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스위스 다보스 ‘세계경제포럼’에서 빌 게이츠는 “가난한 사람을 위한 ‘창조적 자본주의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필자가 이에 특별히 주목하는 이유는 두 가지다. 첫째는 돈만을 최고의 가치로 아는 한국의 속물적 경제관계 인사들에게 게이츠의 지적은 큰 충격으로 다가서리라는 점이다. 둘째는 그의 패러다임이 필자가 줄곧 주장해온 견해와 흡사한 면을 갖고 있다는 점이다.

필자는 2006년 게이츠와 흡사한 견해를 한국사회경제학회 학회지 ‘사회경제평론’에 두 차례에 걸쳐 ‘공동체의 경제학’이란 제목으로 게재했고, 이를 국제학술회의에서 발표한 바 있다.

게이츠는 이타심을 강조한 애덤 스미스의 ‘도덕정조론’에 관심을 촉구하면서 신자유주의 경제학이 경쟁에서 탈락한 가난한 사람들의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내놓는 데 실패했다고 주장했다. 다만 그는 신자유주의를 뒷받침해온 신고전파경제학의 실패의 근원이 그 이론의 기본적 전제 속에 잉태되어있다는 점을 지적하지는 못한 것 같다.

현재 대학 강단을 지배하는 신고전파의 자본주의 경제학은 개인을 독립적 존재로 보고, 효용의 극대화와 이윤의 극대화를 절대적 가치라고 믿는 ‘경제인’을 전제로 이론을 전개하고 있다. 신자유주의 경제정책은 바로 이런 자본주의 주류경제학의 기본 패러다임을 현실에 옮겨놓은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피도 눈물도 없는 ‘경제인’은 현실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실제로는 이웃에 대한 사랑이나 자비심이 더 크게 작용한다. 그 이유는 인간의 본질이 공동체적인 존재이기 때문이다. 애덤 스미스는 ‘국부론’에서는 이기심의 효능을 강조했지만, 그에 훨씬 앞서 출간한 ‘도덕정조론’에서는 사람의 본성이 이타적인 것이며, 이타심이 없는 이기심의 위험성을 강조했다. 이런 그의 강조는 인간이 고립해서는 살 수 없고, 반드시 공동체를 형성하여 살 수밖에 없다는 사실에서 비롯된다. 게이츠는 이기심만으로는 안 되고 이타적 행위가 필요하다고 강조하면서 “창조적 자본주의”를 제창했지만, 경제학 교과서의 패러다임을 피도 눈물도 없는 ‘경제인’을 전제로 한 것으로부터 ‘공동체’를 출발점으로 한 그것으로 바꾸어야만 한다는 점에 생각이 미치지는 못한 것 같다.

필자가 앞의 논문에서 강조한 것은 인류가 수만년 이상 공동체에서 벗어난 적이 없다는 객관적 인식을 출발점으로 하여 경제학을 근본적으로 재구성해야 한다는 점이었다. 사람은 결코 공동체에서 자유로운 존재가 아니다. 자본주의가 발전하면서 개인의 독립성이 강해졌지만, 인간은 본질적으로 공동체를 벗어날 수 없다. 돈이 지배하는 자본주의사회에서 인간은 이기적인 습성을 키웠지만, 이타적 공동체성을 저버리면, 수전노로 낙인 찍힌다. 경제정책도 이기적 영역은 사적 영역에 맡길 수 있지만, 이타적 공동체적 영역은 사회공동체, 즉 국가의 책임이다. 신자유주의의 모순은 이기적 사적 영역을 지나치게 키운 나마지, 이타적 공적 영역을 경시한다는 점에 있다. 종전의 경제학체계를 근본적으로 바꾸지 않는 한, 신자유주의의 모순을 극복할 수 없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게이츠의 ‘창조적 자본주의론’은 중요한 문제 제기다. 이를 계기로 신자유주의의 모순을 극복할 수 있는 새로운 경제학 패러다임으로서 ‘공동체의 경제학’에 관한 토론이 전개되기를 기대한다.

- 주종환 / 동국대 명예교수

출처 : 경향신문
날짜 : 2008년 2월 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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獨 코레아협의회 최현덕 소장 “함께 가는 상호문화로”
입력: 2008년 01월 28일 18:29:08
 


“ ‘다문화’라는 말에는 방향이 없습니다. 그냥 다양한 문화가 존재한다는 현상을 기술할 뿐이죠. 이 바탕에 ‘상호문화’라는 내용과 가치를 채워야 합니다.”

‘다문화’라는 말이 쓰인 지도 얼마 되지 않은 이 땅에서 그것을 넘어서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독일 베를린 소재 민간단체인 코레아협의회 한국학연구센터 소장 최현덕 박사(49·사진)다. 그는 지난 10~12일 전남대에서 열린 상호문화철학 국제학술대회 참석차 한국을 방문했다. 국내에 ‘상호문화철학’을 처음 소개한 최박사를 지난 22일 경향신문사에서 만났다.

