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말라 온다 (무선) ㅣ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52
알베르토 푸겟 지음, 엄지영 옮김 / 문학동네 / 2017년 5월
평점 :
몽땅 수분을 빼앗겨버린 얼굴인양 심장이 푸석거렸다. ‘말라 온다’를 읽으며 서서히 말라 가기라도 하듯 답답했다. 숨이 막혔다. 음습한 공기가 폐 속으로 스며들 것 같았다. 소나기가 쏟아지기 직전의 끈적임 속에서 뿌연 구름이 들쭉날쭉 하늘을 뒤덮은 날, 물 한 방울 마시지 못한 채 아득한 시야의 끄트머리를 바라보며 한참을 걸어간다면, 걷고 또 걸어도 비는 내리지 않고 꺼끌꺼끌 목구멍의 질감만 전해진다면, 지금의 이런 느낌이 들까.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은 미지근한 문장에 속이 터졌다. 책을 읽는 나를 캐리커처 한다면 둥둥 떠다니는 고구마를 배경으로 ‘ㅈㅈ’(자체 모자이크 처리) 두 글자가 담긴 말풍선이 포도 알처럼 주렁주렁 매달렸을 거다.
제목을 보고 두 번 놀랐다. 띠지에 적힌 설명을 보니『말라 온다』가 스페인어(mala onda)라는 거다. ‘말라비틀어지다, 다이어트로 몸이 점점 마르다’와 같은 의미로 번역된 우리말인 줄 알았건만. 마지막 책장을 덮으며 작가의 작명센스에 감탄했다. ‘불만, 불쾌감, 답답하다, 마음에 안 든다, 기분 나쁘다, 시시하다’라는 뜻의 구어체라니! 제목과 내용의 싱크로율이 놀라웠다. 책을 읽으면서 느꼈던 마음을 고스란히 담아낸 촌철살인의 제목 아닌가!
1980년 9월 3일부터 10일까지 칠레 소년 마티아스가 겪은 일주일을 그려낸 성장 소설. 나름 기대를 안고 첫 장을 펼쳤다. 일주일이라는 짧은 기간 설정에서 추리소설의 서스펜스를 기대했나보다.
9월 4일. 하루가 지났는데 당최 뭔 말을 하려는 건지 모르겠다. 그래서 뭐 어쩌라고. 지루했다.
9월 5일. 분위기는 별반 달라지지 않았다. 그래도 점점 창대해지면서 나아지겠지, 설마.
9월 6일. 설마가 아니었다. 일관적인 답답함이 적립금으로 차곡차곡 쌓였다. 일주일이 끝날 때까지. 상실감, 체념, 욕망이 마약, 섹스, 록 음악에 둘러싸여 기분 나쁘게 심장을 눌렀다. 작가의 문장들이 책속에서 튀어나와 시야를 뿌옇게 가렸다. 이토록 답답한 기분, 오랜만이다. 기억하고 싶지 않았지만 하나의 장면이 선명하게 각인되었다. 틈만 나면 끈질긴 스팸문자처럼 튀어나오던 줄 세우기 말이다. 코카인 가루 줄 세워서 콧구멍에 빨대대고 들이마시는 장면이 잊을만하기도 전에 수시로 출몰했다. 9월 10일까지 지났어도 대체 어느 부분을 보고 성장이라는 건지 판단이 되지 않았다.
그러다 갑툭튀한 9월 14일, 애벌레의 껍질 안에 갇혀 혼란스러워하던 주인공이 갑자기 날개를 펼쳤다. 464페이지의 마지막 문장까지 읽고 나서야 ‘성장’의 의미가 훅 다가왔다. 매미 같은 소설이었던 거다. 땅속에서 7년을 기다린 후 드디어 햇빛을 보게 되는 매미처럼 배경의 무게를 견뎌온 주인공은 세상으로 뛰어들려는 액션을 취한다.
