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교자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41
김은국 지음, 도정일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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둥둥 떠다니는 생각을 끌어 모아 글자로 된 실로 꿰어내기만 하면 될 때가 있다. 미리 생각해두지도 않았는데 손가락이 저절로 움직인다. 할 말이 흘러넘쳐 일단 글로 옮긴 다음 알밤을 깎듯 쓸데없는 잡티들을 돌려가며 깎아주면 된다.

그런가 하면 지금처럼 도무지 무슨 말을 써야할지 막연한 경우도 있다. 멍하니 한 시간째다. 매직아이를 하는 인간인양 한글 창의 공백만 노려보는 중이다. 복제된 빈 문서 1이 마음으로 슬그머니 들어온다. 아무 생각도 떠오르지 않는다.

누가 봐도 형편없는 작품이면 차라리 낫다. 오히려 그 때에는 지극히 주관적인 생각이지만이란 단서 조항만 병풍처럼 둘러치고 대놓고 까버리면 그만이다.

난감한 고민은 순교자와 같은 작품을 만나면서 시작된다. 참 좋았습니다, . 이럴 순 없으니까. 어떤 점이 좋았는지 근거를 대야 설득력이 생기는데 딱히 근거를 대기가 애매하다. 줄거리를 요약하자니 줄줄줄 끊기지 않을 것 같다. 출판사 책 소개나 인터넷 검색창을 치면 콸콸콸 흘러넘치는 바닷물에 굳이 별반 다를 바 없는 물 한 방울 보탤 일은 아니니. 말 한 마디로 신뢰감이 확 가는 하이 레벨의 리뷰어라면 홍시 맛이 나서 홍시 맛이 난다고 부르짖는 장금이로 빙의하면 그만이다. 현실은 쩜쩜쩜. 나처럼 평범한 독후감러는 인과 관계가 확실한 부연 설명이 필요하거늘. .

 

순교자는 한국전쟁 당시 학살당한 목사들과 살아남은 목사 사이에서 순교의 타이틀을 둘러싼 진실 게임을 그린 소설이다.

제목부터 손에 턱 걸리는 게 표지를 넘길 때는 영 탐탁지 않았다. 개인적인 호감도순으로 나열하면 가장 마지막에 가져다놓을 종교이기 때문이다. 비록 종교는 없지만 양가 어머니들의 종교가 불교인 영향력도 조금은 미쳤으리라. 기독교에 대한 편견은 책을 읽는 데에도 그대로 적용되었다. 모임 도서로 어쩔 수 없는 경우를 제외하면 종교 관련 도서는 늘 나의 독서 목록에서 아웃사이더였다.

이 책이 더욱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던 이유는 음의 호감도에서 출발한 책이 이토록 깊은 울림을 가져오리라 상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에 좋았던 점 몇 가지만 소박하게 나열하려 한다. ‘소박하게라 쓴 말이비루하게라 읽힌다. 배경지식의 얄팍함으로 절로 소박해질 수밖에 없다. 근거 있는 자신 없음이다.

 

첫째, 가독성이 좋다. 구구절절 부연 설명 없이 담백하고 깔끔한 문체이다. 단락의 구분이 잘 되어있다. 소제목이 숫자로 된 소설은 간혹 다음 단계로 넘어가기가 어려울 때가 있다. 이 책은 휘리릭 읽다 다음 내용이 궁금해지면 장면이 전환된다. 그게 무척이나 자연스럽다. 지루해할 틈도 없이 이틀 만에 완독했다.

 

둘째, 인간의 본성을 다룬다는 점이다. 종교를 배경으로 한 소설인데 종교는 한낱 도구에 불과하게 느껴진다. 종교 너머에 존재하는 요소로 시선이 간다. 책을 읽는 내내 진실이라는 두 글자를 떠올렸다. 진실은 그저 진실이기 때문에 밝혀져야 한다는 주인공 이 대위, 사람들이 진실을 원하지 않을 지도 모른다며 주인공에게 혼란을 불어넣는 사건의 중심인물 신 목사, 진실을 알면서도 이를 덮으려는 장 대령, 아버지의 진실을 알고 싶어 하는 박 대위, 최소한의 품위를 지켜내기 위해 자신이 믿는 진실을 향해 되돌아간 민 소령, 이들의 모든 진실을 지켜보는 고 목사. 진실에 얽힌 이들의 방황과 고뇌와 시선은 사전적 의미를 넘어 진실이라는 두 글자가 내포하는 의미를 톺아보게 한다.

