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황해>를 봤다. 물론 후반부의 엄청난 자동차 추격 액션씬도 인상적이었지만 가장 인상적인 장면들은 구남(하정우)이 배를 채우는 장면들이었다. 무언가를 먹는 장면, 먹는다고 말하기조차 사치스럽게 느껴지는 입으로 뭔가를 밀어채워넣는 장면들. 한국영화에서 이렇게까지 절박하고 처절하게 먹는 장면을 표현하는 영화를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경향신문 인터뷰에서 감독은 이 영화가 자신을 따라다닌 한 이미지에서 시작했다고 밝혔다. <추격자> 프리프러덕션 과정에서 분식집에 떡복이 먹으러갔다가 만난 "추레한 작업복 차림의 10살 가량 되는 아랍계 아이가 덮밥을 먹고 있는 모습". "맛은 안중에도 없고 오직 내 몸을 움직이려면 에너지가 필요하다는 마음만 있는 것 같았어요. 무서웠어요." 

예전에 헐리우드 영화들에서 미국으로 목숨을 걸고 이주해오는 여러 나라의 불법 이민자들의 삶을 그린 영화를 볼 수 있었는데 <황해>는 내가 살고 있는 한국으로 오늘도 어디선가 온갖 인간의 조건을 유보하고 건너오는 타인들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불행히도 오늘 한국은 그들에게 단 한 자리도 내줄 길 없는 송곳들만 꽂혀 있는 척박한 곳이다. 코리안드림이라는 판타지조차 허용되지 않는 땅. 판타지조차 가능하지 않는 그야말로 황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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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이게 다 분량이 너무 많아서다. 3백여 페이지 정도만 됐어도 그럭저럭 봐줄만했을 거고, 이런 소설도 있군 하고 넘어갔을 수도 있었다. 나는 하루키가 설명과 묘사의 역할에 대해 가지고 있는 그의 태도를 지지한다. 설명이나 묘사가 많을 수록 이야기 진행은 더뎌지게 마련인데 단 소설전체의 '무게'를 느끼게 또는 지탱하게끔 할 때는 공들여 묘사한다는 태도. 잘 구사된 설명과 묘사는 작품 전체의 분위기나 감성을 이끈다. 내게 [살인의 숲]의 지지부진한 설명과 지문, 묘사는 좀 끔찍했다.   

2008년 각종 미스터리소설부문 신인상을 수상한 [살인의 숲]은 2007년 정도에 완성된 것이라고 보면 될텐데 이게 몇 년 안되는데도 이미 상당히 뒤처진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사이코패스에 대한 교과서적인 정의 정도에 기반한 형상화에 머물고 있다는 생각이다. 물론 절정부분에서의 두 여자의 대담하고도 교활한 결투는 그럭저럭 봐줄만 했지만 손에 땀을 쥐게 하는 긴장감을 갖긴 어려웠다. 어린 시절 치명적인 외상을 갖고 성장한 주인공 애덤 라이언의 이야기는 뭔가 핵심을 건드리지 않고 안개만 피워대다 만 듯하고(그런 의미에서 한국판 표지는 딱이다. 기대는 잔뜩하게 하잖아. 뭔가 있대니까...일단 들어와봐...) 뭐 인물들도 인상적이지 못했다. 아일랜드에서도 벌어지는 보존 대 개발의 대립을 끌어들이는 것은 거의 변죽만 울릴 뿐이고, 여튼 이게 다 분량이 너무 많아서다. 좀더 타이트하고 콤팩트한 소설이었다면 내가 이렇게까지 나쁜 얘기를 하진 않고 넘어갔을 것이다. 몇 년 전에 읽었던 [직장으로 간 사이코패스(원제는 Snakes in Suits)]가 아마 내가 처음 사이코패스에 대해 읽었던 책이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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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한 권 더 읽기보다는 한 해를 돌이켜보는 고요한 시간을 갖고 싶다. 주변의 우울한 소식들, 특히 올해는 아픈 사람들이 많다. 물론 안타깝게 젊음을 고스란히 갖고 떠난 이들을 보내며 살아왔지만 건강을 잃은 지인들을 보는 중년의 겨울, 세밑은 칼바람이 드는 느낌이다. 별일 없이 살다가 별일을 맞게 되면 알짤 없이 현실적인 문제들이 줄줄이 들이닥친다. 어쩔 수 없이 지난 삶과 앞으로의 삶을 생각해봐야 하는 시기가 있다. 과거는 지나갔고 앞으로는 어쩔 것인가. 지난 날 걸어온 길이 있는데 새날이 뭐 그리 또 새로울 것도 없겠지만 지난 길이라도 수습할 것들은 그렇게 해야 할 것이다.  

