려보겠다고 스트리밍을 해놓은 채 방에 폰을 놓고 등교하고, 멜론 자유이용권을 넘어 앨범 구입으로 충성도를 증명하던 마음을.

평소 음악을 좋아해서 <판타스틱 듀오> 동영상을 자주 찾아 노래를 듣는다. 리듬깡패와 태양이 부른 그 노래, 조회 수가 우월하게 많아서 호기심에 그냥 한 번 본 것뿐인데. 그 날 이후 며칠 째 노래 한 곡에서 헤엄치는 물고기가 되었다. 출근길에는 음악으로 듣고, 퇴근 후 집에 왔을 때나, 밤에 자기 전에는 동영상을 반복 재생한다. 중간 중간 생각했다. 나만 그런 건가, ~

그즈음 접하게 된 책이다. 마음속에 맴돌던 말이 제목으로 떠억 나타나니, 그럴 때가 있던 나는, 약간은 절박한 마음으로 후루룩 책장을 넘긴다. 남들도 그럴 때가 있는 걸까.

 

책의 내용은 크게 3부로 구성된다. ‘그럴 때 있으시죠? 우리가 보이기는 합니까? 우리 이렇게 살 수 있는데라는 제목 안에 작가와 그의 주변, 사회적인 사건에 얽힌 이야기들을 담고 있다. 350쪽의 적지 않은 분량임에도 불구하고 흡인력 있는 입담 덕분에 시간가는 줄 모르고 책장 넘어가는 줄 모르고 읽게 된다. 중간 중간 맞장구도 치고 때로는 코끝 찡한 마음을 안고 가끔은 나를 돌아보기도 하면서 그의 이야기 속에 나의 이야기를 자연스레 비벼 넣었다.

글을 읽었는데 몇 시간 동안 따뜻한 대화를 나눈 것 같은 착각이 든다. 구어체로 이루어진 문장들이 토크콘서트의 분위기도 이와 비슷하리라 짐작케 한다. 그래서 이 책은 문장을 읽었다는 표현보다 이야기를 들었다 는 표현이 더 어울린다.

 

누구나 행복한 삶을 바라고 언제나 웃는 일이 많이 일어나기를 원한다. ‘제 인생 목표는 모두가 함께 웃는 거예요.(p6)’ 라는 그의 목표가 특별해 보이는 것은 중간에 섞인 단어 때문이다. ‘모두가 함께는 이 책 안에서 배경음악처럼 흐르는 마음이다. 나만 행복한 것이 아니라, 나만 웃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함께 하는 것으로 삶의 의미를 찾는 사람이라니. 부록으로 실린 <성주 사드 연설 전문>에는 모두와 함께 하려는 그의 노력이 담겨있었고, 그 연설은 행동이 답이라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어떤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찾아낼 수 있을 것 같은 긍정적인 마인드가 좋다. 책표지 안쪽에 있는 친필 사인 복사본에 적힌 글귀를 보고 들던 생각이다. ‘아직 모든 것이 사라지지는 않은 달’(p7)이란다. 그가 한 말이니, 그의 말이라면 왠지 믿어도 될 것 같은 생각이 든다.

한 때 가장 좋아하던 말은 자유였다. 구속받는 것을 좋아할 사람은 아무도 없겠지만, 받침도 없는 두 글자에서부터 풍겨 나오는 자유로운 분위기부터 좋아서였다. 그의 시각은 독특하고 깊이가 있다. ‘자기 이유로 사는 것, 그게 바로 자유겠지요.’(p18) 이 문장에서 한참 마음이 머문다. 나의 이유는 무엇일까. 내 삶에 대하여, 내 삶의 이유에 대하여 좀 더 진지하고 깊게 생각해야겠다.

 

그 노래를 부를 때의 태양은 강렬한 인상을 남길 정도로 섹시했다. 남성적인 매력이 훅 다가오거나 하는 이유는 아니었다. 내 마음 한 가운데로 들어온 것은 세 가지 면이었다. 눈빛과 목소리와 발걸음. 함께 하는 파트너에 맞춰 배려하며 노래하려는 마음이 눈빛에서 드러나는 순간, 마음이 두근거렸다. 가성으로 자연스럽게 흐르는 목소리도 좋았고, 무엇보다 가장 좋았던 것은 발걸음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발의 움직임이었다. 무대 바닥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한 편의 이야기와 같던 노래. 감정이 고조되면서 한 걸음씩 상대와의 거리를 좁혀가던 발걸음은 몇 번을 보아도 숨을 멈추고 바라보게 했다. 그 장면이 섹시하면서도 아팠다.