그는 자신의 정체성을 ‘디아스포라’로 규정했다. “제 인생의 절반이 외국 생활이었죠. 오랫동안 외국에 살면서 정체성 문제로 많이 고민했습니다. ‘너는 너무 독일식으로 변했어’라는 주변 사람들의 말에 충격을 받기도 했어요. 그런 말에 대해 제 입장을 갖기까지 10년이 걸렸습니다.”

디아스포라는 재일조선인 2세인 서경식 도쿄경제대 교수 덕분에 한국 사회에도 익숙해진 말이다. 최박사는 디아스포라를 “경계에 서 있는 사람”이라고 했다. 보통은 면(面)에 있어야 자리가 있다고 인식하지만 선(線) 위에 있어도 자리가 있다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오히려 선 위에 있으면 면 위에 있을 때 보이지 않던 것을 볼 수 있다고 했다. 가령, 어째서 이쪽에서 억압적인 것이 저쪽에선 아무렇지도 않고, 이쪽에서 ‘합리적’이라고 하는 것이 저쪽에서는 ‘비합리적’인 것이 되는지 말이다.

이쯤에서 상호문화철학에 대해 궁금해졌다. 최박사는 이를 “철학계 내의 대안활동”이라고 했다. “인식론, 논리학, 윤리학, 미학 등과 같은 철학의 한 분야라기보다 철학의 모든 분야를 통괄하되 ‘상호문화성’이라는 새로운 관점에서 기존 철학을 비판하고 이론을 전개하는 철학”이다. 남미 철학자 호세 마르티가 1877년 “철학의 발생지가 그리스뿐 아니라 세계 여러 곳에 있으며, 콜럼버스가 도착하기 전 미 대륙에 존재했던 사유전통도 같은 권리로 철학에 포함돼야 한다”고 한 데서 비롯됐다. 유럽에서는 1980년대 말 서구중심적 사유에 대한 반성적 차원에서 활발해졌다. 한국에서는 최박사의 주도로 2006년 11월 전남대에 처음 국제대회가 열리며 소개됐다. 두번째인 이번 대회에는 베트남 사회과학원 철학연구소장과 베네수엘라 문화부 차관 등이 발표자로 나와 각각 자국의 사회적 연대의 기초와 민중교육·철학교육 등에 대해 토론했다.

“철학은 타 학문과 달리 자신의 정체성을 스스로 규정하는 도구를 가졌습니다. 서구에서 철학이 대학 강의, 연구서 출판, 철학회 결성 등의 형태로 표현되고 제도화됐지만, 아프리카에서는 마을 사람들이 모인 자리에서 현자(賢者)의 구술로 표현되기도 했죠. 문화적 맥락의 다양성에 대한 인식이 철학에도 필요한 것입니다.”

다(multi)문화와 구별되는 상호(inter)문화에 대해 물었다. “ ‘여러 문화가 한 사회 속에 공존한다(다문화)’고 할 때 그것들이 어떤 관계를 맺느냐가 문제됩니다. ‘다문화’는 여러 문화가 있는 속에서 나오는 정책들을 얘기할 뿐, 정책의 방향성에 대해선 말해주지 않죠. 하나의 주류문화가 다른 것을 흡수하는 식으로 나갈 수도 있고, 그렇지 않다면 여러 문화들이 서로 게토처럼 고립돼 존재할 뿐이죠.”

이는 이주노동자와 국제결혼 여성들이 한국의 주류사회와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가를 보면 잘 알 수 있다. 최근 문화관광부 내에 ‘다문화정책팀’이 신설되긴 했지만, 정부나 주류사회가 보여주는 공식적인 태도는 좋게 말해야 ‘보듬어안기’다. 서양이 낯선 존재를 만나온 방식도 마찬가지다. 개종을 강요하며 ‘동일화’한다든지, 알카에다에 대해서처럼 맹목적으로 두려워한다든지, 타히티를 그린 고갱의 경우처럼 ‘낯섦’을 자신을 보강해주는 쉼터 정도로 삼는 것이었다.

