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도를 사서 친정에 가니 

주섬주섬 분주해진 손길로 

인스턴트 볶음밥을 들려주신다 

요즘 밥하기 싫으면 이거 먹는다 

한번 먹어봐라 너무 편하다 

 

한 장씩 재운 향긋한 파래김을 

작은 조개 닮은 새하얀 송편을 

코 틀어막던 누런 메줏덩이를 

무지개를 품은 고소한 김밥을 

추억의 상자에 담아주신 당신 

 

인스턴트의 시간처럼 휘리릭 

여든 너머도 후다닥 흘러갈까 

돌아오는 차 안에서 느릿느릿 

가슴 속 상자를 꺼내어 보다 

포도알처럼 톡 물기가 맺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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푹 꺼진 눈꺼풀 뒤로 

작아져만 가는 눈 

반걸음만치 좁아진 보폭 

어기적어기적 걷는 당신 

 

니 아부지 아까 또 

도롯가에서 넘어지셨다 

불긋불긋한 손바닥으로 

괜찮다며 내젓는 당신 

 

요즘 뭐가 기억이 잘 안 난다 

당신의 웃음은 허허 퍼지는데 

나두 그래요 맞장구치는 

자식의 웃음은 흐흐 시리다 

 

휘몰아치는 여든의 시간이 

덜 서럽기를 조금만 두렵기를 

아이였던 내게 그랬듯이 

톡톡 어깨 두드려드리고 싶어 

 

천천히 당신 걸음 좇아가다 

시간아 느릿느릿 흘러가라 

간절한 주문을 걸어보며 

총총 발길을 재촉하는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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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 쪼그라드셨나 

이렇게 자그마하게 

팔 두르니 내 품 안에 

쏙 들어오는 어깨라니 

 

목욕탕에서 나를 안고 

머리 감겨주시던 당신이 

종종 내 손 붙들고 

시장 데려가시던 당신이 

 

바스락 이파리 떨군 

앙상한 나무인 양 

스르르 녹아버릴 듯 

흩날리는 눈꽃인 양 

겨울을 닮아가는데 

 

가을을 서성이는 나는 

줄지 않는 거리를 품고 

희끗희끗한 겨울을 향해 

먹먹한 웃음을 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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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와 아들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65
이반 투르게네프 지음, 이항재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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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이 주는 선입견이란. 러시아어는 도통 모르니 책 표지에서 이반 투르게네프로 짐작되는 이름 옆의 제목이 거의 직역인 줄 알았다. 에곤 실레의 표지 그림도 한몫했다. 어디서 이런 그림을 적절하게 찾아왔는지. 딱 봐도 아버지와 아들의 대치 상황 아닌가. 표지를 넘기기 전에 했던 상상은 어쩌면 당연했다. ! 아버지와 아들이 대립하는 소설이겠구나.

결론적으로 대립은 맞으나 대상이 살짝 어긋난다. 소설의 중심 무대에서 대립각을 세우는 인물은 주인공의 큰아버지와 친구이기 때문이다. 줄기차게 라떼를 부르짖는 큰아버지와 아아를 연상시키는 친구는 결코 서로에게 섞여 들어가지 않는 중심인물이다.

주인공의 아버지와 아들이 언제 대립하나 하염없이 기다리다 드라마가 끝나버렸다. 작품에 등장하는 아버지와 아들이 각각 두 명씩이라 제목의 <아버지와 아들>이 어느 팀인가 판단하기 어려웠다. 처음 부분에 등장하는 아버지와 아들인가? 싶었는데 나중에 아들의 친구가 급부상하면서 그의 아버지의 비중도 만만치 않아지는 게 아닌가. 뒷부분의 해설을 보니 비로소 이해되었다. 원제는 <아버지들과 아이들>로 주인공을 복수의 인물로 설정했던 거다. 서브로 여겼던 아아도 주인공이었다는 것.