이런 와중에 지난 주부터 읽고 있는 책이 [살인의 숲]인데, 이제 딱 절반 읽었다. 본문만 575페이지인데 글자 포인트도 작고 한 페이지가 빽빽하다. 엄청난 분량이라는 거다. 각종 상의 신인상을 휩쓸었다는 배경을 갖고 있어 이 상들이 기획사 나눠먹기에다 참석한 가수들에게만 상을 주는 한국연말 가요상이 아닌 바에야 나름 권위를 가질 거라는 순진한 믿음을 갖고 책을 대했는데 이건 뭐 기대만큼의 수준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을 이미 하고 있다.  

작품해설이라고 붙은 글을 보면 이 작품에 대해 분명한 자기 해설을 갖지 못한 어정쩡함이 아쉽기도 하다. '이 작품은 어떠한 형태의 작품이라고 딱 잘라서 뭉뚱그리기가 어렵다'. 이게 뭐야.  

여튼 끝까지 가보긴 해야겠지, 책 뿐만 아니라 세상사 모든 일에는 모험도 필요한 거니까, 좋은 경험했다고쳐도 괜찮을 것이고, 다 읽고 나면 지금까지 짜증낸 거 사과해야 할지도 모를만큼 좋은 작품일 수도 있고.     

 

 

 

 

 

 

   

문득 클리프턴 페디먼이 여행갈 때 읽곤 한다는, 아주 재밌게 읽는다는 책, 앤서니 트롤럽(트롤로프)Anthony Trollope의 책들이 생각났다. 여행갈 때 비행기 안에서 페이퍼백으로 읽는 그런 소설인 모양인데 국내에는 이 작가의 작품이 번역된 게 없다. 궁금하다. 19세기 소설, 그 '막대한' 이야기속으로 빠져볼 수 있다는 건 독서가 주는 즐거움이겠다. 나는 찰스 디킨스에 도전해볼까 해서 사들여놨다. 앤서니 트롤럽 작품 한 권이라도 맛보기, 새로운 항목으로 추가. 

 

 

 

 

 

 

 

 

[The Eustace Diamonds]는 귀족출신의 정치가인 플란타제네트 팰리서와 그의 똑똑하고 야심많은 아내의 생애를 추적한 작품인데, 돈이 인간관계에 미치는 영향을 아주 예리하게 분석했다고 클리프턴은 소개했다. [The Way We Live Now]는 어둡고 냉소적인 소설로 멜몬트라는 음모를 잘 꾸미는 금융가가 주인공인 모양이다. 두 작품 모두 자본주의라는 괴물같으면서도 매혹적인 시대를 배경삼아 방대한 이야기가 펼쳐지는 소설같다. 디킨스와 트롤럽(혹은 트롤롭). 이들 작품을 대하는 나의 환상은 대충 이렇다. 봄바람 살랑대는 어느 봄날, 컨디션 최고인 날, 아무 걱정거리 없이 따스한 햇살받으며 책에 흠뻑 빠져 사는 나날, 내 생의 봄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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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기 귀한 영화들을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있으니 이번 주말엔 오랫만에 영화를 보러 갈까 생각중이다, 별 일이 없다면... . 이젠 청춘이 아니라서 상영시간이 긴 영화나, 좌석이 불편한 곳에서의 관람은 몸을 불쾌하게 만들어서 몰입도를 잡아먹는다. 뭐 DVD를 구입하거나 집에서 볼 수 있는 상황이 되면 좋겠지만 이게 또 스크린으로 보는 매체적 특성이 있기도 하고, 사이트 돌아다니며 구매가능성을 타진하는 등의 행위도 귀찮고 구태여 그러고 싶은 욕구도 아직은 강하지 않고.. 그리하여 어쨌든 영화를 보려면 움직여야 하는데 아직은 동하는 마음에 일단 귀기울이는 정도다.  

필름포럼에서 [고다르×고다르] 출간과 맞춰 고다르의 후기영화들을 상영한다. 내일(8일)부터 하는데 시간이나 장소 등은 필름포럼 카페에서 확인하면 되겠다.  

책은 알라딘에서 지금 주문하면 15일에 받을 수 있다는데 영화 상영 때 10% 할인가에 살 수도 있다니까 그 방법도 좋을 듯하다. 1996년까지 해 온 고다르의 인터뷰들을 편집한 것이니까 제법 시기가 좀 된 거지만, 이번 상영에 포함될 <영화사>와 관련한 인터뷰도 있으니 볼만은 할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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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리프턴 페디먼은 [평생독서계획](존 S. 메이저 공저)에서 조지 엘리엇을 말하면서   

"위대한 소설들은 저마다 일정한 독서 속도를 가지고 있다"고 했다. 조지 엘리엇의 소설(들)은 천천히 읽어야 한다고, "카펫을 까는 것처럼 천천히 펼쳐지는" 소설들. 