최박사는 한 쪽이 다른 쪽을 주변화하는 모든 형태의 ‘중심주의’를 배격한다는 점에서의 ‘동등성’과, 언제든 자신이 변화할 준비가 돼 있는 상태에서 임하는 ‘대화’를 상호문화의 요건으로 꼽았다. 그런데 권력관계가 엄존하는 상황에서 낯선 존재끼리 과연 ‘동등한 대화’가 가능할까. 그는 ‘낯섦의 해석학’을 언급했다. 곧 낯선 존재에 대한 이해다. 이 과정에서 해석 또는 번역이 필요한데, 낯선 존재 자신이 번역의 주체가 될 수 있게 해야 한다고 했다. “낯선 자에 대한 자신의 무지를 겸허하게 인정하면서, 그 모름이 불러일으키는 호기심과 동시에 모름의 비밀스러움에 대한 경외감을 지니고 열린 태도로 임할 때 진정한 만남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물론 이는 현실적으로 쉽지 않다. 그래서 중요한 것이 우리 교과과정에서 국민윤리 또는 도덕으로 왜곡돼 있는 시민교육 또는 철학교육이다. “디아스포라의 문제는 단지 교과과정의 내용으로 포함되는 것을 넘어, 디아스포라의 관점을 반영해 도덕 및 철학교육 자체를 재검토할 것을 요구하게 될 겁니다. 디아스포라가 단지 소수자, 희생자인 데서 벗어나 그들의 고유한 관점으로 다수자들이 그냥 넘겨버리는 억압의 문제를 제기하는 겁니다. 그렇게 이 사회를 형성해가는 더욱 적극적인 주체로 나설 수 있을 때, 우리 사회는 훨씬 인간적인 얼굴을 하게 되겠죠. 이제 디아스포라의 관점이 반영된 교과과정을 고민할 때입니다.” 독일에서 조국의 민주화운동과 많은 관련을 맺었던 이 여성 철학자는 이제 선 위에 서서, 면 위에 있는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예리하게 짚어낼 준비를 하고 있다.


- 최현덕 박사는? -

1980년 이화여대 철학과 졸업 후 독일 유학, 97년 브레멘대에서 ‘사회비판 개념으로서의 이데올로기 개념형성사’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80년대 후반에 한국민중판화 독일 순회전, ‘핵시대의 한국인’ 사진전, 구속 민중미술인 국제석방 캠페인 등을 벌이며 해외에서 한국 민주화운동을 지원했다. 박사학위 후 일시 귀국, 한일장신대 철학과 교수로 일했지만 2000년 학내 분규로 ‘쫓겨났다’. 이후 그는 역시 그리스도신학대의 학내 문제로 재임용되지 못한 김상봉 민예총 문예아카데미 교장(현 전남대 교수)과 함께 ‘거리의 철학자’로 일했다. 2001년 이후 독일에 체류하며, 한국에 있는 김교수를 끌어들여 2006년부터 상호문화철학 국제학술대회를 한국에서 두 차례 열었다.

〈 글 손제민·사진 박재찬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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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르헤스에게 책 읽어주던 16살 소년
 
 
 
한겨레 최재봉 기자
 







 

» 〈보르헤스에게 가는 길〉
 
〈보르헤스에게 가는 길〉
알베르토 망겔 지음·강수정 옮김. 산책자·1만원



서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던 열 여섯살 소년이 단골 손님이었던 예순다섯살 노 작가를 만난다. 그는 아르헨티나 국립도서관장이자 세계적인 문학 거장이었던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1899~1986)였다. 이미 시력을 상실해 제 눈으로는 무언가를 읽을 수 없었던 보르헤스는 소년에게 한 가지 제안을 한다. 일이 끝난 뒤 자신의 집에 와서 책을 읽어줄 수 있겠느냐는 것이었다. 그렇게 해서 소년은 1964년부터 1968년까지 보르헤스에게 책을 읽어주고 대화를 나누는 ‘특권’을 누리게 된다. 소년의 이름은 알베르토 망겔. 〈독서의 역사〉와 〈나의 그림 읽기〉 같은 책으로 국내에도 잘 알려진 편집자이자 작가다.

〈보르헤스에게 가는 길〉은 망겔이 이 무렵을 돌이켜 쓴 책이다. 대작가이자 국립도서관장이라는 신분과는 어울리지 않게 보르헤스의 서재는 평범하고 소박했다고 망겔은 회고한다. 그 이유의 하나는 보르헤스의 엄청난 기억력에 있었다. 한번 읽은 책은 스캐닝을 한 것처럼 머릿속에 고스란히 저장되었던 것이다. 보르헤스의 방에는 자신이 쓴 책이 없었다. 그는 자신이 쓴 모든 글을 암송했다. 영국 여행길에는 “신을 조금 놀래주려고” 고대 영어로 주기도문을 암송할 정도로 어학적 재능도 뛰어났다. “보르헤스에게 현실의 정수는 책 속에 있었다.”(36쪽)

1948년생인 망겔은 어느덧 그 자신 소년 시절 만났던 보르헤스와 비슷한 나이에 접어들었다. “그의 아파트 계단을 오르던 소년은 과거의 어딘가에서 길을 잃었고, 이야기를 좋아했던 현명한 노인네도 사라졌다.”(98쪽) 그러나 생전의 보르헤스가 그에게 했던 말마따나 “아무것도 결코 사라지지 않”(96쪽)는다. 〈보르헤스에게 가는 길〉에는 노년의 보르헤스가 여전히 살아 숨쉬고 있다.