이제는 모든 감정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이유가 있으니까 그런 감정이 올라온 거 아닐까요? 슬픈 건 나쁜 감정이 아니고 이유가 있으니까 슬픈 거겠죠. 그러니 그 슬픈 감정을 존중해줘야죠.’(p112)

이 문장을 읽는 순간, 태양의 발걸음이 다시 떠올랐다. 발걸음이 불러일으켰던 나의 감정을 생각했다. 내 안에 잠자고 있던 슬픔이, 외면하고 늘 덮어버리기만 했던 감정들이 떠올랐다. 한 곡의 노래와 한 권의 책에 담겨있는 몇 개의 문장들이 봉인을 풀어버린 것 같았다. 이제 조금은 덜 아파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들만큼.

책에서 가장 좋았던 말은 당신은 늘 옳다!’(p115)였다. 느낌표가 가슴에 찍히는 것처럼 보는 순간 뭉클했다. ‘누구도 당신만큼 당신 인생을 고민하지 않았고, 누구도 당신만큼 당신을 잘 알지 못해요. 그러니 당신은 늘 옳다!”이 한마디, 믿으셔도 좋아요.’(p115) 어쩌면 이제껏 누군가로부터 가장 듣고 싶던 말은 아니었을까.

 

책표지를 감싸고 있는 그의 모습을 다시 바라본다. 깊은 데서 우러나온, 마음을 끌어당기는 매력에 확 끌린다. ! 섹시하다는 생각까지! 조만간 투덜대는 딸내미를 소년들의 앨범으로 유혹한 뒤 콘서트 현장에 같이 앉아있을 지도 모를 일이겠다.

난롯가에서 딱 한 개 남은 군고구마를 나눠먹은 기분이랄까. 둘 다 배고프지만, 둘 다 든든하고, 둘 다 따뜻해져있는. 두 손 가득 뜨끈한 고구마를 감싸 안고 절반 딱 갈라 모락모락 피어나는 김 호호 불어가며 달짝지근하고 노오란 속살을 한 입 가득 베어 문 느낌이다. 읽는 내내 찡한 코끝을 지나 나도 모르게 배시시 웃음이 나왔다. 나는 그를 알지만 그는 나를 모르는 상대에게서 이런 친근감이 느껴지다니 사람을 끌어당기는 그의 힘이 놀라웠다.

 

오매불망 동영상의 댓글을 훑어본 순간 웃음이 나왔다. 나만 그런 건 아니었다. 내 나이또래의 글로 추정되는 수많은 댓글은 사람의 느낌이란 게 다르면서도 비슷하다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나만 본 줄 알았던 그 눈빛을 이 사람도 보았고, 나만 느낀 줄 알았던 영화 같은 분위기를 저 사람도 느꼈던 거다. 사람에게 반하는데 나이는 걸림돌이 되지 않음을. , 내가 태양과 어찌 해보자는 것도 아니고, 평생 만져(^^;)보기는커녕 만나보지도 못할 남자 인간 한 명 잠시 마음에 둔다고 남편에 대해 역모를 꾀하는 것도 아니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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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요일의 기록 - 10년차 카피라이터가 붙잡은 삶의 순간들
김민철 지음 / 북라이프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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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이 되었습니다. 아침을 먹었습니다. 점심이 되었습니다. 점심을 먹었습니다. 저녁이 되었습니다. 저녁을 먹었습니다. 밤이 되었습니다. 잠을 잤습니다.’8세 때 썼던 그림일기의 문구이다. 도돌이표처럼 반복되는 일상. 생각 없이 살아도, 생각을 하며 살아도 시간은 흘러간다.

<시지프 신화>를 읽어본 적은 없다. 돌을 굴리며 반복되는 형벌을 받는다는 신화. 도서 보를 찾아본다. 돌만 굴리는 이야기는 아닌가보다. 중간에 다른 일을 하지 않고서야 내용이 이리 길 수 없다. 돌덩이와 관련된 철학적 사유가 궁금해진다.

 

책을 볼 때마다 겉표지를 유심히 살핀다. 한 권의 책이 시작되는 지점은 1페이지부터가 아니라 표지부터라는 생각 때문이다.‘ : ’. 콜론. 그 다음에 무슨 말인가 쓰고 싶어지게 하는 기호. 표지에서 가장 마음에 든 부분이다. 동양화의 여백이 연상된다. 오직 글씨로만 이루어진 표지, 무채색의 구성. 조선 백자를 본 듯 솔직한 소박함이 책의 내용과 잘 어울린다.

장맛비처럼 쏟아지는 책들 중에 이 책을 선택했고 결과는 아주 만족스러웠다.