 

러시아 이름은 이름(예브게니), 부칭(바실리예비치), (바자로프)’, 세 부분으로 나뉜다고 한다. 애칭으로 비스므레한 발음도 등장하는데 처음에는 오타인 줄 알았다. 보통 헷갈리는 게 아니라 처음에는 그냥 읽다가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가계도를 그려가면서 읽었다. 예브게니 바실리예비치 바자로프를 바실리치였다가 바실리예프였다가 성만 불렀다 이름만 불렀다 부칭을 불렀다. 이런, 된장! 적으면서 짜증났지만 인물들의 관계도는 파악이 되었다. 등장인물의 이름은 대략 ,,,등의 어미로 끝난다. 리뷰에서 그들의 풀네임을 적다 보면 스팸처럼 도배될 것이므로 아버지 1, 2와 아들 1, 2로 적기로 한다.

아들 1과 아들 2 중 앞에서 언급한 아이스 아메리카노는 아들 2로 명명하려고 한다. 그는 니힐리스트이다. 비중으로만 보면 원톱 주인공이다. 아들 1의 친구인 그는 대사량도 많고 액션도 화려하고 사건도 파란만장하다. 순간적이지만 조연급의 여인 1, 2에게 찝쩍대는가 하면 권총으로 결투도 하게 된다. 발진티푸스에 걸린 환자의 시체를 해부하다 손가락을 베이는 바람에 감염이 되어 죽는다는 급작스런 설정은 이건 뭥미? 이다. 허무주의자가 허무하게 죽는다. 복잡하게 여기저기 다 얽히는 인물을 만들어놓고 끝내 감당이 안 되니까 제거해버린 느낌이랄까. 어쨌든 주인공이 죽는 법은 거의 없으니까 끝까지 살아남은 아들 1을 주인공 1으로 여기기로 한다.

 

소설 속 내용은 크게 두 가지로 분류된다. 첫째, 라떼를 고집하는 구세대와 모든 권위를 부정하는 신세대 아아의 갈등과 대립 상황이다. 당시 러시아의 시대상과 맞물리며 보수와 진보의 갈등을 가정으로 끌어와서 구현하고 있다. 둘째, 등장인물들의 각기 다른 사랑 방식이다. 사랑에 빠져드는 심리의 그러데이션을 치밀하게 묘사하고 있다. 사랑의 관점이든 이념의 관점이든 한 가지 관점으로 소설을 음미해도 색다른 느낌으로 다가올 것으로 짐작된다.

다만 나의 경우는 전반적으로 작가의 문체가 마음에 들지 않아 러브러브한 분위기에 몰입하기가 어려웠다. 작위적인 어투도 사건 전개도 도통 못마땅한 데다 재미도 없어서 집어던지고 싶은 책의 필수 조건을 골고루 겸비한 책이었다.

 

큰아버지와 아들 2의 대립이 선명하게 부각되지만, 나는 상대적으로 희미한 색채로 배경처럼 살아가는 이들의 삶에 더욱 시선이 갔다.

첫째, 아들 1이다. 친구인 아들 2를 존경하다시피 하며 그를 추종하는 인물이다. 얼마간은 주체성 없이 아들 2에 끌려다니는 듯한 인상을 준다. 극단적인 아들 2에 비해 이 인물의 내면에는 낭만적인 면모가 자리하고 있다. 소설을 통틀어 가장 많이 갈등하는 인물이다. 나중에는 스스로 일어서서 마이웨이를 걸어가는 모습이 가늘고 길게 걸어가는 인간 승리를 연상케 한다.

둘째, 아버지 1이다. 근본적으로 지닌 이념은 아들 1의 큰아버지인 형과 다를 바가 없어 보인다. 하지만 훨씬 따뜻하고 사랑이 충만한 인물이며 당신의 이념을 아들 1에게 강요하지 않는다. 많이 속고 어리숙해 보이지만 선한 사람의 결이 보여서 마음이 짠했다. 그의 모습을 보며 착한 사람들이 잘사는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셋째, 아버지 2와 어머니 2이다. 소설 속의 어머니들은 한결같이 일찍 죽어서 존재감 제로인데 유일하게 등장하는 어머니이다. 물론 아버지 1의 어린 부인도 아들 1의 어머니 급이지만, 그녀는 어머니로서보다 한 남자의 여인으로서의 면모가 더욱 부각 되므로 제외한다. 집을 버스 정류장으로 아는 아들 2의 들락거림에 마음 아파하면서도 묵묵히 맞이하고 기다리고 아들을 방해하지 않으려고 가슴 졸이는 인물들이다. 헌신적인 그들의 사랑은 아들의 죽음을 지켜보는 모습과 아들의 무덤을 찾는 모습에서 극치를 이룬다. 불효막심한 아들이 뭐라고! 이념, 그게 뭣이 중헌디!

