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의 과거
은희경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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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극성이 더 밝을까요, 태양이 더 밝을까요?” 당연한 걸 왜 묻느냐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는 아이들. “에이, ! 당연히 태양이 밝죠.” 회심의 미소를 짓는 나. “! 북극성이 더 밝습니다.” “? 왜요?” “단지 멀리 있기 때문에 어둡게 보일 뿐이죠. 태양은 지구로부터 가까이 있기 때문에 밝게 보일 뿐 그닥 밝은 별은 아니에요. 북극성 입장에서는 상당히 억울하겠죠? 실제로는 찬란히 빛나는 별인데 지구인들은 알아주지도 않아서 말이죠. 그래서 별의 밝기는 두 가지로 말을 합니다. 지구에서 보이는 밝기인 겉보기 등급과 제각기 다른 거리에 있는 별들을 밀당해서 같은 거리에 놓았다고 가정해서 표현하는 절대 등급으로

과학적인 내용들을 가르칠 때마다 한걸음만 더 들어가면 철학적인 사유와 접목시킬 수도 있다는 점에 종종 감탄한다. 별과 우주에 대해 가르치는 시기에 빛의 과거를 읽어서일까. 소설의 내용을 음미하는데 뜬금없이 별의 밝기가 머릿속에서 튀어나온다. 보이는 것과 실제와의 차이. 이 책을 읽으면서 가장 선명하게 새겨진 단어는 간극이었다.

 

한손에는 낮을, 다른 손에는 밤을 부여잡고 있는 대상. 노을이다. 노을을 의인화한다면 그의 입장을 대변하는 소설이랄까. 작가는 다름과 다름이 만나 섞이는 과정을 온도차로 느끼는 사람의 내면을 집요하게 파고든다.

주인공은 여대 기숙사에 살게 된 20세의 나, 김유경과 또 다른 방에 사는 김희진이다. 두 사람을 주축으로 성격, 외모, 생각, 출신지역 등이 제각기 다른 주변 인물들이 어우러진다. 20대였던 1977년과 60대가 된 2017년을 오가며 고립, 차별, 취향, 욕망, 정당화, 회피, 수긍, 방관, 적응, 왜곡, 부조리, 깨어있음, 행동, 비관, 기억, 망각, 진실이라는 단어에 담긴 인간의 본성이 날카롭게 펼쳐진다. 더불어 1970년대의 20대 청춘들이 피부로 느꼈을 캠퍼스의 풍경과 사회상이 세밀하게 덧대어진다.

작가의 나이로 추정해 보건데 상당부분 자전적 경험에서 소설의 소스를 얻었으리라. 은희경 작가는 소설이란 자기 인생이라는 집을 부수어 그 벽돌로 다른 새로운 집을 짓는 일(p10)’이라며 소설 속 인물을 통해 논픽션과 픽션을 적절하게 버무리는 안전장치를 한다.

1977년의 이야기에는 3, 4월 등 구체적인 시기가 제목으로 등장하는데 8월의 한여름과 12, 1, 2월의 겨울은 빠져있다. 공간적 배경이 주로 기숙사 이다보니 방학과 맞물려 그 시기의 에피소드가 상대적으로 적었으리라. 하지만 너무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은 온도로 미적지근한 혼란을 겪는 주인공의 심리가 어쩐지 시간적 배경과 닮아있다.

 

주인공 는 노을을 연상케 하는 인물이다. 선명함과 또 다른 선명함의 경계에 애매하게 서 있다. ‘나는 중간 지대에 어정쩡하게 서 있다가 간혹 무언가에 떠밀리게 되면 아무것도 결정 못 한 표정으로 거기 휩쓸리곤 했다.(p49)’, ‘나는 누군가 부수고 들어오기를 기다리면서도 스스로 문을 잠가놓은 채 버림받고 잊힌 사람의 노래를 부르고 있었을까.(p178)’, ‘시스템의 눈치를 보며 적응한 척했던 것이 단지 임시방편이었을까. 혹시 그대로 내 삶의 태도가 되어버린 것은 아닐까.(p245)’, ‘나를 지금의 인생으로 데려다 놓은 것은 꿈이 아니었다. 시간 속에 스몄던 지속되지 않는 사소한 인연들, 그리고 삶이라는 기나긴 책무를 수행하도록 길들여진 수긍이라는 재능이었다.(p281)’ 주인공의 담담한 독백을 좇다보면 심장의 민낯을 들킨 듯 얼굴이 화끈해진다.

욕망을 정당화하기 위해 상황을 왜곡하며 과거 기숙사 친구들과의 시간을 지금은 없는 공주들을 위하여라는 소설로 집필한 김희진. 그녀의 입장에서 우주의 중심은 자신이며 세상은 스스로 주인공이 된 그녀를 중심으로 돌아간다. 밉상 서브 주인공으로 그려지지만 적나라하리만큼 떳떳한 그녀의 서사를 따라가면 나 역시 한 구석이나마 이런 모습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대놓고 드러내느냐 공주인양 내밀하게 감추느냐 혹은 많고 적음의 차이일 뿐이다.