최재봉 기자




"나는 눈 먼 보르헤스에게 책을 읽어 줬다"
보르헤스에게 가는 길
알베르토 망구엘 지음|강수정 옮김|산책자|163쪽|1만원
박해현 기자 hhpark@chosun.com 기자의 다른 기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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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쟁기와 칼은 손의 확장이다. 소우주(小宇宙)는 눈의 확장이다. 그러나 책은 그 이상이다. 책은 기억의 확장인 것이다.'

20세기 환상문학과 포스트모더니즘의 선구자로 꼽히는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1899~1986)는 걸어 다니는 도서관으로 불렸을 정도로 방대한 양의 책들을 머리 속에 저장했다. 보르헤스는 시인·소설가로 활동하면서 아르헨티나 국립도서관장을 지냈고, 말년에 시력을 상실한 뒤에도 독서를 멈추지 않았다. 찾아온 손님마다 책을 읽어달라고 부탁했던 그는 책 읽어주는 아르바이트생도 고용했다. 이 책의 저자 알베르토 망구엘은 서점 직원으로 일하던 열여섯 살 때부터 4년 동안 매일 저녁 보르헤스의 서재에서 책을 읽어주고, 함께 영화를 보러 가기도 하면서 성장기를 보냈다. 보르헤스로부터 영혼의 세례를 받은 망구엘 역시 방대한 독서량을 바탕으로 국내에도 번역된 '독서의 역사' 등의 책을 펴내 세계적 명성을 누리고 있다.

망구엘은 이 책을 통해 보르헤스의 서재는 예상과는 달리 책이 그리 많지 않았다고 회상한다. 백과사전과 각종 사전, 기번의 '로마제국쇠망사', 슈펭글러의 '서구의 몰락',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 등이 서재 귀퉁이에 얌전하게 꽂혀 있었다고 한다. 기억의 천재였던 보르헤스는 굳이 집을 도서관으로 꾸밀 필요가 없었다는 것이다.

보르헤스에게 책읽기는 '수천 년 전에 시작해서 한 번도 끝난 적이 없는 인류의 대화'를 뜻했다고 망구엘은 적었다. 한 권의 책은 그 책을 읽는 사람의 수만큼이나 확장될 수 있다는 '텍스트의 무한성' 개념을 바탕으로 보르헤스는 우주를 도서관에 비유했다.








▲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보르헤스는 책을 반드시 끝까지 읽을 의무가 없다는 입장이었다. 그는 조이스의 소설 '피네간의 경야'를 완독하지 않았으면서도 그 책을 주제로 언어학 강연을 하기도 했다. 줄거리를 알고, 백과사전의 도움을 받은 덕분이었다.

보르헤스는 추리소설을 사랑했다. '추리소설의 공식이 소설가로 하여금 그 나름의 경계를 설정하고 말과 그 말로 만들어낸 이미지의 효율성에 집중할 수 있게 하는 이상적인 서술구조라고 여겼다'는 것이다. 그는 실명하기 전에 서부영화나 갱영화를 보면서 눈물을 흘릴 정도로 대중영화를 좋아했다.

"보르헤스는 예민한 몽상가였고, 꿈 얘기를 즐겨했다… 특히 잠들기 전의 짧은 시간, 의식이 사라지는 것을 의식할 수 있는 잠과 깸 사이의 시간을 좋아했다"고 망구엘은 회상했다. 그러나 보르헤스는 "꿈같은 이야기를 쓰고 싶어. 그런데 성공한 적이 없는 것 같아"라며 탄식했다고 한다.


입력 : 2008.01.04 22:38

 

 

 

 

보르헤스에게 책 읽어주던 소년 老 작가의 '도서관 낙원' 엿보다
'보르헤스에게 가는 길'
알베르토 망구엘 지음ㆍ강수정 옮김 / 산책자 발행ㆍ163쪽ㆍ1만원







 


