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노인과 바다 (무선) ㅣ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91
어니스트 헤밍웨이 지음, 이인규 옮김 / 문학동네 / 2012년 1월
평점 :
느리게 밥을 먹고 싶어질 때가 있다. 밥알에서 달짝지근한 맛이 날 때까지 천천히 음미하고 싶은 날, 느리게 흐르는 시간을 따라 생각 역시 느리게 흐른다. <노인과 바다>는 이런 날 읽기에 적당하다. 한 문장 한 문장을 곱씹으며 일주일가량을 보냈다. 125쪽의 분량을 읽기에는 다소 긴 시간이다. 난해한 내용도 아닌데 책장을 넘기기가 어려웠다. 묵직한 몰입감이 나의 손을 사로잡았다. 바닷물이 조금씩 내안에 스며들어 마음이 점점 확장되는 느낌이다.
‘늙은 어부가 돛단배에서 홀로 4일 밤낮을 청새치와 싸운다는 줄거리.’ 뒤표지에 실린 문구이다. 이보다 더 심플할 수 없는 내용이다. 화려한 표현도, 감탄할만한 은유도, 반할만한 캐릭터도, 역동적인 반전 드라마도 없건만. 무엇이 나를 매료시킨 걸까. 매력적으로 다가온 요소를 짚어보았다.
첫째, 주인공 설정이다. <소년와 바다>였다면 감동이 덜 하지 않았을까. ‘모든 것이 늙거나 낡아(p10)’있는 노인, 삶의 마침표가 얼마 남지 않은 인간은 어떤 마음으로 살아가야 할까. 다가올 시간이 지나온 시간보다 짧을 때,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물음에 대한 답이 책안에 있다. 바다로 나아가 거대한 청새치를 맞닥뜨렸을 때 이를 마주하는 노인의 태도는 많은 시사점을 준다. 마음이 늙으면 더 이상 청춘이 아니라고 한다. 이런 관점으로 판단하면 주인공 산티아고는 아직 노인이 아니다.
인간의 수명이 길어졌다고는 하나 내가 100세까지 살 것 같지는 않다. 아득하기도 하고 불안한 마음도 간혹 고개를 든다. 내가 무얼 할 수 있을까? 걸어갈 날들을 상상해본다. 언제까지 지금처럼 글을 쓰는 행복을 누릴 수 있을까. 눈도 침침해지고 가파른 길을 미끄러지듯 하루가 다르게 쪼그라들 몸을 지니게 될 나는. 줄거리만 파악하며 읽었던 학창시절과는 느낌이 달랐다. 소설의 내용이 바짝 다가왔다. 도전하는 노인의 모습은 50대에 들어서면서 마음이 복잡해진 나에게 계속 도전할 용기와 아직 늦지 않았다는 위안을 안겨주었다.
둘째, 주 무대인 돛단배이다. 자그마한 배안에서 두 다리를 딛고 선 노인은 철저히 혼자이다. 말벗이라고는 그 자신뿐이다. 청새치와 싸우고 속속들이 다가오는 상어들과 싸우는 노인. 그의 모습과 어쩐지 닮아있는 단출한 배를 보며 저마다 홀로 끌고 가는 삶의 모습을 연상한다.
삶의 마지막 순간에 차지할 수 있는 공간과 물건은 무엇인가. 몸뚱어리 하나 드러누울 수 있는 공간과 수의 한 벌. 소유한 돈과는 상관없이 한 사람이 차지하는 공간의 크기는 보이는 존재의 크기 만큼이며 입을 수 있는 옷은 단 한 벌 뿐인 거다.
노인이 탄 배가 화려한 유람선이나 우람한 해적선이었다면 어울리지 않았을 것이다. 바다에서 마주하는 날것 그대로의 대상과는 인공의 껍데기 다 훌훌 털어버리고 말간 모습으로 대면하는 것이 어울린다. 청새치나 상어와 싸우는 노인을 지켜보며 민낯으로 역경과 마주하는 인간의 모습을 생각한다. 누구의 도움도 기대할 수 없고 어떤 물건에도 기댈 수 없는 공간에서 오직 본성으로 마주하는.
셋째, 공간적 배경인 바다이다. 바다는 삶을 연상시킨다. ‘라 마르(la mar)’라 부를 정도로 다정한가하면 ‘엘 마르(el mar)’라 부를 정도로 치열한 공간이다. 수많은 생명을 품은 채 잔잔하다가도 어느 순간 야누스의 얼굴로 돌변하는 무대이다. 인간이 헤쳐 나가야 할 삶의 속성과 닮아있다.
흔히 ‘육지’보다 ‘바다’에 삶을 중첩시키는 이유는 공간감으로 입체적이어서 아닐까. 바다는 눈에 보이는 물로 채워져 현실감을 더욱 또렷이 전해주니. 땅속으로 파고 들어가지 못하는 우리는 경계에 발만 디딘 채 2차원에 존재한다. 그 안에 들어갈 수 있는 바다는 이런 관점에서 3차원이다. 삶속으로 뛰어 들어가는 인간의 모습을 생각한다면 바다가 삶의 무대를 비유하기에 적당해 보인다.
거리를 걷다 뺨에 와 닿는 공기의 감촉이 느껴질 때면 입체적인 육지를 상상한다. 하늘까지 뻗어있는 공간이 눈에 보이는 덩어리라면 어떨까. 가령 공기를 구성하는 기체에 색깔이 있다면? 산소는 파란색, 질소는 초록색, 이산화 탄소는 붉은색, 수증기는 하얀색, 방귀는 노란색, 이런 식으로 말이다. 공기를 가르며 걸어가는 우리는 유영하는 물고기가 되고, 길바닥에 소복한 은행잎은 노란 조개껍질처럼 구르는 풍경. 이런 식으로 가시적인 질감이 느껴진다면 삶을 헤쳐 나간다는 느낌이 실감나지 않을까.
