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기 귀한 영화들을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있으니 이번 주말엔 오랫만에 영화를 보러 갈까 생각중이다, 별 일이 없다면... . 이젠 청춘이 아니라서 상영시간이 긴 영화나, 좌석이 불편한 곳에서의 관람은 몸을 불쾌하게 만들어서 몰입도를 잡아먹는다. 뭐 DVD를 구입하거나 집에서 볼 수 있는 상황이 되면 좋겠지만 이게 또 스크린으로 보는 매체적 특성이 있기도 하고, 사이트 돌아다니며 구매가능성을 타진하는 등의 행위도 귀찮고 구태여 그러고 싶은 욕구도 아직은 강하지 않고.. 그리하여 어쨌든 영화를 보려면 움직여야 하는데 아직은 동하는 마음에 일단 귀기울이는 정도다.  

필름포럼에서 [고다르×고다르] 출간과 맞춰 고다르의 후기영화들을 상영한다. 내일(8일)부터 하는데 시간이나 장소 등은 필름포럼 카페에서 확인하면 되겠다.  

책은 알라딘에서 지금 주문하면 15일에 받을 수 있다는데 영화 상영 때 10% 할인가에 살 수도 있다니까 그 방법도 좋을 듯하다. 1996년까지 해 온 고다르의 인터뷰들을 편집한 것이니까 제법 시기가 좀 된 거지만, 이번 상영에 포함될 <영화사>와 관련한 인터뷰도 있으니 볼만은 할 듯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클리프턴 페디먼은 [평생독서계획](존 S. 메이저 공저)에서 조지 엘리엇을 말하면서   

"위대한 소설들은 저마다 일정한 독서 속도를 가지고 있다"고 했다. 조지 엘리엇의 소설(들)은 천천히 읽어야 한다고, "카펫을 까는 것처럼 천천히 펼쳐지는" 소설들. 

가라타니 고진의 [역사와 반복]을 읽다 점 찍어둔 오에 겐자부로의 [그리운 시절로 띄우는 편지]는  바로 그렇게 카펫을 펼치듯 천천히 읽어야 하는 소설 같았다. 소장하고 싶은 책이다. 좀더 매끈한(?) 번역으로 재출간되기를 기대한다. 굳이 하루키의 [노르웨이의 숲]과 비교하고 싶지는 않지만(어차피 고진이 비슷한 시기에 출간된 이 책들을 간략히 비교하며 언급한 것 때문에 읽었던 책이라 그 생각을 안할 순 없었다) 두 사람의 '근거지'가 다른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하는 편이다. 

[그리운 시절로 띄우는 편지]는 예이츠 시의 인용구처럼 "어른들이 보금자리라 부르는 골짜기를 떠나지 않으리라던 어린 시절의 덧없는 맹세를 생각하네"라는 기본적인 정서를 담고 있는 소설이었다. 작중 화자인 나 'K'가 어린 시절 고향의 숲에서 '아름다운 아이' 기이 형을 만나면서부터 두 사람이 각기 다른 '근거지'(K는 도쿄, 기이 형은 고향 그 곳)를 구축해가며 살아가는 동안의 평생의 교류가 이 소설의 주요 골격인데, K의 정신적 근거지는 늘 고향의 마을, 숲과 동격인 기이 형처럼 보인다. 반면, 하루키의 [노르웨이의 숲(상실의 시대)]은 사실 근거지도, 상실할 무엇도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 자체가 젊은이들을 자극한 상실감일 수도 있을 것이다. K가 그리운 시절로 늘 편지를 띄우겠다고 끝맺는 것과 "나는 어디에 있는가" 새삼 질문하며 수화기 저 편의 미도리를 부르며 끝나는 것과의 차이라면 차이가 아닐까,... 라고 아주 단순하고도 도식적인 생각 밖에 나는 못했다. 

 쑹홍빙의 [화폐전쟁]은 금융 파생상품이 어떻게 토대 없는 건물을 계속 쌓아올리는지에 대한 자세한 프로세스를 이해하는 데 좀 어려움을 겪는 것 외에는 금방 읽을 수 있는 책이다. 쑹홍빙의 금본위제 회복, 위안화의 기축통화로서 준비 등 중국 정부를 대변하는 듯한 그의 견해가 의혹을 불러일으키며 이 책에 대한평가절하도 있는 듯하다. 음모론적 흥미가 아니라 실제 세계가 되어가는 꼴을 꼼꼼히 관찰해야 한다는 각성을 다시 한 번 일깨웠던 책이다. 요즘 세상사 돌아가는 것에 시들했던 게으름을 반성했다. ....... 장하준은 최근 책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 첫머리에서 "경제학의 95퍼센트는 상식을 복잡하게 만드는 것"이라고 턱하니 적었다.  