 

라떼의 고지식함과 허세도 밥맛이지만 아아의 극단적인 이념도 마음에 안 들기는 마찬가지이다. 사랑에 빠진 것을 자각하면서도 이념과 모순된다는 이유로 비겁하게 떠나버리는 아들 2의 모습은 이중적이다. 사랑은 이념보다 상위 개념인데 도대체 무엇을 위해서 자신의 마음을 배반했던 걸까.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고, 소설의 처음 부분에서 마부를 텁석부리라며 무시하는 모습에 인성 쓰레기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말만 번드르르한 인물이라는 생각이 계속 들었다.

살아가는데 중요한 건 과연 무엇일까. 커다란 나무로만 보였던 나의 부모님들은 어느덧 자그마한 관목이 되셨다. 어린 시절의 나는 부모님의 말씀이라면 무엇이든 옳은 줄로만 알았다. 부모님의 나이가 되어버린 지금은 부모님 세대의 모순적인 면과 약간은 권위적인 면과 고집이 보인다. 그렇다고 하여 당신들이 무조건 잘못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부모 세대가 되어버린 나도 가끔은 라떼를 찾게 되니 자식들이 지금 나를 바라보면 내가 느꼈던 감정을 고스란히 느끼리라. 나의 아이들이 자라면 또 다음 세대들이 아마도 이런 감정을 느낄 것이다. 세대 간의 간극은 어쩌면 반복되는 현상일지 모른다.

소설의 마지막 부분에서 노부부가 죽은 아들의 무덤을 찾는 장면이 오랜 여운으로 남는다. 마지막까지 남아있는 한결같은 사랑이 고스란히 전해진다. 세대, 이념 따위는 다 날아가 버린다. 작가가 진정으로 말하고 싶었던 주제는 이런 것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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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감 2020-11-01 00:2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러시아 문학은 이게 처음이었는데요, 어려운 이름과 지명을 보면서 일본소설을 처음 읽던 때가 떠오르더라구요. 입에도 붙지 않는 이름들을 메모해가며 읽다가, 나름의 노하우가 생긴 것이 바로 인물을 이니셜로 외우는 거에요. 그래서 아르카디는 A군, 바자로프는 B군으로 리뷰에 적었어요 ㅋㅋㅋㅋ 적응되면 생각보다 편합니다. 암튼 저는 올드보이와 영보이로 나누었는데, 나비종님은 라떼와 아메로 나누셨군요! 재밌는 표현입니다 ㅎㅎㅎ

일단 양쪽의 입장이 확고하고 어떻게 다른지는 초반부터 잘 나왔지만, 타협의 기미가 안보이니 이 대결구도가 끝까지 가는 것 같아 지루한 감이 없잖아 있더라구요. 그래서 작가가 ‘사랑‘에 대한 내용으로 방향을 튼 것 같은데, 그게 아니었으면 뭐 별 내용없이 끝나지 않았을까 싶어요.

흑과 백의 중간인 회색으로 살아도 문제없는 세상인데, 모 아니면 도를 외치는 사람들이 꼭 있어요. 웃긴 건 본인들도 힘들고 피곤한 성격인 걸 알더군요. 근데 이렇게 쭉 살아와서 고칠수 없다는 거죠. 그놈의 자존심 때문에요. 그게 다 쓸데 없는걸 형님처럼 총까지 맞아봐야 아는건지 ^^;; B군도 마찬가지죠. 그렇게 신봉하던 니힐리즘도 죽음에 이르고 보니 중요한 게 아님을 알게 되다니요.