전체적인 내용은 미괄식 구성에 가깝다. 끝까지 읽어야 작가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무엇인지 감이 온다. 18일 동안의 밤을 지나 겨우 마지막 책장을 덮었다. 소름끼치는 어감이다. 어쩌다보니 나의 심정을 가장 적절하게 반영한 기간동안 붙들고 있었나. 중간에 책을 읽지 못할 이러저러한 사정들이 있긴 했다. 실제로 이 책을 읽은 날은 그 기간 중 8일 동안이다. 하지만 별다른 일이 없는 날에도 책을 펼치지 않았으니 그냥 읽기 싫었던 거다. 문장 하나하나가 깊숙이 박힌다기보다는 전체적인 분위기로 독자를 지그시 누른다. 주인공이 그의 세계에서 느꼈을 속 터지는 심정을 덩달아 느끼도록 만든다.
무엇이 그런 된장 같은 분위기를 만들었는가. 다소 거리를 두고 책속의 세상을 바라보면 전체적인 빅 픽처가 보인다. 분위기에 익숙해 지다보면 찾지 못하게 되는 답이 간지처럼 곳곳에 등장한다. 바로 피노체트 군사정권이다. 칠레의 정치적 상황은 도화지 인양 밑바탕에 깔려 사람들의 삶을 지배한다. 폭력적인 정권에 찬성표를 던지는 이들의 모습은 우리나라의 몇몇 정치 상황을 연상케도 한다.
부모님 혹은 이성과의 관계에서 형성되는 사랑에의 갈증, 수많은 사람들 속에서 오히려 선명한 외로움을 느끼는 주인공의 좌절, 공허와 무력감은 소설에서 툭 튀어나와 현실을 그대로 물들인다. 별반 다르지 않다. 나도 가끔은 경험해보았던 감정이다. 소통의 부재, 양키 파워를 선망하는 분위기 등은 도화지에 덧칠해져 본질을 바라보지 못하게 만든다. 얼핏 타락한 개인의 문제로 간주되는 방황이 반드시 그의 탓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자꾸 망각하게 한다.
처음에는 몇 번이나 이 책을 집어던지고 싶었다. 뭐 이런 그지 같은 소설이 있나 싶었다. 하지만 작가들이 그리는 세상을 상상하며 이 책의 내용을 곱씹어보니 내가 간과했던 사실이 보인다. 작가들은 다양한 세상의 모습을 글로 표현한다. 어떤 이는 맑은 햇살 가득한 봄을, 또 다른 이는 녹음 우거진 초록의 숲을 그릴 것이다. 허나 혹독한 겨울이나 지리한 장마가 이어지는 세상도 현실 안에 버젓이 존재한다. 예컨대 쓰레기를 치우는 청소부를 바라보는 상황과 비슷하다. 쓰레기가 역겨운 거지 그걸 치우는 사람에게는 오히려 감사해야하지 않은가. 소설 속 상황이 쓰레기 같은 거지 사진인 듯 적나라하게 상황을 묘사한 작가가 형편없지 않음이다. 얄팍한 겉모습만 보고 깊은 데 자리한 본질을 바라보지 못하고 작품을 판단하는 오류를 범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나에게는 재미없는 소설이다. 내 취향과 180도 반대편에 자리하는 작품이다. 수채화 같은 세상만을 믿는 것은 아니지만 칙칙한 모습을 처발처발한 글은 읽고 싶지도 쓰고 싶지도 않다. 사실 그런 글을 쓸 자신이 없다는 게 좀 더 정확한 표현이다. 이런 이유로 내 관점으로 보면 작가는 대담한 인물이 된다. 그가 여인의 초상화를 그린다면 조선시대 윤두수 자화상처럼 눈가의 주름과 군데군데 얼룩진 검버섯과 점들까지 적나라하게 그렸으리라. 완성작을 건네어주면서 한 마디 하겠지. “이게 당신의 현실입니다! 이런 모습인데 어쩔!”
