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미는 독서... 다 보니, 무슨 탐구하듯이 책을 읽는 것도 아니고 평생의 주제를 찾아 관련된 책을 일관되게 읽는 것도 아니어서 가끔씩, 집에 돌아왔는데 마음이 싱숭생숭해지거나 막막할 때 땡기는 책을 손에 들고 아무 데나 우선 읽고 보는 때가 있다. 요즘은 소설 책을 쥘 때가 단연 많은 듯하다. 그렇게 되어서 며칠 전에 하루키의 [태엽감는 새]를 읽은 것이다. 그냥 2권중반쯤을 펼쳤는데 내친김에 매일 저녁 3권,4권까지 다시 한 번 읽었다.
하루키는 왜? 라는 식의 물음이 떠올라서 가라타니 고진의 [역사와 반복]에 나오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풍경-[1973년의 핀볼]"이라는 비평을 또한 다시 읽었다 신랄하다.
예전에 읽을 때는 거리를 두고 읽은 편이었다면 이번에는 고진의 탁견이 예언 수준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태엽감는 새]나 이후 하루키의 소설들이 고진의 예언과 얼마나 다르게 변화되었는지를 살피는 것도 흥미롭겠다고 생각했다.이번에 새롭게 눈에 들어온 건 고진이 1980년 대에 나온 세명의 소설가의 소설 세 권을 비교한 대목, 오에 겐자부로의 [그리운 시절로 띄우는 편지], 하루키의 [노르웨이의 숲(상실의 시대)], 그리고 나카가미 겐지의 [땅의 끝 지상의 시간].
"오에 겐자부로의 [그리운 시절로 띄우는 편지]에는 상실과 '비탄'의 감정이 넘치고 있는데 반해, 무라카미 하루키의 [노르웨이의 숲]은 태연하다."
[노르웨이의 숲(상실의 시대)]를 읽은 마당에 오에의 [그리운 시절로 띄우는 편지]를 어찌 읽지 않을 수 있겠나.
절판된 도서인데 소장하고 있는 도서관이 있으니 빌려봐야할 형편이다.
나카가미 겐지의 책은 번역서가 없는 모양이다.
예전에 읽을 때도 로렌스 더럴의 [알렉산드리아 사중주]는 어떤 책일까 궁금했었는데 드디어 번역서도 나왔다. 고진은 헤겔의 [정신현상학]의 구성과 같고,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 대항해 쓴 소설이라고 평했다. 별로 많은 관심이 없는 책으로 묻힌 듯한데, 하긴 네 권이나 된 데다 그런 거 확인하려고 책을 읽는 건 재미없는 독서일 수도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