 

셋째, 흡인력 있는 스토리 전개이다. 사건의 진실을 밝히기까지 전개되는 과정이 추리소설을 보는 듯했다. 진실이 밝혀진 후에도 그 진실의 향방이 궁금해져서 계속 책장을 넘기게 되었다. 졸라의 인간 짐승을 읽는 것만큼의 긴박함이 느껴졌다. 다만 인간 짐승이 메이저라면 이 작품에는 마이너의 스릴감이 있다. 은밀하게 다가오는 심해파에 가깝다. 그저 손바닥만 폈을 뿐인데 주변 공기의 흐름이 바뀌는, 내공이 쌓인 고수의 문장이다.

 

넷째, 깊다. 종교에 대한 거부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거슬러 올라가면 모든 종교는 이어져 있다던데 그 신앙의 본질을 마주한 느낌이랄까. 전 지구 바닷물의 가장 낮은 곳에서 느리게 흐르는 심해저를 떠올린다. 자극적이지 않은 담백한 두부 같기도 하다. 묵직하게 천천히 다가오는 사골 국물스러운 감동이 크다.

 

다섯째, 질문을 남긴다. 거짓된 진실이라도 희망이 동반된다면 그 길을 가야할까. 소설 속을 빠져나와 실제로도 신앙의 길을 신념으로 걸어가는 이가 있다면 그는 끝까지 한 점의 후회도 없는 마음이 될까. 사람들이 믿는 진실과 믿고 싶어 하는 진실 사이의 간극에 선다면 나는 어느 쪽으로 발걸음을 옮겨야 할까.

 

평소 다른 사람에게 기대는 것에 익숙하지 않다. 내 안에 불신이 그득하다는 의미와는 조금 뉘앙스가 다르다. 주관도 없이 상당히 의존적이었던 어린 시절도 있었는데. 스스로 해결하는 삶에 익숙해져버린 게 언제부터였더라. 자신을 의지하는 데에 거부감 비슷한 마음이 생겨버린 듯하다. 이런 성향이 종교에도 그대로 투영된 걸까. 종교를 갖지 않는 게 아니라 도무지 가져지지 않는다. 신의 존재를 믿고 안 믿고의 문제는 아니다. 절대적인 신앙이라든지 신에게 기도한다는 상상만 해도 반감이 일어난다.순교자를 읽으며 좋았던 점을 몇 가지 나열했지만, 소설에 등장한 목사님들의 신앙에 대해서는 감정이입을 하기가 어려워서 깊이 있게 말할 수가 없었다. 나와는 다른 존재도 있을 거라는, 인간 존재의 다양성을 인정하는 정도로 이해했다.

한 줄이면 되는 리뷰를 늘여 써도 도무지 다시 읽어보아도 설명이 부족하다. 탄탄한 근거가 깔려있는 피라미드형 독후감이 아니라 모래시계 윗대가리처럼 불안한 구조라서 심히 부끄럽고 아쉽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내린 결론은 하나다. 참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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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감 2021-03-31 17:3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틀만에 완독이라뇨... 대체 어떡하면 그런 경지에 다다를수 있죠? 역시 세월의 내공이 해결해주려나요 ㅎㅎㅎ 저는 급하게 읽으면 긴 글의 리뷰는 절대 못쓰겠어요... 근데 나비종님은 읽고 바로 이렇게 후루룩 쓰시다니, 매번 감탄하고 있습니다요 ^^

고전문학, 특히 서양쪽은 종교의 내용이 많든적든 들어가 있어서, 좋든싫든 종교의 세계를 접하게 되네요. 종교관련 서적은 저도 질색하는데 이런 고전속에 들어간 정도는 크게 거슬림없이 읽어요. 다행이 이 책은 종교 색채가 짙지 않아서 나름 무난하지 않으셨나요? ㅎㅎ