 

글을 쓰는 내내 동물원의 <혜화동>을 듣고 있다. 성시경 버전이나 드라마 <응답하라 1988>에 삽입된 박보람 버전도 좋지만, 이 소설에는 복고풍 냄새가 나는 동물원의 최초 버전이 어울려 보인다. 가사 두 군데가 고막의 과속방지턱을 넘지 못하고 계속 덜컹거린다. ‘어릴 적 넓게만 보이던 좁은 골목길에우린 얼마나 많은 것을 잊고 살아가는지라는 문장이다. 소설 속 문장이 겹쳐진다. ‘젊고 희로애락이 선명하고 새로 시작하는 일도 가능했던 시절이었다. 그 시절의 인생이 더 나았을까. 꼭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욕망이나 가능성의 크기에 따라 다른 계랑 도구를 들고 있었을 뿐 살아오는 동안 지녔던 고독과 가난의 수치는 비슷할지도 모른다.(p277~278)’

두 사람에게 공유된 사건도 서술자에 따라 전혀 다른 이야기로 둔갑한다. 주인공 4명이 각기 다른 관점에서 삶과 사랑을 이야기했던 쿤데라의 소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 떠오른다. ‘우리가 아는 자신의 삶은 실제 우리가 산 삶과는 다르며 이제까지 우리 스스로 들려준 이야기에 지나지 않는다.(p334)’빛의 과거에 등장하는 이 문장은 같은 시공간에 있었더라도 전혀 다른 풍경으로 제각기 비춰질 수 있다는 맥락의 개인 버전이다.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니다. 작가가 독자에게 던지는 메시지를 한 문장으로 말하면 이러리라 생각한다. 주인공이 서브 남자 주인공과 나눴던 대화는 이를 구체적으로 묘사한다. ‘내가 동화 속의 유리성 같다고 하자 그는 쓰러져가는 낡은 서민아파트의 허름한 저녁 밥상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것뿐이라고 차갑게 내뱉었다. 그러고는 어렸을 때 천변의 가난한 동네에 살았는데 개천 건너편에 밤마다 불이 환하게 밝혀지는 환상적인 건물이 알고 보니 도살장이었다는 얘기를 들려주었다.(p152)’ 학보사 기자로서 세상을 취재하면서 그녀가 느꼈던 감정도 비슷하다. 혼란스러운 현실과는 달리 학보 속 세상은 평화롭기만 하다.

이쯤 되면 무엇이 진실이고 거짓인지, 어떤 것이 선이고 악이라 해야 할 지 경계가 애매해진다. 나름 서있는 위치에서는 진실로서 존재하기 때문이다. 작가의 입장은 오현수라는 중립적인 캐릭터를 통해 또렷하게 제시된다. ‘모르는 것이 거의 다라는 생각을 하나 더 보태게 되었다. 그녀에게는 그것이 다른 조건을 가진 삶에 대한 존중의 한 방식이었다.(p264)’ 모르니까 함부로 말할 수 없고 함부로 말해서도 안 된다는 것이다.

 

별을 볼 때마다 묘한 생각에 사로잡힌다. 지금 내가 보는 별은 과거로부터 달려온 빛의 부스러기일터이다. 워낙 멀기 때문에 1초에 30km를 간다는 빛으로도 한참을 달려야 하는 거리에 존재하는 대상이기 때문이다. 빛의 과거를 현재의 내가 바라보는 아이러니라니. 200만 광년 떨어진 별이 빛을 내보낸 후 사라졌다면 이미 존재하지 않는 별의 과거를 바라보고 있는 셈이 아닌가. 분명 눈앞에서 별이 반짝이는데 없는 존재일 수도 있다는 거다. 갑자기 세상이 뿌옇게 보인다.

실제로 밝은데 어둡게 보이는 별과 실제로 어두운데 단지 가까이 있어 밝게 보이는 별. 둘 중 어느 쪽을 밝다고 해야 하는가. 내 눈에는 어둡게만 보이는데 망설이지 않고 밝다고 말할 수 있는가. 바로 코앞에 있는 촛불을 참으로 밝다며 감탄할 수 있는가. 이렇게 생각한다면 둘 다 맞다 할 수도, 둘 다 틀리다 할 수도 있는 거 아닌가.

비단 별빛만은 아닐 것이다. 이 글을 읽는 당신의 눈에 이 글을 쓰는 나는 어떤 모습으로 비춰지는가. 문장만으로 상상할 수 있는 모습은 과연 나의 모습에 얼마나 가까울까. 실제의 모습이라고 말할 수 있는 정답이 존재하기는 하는가. 답은 없다. 나조차 나의 모습을 확실하게 모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뒤늦게 별빛의 과거를 좇는 우리가 별빛의 현재를 결코 볼 수 없듯 보이는 것이 다는 아니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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