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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그네 (무선) ㅣ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31
헤르타 뮐러 지음, 박경희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5월
평점 :
숨을 제대로 크게 쉴 수 없었다. 피부에 있는 솜털 하나하나를 묘사하는 듯한 뮐러의 표현력에, 그 안에 담겨있는 정서에, 정서가 품고 있는 무게에 압도되었다. 문장에서 묻어나는 질감이 잠잠했던 감각을 건드렸다. 감각이 가라앉을 때까지 그저 무기력하게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온 세상이 작가의 언어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새로운 의미로 다시 만들어졌다. 그녀는 상황을 표현하기 위한 도구로 세상의 모든 것을 활용하는 듯했다. 소제목 하나를 지날 때마다 세상의 의미가 휙휙 변했다.
진자인양 삶과 죽음을 왔다 갔다 하는 ‘숨그네’라는 조어와 작가의 문장은 닮아있었다. 진공의 우주까지 올라갔다 응축된 지구 중심으로 빨려 들어가는 듯 문장의 진폭이 컸다. 왔다 갔다 하는 온몸에 부닥쳐오는 바람의 숨 막힘에서 간절하게 그네 줄을 움켜쥔 두 손의 실핏줄에 이르기까지. 부유하는 먼지 한 점의 미세한 까슬거림까지 더듬은 문장이었다.
소련의 강제수용소에 5년간 노역하게 된 17세 소년 레오폴트 아우베르크의 시각으로 그 안에서의 삶과 그 이후의 삶을 서술한 책이다. 동료 오스카 파스티오르로부터 실제로 전해들은 수용소의 일상을 묘사한 글이기에 현실감이 생생하다.
자유를 온전히 제지당한다는 건 어떤 느낌일까. 소설의 처음 부분에서 나는 속박당하는 자유를 생각했다. 나의 의지가 조금도 개입되지 않은 채 다른 존재의 꼭두각시나 무감각한 기계인 듯 도구로 살아가는 시간들은 인간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까.
배우 윤여정이 아카데미 여우조연상 수상 후 기자 인터뷰에서 했던 말이 기억난다. 그녀는 60세가 넘어서는 사치를 부리며 산다고 말했다. 그녀의 사치는 물질적인 것이 아니라 ‘내가 살고 싶은 대로 사는 것’을 의미한다고. 아! 나도 저렇게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마음에 남았던 말이다. 자유란 ‘스스로의 이유’로 사는 것이라 했던가. 『질문이 답이 되는 순간』에서 언급되었던 자유도 생각났다.
소설 속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자유란 부차적인 화두임을 깨달아갔다. 주인공에게 고통을 안겨준 것은 자유로운 표현이나 자아실현의 억압이 아니었다. 떠난 적이 없는데도 다시 찾아온다는 하루치의 배고픔이 그에게는 가장 절실했다. 식의주로 일컬어지는 기본적인 욕망 중 가장 먼저 오는 욕망 말이다. 몸을 구성하는 물질을 받아들여 생명을 지속하고자 하는 욕망은 어쩌면 생명체가 지닌 가장 원초적인 본능일지 모른다. 작가는 근원적으로 존재하는 인간의 본능을 말하고 싶었던 걸까.
읽는 내내 허기졌다. 소설 속 인물을 마주하기라도 한 듯 배불리 먹는다는 행위가 어쩐지 미안했다. 책장이 낱 장 낱 장 느리게 뜯어져 목구멍으로 빨려 들어가 거름종이로 펼쳐졌다. 내안으로 들어가는 음식을 가로막는 듯했다. 책장을 빨리 넘기고 싶은데 손이 제대로 마음을 따라주지 않았다. 문장 하나하나를 꼭꼭 씹어 먹는 기분이 들어서 입 안에서도 종이 맛이 났다.
주인공이 슬래그 노동자로 내려갔던 지하실의 계단 수는 64개이다. 짤막한 소제목의 개수를 세어보았다. 에피소드와 계단 수가 일치한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순간 살짝 소름이 돋았다. 우연의 일치이겠지만 어쩌면 우연이 아닐 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어서이다.
1인칭 주인공 시점으로 전개되는 이야기들은 그러데이션 되는 색채를 보듯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주인공을 따라가며 수용소 곳곳에 담겨있는 인물들의 삶을 바라보았다. ‘나’를 주어로 전개되는 문장에서는 남성도 여성도 아닌 분위기가 난다. 성별의 구분이 의미 없어지는 수용소 안의 삶과 닮아있다.
소설 속에서 나를 중심으로 다루어지는 삶은 두 가지 영역으로 구분된다. 수용소 안에서의 삶과 수용소를 벗어난 삶이다. 주인공은 집으로 돌아왔으면서도 수용소를 벗어나지 못한다. 수용소는 모순된 아득함을 지닌 용수철이 되어 그를 번번이 수용소 안으로 끌고 들어온다. 넓어진 수용소에 갇혀있는 그의 모습을 보며 너비는 깊이가 된다는 책속의 문장이 떠올랐다.
사소해 보이는 것으로부터 입은 상처가 더 쓰라릴 때가 있다. 예린 칼날에 베인 상처는 생각보다 오래 간다. 한 방울의 물기만 닿아도 엄살처럼 몸을 움찔한다.
