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비닛]을 재밌게 봤는데, [설계자들] 또한 무난히 읽힌다. 장정일이 신랄하게 본 것에 비하면 나는 푹 빠져 읽었다고 할 수 있으니 장정일 식으로 말하면, 나는 "한 번도 문학의 진수를 맛보지 못한 사람" 축에 속한 모양이다. 뭐, 내가 생각해도 문학에 대해 할 말이 없다. 굳이 덧붙이자면, [설계자들]이 뛰어난 작품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데는 동의한다는 정도. 많은 사람들이 지적하듯이 오리지널리티라고 할만한 게 없다는 거. 하루키의 그늘이 짙게 느껴진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특히 도서관과 도서관장 너구리영감이나 사팔뜨기 사서의 세계는 영락없이 [해변의 카프카]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엉뚱하게 펴져가는 이야기의 세계도 그렇고, "의아한 북극곰" 같은 얘기는 하루키가 즐겨 구사하는 허구의 인용 혹은 패러프레이즈의 환영이 어른거린다. 후반으로 갈수록 초반의 집중력이 흩어져서 그저그런 범죄영화를 보는듯하다.   

그럼에도, 이 작가는 절망을 흠씬 느끼게 하는데 절묘한 재주가 있었다. 나의 센티멘탈이 이입된 것이라 해도 어쩔 수 없다. 읽는 내내 물젖은 솜처럼 기분이 무거웠으니.   

작가는 주인공을 비롯한 '푸주'세계의 살수들을 '킬러' 보다는 '자객'이라고 부르고 싶은 듯하다. 시대에 어울리지 않는 어마어마한 호칭이지 않는가. 자객이라 호명함으로써 때아닌 낭만적 품격을 이들에게 부여하고 싶은 듯했다. 차마 낯간지러운 시대에 말이다. 주인공 래생을 비롯한 자객들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있는 것들의 치사한 짓거리 뒤치닥하는 정도의 하수의 일 뿐이다. 그러므로 작가는 하수의 똘마니가 아니라 그래도 뭔가 의지를 지닌 듯한 '자객'으로 죽고자 하는 인물들을 애써 그린다. 죽음의 환대라고나 할까.

그리는 세계가 그렇다보니 소설에는 죽음, 문 앞을 서성이고 있는 죽음을 생각하게 하며 묵직해진다. 언제 들이닥칠지는 모르지만 분명 문 밖에 있는. 살인이나 죽음과 관련된 조사도 정성스러워서 정보를 많이 알게 된다. 요즘은 이런 디테일을 제법 잘 활용하는 듯하다. 독일제 헨켈이라는 칼을 다루는 거라든지, 털보의 소각장, 화장에 대해서. 이런 디테일들의 묘사가 인상적이었다.  

임성순의 [컨설턴트]에 이어 김언수의 [설계자들]까지, 폭발적으로 발전한 범죄스릴러 장르소설의 활황이 본격적으로 한국소설에도 기꺼이 받아들여지고 있는 건가. 

   
 

 왜 도서관이었을까. 도서관은 이렇게 조용하고 이곳에 가득 쌓인 책들은 저토록 무책임한데. (p.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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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평론가이자 문학동네 편집위원인 신형철의 언급. 못견디게 보고 싶어지는 책 발생. 

 

 

 

 

 

 

 

   
  윤리적 난제를 서사 구성의 동력으로 활용하는 솜씨가 돋보인다는 점에서 '윤리학적 상상력'의 작가라고 부를 만한 이언 메큐언... 예컨대 그의 대표작인 [속죄]의 서사구조가 위 언급과 긴밀하게 연결돼 있는 터다. 이 작품은 '자신을 타인의 생각과 감정 속에 상상해 넣는 능력'이 결핍돼 있어 비극을 유발한 한 소녀가 뒤늦게 그 능력을 배우기 위해 평생을 한 권의 소설을 완성해나가는 데 바치면서 속죄하는 이야기였다  
   

 이 간결한 작품 요약이 어찌나 구미를 당기는지 ...  