1964년 어느날 초저녁, 아르헨티나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의 구미문학 전문서점 ‘피그말리온’에 단골인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1899~1986)가 찾아왔다.
당시 이미 세계적 명성을 얻고 있는 소설가이자, 국립도서관장이었던 보르헤스는 16세의 서점 직원인 알베르토 망구엘(1948~)에게 “저녁에 집에 와서 책을 읽어주지 않겠느냐”고 물었다.
유전적으로 약한 시력을 타고난 보르헤스는 30세 무렵부터 서서히 시력을 잃어가다가 50년대 후반엔 실명한 상태였다. 지금은 캐나다에서 손꼽히는 소설가로 활약 중인 망구엘은 문호의 청을 받아들여 일주일에 서너 번씩 4년간 보르헤스가 노모와 함께 사는 작은 아파트를 드나들었다.
이 책은 망구엘이 책을 읽어주러, 구술 작품을 받아쓰러 다니며 보고 들은 보르헤스에 관한 기록이다. 100쪽 가량의 본문 분량(남은 60여 쪽엔 보스헤스의 생애ㆍ작품 해설, 연대기, 어록이 실렸다)이 말해주듯 세세하고 정치한 기록은 아니다.
그도 그럴 것이 저자가 스페인어 원서를 출간한 것이 2004년, 그 시절을 40년쯤 흘려보내고 난 뒤다. 망구엘도 “이건 기억이 아니다. 이건 기억의 기억의 기억”이며 “기억들을 일으킨 사건들은 몇 개의 잔상, 몇 개의 낱말만을 남기고 사라졌다”고 고백한다.
크게 실망할 일은 아니다.
책 1권을 독자 100명이 읽으면 100권의 책이 탄생한다는 것이 당시로선 선구적인 보르헤스의 지론이었다. 망구엘은 작가를 두 부류, “세계를 한 권의 책에 담아내려는 작가”와 “그보다 드물기는 하지만 세계가 한 권의 책이어서 본인과 다른 이들을 위해 그 책을 읽으려는 작가”로 나누고 보르헤스는 단연 후자라고 썼다.
보르헤스는 존재와 세계를 해석의 여지가 무한히 열린 텍스트로 본 것이고, 그 점에서 이 책은 매우 보르헤스적인 보르헤스에 관한 글쓰기다.
저자는 보르헤스의 독서를 공들여 서술한다. 그는 처음 보르헤스의 서재를 봤을 때 “낙원을 도서관의 형태로 상상한다는 사람의 서재치고는” 규모가 작아 실망했다고 말한다.
낡은 책꽂이는 키플링, 스티븐슨, 체스터턴, 조이스, 오스카 와일드, 마크 트웨인 등 영미 작가 작품과 쇼펜하우어, 슈펭글러, 기번, 리하르트 마이어 등의 철학ㆍ역사서로 소박했다. 하지만 곧 노작가에게 장서의 양은 그리 중요하지 않음을 곧 깨닫는다. 스스로 ‘쓰레기 하치장’이라 부른 놀라운 기억력 덕분에 보르헤스는 언제든 필요한 구절을 읊어 인용할 수 있었다.
나아가 그는 현실의 정수가 책에 있다고 믿는 텍스트주의자였다. 그는 책을 읽고 쓰고, 책에 대해 이야기하며 “수천 년 전에 시작돼서 한 번도 끝난 적이 없는 대화를 이어가고 있음을 본능적으로 인식했다.”
그에게 역사는 바로 책이었던 셈이다. 망구엘은 책등을 쓰다듬으며 그 제목과 저자를 정확히 알아내는 보르헤스를 묘사하며 “그와 책 사이에는 생리학의 법칙으로는 가능하지 않은 어떤 관계가 존재한다”고 찬탄한다.
망구엘은 공정한 저자다. 문자를 편애한 탓에 보르헤스가 음악, 그림 등 다른 장르엔 별다른 조예가 없었음을 분명히 밝힌다. 균형 잡힌 서술 덕에 이 책은 거장의 인간적 약점을 엿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보르헤스는 자신에게 헌정하는 작품을 낭독하는 작가를 면전에서 모욕하는 심술을 부리거나, 이따금 인종차별적 발언을 쏟아내기도 했다. 반면 그는 좋아하는 사랑 노래를 듣고 싶어 여러 번이나 뮤지컬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를 보러가자고 어린 조력꾼을 조르거나, 서부극이나 갱 영화를 보며 몰락한 영웅을 눈물로 애도하는 천진한 노인이기도 했다.
“꿈 같은 이야기를 쓰고 싶어. 시도는 해봤지. 그런데 성공한 적이 없는 것 같아”란 몽상가적 발언을 전하며 저자는 지난 세기를 풍미한 보르헤스의 환상문학의 연원을 보여준다.
라틴문학의 또다른 거장이자 절친한 친구였던 비오이 카사레스-실비나 오캄포 부부와의 유쾌한 잡담은 보르헤스가 어떤 일상에서 창작의 동력을 얻었는지를 알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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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만원 세대를 구출하라](4) 바리케이드를 쳐라
입력: 2007년 12월 11일 18:31:45
 
“이제 토플책 덮고 거리로” 자각하는 침묵의 세대
청소년들이 지난 10일 서울 이랜드 앞에서 비정규직 탄압에 항의하는 모임을 갖고 있다. |프레시안 제공
- 권익을 위해 싸우는 프랑스 청년들-

지난달 초 프랑스의 파리1·4, 툴루즈, 루앙, 페르피낭, 렌 등 전국 10여개 대학 학생들은 각 캠퍼스에서 시위를 했다. 등록금 인상과 기업 기부금 모금을 허용하는 내용의 ‘대학 자치법’이 대학을 사유화하고 대학 평준화를 깬다는 이유였다.