 

산다는 건 어쩔 수 없이 선택의 연속이다. 하나를 선택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결국 모든 선택에는 '만약'이 남는다. (중략) 그 모든 '만약'에 대한 답은 하나뿐이다. '나는 다른 길을 선택했다'라는 답. (p91)’

좋은 사람과는 나와 공통점을 찾고, 마음에 안 드는 사람과는 차이점을 찾게 된다. ? 악을 좋아하네? 사진 찍는 것도, 글쓰기를 좋아하는 것도. 작가와의 공통점을 발견한다. 이 작가 마음에 든다. 사람의 일상이, 나와는 전혀 상관없는 개인의 신변잡기적인 기록에 뭉클할 줄이야! 순간순간 삶에 뛰어드는 열정적인 모습은 수작업으로 만든 퀼트 작품을 연상시킨다. 한 땀 한 땀 바느질하는 삶의 걸음 사이에 살랑거리는 바람이 자유롭다.

 

우표를 모으고, 껌 종이를 모으고, 빵 봉지를 묶는 금속 끈, 봉지를 묶는 하얀 플라스틱, 냥갑과 편지지를 모았다. 지금은 어디로 사라졌나 기억도 안 나지만 꽤 진지했고 신상을 득템 했을 때 느꼈던 뿌듯한 기억이 있다. 왜 그랬을까? 대가가 오는 것도 아니었는데. 이유는 하나다. .. 작가의 취미에 관한 이야기를 읽고 동료의식을 느낀다. 나만 그런 게 아니었구나. 그냥이라는 말은 순수를 연상케 한다.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이유가 타당해보일 때가 있다. 내게도 그런 시절이 있었다.

 

상상을 한다. 베토벤처럼 귀가 들리지 않는다면, 장금이처럼 갑자기 미각을 잃는다면, 웹소설 주인공처럼 밀가루 알러지를 갖게 된 제빵사라면,...... 상상이 부챗살처럼 펼쳐질수록 대의 머릿결을 만질 수가 있어서참 다행인 삶에 감사한다.

눈을 감고 걸을 때가 있다. 몇 걸음 못 가서 눈이 떠진다. 눈부시다. 이 아름다운 빛을 볼 수 없다면 얼마나 답답할까. 이어폰을 꽂고 음악을 듣는다. 머리 뒤 커다란 방에서 쿵쿵 울리는 음들이 심장을 두드린다. 나이 들면서 감각 기관은 무뎌지지만 시각과 청각은 제일 더디 쇠퇴했으면 한다.

 

카피라이터가 쓴 글 이어서일까. 군더더기 없는 문장이다. 15초로 사람을 움직여야 하는 광고는 단 몇 줄로 감성의 공감대를 만들어야 한다는 점에서 시와 흡사하다. 광고의 특성이 배어나오는 심플함과 삶에 대한 긍정적인 기록에 내 삶을 돌아보고 자꾸 움직이고 싶어진다.

도자기 만들기에 도전하고, 벽 사진을 찍는 작가를 상상해본다. 일상적인 수필인데 가슴이 뛴다. 연필 초상화를 배우고 싶던 20대가, 오카리나를 불고 싶던 30대가, 작사가가 되고 싶던 40대 초반이 생각난다. 좋은 가사는 와 같다는 생각에 요즘 시 쓰기에 도전 이다. 산문과는 또 다른 작업이다. 한 편의 시와 한 편의 산문이 주는 무게감은 같다. 의 가치만큼 살점을 떼어준다 하고 무게를 재어보니, 사람이 온전히 저울에 올라가서야 수평을 이뤘다는 이야기처럼. 시는 단 한 줄의 행만으로도 마음을 울려야 한다. 서투르고 투박할 지라도 계속 도전하고 싶다.

 

열 번을 실패했다는 것만큼 가슴 뛰는 열정이 있을까.’자신감을 잃은 아이에게 이런 기를 해준 적이 있다. ‘여기에서 방점은 실..가 아니라 열..이야. 열 번을 실패했다는 것은 그만큼 도전해보았다는 얘기니까. ’아이는 뭔가를 얻은 표정으로 돌아갔다. 조만간 다시 시도를 할 것이고, 아마도 또 다시 실패를 경험할지 모른다. 하지만, 그만큼 자신과 삶을 더욱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게 되리라. 경험과 시간은 손을 잡는 이에게 뭔가를 안겨주니까.

 

작은 감성의 떨림까지도 줄에 얹어 울리는 기타 소리와 같은 삶. 그런 삶을 글로 쓰고 싶다. 그래서 쓴다. 되도 않는 리뷰나 시일지라도, 지가 쓴 글에 지가 감동받는 어이없는 상황을 연출할지라도 개의치 않기로 한다. 고마운 책이다. 언젠가는 좋은 글을 쓸 수 있다며 다독여주는 친구를 만나고 온 기분이다. 김민철의 글이 주는 힘이다. 시지프처럼 인내의 시간을 통과하면, 마음에 새겨진 기록들이 눈처럼 쌓일 것이다. 마음이 화해진다. 어쩌면 나도, 쩌면 좋은 토양이 만들어질 어느 날엔가는, 사람들에게 따스함을 건네주는 글을 쓰고 있을 지도 모른다는 상상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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