이언 매큐언의 작품으로는 [이런 사랑]을 읽은 적이 있다. 과연 신형철의 평대로 이언 매큐언의 작품에는 그런 윤리적 난제를 떠안게 된 사람들의 딜레마에 독자 또한 공감할 수 있을지를 가늠해보도록 하는 면이 있는 것 같다.  

[이런 사랑]은 우연이 돌풍에 휩싸인 풍선기구의 사고를 목격하고 돕다가 힘에 부치자 결국 잡고 있던 줄을 놓아버린 주인공의 이후 변화하는 삶을 이야기한다. 주인공과 달리 끝까지 공중으로 올라가는 풍선기구의 줄을 잡고 있던 한 남자는 떨어져 사망하고 말았던 것. 당시 읽을 때 나는 충분히 공감하며 읽진 못했었는데... . 이언 매큐언의 세계를 음미해볼 필요가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포스트잇 :  

인용문에서 이언 매큐언이 했다는 '위 언급'이란 9.11테러와 관련해 한 말이라는데, 인용해보면, "만일 비행기 납치범들이 그들 자신을 승객들의 생각과 감정 속에 상상해 넣을 수 있었다면, 아마 계획을 진행하지 못했을 것이다. 희생자의 마음 속에 일단 들어가면 잔혹해지기란 어렵다. 자기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의 마음을 상상하는 것은 우리 인간성의 핵에 자리한다. 그것이 공감의 본질이고 윤리의 시작이다". 

오늘 반값 도서 중 눈에 띄인 책이 테드 창의 [당신 인생의 이야기]였는데, 주문했다. SF는 정말 잘 읽고 싶은데 좀처럼 읽기가 쉽지 않다. 이해력이 현저히 떨어져가는 상황. 곁에 두고 묵혀두기라도 하다가 어느 날 소슬하게 읽으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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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쓰메 소세키와 막스 베버 읽기를 통해 21세기를 극복하는 힘에 대해 고민하는 강상중의 이 책의 장점은 나쓰메 소세키와 그의 소설에 대한 강상중 식 읽기의 재미와 마지막 9장의 제2의 인생에 대한 계획을 소개받으며 웃을 수 있다는 점이다.

     

 

 

 

 

 

 

   

소세키의 소설을 소개받는 재미가 쏠쏠하지만 그의 고민들이 내놓는 결론들이라는 것이 너무 소박하거나 너무 모범생스러워서 답답했을 즈음, 마지막에 제2의 인생의 계획을 터놓고 얘기하는 부분에서 빵터졌다.  

뻔뻔과 그리고 우석훈 식의 '혁명'과 어디쯤 맞닿을 법도 한 '명랑'. 

고민을 거쳐서 그 끝에 뻔뻔해지라는 것, 혹은 그럴 수 있다는 것, '깊게 고민해서 꿰뚫어라'는 것.일본이나 한국이나 '새로운 파괴력'이 필요한 듯한데 그 힘은 어디서 나올 수 있는 것일까? '고도를 기다리며'와 같은 것인가? 오지 않을 고도... . 아니, 언젠가는 올 것이라고 믿어라, 믿는 자가 구원받는다. ...

며칠 전 어렵게 다시 일을 찾은 지인이 전화를 걸어와 일한지 얼마 되지도 않았지만 함께 일하는 사람들에 대한 실망, 생각보다 자신의 견해와 어긋나기 시작하는 계획들.. 등등 불만을 토로하며 하소연하자 내가 그랬다, '의미를 찾지 말라'고. 지금 '일이 필요하고 돈을 벌어야 한다'는 생각만 하라고 충고랍시고 했다. 예민한 그녀는 조직 속에서 일하는 데 늘 어려움을 겪었고 흔히 듣는 '에고가 강하다'는 말을 듣는 사람이다. 오래 버티지 못하고 늘 스스로 사퇴하는 일을 반복한 끝에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을 하던 그녀는 몇 번의 좋지 않은 일들의 고비를 만나면서 고정적인 수입이 필요한 사정에 처했다. 그래서 어렵게 구한 일자리인데 또다시 그녀는 너무나 괴로워하고 있었다. 그녀의 고민을 들어보면 늘 다른 이들은 '속물'이고 자신만이 형형한 고민이 살아있는 존재로 대립하는 식의 구도를 상정하곤 했다. 지레 지쳐서 혼자 떨어져나오는 일들의 반복. 과도한 의미부여, 그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현실에 대한 실망, 그러한 실망스러운 현실 속에 처한 사람이 다른 누구도 아닌 자기라는 자괴감... 이런 불평들의 반복을 그녀로부터 듣다보니 그만 '의미를 찾으려하지 말라'고 짜증스럽게 내뱉었다.  