지난해 1월 프랑스 정부가 최초고용계약법(CPE)을 발표했다. 20인 이상 사업장에서 26세 미만의 노동자를 고용하는 사용자는 최초 고용 2년간 특별한 사유없이도 노동자를 자유롭게 해고할 수 있게 한 것이다. 첫 취업하자마자 해고에 직면하게 된 청년들은 법안 철회를 요구하며 대대적 시위를 벌였다. 3월에는 100만명이 대학과 거리에 모였다. 그리고 3개월 뒤 정부는 법안을 폐기했다.

그러나 이보다 더 악조건 하에 있는 한국의 88만원세대는 조용하다. 교육권·노동권과 밀접한 등록금 문제나 비정규직 문제에 대해 이렇다 저렇다 말이 없다. 초·중·고 때부터 사회 과목에서 노동기본권은 물론 플래카드 작성법, 모의 노사 교섭까지 가르치는 독일·프랑스 등 유럽 국가와 달리 노동 문제를 거의 가르치지 않는 한국의 제도권 교육을 주요 원인으로 꼽는 이들이 많다. 교육부와 전경련이 함께 만든 경제교과서가 등장하고, 기업이 대학을 평가할 정도로 과도한 시장주의도 한 요인으로 지적된다.

조한혜정 교수는 이렇게 분석했다. “‘성공하는 사람들의 7가지 습관’ 같은 책을 읽으며 자란 이들 세대는 ‘모든 게 너 하기 나름’이라는 규칙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젊은 인재들은 자기 주도적으로 노동시장에 접근할 수 있어야 하는데, 그저 삼성을 바라면서 시스템에 그대로 포섭돼 버립니다.”

- 88만원세대 책읽기로 시작된 자각 -

최근 발간된 ‘88만원세대’는 이런 침묵과 순응, 체념에 맞서 “토플책을 덮고 바리케이드를 치고 짱돌을 들라”고 제안했다. 88만원세대들이 자신의 권리를 찾기 위해 저항하고 조직하라는 것이다. 물론 이런 요구는 너무나 얌전하고, 기성체제에 안주하는 88만원세대에게는 어울리지 않는다. 그러나 모든 88만원세대가 그런 것은 아니다. 여전히 소수이지만, 이런 문제 인식에 대해 공감하고 자각하는 이들이 있다.

그런 공감은 우선 ‘88만원세대’라는 책을 사서 읽는 작은 운동에서 발견할 수 있다. ‘88만원세대’는 출간 4달 만에 2만5000부를 돌파했다. 사회과학 분야에서 ‘꿈의 1만부’라는 판매량을 2배 넘어섰다. 지난 5일 8쇄로 1만부를 더 찍었다. 출판사 레디앙의 이광호 대표이사는 “젊은 세대를 소비 주체가 아닌 사회 경제적 의미로 분석한 이 책이 광고를 낸 것도 아닌데, 젊은 층에서 입소문을 타며 꾸준히 잘 팔리고 있다”고 말했다. 일반적으로 사회과학 서적의 20대 구입 비율은 20%. 그런데 ‘88만원세대’는 40% 이상이다. 20대에게 인기 있는 책이 ‘부자학’ ‘처세술’ ‘취업교재’라는 점을 고려하면 ‘88만원세대’의 판매량이나 판매 추세는 이례적이다.

20대 블로거들이 온라인에 올린 ‘독후감’도 수백 건에 이른다. 연구공간 ‘수유+너머’가 시민독서프로젝트 교재로 사용하는 등 각 지역의 여러 독서모임, 문화사랑방에서도 책 읽기가 활발하다. ‘수유+너머’ 독서프로젝트 매니저 김연숙씨는 “우리의 ‘불안정한 삶’이 독서프로젝트의 키워드였는데, ‘88만원세대’는 사회 비정규직 문제와 세대 문제를 지식이 아닌 현실로 다루고 있어 교재로 선택했다”고 말했다.


청소년들이 이랜드 비정규직 문제에 항의하며 쓴 구호, ‘비정규직 악법이 뿌린 저주, 다음은 우리 차례예요’라고 적혀 있다. |프레시안 제공
- 21세기의 의식화 교재로 -

성공회대·연세대·인천대 일부 수업에서도 ‘88만원세대’를 교재로 사용하고 있다. 인천대에서 ‘한국사회노동문제’라는 이름의 교양 강의를 맡고 있는 하종강 한울노동문제연구소 소장은 “이 책은 지금의 20대들에게 가장 적나라하게 우리의 현실을 보여주고 있다”고 말했다. 연세대 사회학과 조한혜정 교수는 “학생들이 아주 공감한다. ‘이제 내가 정말 왜 불안한지 알겠다. 책 읽고 생각하는 것부터가 짱돌을 드는 것’이라고 말하는 학생들이 많다. 대부분 똑똑하게 핵심을 간파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조교수 수업에 들어간 학생들이 과제로 써 낸 서평에서는 상위권 대학 학생들도 ‘88만원세대’로서 느끼는 불안감이 드러난다. 다음 학기 졸업을 앞둔 박모씨(25)는 지원 회사 10곳 중 7곳 정도가 서류 전형에서 떨어졌다. “(회사를) 골라가기는커녕 백수를 준비해야 할지도 모르는 시점에 이른 것이 아닌가 합니다. 정말 88만원을 받고 회사를 다니게 되는 것은 아닌지 겁이 나는군요.”