다른 문화를 이해한다는 것은 무척이나 어려운 일이다. 라틴 아메리카와 칠레의 생활상에 무지하다보니 소설 속 문장들을 매끄럽게 읽어 내려갈 수 없었다. 용어 자체가 생소해서 옮긴이의 주석을 오르락내리락하며 읽다보니 독서속도가 느려지고 맥이 툭툭 끊어졌다.
문장의 의미를 완벽하게 이해하지 못하고 읽는 것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 건 9월 9일에 언급된 『위대한 개츠비』를 보면서였다. 아직도 선명한 첫 문장을 본 순간, “심봤다!”를 외치고 싶을 정도로 반가웠다. 이 책에 등장하는 안토니아가 개츠비 속 여주인공 데이지를 연상시킨다는 문장에 안토니아의 캐릭터가 단번에 이해되었다.
『호밀밭의 파수꾼』도 이 책에 자주 등장한다. 홀든 콜필드라는 주인공 캐릭터의 오마주로 이 책의 주인공 마티아스가 언급된다. 아직까지 『호밀밭의 파수꾼』을 읽어보지 않았다. 인터넷 자료를 검색하니 대략 스토리의 전개는 비슷해 보인다. 칠레의 문화와 책속에 등장하는 록 음악과 인물들, 언급된 책들에 대한 배경지식이 풍부했더라면 이 책을 좀 더 의미 있게 수용했을 지도 모르겠다. 나의 무지함으로 이해의 폭이 좁아졌다고 생각하니 많이 아쉬웠다. 언젠가『호밀밭의 파수꾼』을 읽게 된다면 이 책을 다시 읽어보아야겠다.
늘 추웠던 사람과 한 번의 따스함을 경험한 사람 중 어느 쪽이 추위를 더 잘 버틸까. 한때나마 온기가 스며들었으니 후자가 나을 듯싶지만 의외로 전자라는 생각이 든다. 항상 그랬던 사람은 관성의 테두리 안에서 적응하며 머물지만, 온도차를 겪은 사람은 그 간격만큼 견디기가 어려워져 다른 방법을 모색하게 될지도.
브라질 리우의 화려함을 맛보고 온 주인공 마티아스가 칠레로 돌아와서 더욱 힘겨워했던 것도 비슷한 맥락일지도 모른다. 그대로 쭉 살았으면 추웠던 것조차 인지하지 못했을 것 아닌가. 리우에서의 경험이나 록 음악은 주인공을 변화시키는 불씨가 되었다고 본다. 늘 마약에 찌들어 살던 소년이 움찔하며 세상을 향해 뛰어들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만들었으니.
『어린 왕자』에서는 ‘길들인다’는 말이 꽤 로맨틱하게 등장한다. 여우로부터 그 말의 의미를 들었을 때 어찌나 간지가 나던지. 이와 대조적으로 푸겟의 ‘길들인다’는 최악의 상황에서 언급된다. 작가가 지닌 문제의식이 독보적으로 드러난다. 낯설던 냄새에 익숙해져 길들여지면 나중에는 그로부터 벗어날 생각조차 하지 못한다며 그렇게 되지 않도록 경계해야함을 말한다.
세상은 관성의 지배를 받은 채 묵직하게 굴러간다. 때문에 변화는 작은 것조차 어렵다. 바꾸려면 엄청난 힘이 필요하다. 물이 수증기로 변하려면 100도에 이르기까지 조금씩 올라야하는 인내의 시간이 필요하다. 여전히 물로 존재하기에 얼핏 지루해 보이는 상황 말이다. 『말라 온다』는 관성으로 굴러가는 빌어먹을 세상 속에 던져져 0도의 물에서 100도의 물까지를 견뎌내야 하는 과정을 담은 작품이 아닐까. 용기내기 직전의 기초 공사와 같은 의미를 담은. 이 과정을 통과해야 수증기의 자유를 얻을 수 있으리라. 물로만 머물 것인가, 수증기로 날아오를 것인가. 경계에서의 용기는 비로소 당신의 몫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