작가는 바자로프를 인성 쓰레기로 만들기로 작정한듯 싶어요 ㅋㅋㅋ 사랑도 저버리고, 친구도 잡지 않고, 노인공경도 없고, 귀족도 아니면서 아랫사람들을 막 대하는 모습도 그렇고. 그런데 적어놓고 보니 ‘요즘애들‘이 딱 바자로프를 빼닮았네요. 그리고 아메였던 저는 어느새 라떼가 되어버렸구요 ㅎㅎㅎㅎ 아이가 자라서 부모가 되어봐야 부모마음을 알게 되듯이, 아메는 라떼를 이해 못하니까 라떼들이 이해해줘야 할거 같아요^^

이번에도 책보다 서로의 리뷰와 감상이 훨씬 재미있는 시간이었네요 ㅋㅋㅋ 이번 리뷰는 언제쯤 올라올까 계속 기다렸는데, 아슬아슬하게 성공하셨네요 ㅋㅋㅋㅋ 댓글 적다가 어느새 11월이 되었네요. 10월도 고생하셨어요. 점점 연말이 다가와서 여러모로 바쁠텐데 컨디션 조절 잘하시고 건강하세요^^

나비종 2020-11-01 07:59   좋아요 1 | URL
페테르부르크란 도시를 검색해서 찾아보고 그곳이 레닌그라드인 줄 이번에 알았습니다.^^; 일본소설은 자주 접하지 않은 장르인데요, 매력이 있나요? 오호! A군, B군. 좋은 방법이네요. 예전에 비슷한 문장들을 겹치지 않게 쓸 때 번호를 붙여서 순서쌍으로 돌린 적이 있었거든요. 1,2 7,8 2,5 이런 식으로요. 다음번에 복잡한 이름이 나오면 써먹어보겠습니다. 도통 이름이 헷갈려서 말이죠.ㅎㅎ 올드보이와 영보이도 정체성이 확 드러나서 좋은 표현 방법이네요.^^ 저는 큰아버지 캐릭터를 보고 라떼는 말야~ 를 자꾸 외치시길래 그와 대비되는 차가운 지성을 지닌 친구를 아이스아메리카노로 비유를 했거든요.

맞아요. 갑자기 중간부터 사랑이 툭 튀어나온 느낌이 강하더라구요. 오딘초바의 캐릭터가 그렇게 끝까지 갈 줄 몰랐거든요. 책 뒤에 나오는 작가 연보에 나오는 비아르도라는 여인을 많이 반영한 걸까요. 평생에 걸친 사랑이라는 여인이요.
소설을 시작하기 전에 벨린스키와의 추억에 바친다고 나오잖아요. 바자로프의 캐릭터에 그렇게 공을 들였던 것도 그 친구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으로 보여요. 벨린스키 곁에 묻히고 싶다는 유언까지 남겼다는 걸 보면요.
그나저나 뜬금없이 결투 장면이 나와서 이건 뭐야 했었는데 작가 연보를 보고 푸시킨이 결투로 사망했다는 것도 처음 알았네요, 톨스토이와 결투까지 갈 정도로 언쟁도 벌였다는 걸 보면 당시 사회적인 분위기 중 하나였더군요.
이런 요소들을 보면서 당연한 얘기이겠지만 글이란 작가의 삶을 많이 반영할 수 밖에 없겠다는 생각을 다시 한 번 하게 되었습니다.