기성 세대를 향한 불만도 터져나왔다. 김윤하씨(19)의 말이다. “기성 세대는 우리가 어떤 상황에 처해 있고 왜 이렇게 힘들어 하는지 이해하려는 노력이 부족해요. 조금만, 아주 조금만이라도 손을 내밀고 관심 가져주시면 될 텐데….” 윗세대의 관심만으로 해결될 수 있을까. 서명선씨(20)는 “기성세대에게 ‘우리 불쌍하니까 가엾게 여겨서 고쳐주세요’라고 할 건가. 그들이 나누어 줄 것 같은가. 그럴 가능성은 희박하다”고 말했다.

- 개인아닌 사회문제로 보자-

이원희씨(20)는 이렇게 주장했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고통받고 있는데 이는 사회적인 문제이지, 개인적인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 이제 이야기 좀 나누어 봅시다. 우리가 사는 세상이잖아요.” 안슬기씨(20·여)는 “밤새 토플책을 읽기보다 하루치 토플 시험을 보지 말자. 시사 공부를 위해 신문 스크랩을 하기보다 아름다운 반항으로 신문의 기사거리가 되어보자”는 제안을 했다. 최모씨(19)는 “지금은 ‘노동 기회 소멸의 시대’다. 이제 이 판을 한 번은 엎어볼 때다. ‘배틀로얄’에서 게임의 룰을 한번 정도는 뒤집어 버릴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고, 그 용기가 존재함을 서로 깨달을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말했다.

88만원세대들이 작지만 의미 있는 행사도 했다. 성공회대에서는 11월27일부터 3일간 ‘비정규직 전시회 시즌 1’이 열렸다. 민주자료관과 민주주의와 사회운동연구소가 주최하고 학생들도 참여했다. 유소라씨(24)는 “어떻게 하면 더 많은 친구들에게 공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을까. 다 같이 함께 노력하고 뭉치는 것이 대안임을 알릴 수 있을까 고민했다”고 말했다. 참여 학생들은 ‘우리가 바로 미래의 비정규직’이라며 전시 참여를 촉구하는 대자보를 붙였다. 전시장에는 홈에버, 롯데호텔 노조 등 비정규직 농성장에서 기증받은 글과 영상물로 빼곡히 채웠다. 3일 동안 200명이 넘는 학생들이 다녀갔다. “4학년으로 취업준비를 하는 동안 저 역시 불안해요. 시험 때면 예민해져요. 하지만 개인적으로 해결하려면 도무지 답이 보이지 않는 문제잖아요.” 유씨의 말이다.

- 저항하는 사이 경쟁 탈락 걱정도 -

그러나 누가 나서서 바리케이드를 칠 것인가. 김모씨(20·여)는 “내가 (책에서 말한대로) 짱돌을 드는 사이에 다른 ‘현명한’ 이들은 좁은 취업문을 벌써 비집고 들어가고 있을지 모른다”고 말했다. 누군가는 5% 정규직을 향해 뛰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김씨의 손목을 붙들어 맨다. 박모씨(22)도 “짱돌을 들었을 때 생길 수 있는 모호함보다 누군가 짱돌을 들 때 나는 GRE(미국일반대학원 입학자격시험)를 공부해 얻을 수 있는 작은 이익을 추구하게 될 것 같다”고 말했다.

김호경씨(25·성균관대)는 “20대가 처한 고민을 친구들과 나눠볼 수 있는 기회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면서도 “세대 중심으로 20대 문제에 접근하는 것은 와 닿지 않는다. 결국은 계급 문제 아닌가”라고 반문했다.

- 아직 소수지만 곧 운동으로 확산될 것 -

이들 88만원세대들의 자각과 공감이 사회 변화의 에너지로 발전할 수 있을까. 하종강 소장은 “이랜드 신촌 본사에 와서 깃발 들고 오는 청소년들이 소수지만 있다”며 “소수의 정서가 다수가 될 수 있는 상황이 올 것”이라고 전망했다. 그는 “1970~80년대 소수 극렬 운동권의 정서가 80년대 말 대중의 정서가 됐다”며 “지금도 대학 내에서 구조적으로 접근하는 운동권은 백안시 되지만 신자유주의가 심화되면 대중의 정서로 확산될 것”이라고 말했다.

홍세화씨는 “20대들은 이념적으로 보수적인 게 아니라 탈정치 때문에 보수적이 된 것”이라며 “88만원세대가 정치에서 벗어나 살 수는 없기 때문에 정치에 관심을 가질 때 길이 열릴 것”이라고 말했다.