가라타니 고진의 [역사와 반복]을 읽다 점 찍어둔 오에 겐자부로의 [그리운 시절로 띄우는 편지]는  바로 그렇게 카펫을 펼치듯 천천히 읽어야 하는 소설 같았다. 소장하고 싶은 책이다. 좀더 매끈한(?) 번역으로 재출간되기를 기대한다. 굳이 하루키의 [노르웨이의 숲]과 비교하고 싶지는 않지만(어차피 고진이 비슷한 시기에 출간된 이 책들을 간략히 비교하며 언급한 것 때문에 읽었던 책이라 그 생각을 안할 순 없었다) 두 사람의 '근거지'가 다른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하는 편이다. 

[그리운 시절로 띄우는 편지]는 예이츠 시의 인용구처럼 "어른들이 보금자리라 부르는 골짜기를 떠나지 않으리라던 어린 시절의 덧없는 맹세를 생각하네"라는 기본적인 정서를 담고 있는 소설이었다. 작중 화자인 나 'K'가 어린 시절 고향의 숲에서 '아름다운 아이' 기이 형을 만나면서부터 두 사람이 각기 다른 '근거지'(K는 도쿄, 기이 형은 고향 그 곳)를 구축해가며 살아가는 동안의 평생의 교류가 이 소설의 주요 골격인데, K의 정신적 근거지는 늘 고향의 마을, 숲과 동격인 기이 형처럼 보인다. 반면, 하루키의 [노르웨이의 숲(상실의 시대)]은 사실 근거지도, 상실할 무엇도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 자체가 젊은이들을 자극한 상실감일 수도 있을 것이다. K가 그리운 시절로 늘 편지를 띄우겠다고 끝맺는 것과 "나는 어디에 있는가" 새삼 질문하며 수화기 저 편의 미도리를 부르며 끝나는 것과의 차이라면 차이가 아닐까,... 라고 아주 단순하고도 도식적인 생각 밖에 나는 못했다. 

 쑹홍빙의 [화폐전쟁]은 금융 파생상품이 어떻게 토대 없는 건물을 계속 쌓아올리는지에 대한 자세한 프로세스를 이해하는 데 좀 어려움을 겪는 것 외에는 금방 읽을 수 있는 책이다. 쑹홍빙의 금본위제 회복, 위안화의 기축통화로서 준비 등 중국 정부를 대변하는 듯한 그의 견해가 의혹을 불러일으키며 이 책에 대한평가절하도 있는 듯하다. 음모론적 흥미가 아니라 실제 세계가 되어가는 꼴을 꼼꼼히 관찰해야 한다는 각성을 다시 한 번 일깨웠던 책이다. 요즘 세상사 돌아가는 것에 시들했던 게으름을 반성했다. ....... 장하준은 최근 책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 첫머리에서 "경제학의 95퍼센트는 상식을 복잡하게 만드는 것"이라고 턱하니 적었다.  

그렇다고 아무리 복잡해 보여도 현실이란 (금융)자본가 대 전세계 '서민'의 이해관계가 대립하는 것이다 라는 식으로 늘 깔끔하게 정리해 주는 수많은 글들에 무슨 힘이 있을까, 새삼 요즘 넘쳐나는 비판적 글들의 무기력함이 눈에 밟힌다.      

 스릴러의 새로운 하위 장르로 '테크스릴러'가 심심찮게 나오는 모양인데, 전직 시스템 컨설턴트였던 다니엘 수아레즈의 이 소설은 전 세계가 동일한 시스템을 사용하며 동일화되어 가는 현실을 이용할 때 벌어질 수 있는 세계의 새로운 전쟁을 보여주려는 듯했다. '레드퀸 가설'과 진화론으로 어떻게 자신이 새로운 세계의 주인이 될 수 있는지 설파하는 대목은 작가가 출발점으로 삼은 생각이 아닌가 싶었다. 동일한 시스템이 갖고 있는 치명적 결함, 약점은 세계경제가 연동되는 시대의 위험과 기회와 대체로 일치한다. 소설은 완결된 것이 아니라 [데몬과 프리덤]이라는 후속편을 기다려야 한다.  

 

 한동안 히가시노 게이고가 뜸했는데, 나왔길래 역시 지나치지 못하고 읽었다. 연습작처럼 보이는 단편 모음집이니까 가볍게 읽으면 된다. 연습작처럼 보여서인지 가끔 성긴 도약이 보이기도 하지만 머리 식힐겸 보는 것도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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