며칠 전의 일이었지만 이 일이 머리속에 맴돈다. 다소 밉살스러운 지인과 관계된 저간의 맥락이 있긴 하지만, '의미를 찾으려하지 말라'고 말했다는 것 자체가 내 스스로 생각해도 다소 당혹스러운 사건이었다. 

[고민하는 힘]의 말들이 강상중식 청춘의 '멘토'로서의 말이라면 적당한 것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그럼에도 뭔가 답답하다. 무책임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 내지름, 명랑뻔뻔의 길은 불가능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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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전 로쟈님 서재에서 그리고 오늘 우석훈님 블로그에서 목수정의 [야성의 사랑학]에 대한 소개를 받았다. 이런 소재에 대해 별로 관심이 없는 관계로 그저 그런가보다 하고 넘어가려는데, 두번이나 소개를 받다보니 미리보기를 통해 몇 페이지를 읽어봤다.  

길지 않은 프랑스에서의 생활을 정리하고 2003년 한국에 돌아온 저자 목수정은, 외환위기를 '극복'했다고 하며 월드컵의 후끈한 열광을 마친 후의 한국에서 먼저 거리에서 가슴을 뛰게 하는 여자를 보고 차 한잔 하자고 말을 거는 남자들이 사라진 현상에 주목한다. 거기서부터 이 책이 목적하는 주제를 향한 항해가 시작된 모양이다. 자못 어떤 결론에 이르렀는지 궁금해서 조만간 이 책도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쫌만 생각해보면 거칠게나마, 거리에서 차 한잔 하자는 수작이 없어진 이유는 간단하다. 지역,같은 지역 내에서도 구, 혹은 동별 구획에 따라 이른바 '레베루'가 딱 정해져 있는데 아무 거리에서나 아무(물론 마음에 드는 사람이어야 하지만)에게 다가가 수작하는 게 쉬울리가 없다. 그리고 그 근저에는 흔히 수작의 주동자인 남자들의 '루저'감성이 어느 정도는 만연해 있기 때문일 것 같다. '루저'... 이 단어에 내포된 의미가 있지 않은가? 그들은 내내 '위너'였다가 언제부터가 '루저'가 된 것이다. 거리에서 '저기... 차 한잔..' 이럴 수 있는 사람은 남자들이었다. 남자이니까 그게 가능했다. 남자라는 이유만으로. 선한 의미에서 여자들에게는 즐거움이었다. 그런데 이게 이제는 가능하지 않다. 남자라는 이유만으로는. 서열로 구획된 '레베루'가 있는 상황에서도 지레 염두에 두어야 할 사항들이 줄줄이다. 점장이가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 앞날이 예상되는 스펙과 견적을 두고 감히 젊음의 도전 운운하기엔 이 사회에서의 운신의 폭이 넓지 않다.     

오현종의 [거룩한 속물들]에서처럼 버스를 타고 가다 '저 여기에서 내려요...'하면 여기? 아, 이 동네에서 사는구나, ... 어쩌구, 딱 견적 나온다. 아, 삭막하구랴. 나이트클럽이나 홍대같은 구역에서 만난다면 이 또한 일단 딱 견적 한 번 뽑아보고, 더 캐봐야하는지 어쩐지도 가늠하게 된다. 이런 것도 연애라면 연애로 인정해야지.  

 

 

 

 

 

 

 

아직 영화를 보지 못했지만 오랜만에 나온 로맨틱코미디 <시라노:연애조작단>가 그나마 추석연휴 개봉영화 중 선전하고 있는 모양이다. 한국 로맨틱코미디로 관객 200만을 바라본다는 건 지금 상황에서 굉장히 주목해야 할 사항인데, 그만큼 영화에서 로맨틱코미디나 멜로 장르가 성공하기 쉽지 않은 상황을 말해주고 있다. 이야기만으로는 TV 드라마의 막장을 따라잡기 힘들다.  