확실히 읽는 사람마다 포커싱이 다르다는 걸 느껴요. 저는 ‘양심‘이었고, 나비종님은 ‘진실‘이군요. 예쩐에 개그콘서트 코너중 ‘불편한 진실‘이 기억나네요~ 다루었던 모든 진실이 하나도 도움 안되지만 진실은 진실이니까요. 때로는 덮어둘줄도 알고 드러낼줄도 아는 것이 지혜라고 생각됩니다 ㅎㅎㅎ

날이 점점 풀려서 독서가 게을러지고 있어요. 나비종님은 어떤가요? 바쁘셔서 게을러질 틈도 없으신 건 아닌지요^^ 독서모임이 점점 무리한 요구가 되가는 건 아닌지 걱정도 들어요. 꽤 오랫동안 월말 벼락치기 중이신데 정말 괜찮으신가요 ㅠㅠ 힘드시면 꼭 말해주세요! 3월도 수고하셨습니다!

나비종 2021-03-31 20:10   좋아요 1 | URL
발등에 불 떨어지면 절로 스피디해진답니다~ㅋㅋ 저는 급하게 읽어도 써야 하는 글은 써지기는 해요. 다만 퀄리티가 현격하게 떨어져 나중에 다시 리뷰를 읽어보면 집어던지고 싶어져서 탈이죠^^; 집중력이 좋은 편이기는 합니다ㅎㅎ

그러게요. 종교 서적은 질색인데 <데미안>이나 이 책은 큰 거부감이 없더라구요.^^

양심과 진실도 파고 들어가면 거의 비슷한 맥락인 것 같기도 합니다. 진실을 향해 움직이는 마음이 양심이라 한다면요.
저는 ‘불편한 진실‘하면 환경 다큐가 떠오릅니다만.^^
모든 진실이 다 드러나야 하는 건 아닌 것 같아요. 그걸 가려내는 지혜가 필요하다는 물감님 말씀에 공감합니다.
불편하지 않은 진실은 뭐가 있지....? 잠시 생각해봅니다.

작년에는 코로나의 첫 혼란이라 학기초에 처리되어야 할 업무들이 길게 늘여져서 그런대로 견딜만 했나 봅니다. 올해는 정상적인 시기에 개학이 이루어지다보니 몇 달에 걸쳐 했던 일이 3월 한 달에 몰리더군요. 엄~~~~청 바빴습니다. 잠도 몇 시간 제대로 못 잤구요, 지난 주에는 오른쪽 눈 흰자위의 가장자리에 실핏줄이 터져서 며칠동안 완전 토끼 모드였습니다. 흐윽!ㅜㅜ
올해도 3학년 담임을 맡았는데요, 새로운 걸 시도해본다고 카톡으로 상담을 했거든요. 아이들이 학원 다녀오고 나서도 대화할 수 있게요. 그게 23시, 24시까지 연일 이어지다보니 더 피곤했나봐요. 업무도 부장을 맡아 계획 세우느라 바빴고 다음 달은 과.학.의.달.이라 그거 준비하느라 또 바빴어요. 책을 거의 못 읽다 며칠 전부터 그나마 짬이 나서 초스피드로 읽어냈답니다.^^

독서모임은 오히려 힐링의 아이콘입니다. 이것마저 없었으면 허탈할 뻔 했거든요.
꽤 오랫동안 월말 벼락치기ㅋㅋㅋ 찔림^^;;
정말 괜찮습니다. 이것만 다 하면 맛있는 아이스크림을 먹을 수 있다는 일념으로 그나마 미친듯이 일할 수 있는 거거든요. 일하기 싫은데 일이 자꾸 엉겨붙는 된장같은 상황을요ㅡㅡ;;
4월에는 부지런히 달려서 5월부터 퇴근 후에는 제발 제 시간을 갖고 우아하게 독서하고 싶습니다! 잘 지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