〈김종목·유정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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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노총 “李 지지·정책연대”…노동자의 ‘자기 배반’
입력: 2007년 12월 10일 02:56:27
 
-“계급 정체성 잃은 인기투표 아니냐”
-대상 제한 문국현·권영길은 아예 배제해 논란
-“85만 중 10만표로 결정 대표성 의문”

한국노총은 정책연대 후보 선정을 위해 지난 1~7일 휴대폰 번호를 제출한 조합원 45만6152명을 대상으로 총투표를 실시한 결과, 유효투표 23만6679표(투표율 52%) 중 이명박 후보가 9만8296표(득표율 41.5%)를 얻어 1위를 차지했다고 밝혔다. 대통합민주신당 정동영 후보는 7만3311표(31%), 무소속 이회창 후보는 6만5072표(27.5%)를 얻었다. 한국노총은 10일 이명박 후보측과 정책연대 협약체결식을 갖고 공개지지를 선언한다.


한국노총의 총파업 진군대회 모습. /경향신문 자료사진
그러나 노동계 내부에선 “항상 여당을 지지하던 20여년 전으로 돌아간 것 같다”며 노총으로서의 정체성에 심각한 타격을 입을 것이라는 우려가 제기된다. 이용득 한국노총 위원장은 지난 10월초 이후보와의 정책간담회에서 “비정규직 문제에 대해 ‘해고 자유 확대’를 언급하는 등 대통령 후보로 우려스러운 부분이 있다”고 지적한 바 있다.

이후보는 지난 7월 당 경선 울산 합동연설회에서 “정치노조, 강성노조, 불법 파업을 없애겠다”고 했고, 지난 9월 대구 중소기업인 타운미팅 때엔 “우리나라처럼 비효율적이고 불법적이고 극렬한 노동운동을 하는 곳은 없다”며 노조에 대한 부정적 입장을 피력했다.

어떻게 이런 상황에 이르게 됐을까. 후보들의 정책을 자신의 정체성에 비춰 판단하기보다 당선 가능성 등 일반 유권자의 눈으로 이미지만 좇음으로써 ‘인기투표’가 됐다는 지적이 나온다. 손혁재 경기대 교수는 “우리는 노동자들이 계급적 투표를 하는 것이 아니다. 결국 노동자 의식의 부족”이라고 진단했다.

조합원들의 ‘정치의식’을 제고하고 그 결과가 반영될 수 있는 충분한 장치를 제공하지 못했다는 자성도 나온다. 각 후보들로부터 ‘10대 과제, 12대 요구’에 대한 답변을 받았지만 차이점을 보여주는 데는 실패했다는 것이다. 실제 ‘동일업무에 대한 비정규직 계속 사용 규제’에 대해 이명박 후보가 ‘인사권 침해가 우려된다’는 이유로 사실상 반대인 ‘논의 필요’로 응답했지만 그 의미에 대한 평가는 없었다. 한국노총의 핵심 관계자는 “한국매니페스토실천본부에서 만든 답변 분석표가 중립적이어서, 어느 후보가 우리 요구를 더 잘 반영했는지 알기 어려웠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당초 노총 내부에서 별도의 평가위원회를 구성, ‘노동자적 평가’를 위한 잣대를 제공하자는 주장이 제기된 것도 그런 이유다. 그러나 지도부가 특정후보 지지를 유도한다는 비판을 살 수 있다는 이유로 무산됐다. 특히 MBC와 공동 추진한 대선후보 TV토론회가 이명박 후보측 거부로 무산되면서 조합원들은 공개적 비교·검증 기회도 잃었다.

지도부가 조합원들의 선택을 제약한 측면도 지적된다. 정책연대 대상을 지지율 10%로 제한하면서 창조한국당 문국현, 민주노동당 권영길 후보는 아예 제외됐다. 한 조합원은 지난 2일 한국노총 홈페이지에 올린 글에서 “한국노총이 상식을 가지고 일을 하는 것인지 묻고 싶다. 전화투표하는 세 후보 말고 다른 분을 찍겠다”면서 투표 중단을 요구하기도 했다.

박영삼 한국노총 대변인은 “현재의 보수화된 여론이나 정치구도를 넘기엔 힘들었던 것 같다”면서 “이명박 후보 집권후 반노동(자)적인 정책이 현실화할 경우 정책연대는 언제든 파기될 수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처럼 ‘불안한’ 정책연대라면 조합원 총투표까지 실시하며 연대를 시도하는 명분이 약하다.

김유선 한국노동사회연구소 소장은 “노조 진영은 과반수 투표에 과반수 득표가 원칙인데, 한국노총 조합원 85만여명 중 10만표가 안되는 지지를 가지고 노총의 공식 방향을 잡는 게 맞는지 의문이 든다”고 지적했다.

〈김광호·김창영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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