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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물처럼 살기 - 우리가 동물처럼 살지 말아야 할 11가지 이유
최문형 지음 / 사람의무늬 / 2017년 6월
평점 :
한여름이었다. 머그잔만한 화분에 담겨있던 초록은 하나도 남김없이 갈색으로 변해있었다. 한동안 물주는 것을 잊어버렸던 탓이다. 바싹 마른 잎들은 뜨거운 햇살에 타들어간 종이인 양 손끝을 대자마자 재처럼 부스러졌다. 이럴 줄 알았으면 아파트 화단에라도 옮겨 심을 걸. 굳이 집안으로 끌고 들어와서 저 지경을 만들다니. 이름도 모르는 식물에게 미안했다.
갈색의 부스러기들을 하나하나 떼어냈다. 고동색 철사 같은 가지가 삐죽삐죽 앙상하게 드러났다. 한참 늦은 뒷북이지만 맨땅에 헤딩하는 기분으로 물을 흠뻑 주었다. 혹시 기다리면 잎 하나라도 돋아날 수도 있지 않을까. 그대로 베란다에 며칠을 두었다.
무심코 화분을 들여다본 나는 묘한 기분에 휩싸였다. 연둣빛 자그마한 잎들이 눈곱만하게 돋아있었다. 살아있었구나! 말없는 생명에 대한 경이로움에 가슴이 울렁거렸다.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더 이상 집으로 들어온 화분들이 죽어나가지 않았다. 선인장도 말려 죽이는 마법의 손이 드디어 봉인해제된 거다. 살아 숨 쉬는 생명체가 내 가까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깨달은 이후에 일어난 일이었다.
『식물처럼 살기』는 말없는 식물의 삶에서 드러나는 속성을 다각도에서 세밀하게 조명하며 우리 삶의 자세와 연결 지어 서술한 책이다. 생태계 먹이피라미드의 아랫부분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며 중심을 잡고 있는 존재. 우리는 이 거대한 존재를 종종 잊어버린다. 저자는 식물의 지혜에 시선을 돌리자는 주장을 시작으로 식물처럼 살기 11계명을 제시한다.
여행지에서 오래된 나무를 보면 묘한 신비감에 사로잡힌다. 죽지 않고 몇 천 년을 살아가는 존재, 젊은 부분과 늙은 부분이 공존하는 존재, 죽어가는 동시에 살아가는 존재를 상상한다. ‘영원’의 의미가 새삼 와 닿는다. 또, 2천년이 넘는 씨앗이 싹을 틔웠다는 뉴스를 접하면 생명의 잠재력을 절감한다.
소설과 영화를 비롯하여 여러 기록에서의 나무는 신성함을 뿜어낸다. 오랜 옛날부터 인류가 상상해온 우주목으로부터 불교의 보리수, 성경과 신화 속에는 각종 나무들이 등장한다. 동양의 오행 ‘목화토금수’에서도 유일하게 포함된 생명체가 나무이다. 이처럼 나무는 인간 가까이에서 친숙하게 존재한 생명체였다.
짧으면서도 인상 깊은 감동을 주는 『아낌없이 주는 나무』는 나무의 속성을 매우 적절하고 감동적으로 표현한 작품이다. 다양한 종류의 나무들은 뿌리에서 줄기, 잎, 열매에 이르기까지 버릴 것이 한 군데도 없을 정도로 우리 생활에 유용하다.
나이든 현자와 같은 나무가 있는가하면 인간에게 큰 행복을 주는 꽃들도 많다. 꽃들은 자세히 들여다보면 매우 신중한 생존 전략의 소산이다. 다양한 향기와 색깔로 동물의 욕망을 활용하여 번식하는 생식기관으로서의 면모는 소름끼칠 정도로 치밀하다.
신중하고 지혜롭게 스스로를 방어하는 숲 속의 식물들은 동물 못지않은 무기를 지닌다. 특수한 화학물질을 분비하거나 열매의 맛으로 무장함으로써, 필요에 따라 모습을 바꾸거나 전기신호를 전달하거나 특정 곤충들과의 공생 관계를 이용한다.『식물병법』이라는 책이 나올 정도로 전략적이다.
하늘에서 내려오는 빛을 이용하고 땅에서 끌어올리는 물을 이용하고 공간에 흩어져있는 기체를 이용하는 식물은 이 세상 모든 것과 연결된 존재이다. 스스로 양분을 만들어낸다는 것은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단지 빛과 물과 이산화탄소만으로 말이다. 양분과 더불어 만들어지는 산소는 생명 활동의 원천이지 않은가. 광합성은 한 줄의 화학 반응으로 나타내기에 너무도 묵직한 존재감과 의의를 지닌다.
식물의 삶에서 높이 평가할만한 점은 더불어 사는 지혜를 지녔다는 점이다. 제 삶에 치열하되 저 혼자만 살아가지 않는다. 다른 종류의 동물이나 균류와도 멋지게 상생한다. 여분의 수분과 양분도 붙들어두지 않는다. 증산 작용으로 다시 돌려보내고 열매로 저장하여 동물에게 제공한다. 생태계에서 어머니와 같은 존재감을 뿜어내며 주변의 생물을 아우른다.
지극히 주관적이지만 책을 읽으면서 아쉬웠던 점이 두 가지 있다. 첫째, 내용을 배열하는 방식이다. 이것저것 주섬주섬 잡다한 자료들을 널어놓은 느낌이랄까. 체계 없이 짜깁기한 논문을 보는 듯 산만했다. 내용이 뚝뚝 끊어지는 듯했다. 재료만 많이 들어간 어설픈 김치찌개가 연상되었다. 둘째, 미주 부분이다. 뒷면의 미주를 계속 왔다갔다 읽다보니 나중에는 짜증이 날 정도로 불편했다. 차라리 내용의 일부는 본문에 삽입을 하거나 해당 페이지의 아래 부분에 적었으면 나았겠다 싶다. 참고 도서는 책의 뒷부분에 놓더라도 말이다.
위의 두 가지를 제외하면 저자가 제시한 자료들은 식물의 삶이 생각보다 더욱 놀랍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주었다. 식물에 대한 유용한 정보가 많아 상식이 풍부해진 느낌이다. 어디에 있는 어떤 식물은 이러이러 하다더라는 식으로 흥미 있는 대화의 소재로 말하기에 좋은 내용들이 많다.
멀리서 바라보는 식물은 그저 고요하게 있는 듯 없는 듯 살아가는 존재였다. 하지만 이제껏 바라보았던 모습은 태풍의 눈에 불과했나 싶다. 식물의 삶은 치열한 태풍이었다. 움직일 수 없는 존재이기에 움직이는 동물을 뛰어넘는 삶의 전략이 필요했을 것이다. 그런 삶으로 살아가다보니 어느 식물학자가 했다던 말처럼 나중에는 움직일 필요가 없는 삶으로 자리매김 되었으리라.
식물처럼 살아간다는 것은 단순한 삶이 아니었다. 단순하게 보이기까지 끊임없이 노력해야 하는 시간을 건너야 하는 일이었다. 생각보다 묵직하고 상상 이상으로 커다란 포용력이 필요한 삶이었다. 주방 창가의 화분을 바라보며 그들의 삶을 닮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초록의 잎 사이로 점점 박힌 연보랏빛 꽃잎들이 가볍게 흔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