시나리오를 봤을 때 난 올드하다는 느낌을 지울수 없었다. 물론 감독 김현석의 역량과 제작사의 기획능력을 믿긴 했고 시나리오보다 연출이 잘 나왔다는 얘기를 들었지만, 요새 젊은 사람들이 이런 영화를 볼까, 혹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 궁금해하긴 했다. 200만을 바라본다니, 분명 이유가 있을 것이다. 마케팅 힘만으로 200만이 되지는 않으니까. 김현석 감독은 남자들의 연애매뉴얼과 심리를 잘 아는 사람이기도 하다. 추석연휴에 만난 연인들이 갈 데 없이 극장에 가서 이 영화를 봤다는 얘기기도 하고. 그럼에도... 별로 보고 싶지는 않은 영화다. 아, 놔, ... 이런 영화 별로 안좋아한다니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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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 그림과 책 만듦새 땜에 혹해서 읽게 된 두 책.  

 

 

 

 

 

 

 

제인 오스틴의 마지막 작품이라는 [설득]과 헨리 제임스의 [데이지 밀러] 

제인 오스틴의 작품은 [오만과 편견]이 대학 시절 우연히 하게 된 스터디에서 채택된 텍스트였기에 대충 내용만 아는 정도(다른 학생이 이 소설을 맡았다.), 그 외 오스틴의 소설을 본 적이 없다. 영화도 본 적이 없다. 별로 내 취향이 아니라서 관심이 없었다.   

헨리 제임스는 [아메리칸]과 [나사의 회전]으로 알 뿐이다. [나사의 회전]은 영화도 봤다, 영화를 먼저 보고 원작이 보고 싶어서 보게 된 케이스.   

[데이지 밀러] 펭귄문고판에는 데이비드 로지의 해설이 있어서 참고가 많이 되었다.  

예전의 나는 사람이 좀 덜 됐던 지라, 연애, 결혼 뭐 이따우 것들에 눈도 돌리지 않았던 얼척없는 시절이 있었다. 인간의 달달한 감성을 믿지 못했다. 그렇다고 지금은 완전히 달라졌냐하면 ... 그건 또 아니다. 그저 조금 변한 정도? 사랑이나 로맨스, 결혼이 무작정 계약만은 아닌 것 같고, 그 계약을 통해 인간의 아주 심오한 감정이 작동하는 어렵고도 힘겨운 삶의 일부분일 수밖에 없음을 인정해야 한다는 정도? 잘 몰러. 나이들수록 참 어려운 것 같다. 

헨리 제임스는 데이지 밀러가 어떤 종류의 여성의 전형처럼 받아들여지는 걸 좋아하지 않았다고 하지만, 읽다보면 싫어도 그렇게 볼 수밖에 없는 듯하다는 생각이 든다. 규범이나 풍속, 암묵적 계율 등에 그다지 얽매이지 않고 즐거운 일탈을 하고 있는 듯한 여자 앞에서 억압과 금기, 망설임으로 어정쩡하게 있는 남자의 구도란 언제봐도 흥미롭고 안타까움이 있다. 그 남자의 회한이 가슴을 울리는 것일까? 세월이 흘러도? 

[설득]은 과연 오스틴다운 재미를 선사한다. 이제 시대, 신분과 계급, 풍속,남녀의 차이 등의 맥락에서 오스틴의 소설을 읽는다는 건 싱거운 소리를 하게 되는 것 같고... . 어긋나고 오해가 쌓이며 이게 닿을까 말까 애태우던 독자들에게 끝부분의 웬트워스의 편지는 마치 자신이 앤이 된 듯 그 고백의 황홀함을 온전히 받아들이게 한다. 이 나이에도 여전히 이런 설렘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이 신기해서 헛웃음을 쳤다. 이와이순지 감독의 <러브레터> 마지막 장면이 생각났다. 독서카드 뒤에 그려진 그림. 그 때의 느낌 그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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