넷째, 상어와 대결할 때 사용된 도구들과 이를 대하는 노인의 생각이다. 칼을 갈 숫돌을 가져왔어야 했다는 생각을 하다가도 ‘지금은 없는 걸 생각할 때가 아니야. 있는 걸로 뭘 할 수 있을지 그거나 생각하도록 해.(p115)’라며 독백을 한다. 마지막에 남게 된 노와 몽둥이와 키 손잡이로 어떻게 무시무시한 상어들과 대적할까 싶지만 그는 끝까지 희망의 끈을 놓지 않는다. 도구가 하나 둘씩 떠나가는 장면들은 은근히 긴장감을 안겨준다. 암담한 상황이 올 때마다 최선을 다하여 이를 극복하는 장면은 인간 존재의 의지에 대한 경외심을 불러온다. 위기의 상황을 만났을 때 떠올릴만한 지혜로운 태도로 소중히 품어본다.
다섯째, 군데군데 경구처럼 툭툭 튀어나오는 문장들이다. 좌절할만한 일이 닥쳤을 때 종종 떠오르는 질문은 ‘왜’이다. 왜 이런 일이? 왜 나에게만? 헤밍웨이는 ‘왜’를 던져버리고 ‘어떻게’에 대한 답을 찾으라고 말한다. 이미 일어난 일에 대해 소용없는 질문을 하지 말고 어떻게 상황을 헤쳐 나갈까 생각하라는 메시지를 전한다. 노인의 독백은 따로 놓고 음미해도 자체로 의미심장하다. 보물찾기의 쪽지라도 되는 양 비슷한 일상과 만나졌을 때 빛을 발한다. 이를 테면, ‘매일매일이 새로운 날인걸. 운이 있다면야 물론 더 좋겠지. 하지만 난 우선 정확하게 하겠어. 그래야 운이 찾아왔을 때 그걸 놓치지 않으니까.(p33-34)’, ‘꿋꿋하게 도전하며 너답게 살아, 사람이든 새든 물고기든 모두 그렇듯이 말이다.(p57)’, ‘언제나 매번 새로 처음 하는 일이었고, 그 일을 하고 있는 순간에는 과거를 결코 생각하지 않았다.(p64)’, ‘이대로 항해나 계속하게. 그러다 일이 닥치면 그때 맞서 싸워.(p108)’라며 행동 지침으로 삼을 만한 문장을 건네어준다. 몇 번이나 곱씹다보면 마음속으로 힘이 고인다.
여섯째, 과장하거나 미화되지 않은 과정들이다. 노익장을 과시하며 짜잔 당당하게 700킬로그램의 청새치를 득템하는 결말이었다면 얼마나 밋밋하고 평범했을까. 청새치를 잡는 게 끝이 아니었던 데서 매력이 확 다가온다. 고생하며 잡은 물고기를 상어에게 물어뜯기는 상황을 마주한 노인은 치열하게 대응을 한다. 작가가 이 부분에 공을 들였다는 느낌이 강하게 온다. 만신창이가 되면서, 눈앞에서 상실을 마주하면서, 기도문을 언급하면서, 그 애가 옆에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몇 번이나 아쉬워하면서, 이 모든 게 꿈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바라는 노인의 모습에는 삶에서 만나게 되는 상황들과 너무나 인간적인 생각들이 담겨있다. 나라면 어떤 기분이었을까, 이런 상황에서 나는 어떻게 행동했을까. 노인을 따라가며 나만의 답을 찾아보았다. 나라는 인간을 다시 마주하게 되었다.
일곱째, 승리와 패배를 판단하는 기준에 대한 물음이다. ‘사람은 파멸당할 수는 있을지언정 패배하진 않아.(p108)’ 스스로 말했듯이 뼈다귀만 남은 물고기를 들고 집으로 돌아간 노인은 결코 패배하지 않았다. 청새치를 잡은 순간의 성취를 고스란히 마음에 품고 있기 때문이다.
‘침대는 바로 네가 패배했을 때 편하게 누울 수 있는 곳이지(p126)’ 편하고자 하면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고 그저 가만히 침대에 누워있으면 될 터이다. 작가는 시도하지 않음을 패배라 말한다. ‘그런데 널 패배시킨 것은 누구지? (중략) 아무도 아냐. (중략) 난 그저 너무 멀리 나갔을 뿐이야.(p126)’ 침대에서 떠나 바다로 뛰어 들어가는 순간, 노인은 진정한 승리자로 우뚝 선다. 삶에서 결과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음을, 돌아와서 사자 꿈을 꾸는 듯한 노인의 모습으로 작가는 삶의 진정한 성취를 매듭짓는다.
물고기의 아가미와 닮은 책이었다. 공간은 별로 차지하지 않아도 켜켜이 접힌 주름을 펼칠수록 삶의 즙이 배어나와 마음과 접촉하는 면이 넓어졌다. 주름 하나하나를 펼치며 읽을수록 다가오는 내용이 많았다. 책을 읽으며 삶과 도전과 의지와 패배와 역경과 상실과 존재와 공존과 꿈과 위안을 생각했다. 몇 번이나 죽을 고비를 넘기며 이를 극복해나가는 노인 앞에서 ‘죽음’이나 ‘늙음’이란 단어는 의미를 잃었다. 오롯이 날 것 그대로의 삶이 싱싱하게 펄떡이며 뜨거웠다. 노인의 삶에 나의 삶이 더해져서 두 권의 책을 읽은 듯했다. 마지막 책장을 덮고 한동안 코끝이 찡했던 건 이런 이유에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