무형의 대상으로 인한 마음의 쓰라림에도 비슷한 현상을 발견한다. 사랑하는 이의 메마른 말 한 마디, 주변 사람의 차가운 눈빛은 심장에 날카로운 생채기를 낸다. 유려한 문장이나 단어는 전체적인 의미로 송두리째 다가오지만, 무심코 굴러온 알파벳은 획 하나도 한 줄 곡선을 따라 섬세하게 눈에 띄므로 날카롭다.
사소해 보이는 물건 하나에 삶 전체가 매달리는 경우도 있다. 주인공이 삶의 동아줄처럼 마음으로 붙들고 있던 대상은 거대한 무엇이 아니었다. ‘너는 돌아올거야.’라는 할머니의 말 한 마디, 물건으로 모습을 바꾼 손수건 한 장이었다.
결국 마음에 상처를 주는 것은 그 안에 담긴 의도의 농도이며, 물건의 가치 역시 물리적인 크기가 아니라 그것이 담고 있는 의미의 농도로 결정되는 걸까.
비유와 상징적인 표현이 많았다. 329쪽 분량의 시를 읽는 기분이 들 정도로 작가는 고차원적인 비유법을 구사하고 있었다. 온통 비유와 상징으로 빼곡한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가 떠올랐다. 두 책의 차이를 비교한다면, 『숨그네』의 문장은 온몸의 감각으로 생생하게 전달된다는 점이다.
인간의 본성을 소재와 연관 짓는 작가의 능력은 탁월했다. 사물을 이용하여 분위기와 주변 상황을 묘사하고 심리를 표현하는 문장은 볼 때마다 감탄스러웠다. 하아! 어떻게 이런 시각으로 이런 시적 표현이 가능할까. 소제목 하나 지났을 뿐인데 벌써 진 기분이 들었다. 지금껏 읽었던 책 중에 비유적인 표현을 기준으로 판단한다면 단연코 최고이다. 끌리는 표현을 옮겨 적었던 A4용지의 절반만한 종이가 17페이지에 이를 때까지 옮겨 적고 또 적었다.
엔딩까지 줄기차게 표현의 텐션을 유지하는 작가의 비결은 무엇일까. 부러워하는 단계를 넘어 존경하는 마음까지 들었다. 펑펑 쏟아져 내리는 눈처럼 시적인 문장들이 펑펑 쏟아져 내렸다. 차원이 다른 표현력에 그녀의 머릿속이 궁금해졌다.
‘시멘트’를 묘사하는 장면은 압도적이었다. 시멘트 포대로 훅 빨려 들어가는 듯 숨이 턱턱 막혔다. 둘러보는 온 세상이 순식간에 잿빛으로 채색되었다. 팝송 ‘What a Wonderful World’가 떠올랐다. 폐허와 아름다운 선율, 가사와 배경의 상반된 어우러짐, 악기소리와 굵은 암스트롱의 목소리. 대조가 자아내는 괴리만큼의 공허와 아픔은 커다란 충격이었다. 쥐어짜는 통곡이 아니라 무감각한 카메라의 시선인 듯 세상이 투영되었다. 장면이 끌어내는 느낌은 독자의 몫이었다. 흑백 화면처럼 온통 시멘트로 보이는 소설 속 풍경이 책속에서 튀어나올 것 같았다. 그때의 노래처럼 이 장면들이 극대화된 이미지로 그려졌다.
넓게 펼쳐진 문장들은 나를 둘러싸다 내 안으로 깊이 스며들었다. 겹겹이 입은 모든 옷의 감촉이 느껴지는 기분이었다. 속옷부터 티셔츠, 겉옷에 이르기까지. 장갑, 양말, 모자, 스카프의 감촉까지도. 그녀의 문장들이 머리카락 한 올까지 훑으며 내 안에 내려앉았다. 표현이 깊었다.
평범한 서술어로 정의할 수 없었다. ‘슬프다. 불쌍하다. 안쓰럽다?’ 아니다. 이런 느낌이 아니다. 처량한 것도 아니고 아픈 것도 아니다. 내게서 일어나는 이 느낌을 어떤 서술어로 정확하게 묘사할 수 있을까. 뮐러의 언어가 붙든 것은 텅 빈 허기 안에 내재된 고통이었다. 3도 화상을 입은 듯 고통에 담담해 보이는 작가의 문장 앞에서 나는 할 말을 잃어버렸다.
소리 없는 짐을 들고 다닌다는 주인공의 감정에 이입되었을 때, 울컥해지는 마음이 뒤늦게 느린 속도로 다가왔다. 실체가 없는 짐은 크고 묵직했다. 모순투성이인 세상에서는 이토록 모순적인 표현이 가장 진실에 가까운 건지도 모른다.
인간 존재를 생각했다. 작가는 이 책을 통해 인간의 본성을 낱낱이 해부하며 가장 원초적인 세포 단계를 보여주었다. 분리된 세포 하나가 이물질처럼 심장에 깊이 박혀 마음을 깜빡일 때마다 욱신거렸다. 내면에 자리한 본성. 동물과 인간의 경계를 허무는 생명으로서의 본능은 깊었다. 넓고 짙었다. 마지막 책장을 덮은 나의 시선에 세상은 더 이상 이전의 모습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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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22, 밑에서 5째줄: 파스트라마 → 파스트라미
p182, 7째줄: 의심의 담긴 병 → 의심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