그렇다고 아무리 복잡해 보여도 현실이란 (금융)자본가 대 전세계 '서민'의 이해관계가 대립하는 것이다 라는 식으로 늘 깔끔하게 정리해 주는 수많은 글들에 무슨 힘이 있을까, 새삼 요즘 넘쳐나는 비판적 글들의 무기력함이 눈에 밟힌다.      

 스릴러의 새로운 하위 장르로 '테크스릴러'가 심심찮게 나오는 모양인데, 전직 시스템 컨설턴트였던 다니엘 수아레즈의 이 소설은 전 세계가 동일한 시스템을 사용하며 동일화되어 가는 현실을 이용할 때 벌어질 수 있는 세계의 새로운 전쟁을 보여주려는 듯했다. '레드퀸 가설'과 진화론으로 어떻게 자신이 새로운 세계의 주인이 될 수 있는지 설파하는 대목은 작가가 출발점으로 삼은 생각이 아닌가 싶었다. 동일한 시스템이 갖고 있는 치명적 결함, 약점은 세계경제가 연동되는 시대의 위험과 기회와 대체로 일치한다. 소설은 완결된 것이 아니라 [데몬과 프리덤]이라는 후속편을 기다려야 한다.  

 

 한동안 히가시노 게이고가 뜸했는데, 나왔길래 역시 지나치지 못하고 읽었다. 연습작처럼 보이는 단편 모음집이니까 가볍게 읽으면 된다. 연습작처럼 보여서인지 가끔 성긴 도약이 보이기도 하지만 머리 식힐겸 보는 것도 좋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무라카미 하루키의 논픽션(자신은 논픽션도 아니고 비(非)픽션이라고 하지만) [언더그라운드]와 [약속된 장소에서] 두 권이 문학동네에서 재출간된다고 한다.  

 

 

 

 

 

 

   

 

1995년 3월 어느 날 아침 도쿄 지하철에 사린가스를 살포한 옴진리교 사건에 관심을 가진 하루키는 피해자들과 범인들을 만나 인터뷰를 진행한다. 이 두 권은 그 인터뷰를 기록한 책이다.  

 2권 [약속된 장소에서]는 국내 처음으로 나오는 책인데 사건의 가해자들인 옴진리교 범인들의 인터뷰라고 한다. 피해자들의 인터뷰를 담은 1권 [언더그라운드]는 열림원에서 나온 책을 읽었었다. 지금은 절판되었고 문학동네에서 다시 나오는 셈이다.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당시 피해자들인, 그야말로 그 날 아침 출근 또는 어딘가로 가기 위해 그 곳에서 그 지하철을 탔던 일반 사람들을 만나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그 진술을 써내려간 글들이라서 한 번 손에 쥐고 쭉 읽어내려가기가 쉽지 않은 책이었다.   

계간지 [문학동네] 지난 호에 실린 하루키의 인터뷰에 이 [언더그라운드] 프로젝트와 관련된 언급이 나온다. [언더그라운드]를 읽으면 자연스럽게 [언더그라운드]와 안톤 체호프의 [사할린 섬]을 연관시킬 수 있다. 그건 [1Q84] 1권 20장에서 [사할린 섬]의 '길랴크 인' 대목을 덴고가 후카에리에게 읽어주는 형식으로 길게 인용한 장면에서 비로소 이해할 수 있었다.  

인터뷰에서 하루키는 1995년 한신 대지진과 옴진리교 사건을 보면서 일본이 전후 오십년을 기점으로 분명하게 바뀌고 있음을 실감했다고 한다. 일본을 피하고 싶었던 하루키가 자신은 '일본 소설가이고 일본을 무대로, 일본인을 주인공으로 소설을 쓰고 있'다는 인식을 더욱 강하게 한 듯하다. 자신의 눈으로 그 변화를 지켜보자는 마음이 강했다고 한다.  

어떤 식으로 옴진리교 사건을 다룰 것인가, 여기서 하루키는 체호프의 [사할린 섬]을 생각했을 것이고, 이후 [1Q84]에서 비법 혹은 해명의 일단을 느낄 수 있도록 쓴 듯하다.  

[사할린 섬]은 꼼꼼히 읽어보면 정말 좋은 책이라고 하는 하루키는 소설가로서 특히 '묘사'에 감탄한다.  