형님이나 B군이나 다 쓰잘데기 없는 객기로 보여지더라구요. 신념을 굽히지 않던 박새로이는 멋있기라도 했지ㅋㅋㅋ 아! 이태원클라스의 그분이요~ㅎ 저는 드라매니아^^;

작가 현실의 삶에서도 A군의 모태로 추정되는 작가와 B군과 O양의 삼각구도가 있었던 걸까 잠시 근거없는 상상을 해보았어요.^^;
맞습니다. 저 역시 아메였는데 라떼가 되어버리고 이게 투비컨티뉴드 되는 건 어쩔 수 없는 흐름 같기도 해요.ㅎㅎ

물감님의 리뷰와 댓글로 독서 레벨이 몇 단계 업그레이드 되었습니다.ㅋㅋ 책보다 리뷰가 더 흥미있고 댓글도 만만치 않게 작은 리뷰 수준이니 그나마 이 재미로 고전의 사막을 횡단하는 것이 아닌가 싶어요~ㅎㅎ
아슬아슬^^;;; 네. 이번 달에는 좀 더 분발해볼게요. 11월의 첫 날, 눈 비비고 일어나 대댓글부터 쓰는 이 미친 정성의 클라쓰! ㅎㅎ 물감님도 잘 지내세요~^^*
 
동물농장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5
조지 오웰 지음, 도정일 옮김 / 민음사 / 199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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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종종 잊고 산다. 나를 둘러싼 많은 것들이 처음부터 존재해온 것이 아님을. 세상에 당연한 것이 있을까. 당연한 듯 마시는 공기도 당연히 내리쬐는 햇살도 초록을 흩뿌리며 서 있는 저 나무도 처음부터 당연한 존재는 아니었을 터이다. 까마득한 시공을 거슬러 올라가면 분명 우연처럼 일어난 시작이 있었으리라.

유형의 것뿐 아니라 무형의 것도 마찬가지이다. 문화나 정치, 경제, 사회 체제도 말이다. 정치는 먼 나라의 일이었다. 국가나 사회는 처음부터 나를 둘러싼 테두리였다. 그 당연함이 이 책을 읽으면서 무너졌다. 이 글은 당연하지 않은 것을 당연하다 여기며 살아온 한 사람의 짧은 반성문이자 역사와 정치에 무지몽매했던 평범한 인간의 부끄러운 고백이다.

 

작가 조지 오웰의 대표작은 예전부터 툭 치면 입에서 술술 흘러나왔다. 1984동물농장이 책장에 꽂힌 건 한참 전의 일이다. 자리만 잡았을 뿐 선뜻 손이 가지는 않았지만. 고전을 읽어야겠어. 더워지기 시작하던 몇 달 전, 지적 허영을 채우려는 마음으로 꺼내 들기는 했다. ~ 배우형일세. 표지에 나온 작가의 얼굴만 구경하다 웽웽거리는 모기 한 마리 때려잡고 책꽂이로 컴백했다.

왜 이제야 만났을까. 동물농장이 이런 내용이리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원제도 ‘Animal Farm’이고 두께로 짐작했을 때 그저 동물들에 얽힌 에피소드 정도려니 했다. , 틀린 말은 아니다. 동물들이 주인공으로 등장하고 이에 얽힌 소설이니까. 하지만 작가의 의도를 파악하고 나면 오소소 소름이 돋는다. 아니! 이렇게 깊은 뜻이!

처음 몇 장은 나의 짐작대로 이야기가 전개되었다. 동물들이 전투를 하고, 풍차를 건설하고, 일곱 계명을 발표했다. 판타지스러운 동화 정도인가. 돼지를 시작으로 말, , 염소, 고양이, 당나귀, 까마귀, , , 오리 등 소나기처럼 후두둑 쏟아지는 동물들에 이름과 캐릭터가 부여되었다. 몇 페이지 읽다 되돌아갔다. 빈 종이를 펼쳐놓고 동물의 종류-이름-캐릭터를 짝지어 메모하면서 읽어내려갔다.

부제도 없고 1번에서 10번까지 번호만 붙은 채 비교적 빽빽하게 이어진 내용에 이토록 몰입하게 될 줄이야! 동화 속 상황에 이렇게 답답하고 화가 치밀 일인가. 이 소설이 어린이용 동화가 아님을 깨닫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치밀한 내러티브를 지닌 저격용 이야기였다. 소설의 배경을 모르는 사람이 읽어도 한 국가의 체제를 겨냥하고 이에 대하여 깊이 사유케 하는 날카로움이 담긴 책이었다.