"그는 의견은 거의 쓰지 않았어요. 그저 세세한 부분을 찬찬히 바라보고 묘사합니다. 관찰하고 묘사한다. 또 관찰하고, 묘사한다. 그 자세 속에 그의 분노라든가 슬픔이 떠오릅니다. ...... 거기에 비교할 건 못 되지만, [언더그라운드]도 남의 이야기를 정확하게 듣고 그걸 공정하게 기록함으로써 나 자신의 분노, 슬픔을 표출하려고 애썼습니다. 나중에 다시 읽어보면서, 그 일을 하길 잘했다고 느낄 때가 많았습니다." (인터뷰) 

"...체호프가 묘사한 황량하기 짝이 없는 사할린의 바닷가 풍경이 그의 머릿속에 뚜렷하게 자리를 잡았다. 덴고는 체호프가 들은 그 파도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눈을 감자 덴고는 인적 없는 오호츠크 해의 찬 바닷가에 홀로 서서 깊은 사색의 포로가 되어 있었다. 체호프의 어디에도 둘 데 없는 우울한 사색을 공유할 수 있었다. 그 땅 끝의 대지에서 그가 느낀 것은 압도적인 무력감이었으리라. 19세기 말에 러시아 작가로 산다는 것은 아마도 달아날 곳 없는 통렬한 숙명을 등에 짊어지는 것과 같은 의미였을 것이다. 그들이 러시아에서 도망치려고 하면 할수록 러시아는 그들을 제 몸뚱이 안으로 삼켜버렸다." ([1Q84] 1권) 

[언더그라운드]와 [약속된 장소에서]를 읽는 한 가지 길 안내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도대체 이 건조하고 계속되는 구술 속에서 무엇을 읽을 수 있고 읽어야 하는지, 읽는 자의 몫이 남는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이 조그만 책자를 오랫동안 질질 끌었는데, 꽤나 재미있었다. 책의 백미는 저자 코난도일과 주인공 셜록홈즈간의 갈등을 언급한 대목이라고 생각한다. 코난도일은 한차례 홈즈를 죽이려고 했지만 결국 실종으로 떼웠고([셜록홈즈의 마지막인사-마지막 사건]) 다시 살렸다([셜록홈즈의 귀환-빈집]).  

 

 

 

 

 

 

 

 

페이퍼를 차분히 쓰고 싶지만 될런지 모르겠다. 흥미를 당기는 책이었는데... . 덕분에 코난도일의 전기나 평전, 관련 책도 더 읽어보고 싶다는 욕심도 들었지만 이 역시 가능할 것 같지 않다. 국내 번역서 한 권 정도 읽어볼 생각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취미는 독서... 다 보니, 무슨 탐구하듯이 책을 읽는 것도 아니고 평생의 주제를 찾아 관련된 책을 일관되게 읽는 것도 아니어서 가끔씩, 집에 돌아왔는데 마음이 싱숭생숭해지거나 막막할 때 땡기는 책을 손에 들고 아무 데나 우선 읽고 보는 때가 있다. 요즘은 소설 책을 쥘 때가 단연 많은 듯하다. 그렇게 되어서 며칠 전에 하루키의 [태엽감는 새]를 읽은 것이다. 그냥 2권중반쯤을 펼쳤는데 내친김에 매일 저녁 3권,4권까지 다시 한 번 읽었다.  

 

 

 

 

 

 

 

 

하루키는 왜? 라는 식의 물음이 떠올라서 가라타니 고진의 [역사와 반복]에 나오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풍경-[1973년의 핀볼]"이라는 비평을 또한 다시 읽었다 신랄하다.

 

 

 

 

 

 

 

예전에 읽을 때는 거리를 두고 읽은 편이었다면 이번에는 고진의 탁견이 예언 수준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태엽감는 새]나 이후 하루키의 소설들이 고진의 예언과 얼마나 다르게 변화되었는지를 살피는 것도 흥미롭겠다고 생각했다.이번에 새롭게 눈에 들어온 건 고진이 1980년 대에 나온 세명의 소설가의 소설 세 권을 비교한 대목, 오에 겐자부로의 [그리운 시절로 띄우는 편지], 하루키의 [노르웨이의 숲(상실의 시대)], 그리고 나카가미 겐지의 [땅의 끝 지상의 시간].   

  "오에 겐자부로의 [그리운 시절로 띄우는 편지]에는 상실과 '비탄'의 감정이 넘치고 있는데 반해, 무라카미 하루키의 [노르웨이의 숲]은 태연하다."  

[노르웨이의 숲(상실의 시대)]를 읽은 마당에 오에의 [그리운 시절로 띄우는 편지]를 어찌 읽지 않을 수 있겠나. 

  

 

 

 

 

 

 

절판된 도서인데 소장하고 있는 도서관이 있으니 빌려봐야할 형편이다.

나카가미 겐지의 책은 번역서가 없는 모양이다.  

예전에 읽을 때도 로렌스 더럴의 [알렉산드리아 사중주]는 어떤 책일까 궁금했었는데 드디어 번역서도 나왔다. 고진은 헤겔의 [정신현상학]의 구성과 같고,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 대항해 쓴 소설이라고 평했다. 별로 많은 관심이 없는 책으로 묻힌 듯한데, 하긴 네 권이나 된 데다 그런 거 확인하려고 책을 읽는 건 재미없는 독서일 수도 있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