 

인간이 경영하는 농장에서 노예처럼 시달리던 동물들이 반란을 일으킨다. 인간을 몰아내는 데 성공한 동물들은 수퇘지를 필두로 자신들만의 <동물농장>을 만든다. 처음에는 유토피아인 듯 이상적인 사회가 유지되지만 머지않아 그들 사이에는 지배와 피지배로 분리된 계층이 형성된다. 나중에는 반란 전과 다를 바 없는, 도리어 동족으로부터 대놓고 사기를 당하듯 상황이 악화된다. 돼지들은 반대 세력을 권모술수로 차례로 제거하고 지배 계급으로 부상한다. 이들과 사람이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음을 풍자하는 마지막 장면이 압권이다. 독자에게 물음표를 던지는 깔끔한 결말이다. 이런 체제, 당신은 어떻게 생각해? 라고.

작품 해설을 보고 스탈린 체제를 희화화한 작품이라는 사실에 전율이 일었다. 정치 상식이 없어도 체제가 돌아가는 전 과정을 알 것 같았기 때문이다. 점차 변질되어버리는 순수한 의도, 지도자의 자질, 알지 못함으로 이용당할 수밖에 없는 대중들, 다수임에도 불구하고 답답하리만큼 순응하게 되는 체제의 묘한 테두리, 지배와 피지배의 연결고리로 작용하는 존재의 간사함, 체제와 관계없이 묵묵히 살다 희생되는 존재들을 생각했다.

비판받는 체제가 만들어지는 건 나쁜 지도자 한 사람의 영향만은 아님을 깨닫는다. 그를 추종하는 사람들이 바닷물에 잠긴 빙하처럼 거대한 배경으로 자리하는 것이다. 그들 모두는 100% 선함과 악함으로 구분할 수 없는 애매한 지점에 놓인다. 동물이 주인공인 이 소설은 어느 순간 동물의 탈을 쓴 인간의 일로 인식된다. ‘스탈린 체제라는 다섯 글자를 초고속카메라로 촬영하여 한 올 한 올 살랑거리는 털끝까지 관찰하고 난 느낌이다.

저자는 영리한 사람이다. 우화의 형식으로 주제를 표현한 점은 탁월한 선택이다. 체제가 지닌 맹점과 그것이 만들어져가는 처음과 끝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게 한다. 인간을 주인공으로 했더라면 보지 못했을 요소들이다.

 

한 편의 문학 작품은 당대를 대변하는 목소리로 가치가 매겨진다고 생각한다. 코로나로 둘러싸인 요즘에 포스트 코로나를 말하는 작품이 많은 공감대를 끌어낼 수 있는 것처럼. 어떤 작가가 코로나와 관련된 작품을 썼다면 100년 후의 독자에게도 공감을 끌어낼 수 있을까. 고전으로 이어지느냐 반짝스타로 묻히느냐는 여기에 있다. 특정 사회의 이슈로부터 보편적인 요소를 발견하여 표현하는 능력이 작가의 역량이며 작품의 수명을 결정한다고 본다. 정치와 체제에 기본 상식조차 없는 나에게 시대를 아우르는 공감을 끌어냈다는 건, 조지 오웰의 작품이 75년을 건너와서도 여전히 고전의 반열에 오를 수 있는 이유일 것이다.

내용을 아는 사람은 많아도 의외로 읽어본 사람은 적다는 고전 분야. 학창 시절에는 시험공부로 활용되는 의무감으로 꾸역꾸역 머리에 집어넣기 바빴다. 그 맛을 제대로 알지 못한 건 당연한 결과였다. 중년이 되어서야 고전이라 불리는 책을 한두 권씩 펼쳐본다. 경험의 폭이 넓어지고 인생의 산에 조금은 높이 올라가 있는 지금, 예전에 읽었더라면 보지 못했을 것들이 보인다. 천천히 음미하며 나의 삶과 주변을 돌아보는 이 시간이 좋다. 잔잔했던 내 삶에 당연히 여겨왔던 것들이 바람처럼 스며들어와 나를 흔드는 이 느낌이 생소하면서도 참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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